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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who작가 님의 서재입니다.

히어로즈(Heroes)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일반소설

완결

라끌리에
작품등록일 :
2015.01.04 23:44
최근연재일 :
2015.01.27 20:07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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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8,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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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1.22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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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8. 엄동-(2)

DUMMY

“하하하! 우매한 자들 같으니라고! 히어로 레드, 넌 내 상대가 안 된다!”

“웃기지 마라, 어리석은 악당! 정의는 절대로 악에 굴하지 않는다!”

“그놈의 허세는! 정의도 무력(武力)이라는 장애물 앞에선 결국엔 굴복하게 되어 있다. 마치 바람 앞의 잡초처럼!”

“그러면 그 잡초가 바람이 잠깐이라도 그치면 다시 일어서리라는 것도 알겠군! 받아라! 사악한 악당!”


영웅이 악당을 때릴 때의 자세를 취했다. 눈을 감았다. 오늘도 맞겠구나.


“이런, 하지만 네가 아무리 나를 막은들 나는 멈추지 않아. 온 세상을 악으로 물들여버릴 때까지 말이다!”


그 대사를 마지막으로 나는 바닥에 앞으로 쓰러졌다. 주변에서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머뭇거릴 여유도 없이 나는 살짝 고개를 들어 살아날 방도를 찾았다. 영웅의 수는 몰래 도망치긴 어려운 세 명이었지만 나는 끝까지 도망칠 수 있으리란 희망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실낱같은 희망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무참하게 깨지게 되었다. 어떻게 알아챘는지 슬금슬금 도주하려던 나를 한 영웅이 제지했다. 나는 어깻죽지며 뒷덜미를 잡혀 끌려가게 되었다. 그 와중에도 나는 쇠 작대기로 맞을 것을 걱정하며 피곤한 숨결을 내뱉었다.



하루라도 가면을 벗고 사는 날이 없었다. 옷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곳에는 아직도 붕대가 감겨져 있었다. 머리는 악당이 아픈 티를 낼 순 없으니 일부러 두르지 않았다.


정말 죽을 맛이었다. 정오부터 실컷 두들겨 맞으니 그 후의 시간은 몸을 추스르는 데 낭비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고통도 가볍게 무시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니었다. 학창 시절의 영웅들은 겨우 청소년들에 불과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나는 끼니를 거르던 세월이 있다 보니 비실비실했고 편하게 자란 그들은 이젠 힘 좋은 성인이었다. 그들이 때리는 강도는 그때보다 더했음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는 소리였다―연극일지라도 일말의 자비 따윈 없었다. 당연한 것이다. 사령관만이 이것이 연극인 것을 알 테지. 그들도 사령관의 충성스런 꼭두각시에 불과하니 말이다.


몸이 요 모양 요 꼴이니 잠마저도 제대로 오질 않았다. 고통을 잊으려면 억지로라도 자야 되겠는데 그놈의 불면증까지 합세하니 나는 누워도 괴로웠고 앉아도 괴로웠고 서도 괴로웠다. 어디가 특출 나게 부러진 것도 아니니 사령관은 나를 병원에 보내지 않았다.

계약대로 약은 그가 챙겨주었지만 치료는 죄다 내 몫이었다. 그제야 102호가 기가 막히게 치료를 잘 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발적이든 강제적이든 그도 악당 노릇을 하고 있으니 치료법은 불가피한 상식이었던 것이다.


자가 치료가 힘들 정도로 심하게 맞아온 날, 나는 내 손으로 어딜 한번 부러뜨려볼까 잠시 생각해봤지만 곧 멍청한 짓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꼼짝없이 집에 갇혀서 혼자서 앓아누워야만 했다. 하지만 가장 괴로운 것은 몸보다도 마음이었다. 내겐 비상 탈출구가 없었다. 수입은 전보다 늘었을 진 몰라도 하루라도 행복한 날이 없었다.


그리하여 내가 손길을 뻗은 것이 바로 약물이었다. 계약 내용엔 약물 종류는 개의치 않는다고 나와 있었다. 고로, 사령관이란 작자에게 청구만한다면 그는 바로 진통제부터 코카인이나 헤로인 따위의 마약까지도 구해다줄 수 있었다.

그 불법 약물의 유통 경로를 난 알 수 없다마는 난 아직까진 마약에는 일절 손대지 않았다. 나중에는 어떨지 몰라도 겨우 며칠도 안 되어서 그 정도까지 망가지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수면제나 진통제라면 상황이 달랐다. 그것이 식사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나는 꼬박꼬박 그것들을 챙겨먹었다. 밥 먹듯이 약을 퍼먹다가 드디어는 내성이 생기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보통 복용량의 몇 배는 먹어야 그 효과를 볼 수가 있었다.

오용과 남용을 거듭하더라도 나는 약물들의 위력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어느새 나는 그것들에 중독되어가고 있었다. 맞으러 갈 때 항상 복용하는 것이 여러 상표의 진정제였고, 수면제가 없으면 나는 고통과 불면증에 절어 며칠이고 밤을 꼬박 샐 수밖에 없었다.


내가 밤 부엉이가 된다는 건 결코 자유시간의 연장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잠을 자지 않는다면 피곤과 고통에 절어서 앉아서 신음을 흘리는 것 외에는 그 어느 것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픈 것에 신경 쓰느라 책조차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컨디션이 엉망이었다.

일주일의 반을 영주에게 빼앗긴다는, 중세시대의 농노. 내가 딱 그 꼴이었다.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사령관이 내게 지불한 금액은 결코 비싼 값이 아니었다. 몸을 판 대가가 이리도 끔찍하단 말인가. 남의 손에 의해 약쟁이로 전락해버린 기분은 상당히 비참했다.


이런 지옥들이 순환되니 나는 점점 파리해져만 갈 수밖에 없었다. 이전의 나 자신을 거울 너머에서는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영웅들과의 결전 아닌 결전이 있었을 때마다 돌아와서 제일 먼저 거울을 들여다보는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그러나 정작 그 금단의 판때기를 들여다볼 때마다 내 두 눈에 들어오는 것은, 머리와 입이 깨져서 턱까지 선혈을 흘려대는, 어느 패배한 한 악당이었다. 눈두덩은 가면을 쓰지 않는다면 차마 눈 뜨곤 볼 수 없을 정도로 피로에 거뭇해져있었고, 약해진 몸은 조금만 맞아도 치명적인 피해를 보도록 길들여지고야 말았다.


나는 그 지겨운 일상에 절어 몸을 질질 끌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악당의 기지라고조차 부를 수 없는, 초라하고 너저분한 단칸방 말이다. 바닥에 기절하듯 쓰러졌지만 그 안온은 내게 있어서 사치였다.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바닥에 앉았다. 그리곤 먼지투성이인 겉옷부터 벗었다. 그 뒤로 너덜너덜해진 셔츠를, 웃기지도 않을 장식들을 벗어던졌다.


이미 맞았을 때부터 예상은 했다마는 내 몸은 멍투성이였다. 그 분장이란 게, 화려하기만 하지 방어용으로 쓰기엔 형편없이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옷가지들을 대충 주워 입고 내 발길은 자동적으로 벽장으로 향했다. 말로만 벽장이지 그건 이젠 약장이었다. 그리곤 물도 없이 진통제를 몇 알을 삼켰다. 빨리 끔찍한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아…….”


머리에 무심코 손을 댔다가 초라한 신음을 흘렸다. 붕대를 간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뒷머리에서 혈액이 새어나왔다. 다른 곳은 몰라도 머리는 한번 다치면 지혈하는 데만 해도 몇 시간은 가는데 악독한 사령관은 내게 넉넉한 기한을 잡아주지 않았다.

결국, 다친 곳을 계속 다쳐오니 나는 이제 상처들을 가리기 위해 더욱 화려하게 옷을 수선했다. 소매에는 레이스를 달았고 검은 가면도 한 층 더 장식이 현란한 것으로 바꿨다.


세상에서 가장 끔찍하고 사악한 악당이 여기에 서 있었다. 외형만으로도 그럴싸한 표제였지만 그것은 나 자신을 제대로 사수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명이었다. 그리곤 얼마 전부터 머릿속에 엉뚱한 생각이 뒤늦게 들기 시작했다―난 왜 사는가.


하지만 나는 이것에 대해 시원스런 답변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천사님이 슬퍼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나름 변명해봤지만 나는 내가 진짜 악당이 된 후로 그녀의 그림자조차 구경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내가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지조차도 모르지 않던가. 어쨌건, 그건 내가 고민해야 할 사항이 아니었다. 지금 내 코가 석잔데 감히 누구 일에 참견하겠다는 건가.


왜 사는가. 분명 이건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고뇌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이것은 자기비하요, 곧 자살충동이었다. 사는 이유가 없냐? 그럼 죽어라. 너는 이미 시체와도 다를 게 없지 않느냐. 사는 게 괴롭고 고통스러운데 그 지루한 목숨 이어나가서 얻다 써먹을 것이냐. 너는 이미 희망도, 삶의 목표도 없지 않느냐…….



두 번째 계약금을 받기 하루 전날, 나는 기절하기 전까지 일곱 명의 영웅과 싸웠던 기억이 있었다. 영웅들은 기절한 나를 사령실로 데려가서 이번엔 고문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손이 뒤로 묶여 끌려갈 때는 어리둥절했다. 그들이 나를 욕조 비슷한 것에 넣어서 뭘 하려나 싶었다.

그런데, 그들이 내 머리칼을 잡고선 물통에다 억지로 우겨넣는 것이 아닌가. 나는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어 입에 코에 물이 들어가는 줄도 모른 채 열심히 버둥거려봤다.


그들은 내가 익사하기 일보 직전까지 머리통을 넣었다간 다시 빼 주었다. 몇 번의 담금질이 지나자 나는 그들에게 애원하기 시작했다. 제발 살려달라고, 숨을 쉴 수가 없다고. 영웅들은 목숨을 구걸하는 내게 이리 소리 질렀다. 세상을 멸망시키는 무서운 최종 병기가 잠들어있는 비밀 기지의 위치를 불어라. 그러면 곱게 풀어 주겠다.


나는 그들이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런 괴상한 기계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내게 무엇을 내놓으라는 건지 감조차 잡히질 않았다. 내가 망설이고 있자 영웅들은 또다시 내게 물을 먹였다. 이대로 가다간 폐에 공기대신 물이 들어찰 것만 같아, 나는 내 집에 나뒹구는 아무 기계나 말했다.

나는 집까지 강제로 끌려가서 수많은 기계 중 하나를 지목했다. 어차피 모두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설계도를 보고 만든 기계들이었다. 형편없는 철판때기로 만들어졌기에 기계는 그들의 일격에 처참하게 부서져나갔다.


그러고선 그들은 이렇게 많은 무기들을 숨기고도 제대로 말하지 않았다면서 날 바닥에 넘어뜨리곤 기계의 날카로운 잔해들로 때리기 시작했다. 맨 정신으로 생살이 잘려나가는 고통은 말로 이루 형용할 수가 없었다.


한참을 때리고 나서 영웅들은 그것이 질렸는지, 나를 어떻게 할지에 관해 상의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틈에 이리저리 썰린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영악하게도 그들은 옷으로 가려질 수 있는 부분들만 골라서 상처를 내 놓았다. 나를 때릴 때 얼굴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가면을 그대로 씌운 채로 때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누군가 이 장면을 보더라도 악당 가면을 썼기에 그저 취조하는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마침내 그들이 결정을 내렸는지 한 영웅이 손수건과 어느 약병을 꺼내들었다. 그리곤 손수건을 약에 흠뻑 적셨다. 그것으로 내 호흡기에 대고 눌렀다. 녹슨 대못이 코를 뚫고 머리까지 들어가는 것만 같은 향이 났다. 독한 마취제가 분명했다. 그들은 내가 약기운에 절어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도 손수건을 얼굴에서 떼지 않았다.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어느 침대에 누워 있었다. 여기가 어딘지는 잘 몰랐다. 깨질 듯한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나려는 찰나, 나는 무언가 잘못됨을 느꼈다. 한쪽 팔이 움직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영웅들이 내 몸에 이상한 짓을 해놨음이 분명했다. 틀림없었다. 다리로라도 일어나려 애썼지만 다리 한 쪽도 움직여지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어지러운 마취기가 가시고 그때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들이 내 팔다리를 한 쪽씩 부러뜨려 놓은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짓을 해놓으려고 나를 약에 절였단 말인가! 왼쪽 팔과 오른쪽 다리에 감각이 없었고 조금만 움직여도 불같은 통증이 일었다.

도망쳐야 한다. 영웅들이 그 짓을 해놓고 나를 미지의 침대에 눕혀놨다는 것은, 이 장소는 전혀 내게 유리한 장소가 아니란 뜻이었다. 불안과 공포가 엄습했다. 엇갈려서 부러뜨려 놨으니 이래서야 일어날 수조차 없지 않은가.


조심스럽게 한쪽 다리를 옮겨서 바닥에 발이 닿았다. 하지만 어제 심하게 맞아서 온 몸에 힘도 없는데다가 한쪽 다리로는 중심이 잘 잡히지 않았다.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고 부러진 오른쪽 다리가 꺾였다.

너무 아파서 비명이 절로 나왔다. 가뜩이나 긴박한 마음에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데 바닥에 엎드려 있으니 더 그런 것만 같았다. 멀쩡한 오른팔로 기를 쓰고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몇 번이고 무너졌다.


가까스로 앉을 수 있게 되었지만 아무리 용을 써도 완전히 일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오른다리에 힘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어쩔 수 없이 기어서 방문을 여는 데 성공했다. 열고나니 탈진한 몸이 앞으로 쓰려졌다. 이제 더는 기어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래도 이렇게 손 놓고 앉아있을 수만은 없었다. 현관이 눈앞에 보였기에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온종일 노력해 봐도 현관 문고리엔 손조차 닿질 않았다. 그때, 문이 열리고 집주인이 들어왔다.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 자는 또다시 사령관이었다. 나는 속으로 나를 이딴 곳에 데려다놓은 두고두고 영웅들을 저주했다.


“당신……!”

“자네는 지금 여기서 뭐하는 짓이지? 셋을 세겠다. 나가라. 하나, 둘……”


사령관이 다짜고짜 나를 내려다보더니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더 맞았다간 반병신이 될 것이 뻔했다. 일단은 살아야겠단 생각에 나는 기겁하듯 그의 발치에 매달렸다.


“제발, 병원에 보내 주세요. 팔다리가 부러졌어요. 제발…….”


사령관은 내 애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얼굴을 발로 찼다. 그러곤 부러진 팔을 짓밟았다. 온몸에 경련이 절로 일어났다. 그를 올려다보면서 괴롭게 울면서 빌었다.


“자,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살려 주세요……. 너무 아파요…….”


뭘 잘못했는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목이 멘 채로 빌었다. 눈물이 비굴하게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닦을 여유는 없었다.


“이제 네 주제를 확실히 깨달았나 보지?”


그의 말에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살고 싶었다. 본능적인 행동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너무 살고 싶었다. 사령관은 순식간에 내 머리채를 잡아서 집 밖으로 끌고 갔다. 머리가 통째로 뽑혀 나갈 것 같은 느낌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나는 길바닥에 앞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순간적인 충격에 입이 터지고 이마가 깨진 것 같았다. 밖에는 영웅 레드와 블루가 기다리고 있었다.


“요 앞 종합병원 있지. 거기로 보내. 입원시키진 말고.”

“알겠습니다, 캡틴!”


고통과 피로가 덕지덕지 달라붙어 나는 또다시 기절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저 희미하게 나를 드는 손길이 느껴질 뿐이었다.


팔 다리 뼈를 억지로 끼워 맞추곤 영웅들은 나를 내 집에 가져다 놓았다. 나는 바닥에서 생각했다, 내일도 분명 나와야 한다. 대본에 그렇게 날짜가 잡혀 있었다. 어쩌면 사령관은 일부러 영웅들에게 이리 하라고 명령했을 지도 모른다. 나는 팔다리에 한 짝씩 깁스를 하고 있게 되었다. 머리에도 붕대가 감겨져 있었다. 꼴이 아주 가관이었다.


다음날, 나는 부상을 입었지만 악당으로서 등장하는 것을 모면할 수는 없었다. 오른쪽 손은 협장을 짚고 왼쪽 팔은 깁스를 한 악당이 광장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 손도 자유롭게 쓸 수가 없었다. 그런 꼴로 외워온 대사를 읊었다.

나를 이길 수 있으면 이겨 보아라, 네놈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차피 지는 게임이었다만 실전이었어도 지는 건 당연지사였다. 인질조차도 못 잡을 정도로 초라한 몰골의 악당에게 질 영웅 따윈 없었다.


“네 녀석이 들고 있는 그것은 무엇이지? 분명 목발을 가장한 무기일 테지!”

“아, 안 돼, 그건…… 돌려줘!”


어처구니없게도 목발을 빼앗기자 나는 너무나도 쉽게 지고야 말았다. 어 소리도 내기 전에 앞으로 고꾸라져버렸다. 영웅들은 쓰러진 내 몸에다 발길질을 해댔다.

내 옆구리를 차서 나를 뒤집곤 뺏은 목발로 명치를 세게 내려찍었다. 나는 속에서 무언가 올라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아내었다. 급하게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잠깐만 타임. 잠깐 타임아웃 좀…….”

“뭐냐. 교활한 악당!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날 일으켜 세워주면…… 계획을 말해주겠다.”


웬일인지 영웅들은 순순히 나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그들이 목발을 던져주자마자 나는 절뚝거리며 반대쪽으로 달렸다.


“어딜 도망가는 것이냐, 악당!”

“도, 도망치긴 누가……. 나는 악의 군단들을 이끌고 다시 나타날 것이다.”

“어디 한번 몰고 와 보시지! 백만 대군을 몰고 와도 정의는 패배하지 않는다!”


거짓말이었다. 내게 부하 따위가 있을 리가 없었다. 이건 도망이었다. 이번에 잡혔다간 사지가 다 부러질지도 모른다. 애를 바득바득 쓰며 목발을 짚고 앞으로 나아갔다. 현기증이 일어 몸무게에 앞으로 쏠릴 뻔했던 걸 가까스로 버텨내며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명치가 얼얼했다. 급소를 맞으니 죽을 맛이었다. 입에서 비릿한 맛이 도는 게 아무래도 속이 터진 것 같았다. 주먹도 아니고 단장으로 찍혔으니 그 정도 상처는 각오해야 했다. 그런 내 행색을 보곤 동네 아이들이 와하하 웃으며 주변을 맴돌았다.


“와아! 저기 봐라! 영웅 레드랑 만날 싸우는 악당이다!”

“저것 봐라! 제가 지구를 정복한다지? 우우, 물러가라! 이 악당아!”


아이들이 소리치며 돌을 던졌다. 정석대로라면 큰 소리를 쳐서 악당의 무서움을 각인시켜야 하겠지만 괜히 창피해진 나는 그러는 대신 고개를 숙였다. 낯짝을 도저히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그러다 머리를 정통으로 모난 돌에 맞았다. 둔탁한 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내가 으하고 탄식을 내뱉자 아이들은 재밌다고 웃어댔다. 그때, 어른들이 나타나 아이들을 얼른 데리고 저마다 자리를 피했다.


“어머! 이 녀석들, 저렇게 위험한 악당 곁에 함부로 가는 거 아니야.”

“엄마, 저것 봐요. 저 악당은 이상하게 걸어요.”

“너희들도 저렇게 되고 싶지 않으면 착하고 예의바르게 살아야 한단다. 공부도 안하고 만날 놀고먹으면 저렇게 되는 거란다.”


어른들도 내게 돌을 던졌다. 보이는 돌이 아니었지만 충분히 아팠다. 내가 언제 놀고먹었던가. 가슴을 후벼 파는 모난 돌이었다. 나는 더더욱 고개를 숙였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이런 말에 상처나 받고 있는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져 서였다.

그 와중에도 나는 계속 다리를 절며 달리고 있었다. 뒤늦게라도 쫓아오는 영웅들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서 달리고 또 달렸다.


추격을 따돌리고 나서 식당 옆에 선 철제 표지판의 민면을 들여다보았다. 심하게 찢어졌는지 머리에서 피가 멈출 생각을 않았다. 옆얼굴로까지 핏줄기가 손길을 뻗쳐댔다. 주변의 머리카락을 걷어내고 상처를 찾았다. 생각보다 깊이 찢어진 것 같았다. 바늘로 꿰매야 할 정도였다.

일단은 소독을 해야 되겠는데 주변을 건드릴 때마다 화끈거리는 통증이 머리를 울렸다. 누가 좀 도와 줬으면 좋겠는데. 이런 차림으로 병원에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보다도 영웅과 싸우다가 다친 악당을 도와줄 이는 없었다.


쓰레기 버리러 나온 옆 식당주인이 나를 발견했다. 이게 뭐하는 짓이냐며, 손님들 끊긴다며 꺼지라고 깨진 접시를 던졌다. 그걸 얼굴에 정통으로 맞았다. 접시에 피가 묻어서 떨어졌다.

식당주인은 신고를 위해 전화기를 드는 중이었다. 나는 아파할 겨를도 없이 또 달렸다. 재수 없는 악당 녀석! 주인은 나를 삿대질하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게 도움의 손길을 뻗어줄 이는 없었기에, 나는 정말 찾아가고 싶지 않은 사람을 하나 떠올렸다. 102호라면 날 도와줄지도 모른다. 그는 가련한 악당을 외면할 인물이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엔 그랬다.



작가의말

팔다리를 엇갈려서 부러뜨리는게 오히려 일어나기가 쉽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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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5. 현자의 망언-(2) 15.01.19 587 3 16쪽
32 5. 현자의 망언-(1) 15.01.19 698 3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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