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제의 거래
며칠 동안 중천의 모든 공간이 결계로 둘러싸이고, 겁운의 굴레에 놓인 혼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곳만이 유일한 중천의 통로로 열려 있었다.
혼들이 타고 올라오는 빛기둥은 인간계의 영기가 밝은 곳에서 시작해서 중천의 천유원으로 이어져 있었다.
여러 혼들이 만들어 내는 빛줄기는, 마치 하늘 위로 솟구치는 나비 떼의 무리처럼 연약해 보이면서도,
길을 따라 올라가는 강한 본성은 운명을 따르는 인간들의 강한 의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혼의 존재로 인간계에 머무르던 그가 빛의 기둥인 '호선로'를 따라 중천으로 숨어 들어온들, 아무도 그를 눈여겨 볼 이유는 없었다.
잠시 후 '세정전' 옥호의 침궁 에서는, 은밀한 이들의 무거운 대화가 한참동안 이어지고 있었다.
옥호의 얼굴에 사나운 그늘이 가득 낀 채로 그의 앞에 서 있는 사내를 응시하고 있었다.
유난히 하얗다 못해, 그의 얼굴을 반쯤 가린 하얀색의 가면처럼 창백한 얼굴빛의 사내는, 중천의 대신들이 입는 청회색 빛깔의 의복을 어색하게 입고 있었다.
하지만, 전혀 대신들 답지않게 꼿꼿하게 서 있는 모습은, 상제의 굳어진 얼굴을 망설임 없이 맞받아 보고 있었다.
“무은 상선, 수신의 수제자 였다지 ?!”
상제의 단호한 목소리가 무심한 투로, 그의 앞에 선 사내를 향해 던져졌다.
“ 그렇습니다. 상제.”
그 역시 뻣뻣한 어조였다. 나체귀가 넓은 구중천에서 가장 혐오하고 뼛속까지 분노하는 대상이 천제 다음으로, 바로 중천의 상제였다.
혼 들의 운명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유린하는 그들의 존재 자체를 세상에서 제거해 버려야 한다는 의지만이, 그가 남은 생을 이어가는 의미가 될 뿐이었다.
“ 세오에게 너의 이야기를 들었다. 너희와 같은 생각을 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는 않지만, 너희가 하려는 일부의 계획에는 중천도 원하는 바가 있으니 돕도록 하겠다!"
세오에게 넌지시 들었던 부분은 있었지만, 중천의 상제가 요 마귀의 힘을 응원하고 거래를 한다는 것 자체가 가능한 일이기는 한 것인지...,
나체귀가 또 한 번, 이런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을 비꼬기라도 하듯이 뻣뻣한 눈길로 상제를 올려보았다.
“상제께서는 무엇 때문에 고귀한 걸음을 흙탕물 속으로 디디려 하십니까?
가만히 기다리기만 해도, 요 마족이 천계를 어지럽히면, 그 사이에 구중천에서 힘을 얻으실 분은 자연스레 중천의 상제가 되실 텐데요!”
“어리석은 놈! 내가 선택한 걸음이 흙탕물이 될지, 묻은 흙을 씻어낼 물이 될지, 어찌 알고...! 허튼 추측은 할 생각도 하지 말고, 요 마족은 내가 빌려주는 힘을 살뜰하게 쓸 생각이나 잘 하도록 하거라!!"
상제의 태산 같은 호통에 놀란 나체귀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자, 가면 안의 반쯤 가려진 얼굴 아래로는 마른 입술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궁소검을 빌려 주겠다!
세상 모든 혼을 다스릴 수 있겠지만, 그 일을 할 때까지 만이다.
그러니, 네놈들이 잡고 있는 인간들의 혼을 빼앗기 위해, 더 이상 그들을 괴롭힐 필요는 없겠지. 궁소검을 손에 들고 혼들에게 내리는 명령만으로, 얼마든지 인간들의 혼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은밀하게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귀왕의 대업에 대해서, 중천의 상제가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나체귀가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들어 반쯤밖에 보이지 않는 표정으로 그의 옆에 서 있는 세오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을 느낀 세오가 알겠다는 듯이 찬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구석구석 숨어있는 벌레들처럼, 소귀들 또한 언제 어느 곳이라도 순식간에 나타나 혼들을 먹어 치울 수도 있고, 작은 소식이라도 다 보고 전해 주는 일을 할 수가 있어.”
소귀라는 소리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나체귀가, 그것들에게 뜯겨진 얼굴위로 덮인 가면위를 더듬었다.
함께 분노를 곱씹는 듯이 손끝으로 뻗쳐오르는 경련을 불끈 움켜쥐었다.
가면에 가려진 탓에, 불완전하게 드러나는 그의 표정을 살피며 세오가 계속 말을 이었다.
“지금껏 요 마족이 해왔던, 모든 행동과 성과와 계획은 이전부터 소귀들에게서 모두 중천으로 고스란히 전해져 왔어.
물론 그 대가로, 그들이 원하는 혼 들을 넉넉하게 구해줘야 했지만...
세상의 어느 누가, 그 살벌한 귀왕의 근처까지 가서 몰래 지켜볼 거래를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곳 중천에서는 요 마족에게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 수가 있었던 거지.”
나체귀가 불쾌한 듯 상제와 세오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감정 따위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이 상제가 여전히 무표정하게 나체귀에게 말을 이었다.
“궁소검이 너희의 손에 있다고 해서, 생각처럼 아무렇게나 사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검령으로서, 다른 이의 사용을 허락 하였다만, 선을 넘는 일에 궁소검을 사용한다면 오히려 너희가 다치게 될 것이니, 명심하도록 하라! ... 그 일이 끝나는 순간에 다시 궁소검을 돌려받겠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상제의 표정은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말을 씹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무은선인, 너의 여인을 찾는 일에 더 진실 하거라. 복수를 한답시고, 그녀와의 인연이 더 멀리 흘러가는 걸 내버려 두지 말고!”
무엇에 맞은 것처럼 반응 없이 꼿꼿이 서 있는 나체귀를 곁눈으로 힐끔 보던 상제가, 머리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후 단전에 힘을 실은 상제가 고요한 호흡 속에 궁소검을 소환하자, 세오가 재빠르게 상제에게로 다가갔다.
세오에게 궁소검을 전한 상제가 문을 나서자, 세오가 천천히 나체귀에게 다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이제야 정신이 번뜩 든 나체귀가, 다가온 세오를 사납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존재를 없애버린 자가, 어떻게 그녀를 진실되게 찾으라는 소리를 하는 거지? 요 마족이 자네와 중천을 믿어도 될지 모르겠군!”
나체귀에게 궁소검을 전해주며, 벗을 바라보는 눈길로 세오가 그를 쳐다보았다.
“ 무은, 난 자네가 이번 일을 끝내고 나면 저들과 엮이지 않았으면 좋겠어. 자넨 그들과 같은 길을 갈만한 성정이 아니야. 분명 다른 길이 있을거네!
그리고 전음부는 위험하니, 우리만의 이야기는 내 흑조편에 실어 서신으로 보내도록 하겠네, 서신은 자네 앞에서만 드러날 것이야.”
하지만 여전히 심기가 불편한 나체귀의 심중이 느껴진 세오가 조금 더 다정한 투로 그를 불렀다.
“무은, 명심하게. 궁소검의 검령은 다름 아닌, 상제 자신이야 ! 검의 기운이 상제에게 그대로 전해지네, 그래서 빌려주는 것인지도 모르지,
만약, 검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으면, 상제는 자신의 내공이 상하더라도 궁소검을 자멸시킬 거야,
그렇게 되면, 그 파괴력이 지하궁전 몇 개쯤 소멸시키는 건 일도 아닐 만큼 강한 위력으로 요 마계에게 큰 타격을 줄 것이네!"
세오의 말을 전해듣던 나체귀의 표정이 또 한 번 어둡게 굳어지고 있었다.
***
태자와 훈련 할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의 대련이 펼쳐지고 있었다.
규칙적이지도 않고 자유로운 검술이, 보는 이로 하여금 지루할 틈도 없이 이들의 몸짓 속으로 빠져 들게 하고 있었다,
“ 눈앞에 온 검을 쳐 낼 생각만 하지 말고, 검의 길을 미리 느끼고 원하는 곳으로 검이 흐르게 하시오,
상대의 검까지 내가 움직일 수 있어야 원하는 결과가 얻어지는 법이지!”
푸른 옥빛과 투명한 물빛과도 같은 검광이 사납게 혹은 매끄럽게 서로의 검기를 타고 그들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 이제는 호흡을 죽이고 상대가 당신을 느끼지 못하게 고요하게 침범하시오.
자... 잠시 눈을 감고, 내가 어디에서 나타날지, 나의 호흡을 찾아보시오!”
자운이 두 눈을 꼬옥 감자, 분주하던 검의 기운이 모두 사라진 채, 허공에 떠 있는 듯 진정되지 않는 불안감이 급습해 오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신이 하라는 대로 해야 했다.
감은 두 눈이 저도 모르게 갑작스럽게 떨어지지나 않을지, 조심스럽게 정신을 모은 채로 더욱 두 눈에 힘을 주고 있었다.
그녀의 심장이 요동치는 소리가 무척이나 거슬릴 만큼 시끄럽게 머릿속을 헤집고 있었지만,
전신. 그의 심장소리는 이상하게 전혀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이곳에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그때였다. 전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막으시오!”
그의 목소리와 함께 이제서야 그의 부드러운 숨소리가 그녀의 뒤쪽에서 느껴지며, 차가운 검광이 다급하게 다가오는 게 감지되었다.
본능적으로 선요검을 들어 돌아서며 검광을 막아 낸 듯하였다
‘챙,,,’
하지만, 연이어 들려오는 호흡은 분명 그녀의 정면 이었다.
검 날을 피하며 허리선을 뒤쪽으로 젖히자, 그녀의 검고 긴 머리칼이 땅에 닿을 듯 아래로 요동치다 다시 튕겨 올라왔다.
그런데 그 이후로는... 적막했다. 선요검의 남은 떨림이 그녀의 손끝으로 잠시 느껴 질뿐, 이곳에는 전신의 숨소리가 또다시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자운이 여전히 두 눈을 꼬옥 감고 잠시 멈춘 채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였다
차가운 검기가 느껴지는가 싶더니, 그 차가움은 갑작스럽게 그녀의 목 앞에서 멈춰 섰다.
의지와 상관없이 부릅뜬 두 눈 앞에는 차고 묵직한 검을 그녀의 목전에 멈춰 세운 전신이, 웃는 모습으로 자운의 바로 앞에 서서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운공주, 목을 내어줄 자가 상대가 될지 공주가 될지 모를 일이오, 더욱 수련에 힘 써야 할 것 같소!"
전신이 말을 이으며 한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잠시 후,
왜냐고 생각할 틈도 없이 그녀의 마른 입술위로 따뜻하고 부드러운 그의 손끝의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딸꾹...!!'
자운이 놀란 마음에 순간 딸꾹질을 내뱉자, 전신의 부드러운 손끝이 그녀의 입술위로 흐트러진 채 달라붙은 몇 가닥의 머리칼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아까부터 저 옆쪽 나무위에서 공주를 지켜보는 이가 있으니, 이제 그만 하고 그에게도 가서 인사를 하는 게 도리인 것 같소."
전신이 자운의 흩어진 몇 올의 머리칼을 아래로 쓸어 내리자, 때 마침 불어온 미풍이 그녀의 머리칼을 어지럽게 흩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내 멈춰진 미풍은 다시 가지런하게 그녀의 머리칼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그가 흑룡이 각인된 검을 소중하게 거둬들일 때, 검의 자루위로 작고 단아하게 새겨진, ‘수심’ 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한편 느끼지도 못하는 사이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성운 제군이, 멍해 있는 그녀 앞으로 삐죽이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성운의 들이 민 얼굴사이로 어느새 저 만치 멀리 전신이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이자, 성운도 고개를 들어 전신과 자운을 번갈아 보며 말을 이었다.
“자운, 옷이 찢어 져서 잠시 갈아입으러 갔다 온 사이에 벌써 대련이 끝났단 말이야? 오늘은 좋은 구경을 다 놓쳤네. 사부님이 연습 중에 내 옷을 날려버린 경우도 극히 드문 일인데,
하필이면 너와 대련을 하는 오늘, 날려버리셨을까.!”
성운이 전신의 뒷모습에 여운이 남은 듯 한참을 바라보고 서 있는 사이에,
자운이 검은 옷자락이 하늘거리며 걸려있는 나무 아래로 총총 걸음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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