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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who작가 님의 서재입니다.

히어로즈(Her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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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라끌리에
작품등록일 :
2015.01.04 23:44
최근연재일 :
2015.01.27 20:07
연재수 :
5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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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429
추천수 :
229
글자수 :
348,419

작성
15.01.18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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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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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자
11쪽

4. 위대한 군주는-(2)

DUMMY

그 뒤로는 무의미한 대화 몇 개만이 오갔다. 짧은 만남이 끝나고 돌아가려는 나를 배웅하면서, 그녀는 내가 다음에도 이 시간대에 자주 와줬으면 좋겠다며 고백했다. 나는 처음엔 그 말을 거절하려고 했으나 그녀가 내게 또 무언가를 쥐어주는 바람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얼굴만 붉히는 신세가 되었다.

종이컵에 담겨진 따듯한 차였다. 돌아가는 길이 조금이라도 더 따뜻해졌으면 좋겠다는 그녀의 배려였다. 나는 손바닥으로 찻잔을 감싸곤 고갤 떨군 채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차마 마시진 못하고 집에까지 그대로 그것을 들고 갔다. 진한 루비색의 찻잔에 내 변장한 모습이 비추어졌다. 식었다고 생각했던 찻잔엔 아직 따스한 온기가 남아있었다.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아무래도 그녀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항상 나를 맞이할 때마다 천사처럼 웃어 주었다. 내가 그녀에게 특별히 무언가를 해주거나 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외딴 집에 찾아와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하는 듯 했다.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 때처럼 집 안에만 가만히 앉아 있다가 나오곤 했다.

그녀는 때로 자신의 추억을 보물 상자에서 보물을 꺼내듯 내게 조심스럽게 털어놓곤 했다. 물론 그것들은 모두 그녀의 어머니와의 추억이었다. 내가 몇 차례 설득을 해 봤지만 그녀의 생각은 확고했다.


그럴 때면 나는 암살자에 대해 생각했다. 어차피 그녀의 아버지가 아니어도 그림자에선 칼질이 끊이질 않기 마련이었다. 암살자는 명성과 신의에 가려진 성군의 치졸한 참모습을 보고 복수를 위해 그를 칼로 찌른다. 그런데, 그 위대한 군주를 지지하던 국민들이 그것을 보게 되고, 그 정의로운 암살자는 모든 국민의 원망과 증오를 한 몸에 받게 된다…….


날씨가 맑은 어느 날이었다. 내가 여느 때와 같이 그녀의 집에 찾아갔을 때였다. 그녀가 뜬금없이 내게 밖에 나가자고 권했다. 나는 갑작스런 외출제안에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도 내가 악당임을 알고 있는 마당에 외출이 또 웬 말인가. 그러나 그녀는 곧 내 가발과 안경을 벗기기 시작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나 자신을 악당이 아닌 사람이라고 생각하라고 말하면서. 그녀가 나와 팔짱까지 끼며 부탁하자 나는 엉겁결에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야 말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녀가 나를 이끈 곳이 광장이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바로 그 광장 말이다. 나는 그 일이 있었던 뒤로 광장은 물론이고 사람들이 많은 곳에 선뜻 나갈 수 없게 되었다. 그곳을 지나기만 해도 그 장면이 자꾸만 되풀이되어 식은땀이 흐르고 온 신경이 정지되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공포증이었을 지도 모른다.

오른쪽 손목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저려왔다. 그녀가 내 손을 잡고 나를 바라보며 행복하게 웃었다. 나는 억지로 그녀에게 웃어 주었다. 그녀가 나를 여기로 데려온 것에 대해서 원망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 한 번도 입 밖에 낸 적이 없지 않던가.


바닥이 흐릿하게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망각의 저 심연 속에 묻어놓은 기억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때의 내가 죽은 아버지를 안은 채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새벽 동이 터왔지만 그는 끝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나는 끝까지 도리질 치며 아버지의 죽음을 부정했다. 심장을 도려내는 것만 같은 통증이 함께 터져 나왔다.

우리 아버진 아직 죽지 않았어요. 산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단 말예요. 우리 아버지라고요. 내 가족이에요. 하나밖에 없는……. 두 명의 시체처리반이 실성한 나를 떼어내고, 어린아이에게서 인형을 빼앗아가듯 아버지를 데려갔다. 그들이 아버지에게 흰색 가면을 씌웠다. 하얀 괴도는 그렇게 변장되어 그들에게 연행되어 갔다. 그것이 내가 본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나는 마지막까지 그의 가면을 벗겨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 분명 난 그 끔찍한 일이 있었던 뒤로 다짐했다.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이 이토록 고통스러운 일이라면, 이제 그 누구와도 이런 식의 인연을 맺지 않으리라고. 난 혼자 살아가다가 혼자 죽어갈 것이다. 이 세상에 내가 발 딛고 살아갔었는지도 의심스러울 정도로. 마치 가벼운 먼지처럼. 내가 태어날 때 아무도 기뻐하지 않았던 것처럼, 죽어갈 때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게…….



악당님, 바로 이 지점이에요. 여기서 매일 어머니와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곤 했었지요. 굉장히 행복했던 나날들이었어요. 저만치에서 제가 손을 흔들고 있으면, 어머닌 밝은 미소를 지으시며 내게도 손을 흔들어 주셨죠. 두 팔을 뻗으면 파란 하늘로 날아가는 하얀 비둘기 무리 중 하나가 된 듯 했어요.

그 어떤 짐도 짊어지지 않고서, 마음이 닿는 곳은 어디든 갈 수 있는……, 악당님? 악당님, 왜 그러세요? 그녀가 경기를 일으키는 나를 바라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나는 끝까지 괜찮다며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될 수 있는 한, 내게 웃어주는 그녀에게 나도 웃어주고 싶어서였다. 그녀를 안심시키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입이 붙어버린 듯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녀가 가리키던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비둘기가 깃털을 몇 점 흘리며 날아올랐다. 그것을 따라 고개를 올리던 나는 그대로 바닥에 까무러쳤다.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땐 나는 나무로 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또다시 그 외딴 집이었다. 내 손에 누군가의 온기가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천사님이셨다. 그녀의 슬픈 쪽빛 눈동자에 초라한 내 모습이 담겼다. 어쩐지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나는 그만 눈길을 피해버렸다. 그러자 그녀가 울상을 지으며 내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그것은, 아주 짧은 말이었지만 많은 것이 담겨있는 사죄였다. 나는 사양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바닥에 졸도해서 그런지 뜻대로 되질 않았다. 몸은 몸대로 쑤시고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팠다. 그녀가 그런 나를 제지하며 더 누워있으라며 눕혔다.

그녀가 말없이 내 머리 위의 물수건을 갈아주곤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쏟아지는 그녀의 하늘빛 머리카락을 위로하듯 뒤로 넘겨주었다. 사과는 오히려 내 쪽에서 할 일이었다.


“저도 사과하고 싶어요. 힘들게 해서 미안해요. 고생만 시키는 것 같아서.”


그 상황에서도 나는 내 오른쪽 손목의 번호를 다시금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애초에 난 그녀를 만날 여력이 되질 않았다. 혼자서 다짐하지 않았던가. 아무도 안 만나지 않겠다고 한 나 자신은 대체 어디에 있던가. 더구나 그녀는 영웅의 딸이었다. 내가 감히 만나서는 안 되는 상대였다.


“아, 아니에요! 이번엔 제가 잘못한 일이고…… 게다가, 좋아서 하는 일이에요. 전 악당님이 좋은걸요.”


내 표정이 심각하게 치닫자 그녀가 깜짝 놀라며 얼굴을 붉혔다. 나는 그것에 대해 차마 기뻐할 수가 없었다.


“그러지 마세요. 전 악당인걸요. 악당은 영웅을 위해서 살아가요. 정의가 실현되려면 악은 언젠가 죽어야 하겠지요.”

“하지만 전 상관없는걸요. 악당님께선 정의보다도 소중한 존재에요. 적어도 제겐 그렇단 말이에요!”

“마음만은 고마워요. 천사님께서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정말 기뻐요.”


내가 힘없는 미소를 지어보이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질 못했다. 나는 또다시 천장만 바라보았다. 나도 언젠간 아버지처럼 죽게 되겠지. 비참하게 얻어맞으며 죽든, 약을 먹고 조용히 눈을 감든, 결말이 어찌되었든 결론은 하나로 귀결되지 않던가. 나는 죽는다. 언젠간, 누군가에게 죽는다.


*


아무도 남지 않은 싸늘한 밤이었다. 따스했던 낮과는 다르게 밤에는 춥고 눈보라가 몰아닥쳤다. 바람과 눈이 방 안이 궁금한 듯, 함께 창문을 두드리며 거세게 스쳐지나갔다. 어둠이 들어찬 방에는 작은 불빛만이 적막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속에서 한 여성이 고개를 들었다. 연한 하늘색 머리가 호롱불과 뒤섞여 어두침침한 주홍빛을 그려냈다. 노을 속의 천사 같은 자태를 자아내는 여성은 저만치에 홀로 서 있는 그녀의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여긴 대체 뭣 하러 오신 거죠? 이제야 제가 그렇게 그립던가요?”

“그건 네가 더 잘 알 텐데. 네가 정말 간만에 안 하던 짓을 하는구나. 아주 잘만 놀아나던데. 그래, 그래서 그 정신 나간 놈하고 대체 어디까지 갔지?”

“그 분은 그럴 사람이 아녜요!”


그녀가 발끈해서 소리치자 그녀의 아버지는 통쾌한 듯이 웃었다. 암, 그렇지, 그렇고말고. 제 집에 다짜고짜 쳐들어온 나 하나 못 쫓아내서 쩔쩔매는 녀석이 그럴 리가 없지. 그렇게 중얼거리곤 그는 의자를 빼서 아예 앉아버렸다. 그의 딸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제발 그놈의 사령관직 좀 그만 두시는 게 어때요? 아버지는 악당들이 불쌍하지도 않으세요? 그 사람의 양아버지를 죽음까지 몰고 가야 할 정도로 잘못했던가요?”


사령관은 탁자를 세게 내려치며 언성을 높였다.


“네 어머니를 죽인 놈들이란다, 아가야! 정신 차려야 될 것은 바로 너야. 세상에 착한 악당은 없어. 그 자도 결국엔 네 어머니를 죽인 살인자와 똑같은 악당일 뿐이야. 어쩌면 네게도 끔찍한 최후를 맞게 해 줄지도 모르지.”


사령관은 그렇게 말하는 순간까지도 비참하게 죽어가던 자신의 아내를 생각해냈다. 믿었던 한 악당이 있었다. 젊은 시절의 그는 항상 그 악당과 기분 좋게 승부를 내오곤 했었다. 하지만 적을 믿었던 어리석은 자신의 최후는 어땠던가?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 알았었더라면, 진작 알았었더라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고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한시라도 더는 이 한심한 딸자식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네가 그 악당을 계속 만나고 싶다면야, 그래, 말리지 않으마. 지금처럼 웃고 떠들면서 밖을 쏘다녀도 좋은 일이지. 한창 그럴 때지, 그럴 때고말고.”


그렇게 흘러가듯 중얼거리곤 그는 문을 부서뜨릴 것처럼 세게 닫았다. 바람이 그의 무언의 경고에 힘을 실어주었다. 한동안 악당 157호를 너무 살맛나게 놔둔 것 같았다. 그의 입가에 냉소가 걸려 있었다. 증오가 담긴 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한 악당이 또다시 어떤 식으로 파탄 나는지 눈앞에서 보여 줄 것이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눈보라는 언제 휘몰아쳤냐는 듯 아까보다 많이 가라앉고 있었다.

위대한 군주의 행차는 죽어가는 눈발 속에서도 그칠 줄을 모르고 계속되었다. 앞으로, 앞으로…….






작가의말

4화 끝입니다

딴에는 로맨스라고 끄적인게

소제목이... 영 아니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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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7. 돌아온 작살-(1) +2 15.01.21 365 1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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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6. 산(酸)-(1) 15.01.20 622 2 21쪽
33 5. 현자의 망언-(2) 15.01.19 587 3 16쪽
32 5. 현자의 망언-(1) 15.01.19 698 3 15쪽
» 4. 위대한 군주는-(2) +2 15.01.18 464 3 11쪽
30 4. 위대한 군주는-(1) 15.01.18 414 2 16쪽
29 3. 교수라는 직책-(2) +2 15.01.17 724 3 31쪽
28 3. 교수라는 직책-(1) 15.01.17 465 3 20쪽
27 2. 도둑과 양아버지-(4) 15.01.16 428 3 14쪽
26 2. 도둑과 양아버지-(3) 15.01.16 380 3 15쪽
25 2. 도둑과 양아버지-(2) 15.01.16 365 3 21쪽
24 2. 도둑과 양아버지-(1) 15.01.16 587 3 14쪽
23 1. 귀공자 15.01.15 453 2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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