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 오늘도, 내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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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탁진우.
하아······.
뭐가 뭔지 모르겠는 1인이다.
내가 농구를 포기한 데에는 아버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
중3 겨울의 대타협은, 아버지가 앞으로 검도를 배우라는 강요를 하지 않는 대신 나는 농구선수의 꿈을 완전히 접는다는 종신계약이었다.
이미 중2 시절부터 농구명문 고등학교에서 몇 차례고 스카웃 제의를 받았던 나로선 정말 큰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단은 늘 밝고 행복하던 소년 탁진우를 바꿔놓았다.
탁진희의 말에 따르면, 정말 눈 뜨고 보기 힘든 꼴이었다고 한다.
피부는 점점 더 엉망이 되어가고 안 그래도 못생겼던 얼굴이 더 꼴 보기 싫어졌다고.
······ 친동생 맞냐?
아니, 친동생이니까 할 수 있는 말이겠지만.
그래도 나는 삶에 만족하고 있었다.
친구들과 가끔 튀기는 농구공, 열 명을 넘지 못하는 구경꾼, 어떤 기록도 남겨지지 않는 비공식전.
그 속에서도, 나는 농구공을 만질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할 줄 아는 무소유의 아이콘이었다.
나는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음······ 왜지?
분명히 냅다 내던져서 부숴버렸는데.
아니. 아니. 그보다, 왜지?
나, 죽었는데?
“람보로 레드요.”
멍한 정신으로 고개를 든다.
“······ 저기요?”
“아, 네! 람보로, 레드요. 네, 네.”
생각이 채 이어지기 전에 몸이 반응했다. 왼쪽 끝열 맨 윗줄의 빨간 담배를 꺼내 손님에게 건네려다가 잠깐 멈칫.
“신분증이요.”
“어······ 내가, 어려 보여요?”
“아, 저기, 규정이니까요.”
낯익은 얼굴이다. 그러니까······ 잘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한 번 본 기억이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 하얀 얼굴, 뿌염이 시급해 보이는 밝은 금발.
이른바 뿌염 누나였다.
“그래요······ 여기요.”
내보이는 신분증을 살핀다.
이주희. 93년생. 그럼······ 스물다섯이군.
고개를 끄덕이고 카드를 받아 결제기에 꽂는다. 그리고 결제가 완료되길 기다리며 생각했다.
이거 아무래도······
돌아온 것 같은데.
“밤에 알바 하느라 힘들죠?”
뒷부분이 좀 잘린 것 같긴 하지만 이것도 들어봤던 대사다.
“괜찮아요······ 제가, 체력 빼면 시체거든요.”
“그래요? 흠, 자세 좋네요.”
카드와 담배를 건네며 난 말해보지 않은 대사를 읊었다.
“누나도, 많이 힘들죠?”
“응? 아······ 왜요?”
“아뇨 그냥, 지금 귀가하시는 것 같아서요. 새벽인데.”
흘끗 시계를 본다.
예상대로, 0시.
나는, 젠장,
3월 18일의 첫 순간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하하, 지금 퇴근한 거 아니에요. 금요일이잖아요. 회식하고 오는 길이죠.”
하지만 술냄새는 안 나는데?
음, 아마 자리만 지키다가 먼저 나온 모양이었다.
담배는 피우지만 술은 안 좋아하는 사람인가 보다.
“아······ 근데 이거 진짜 너무한 거 아니에요? 각에 왜 이런 걸 붙여놓냐고.”
뿌염 누나가 들어 보이는 빨간 담뱃갑의 윗부분을 살펴본다.
눈이 빨개진 아이의 사진 아래로, ‘부모의 흡연은 자녀의 유아돌연사증후군, 천식, 주의력결핍행동장애 등을 일으킵니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어, 죄송합니다.”
“왜 그쪽이 죄송해요? 후후, 재밌는 사람이네. 어쩌겠어요, 못 끊는 내가 죄인이지. 수고하세요.”
“예, 안녕히 가세요.”
뿌염 누나는 조금 산뜻해진 표정으로 윙크를 남겼다.
아, 윙크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웃는 얼굴이었다.
웃을 때 왼쪽 입술만 사용해서 한쪽 눈만 감기는 것 같다.
······ 아니 지금 그게 문제냐.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3월 17일을 간신히 돌파하고 ‘내일’을 맞이한 탁진우는,
‘내일’ 속에 갇히고 말았다.
10분에 한 명쯤 들어오는 손님들에게 응대하며 나는 내 다섯 번째 죽음을 떠올렸다.
하······ 일단 한숨 한 번 쉬고.
좋아. 하압! 정신 차리자.
나는 다시 한 번 죽었다.
3월 18일의 일이다.
정확한 시각은 알 수 없다. 차단기를 내리고 암막까지 쳐버렸으니까.
벽시계를 야광으로 살 걸. 의미 없는 후회에 한숨 한 번 더.
혼란스러운 죽음이었다. 그리고 모든 판단이 흔들린 하루였다.
혼란스럽지만······ 정리하자. 새롭게 알게 된 게 많다.
일단 내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게 됐다는 것.
암흑 속을 꿰뚫어보고, 오감이 놀랍게 예리하며, 신체능력 역시 초인적이다.
진작 알았어야 하는 사실을 18일이 되어서야 깨달았다는 점에 자괴감이 들었다.
다음. 우리 탁씨 가문은 어쩌면 좀 특별한지도 모르겠다.
아버지가 입이 닳도록 하던 얘기긴 했지만, 지금껏 한 번도 진심으로 수긍했던 적은 없다.
하지만 고구현 아저씨의 이야기를 듣고 또 내 특별함을 깨닫고 나자 이게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됐다.
그러니까······ 우리 집안엔 검도 외의 운동을 하면 안 되는 어떤 저주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른다.
이게 제일 중요한 부분이었다.
농구부 코치의 전화를 받고 나서, 난 그게 내 악몽의 근원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렇기에 단호하게 코치의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부쉈다.
그게 악몽을 끊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고 희망하면서.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청소부는 다시 나타났고, 나는 다시 죽었다.
젠장······ 집에 가기 싫어지네. 멍청하게 왜 집에서 자다가 죽었을까.
앞으로 그 집에서 다시 잠을 잘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사라도 가야 되나.
고개를 털고, 내가 죽게 된 원인을 분석했다.
가장 중요한 것.
대체 왜 청소부가 나타났을까.
멀대 함구연이 혈연관계인 농구부 코치에게 내 활약상에 대해 말한 것으로 인해 저주가 발생했다는 판단은, 다시 생각해보니 좀 미심쩍었다.
어제는······ 그러니까 첫 번째 18일에는 감정이 너무 격한 탓에 그렇게 확신해버렸지만, 그게 실수였던 걸지도 몰랐다.
일단, 세미프로 수준으로 인정받는 대학농구라곤 하지만 당장 입단계약을 맺은 게 아니다.
그저 테스트 제의였다.
그게 설혹 입단이 확실시되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당장 돈을 버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수준은 좀 낮지만 고교 팀의 스카웃이라면 중학생 시절에도 질릴 정도로 들어왔었다.
어차피 대학농구나 고교농구나 아마추어인 건 마찬가지인데 이번에만 다르다는 건 논리적이지 못하다.
아니, 그 이전에, 난 아버지 몰래 중학농구 전국대회에 출전해 활약했던 바가 있다.
정말 내 몸을 스포츠에 쓰는 게 안 되는 거라면, 저주는 그때 나타나는 게 훨씬 합당했을 것이다.
게다가 고구현 아저씨도 아버지도, 쓰레기 기사에 대해서는 조금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 집안의 저주 때문에 찾아온 파멸이라면 적어도 아버지는 청소부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할 텐데도.
그러니까 청소부의 등장은 우리 집안과는 무관한······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 나는 왜 회귀하는 걸까.
앞의 것에 버금가게 신비로운 일이고, 그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껏 그에 대해서는 굳이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당장 사는 게 급했고, 몇 번이나 회귀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알 필요가 있다.
적어도 단발성의 기적은 아닌 셈이니까.
3월 17일을 끝마쳤음에도 18일에 또 반복되기 시작했는데, 그냥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넘겨버리면 그건 바보일 것이다.
보자······ 회귀한 시점은 18일의 시작- 0시.
그에 비해 17일의 회귀는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시작했다.
그건 아마도······ 음, 0시에, 내가 이미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 아닐가?
회귀를 했다고 바로 눈이 떠지는 게 아니라고 한다면 17일의 회귀 역시 0시를 기점으로 하고 있다고 보는 게 맞았다.
그렇게 따지면 청소부의 등장 역시 일관적일 수 있었다.
시계를 보진 못했지만 19시······ 저녁 7시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혹시 이 회귀야말로 우리 집안과 연관된 것일까?
특별한 탁가의 능력?
그게 아니면, 탁가의 저주?
“안녕, 진우.”
주말 오전 알바 김명숙은 오늘도······ 아니, 오늘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아 보였다.
“집에서 나오다가 담배꽁초라도 맞았냐?”
“어? 헐, 대박. 진우야, 너 신기 있냐?”
······ 신기라면 좋겠다. 그렇게 단순한 거라면 그냥 내가 모른 척하며 살면 그만일 텐데.
하지만 내겐 신기가 없다. 그저 다시 사는 인간일 뿐.
다시 산다라. 그것도 참 웃기는 말이었다.
다시 살아봤자 같은 결말을 맞을 거라면, 그게 정말로 사는 거라고 할 수 있을까?
어떻게든 살아서 내일을 보고 싶지만, 그래봤자 19일이 또 반복될 거라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
대체 이제 뭘 어떻게 해야
“진짜 졸라 짱나. 불 잘 꺼지게 혓바닥에 지져주고 싶어.”
“음, 그래야겠다.”
“어······ 농담인데?”
“그러네.”
그래도, 살아야 한다. 여전히 목숨이 몇 개나 남았는지는 알 수 없고 어떻게 해야 이 저주를 끝낼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지만, 난 아직 죽고 싶지 않다.
그렇잖아? 아직 2일째라고. 은혜랑 키스하고 오늘부터 1일 써놓고서, 이제 겨우 날짜가 한 번 바뀌었단 말이다.
“너 오늘 이상하다? 이번 주에 무슨 일 있었어?”
“······ 요새 피부 관리하거든.”
“오······ 진짜, 잡티도 없어지고, 좀 밝아진 것 같은데?”
난 대충 고개를 끄덕여주고 POS기의 정산 버튼을 눌렀다.
알바를 마치고 은혜를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주면서 문득 생각했다.
언제 삶이 끝날지 모르는데
오늘, 은혜랑 데이트라도 할까?
데이트······ 사귀기 전에도 우린 그런 거 해보지 못했다. 은혜와 난 늘 후문 근처에서만 놀았다.
내가 멀리 나가는 걸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음······ 그래도 죽기 전에 한 번은 해보고 싶은데.
“어! 버스 왔다······. 진우야, 나, 갔다 올게. 밥 잘 챙겨먹고, 아프지 말고 있어야 돼?”
“아, 응. 바람 안 피우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게.”
“아하하하, 예뻐라! 가서 전화할게.”
“응. 조심히, 다녀와. 내 사랑.”
은혜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거의 버스를 못 탈 뻔했다.
간신히 그녀를 버스에 올린 뒤에, 난 최대한 밝은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은혜는 활짝 웃었다.
햇살처럼 환하게.
중대입구역 근처의 다있소에서 농구공을 하나 사서 일찌감치 코트로 향했다.
도착시각은 10시 14분.
쳇. 더 일찍 왔어야 했는데. 왜 문을 10시에 여는 거냐고.
공의 튀기고, 슛을 쏘기 시작했다.
근거리 점퍼는 100%. 아무 연습이 안 된다.
물러나서 미드레인지 점퍼.
95% 정도는 나오는 것 같다.
더 물러나서 탑 3점 라인에서 풀업 점퍼.
······
어제보다 더 나온다. 100개를 던지자 87개가 들어갔다.
젠장. 미친 몸이다, 진짜.
키만 좀 더 컸다면 당장 NBA 진출해도 슈퍼스타가 될 수 있었겠는데.
기다렸던 새내기들은 10시 반 정도에 도착했다.
뭔가를 신나게 떠들며 입장하던 꼬맹이들은 6번 코트를 점령한 나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형님, 어쩐 일이세요? 원래 토요일엔 운동 안 하시잖아요?”
김경우 이 자식, 시간이 다른데도 대사가 왜 똑같은 거냐.
“21세기는 팀농구의 시대······ 그러니 패스 연습을 실시한다. 내가 가운데에서 뺏는 역할이다.”
“오, 형, 바로 본론? 카리스마 쩌는데요? 저희 안 그래도 패스 연습하려고 하긴 했는데.”
아마 17일엔 슛 연습, 18일엔 패스 연습으로 정해뒀던 모양이다. 난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이주환에게 공을 던졌다.
“당장 시작해! 일문과 덕후들을 무찌르기 위해선 1초도 쉴 시간이 없다!”
“오······ 예쓰, 킹!”
······ 이것도 별 효과는 없나.
기진맥진해져서 널브러진 새내기들을 내려다보며, 아직도 팔팔한 내 몸을 관조했다.
“아······ 후······ 진짜, 형 쩐다······ 어떻게 사람이 그래요?”
“사람은, 돌아오는 거야.”
“······ 뭔 소리데?”
“옛날 광고 패러디 아냐? 어떻게 사랑이 그래! 사랑은 돌아오는 거야!”
“아, 들어본 것 같은데. 킹진우 형님, 아재냄새 나요.”
헛소리를 내뱉는 새내기들을 일별하고 림을 향해 공을 던졌다.
사람은 돌아오는 거다.
패러디가 아니라 진실이다.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내 경우엔······ 돌아오고 만다.
아니······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더는 죽고 싶지 않다. 더는 갇혀서 살고 싶지 않다.
농구도 마음대로 못 하는 빌어먹을 세상이지만, 난 어떻게든 내일을 살고 싶다.
철썩. 텅 텅 터터르르르엉.
클린으로 골대를 파고든 농구공은
마치 잘린 머리처럼
코트 위를 뒹굴었다..
- 작가의말
오늘도, 연참
...은 될지 모르겠네요.
고맙습니다.
ps. 혹시 재밌으면 간단한 코멘트라도 좀 주세요 ㅠ 제가 이런 글은 처음이라 잘 쓰고 있는건지 모르겠어요. 어... 반응이 없어도 완결까지 쓰긴 쓸 거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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