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계에서 만나자
잠시 애매한 정적이 흐르고,
침묵을 깨듯 바닥에 내팽개쳐진 작고 검은 강아지의 입안에서는 평소 날름거리던 혓바닥 색깔과 같은 붉은빛의 액체가, 아주 천천히 싸늘한 땅위로 내려와 기어나가고 있었다.
작은 짐승에게 어울리는 아주 작은 양이었지만, 짐승의 마지막 온기가 그렇게 식어가는 모양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은 서릿발 같은 날카로운 한기가 몸에 스며든 듯, 모두 부르르 몸을 떨고 있었다.
잠시후,
슬픔과 놀라움에 몸을 떨고 있는 아이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작은 몸에 갇혀있던 강아지의 영이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천천히 일어서고 있었다.
육체에서 벗어나자, 세상의 모든 소리가 짐승도 알아 들을 수 있는 음성으로 들려왔다.
측은해 하는 인간들의 웅성거리는 말소리가 다 들려왔다.
하지만, 강아지였던 짐승에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솔 이라고 했던가...!'
그녀의 마음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 나의 검은 강아지, 내 동생... '
... 소리가 들려왔다.
' 너의 이름을 불러 줄 수가 없었어. 하지만 난 언제나 너의 이름을 생각했어. 불러주고 싶은 이름이 너무 많아서... 널 안을 때마다 다르게 불렀어. 어차피 넌 이름을 듣고 내게 오는 건 아니었잖아...!'
강아지의 영이, 아이의 앞에 서서 삼킬 듯이 온통 아이만을 눈에 담아 바라보고 있었다.
‘솔... 이런 목소리 였구나... 아주 예뻐. 네 목소리인데 내가 먼저 듣는구나...!'
‘ 하늘, 구름, 까망이, 사랑이. 내 동생..., 아빠도 너도 다 가버렸어. 어떡해... 널 어디서 다시 찾을 수 있지? '
강아지의 영이 점점 원래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매끈하고 강인한 골격선을 이루며 아이보다도 훨씬 커진 몸체로 변하였지만, 여전히 눈만은 아이를 응시한 채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당당아, 흘러가고 흩어지는 인간계의 인연이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은은하게 울려오는 낯익은 목소리였다.
당당이 천천히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눈을 돌리자, 검고 긴 머릿결에 어울리는 검은 도포자락을 물결처럼 나풀거리며 이마에는 꽃잎모양의 화전이 은은하게 빛나는 용모 수려한 사내가, 인간은 아닌듯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을 서 있었다는 듯, 지친 표정으로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오라는 손짓을 하며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이번이 마지막 이었다. 수고했다! 이제 집으로 가자. 당당...”
하지만 가까이 가기는커녕, 하얗고 기다란 송곳니를 드러내며 커다랗게 변한 개의 영이 그를 향해 살벌하게 으르렁 거리고 있었다.
“아홉 번의 생을 거치면서, 너는 사람들에게 많은 행복을 주었고 많은 사랑을 받았다. 덕분에 너의 겁운이 무사히 잘 끝날 수 있었지.
이번이 아홉 번째의 마지막 겁운 이었고, 이번 또한 너의 존재가 인간에게는 큰 의미가 될 수 있었으니, 이것으로 되었다.
이제 너는 나 마존의 영수가 되어, 천상의 마계에서 언제나 함께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인간계의 감정에서 헤어나지 못한 개의 영이 으르렁거림을 멈추지 않고 그를 향해 눈빛을 번뜩이자, 한숨 섞인 마존의 말투에는 조금의 익살기마저 비쳐지고 있었다.
“그래, 알았다 당당. 조금 더 기다려 줄게...!
지난번 생이 끝난 후에는 사십구일 동안이나 네 모습을 찾지 못하고 철없는 강아지로 머무른 널 보살핀다고, 본존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너니까, 옆에서 계속 지켜준 걸 알고 있느냐. 다른 잡귀들이 윤회 중에 약해진 네 혼 옆에 얼씬도 하지 못하도록 말이야!
그래도 이번엔 네 모습으로 돌아오는데 시간이 별로 걸리지는 않아서 다행이구나. 얼른 마음 정리하고 집에 가자. 피곤하다...!"
****
평온한 물소리와 새소리에 마음이 가벼워진 몸은, 나른한 기지개와 함께 아직 초점이 잡혀지지 않은 몽롱한 시선으로 주변을 천천히 의식하기 시작했다.
이때, 누군가 그의 궁둥이 선을 탁탁 치는 것이 느껴졌다,
마존의 외궁.
대나무 숲으로 깊이 둘러싸인 파한정의 누각에서 책을 읽던 마존 옆에서, 무료하게 엎드려 있던 자신의 모습이 기억났다.
“또 꿈을 꾼 것이야? ... 그 아이? 착한 아이니까, 점점 더 나은 운명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 거야. 이제 그만 잊어도 되지 않겠느냐!"
아이의 마음의 소리를 듣게 되었을 때의 그 아픈 메아리는, 당당의 기억속의 일부분이 되어 그 후로 당당은 마존의 말처럼, 어리거나 젊은 여인만 보게 되면 주책없이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는 음흉한 짐승이 된 것 같았다.
심란해진 당당이 무겁게 몸을 일으켜 꽃밭 쪽으로 엉거주춤 걸어가더니, 꽃밭위로 그 큰 몸을 갑자기 구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익숙한 듯이 마존이 고개를 설레 흔들며 못 본 척, 딴전으로 책장만 넘기고 있었다.
"그래... 그 아이와 그렇게 흙에서 딩굴며 놀았었단 말이지! 하지만 본존은 체면 없이 절대 그렇게 구르고 하지 않을 거야. 당당. 포기해!"
당당을 지켜보던 마존이 무심한 표정과 함께, 누군가 들으라는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
망천강 위로 잔잔히 흘러가는 혼들의 물결을 바라보던 마존이, 그의 옆에 앉아서 반쯤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당당을 잠시 흘겨보더니,
갑자기 그의 발밑에 늘어진 당당의 풍성한 꼬리를 힘껏 밟아 버렸다.
순간 당당의 나른하게 감겨지던 눈이 살벌하게 커지고, 마존을 향한 으르렁 거리는 소리가 목젖 에서부터 불편하게 울려 나오기 시작하였다.
“너 같으면 얄밉지 않겠느냐? 벌써 십 만년이나 지난 일이야!
네 마음속에는 아직도 내 자리가 많이 크지 않은 게지. 우리가 함께 한 세월이 얼마인데, 고작 몇 년을 함께 한 여자애를 그리워하는 맘이 어떻게 본존보다 더 큰 것이야!”
마존과 당당이 함께 시선을 마주보며 잠시 불꽃을 튀기는 사이, 누각위로 누군가 성큼 성큼 올라오는 소리에 신경이 거슬린 마존이 두 손으로 무릎을 탁 치며 콧소리와 함께 돌아보았다.
진소였다. 진소가 둘을 번갈아 보며 웃음기가 가득 담긴 얼굴로 마존에게 예를 올렸다.
“ 마존, 조금 전 천궁에서 소식이 전해져 왔습니다.”
아직도 조금 뚱해 있는 표정의 마존이 어서 말해 보라는 듯이, 진소에게 한손을 올리며 손짓해 주었다.
“천제의 생신연회가 예정대로 다음 달에 천궁의 태선궁에서 열려질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자성의 별의 위험이 얼마 남지 않은 때이니만큼, 구중천의 분위기가 동요되지 않도록 삼계의 수장들만 몇몇 모여 조촐하게 식사를 하면서 이번 일을 의논한다고 합니다!"
여전히 별로 관심이 없는 표정으로, 마존이 아직 식지 않은 찻잔을 우아하게 들어 올리며 진소를 바라보았다.
“본존은 원래 생신 잔치에는 잘 나서지 않았으니, 외숙부께서도 충분히 헤아려 주실 것이다!"
하지만 진소도 급하지 않게 천천히 마존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하는 모양새가 뭔가 꿍꿍이가 들어 있는 표정이었지만, 얼른 풀어내지는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삼계의 수장들만이 몇몇 모이는 자리여서, 마존께서 참석하지 않으시면 마계의 빈자리가 많이 드러나게 될 테고, 천제께서도 많이 서운해 하시게 될 것 같습니다.”
여전히 아무런 대답이 없는 마존을 넌지시 기다리던 진소가 다시 미소를 머금으며, 얕은 헛기침을 하고 있었다.
“더 할 말이 남은 것이야?”
“네 마존, 이번 자성의 별의 움직임으로 인해서 인간계에 흩어져 있는 마귀들의 마성이 많이 강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 그렇겠지...!"
마존의 표정을 넌지시 즐기며 진소가 말을 이었다.
“그 때문에, 중천의 상제께서는 천유원과 인간계의 안정을 위해 잠시라도 자리를 비울수가 없으셔서, 이번 천제의 생신연회에는 자운 공주와 자원 태자를 대신 보내신다고 합니다.”
이제는 별로 뜨겁지도 않은 찻잔의 조금 남은 찻물을 요리조리 돌리며 진소의 눈길을 의식한 그가 퉁명스럽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구중천의 상황도 좋지 않은 때에, 천궁에서는 무슨 생신연회를 여신다고 하는 건지...!"
이번엔 괜스레 혀를 차는 척하며, 진소를 바라보았다.
“삼계에서만 참석한다는데 ... 어린 공주와 태자만 연회에 참석해서 주눅이 들게 하는 것도 딱한 일이니, 이번엔 어쩔 수 없이 마계에서도 참석을 하지 않을 수 없겠구나.
천궁에 계신 어머님을 뵌 지도 오래된 듯하니, 이참에 가서 어머님도 한번 뵙고 오도록 해야겠다. 진소 네가 과하지 않게 적당한 선물을 미리 준비해 두도록 하거라!”
“네, 알겠습니다. 마존!"
여전히 미소를 띄우고 있었지만, 주군의 장단에 맞추며 진소도 평상시보다 좀 더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
중천의 해선궁 대전의 높다란 상석에서는 푸르고 맑은 구름모양의 웅장한 옥석의자에 앉은 상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대전 아래에서 해맑게 미소 짓고 있는 자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운은 그녀의 아버지가 인자하고 평범한 신선의 모습으로 세정전에 있을 때 보다는, 이렇게 넓은 대전의 상석에서 근엄한 모습으로 앉아있을 때 만나는 것을 더 좋아하였다.
“유란 장군! 천제의 연회에 참석할 때에는 세 명의 원로대신이 함께 동행 하게 될 것이네.
그들이 잘 알아서 이야기 하겠지만 이번에 천궁에 가면, 중천의 결계를 점검하는 동안, 인간계의 영들이 들어오는 천유원의 입구 한 곳만 열려있고 얼마간은 중천의 모든 입구가 봉쇄될 것이라고 천제께 말씀 전해 주게.
그리고 그동안 공주와 태자가 천궁에 더 머물게 되어서, 죄송스러운 마음도 함께 잘 말씀 드려야하네!"
“네 상제, 분부하신대로 잘 말씀드리고, 중천의 결계가 걷히는 날에 공주님과 태자를 잘 모시고 돌아오겠습니다!"
중천의 중요한 일을 수행한다는 사실만으로 천공을 뚫을 듯이 사기가 치솟아 있는 자운과는 다르게, 얼마 전 현연이 인간계로 겁운을 겪기 위해 떠난 이후부터는 더욱 말수가 줄어든 자원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상제가 여느 아버지처럼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원아, 이번에 천궁에 가거든, 그곳에 있는 태자가 너희들보다도 나이도 많고 배움도 더 많을 것이니, 좋은 벗을 얻는다는 생각으로 함께 잘 지낼 수 있으면 좋겠구나."
말 수가 줄어든 탓에 이전보다 더욱 진중해 보이는 자원이, 상제의 당부에 예의 바르게 두 손을 올려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예를 올렸다.
“상제의 말씀에 유념하며, 중천의 태자로서 부끄럼 없도록 항상 신중하게 행동하겠습니다!"
자운이 바라보아도, 천성이 다음 상젯감 이었다.
동생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 자랑스러움이 한껏 차올랐다.
***
천궁의 천해문을 들어서자, 자운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유란의 팔 한쪽을 쿡쿡 쳤다.
“유란, 저번에 왔을 땐 입구가 이렇지 않았잖아?”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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