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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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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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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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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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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영화밥 먹고 살 팔자... (1)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류지호는 한동안 슬럼프에 빠진 것처럼 기운이 없었다.

자신도 왜 기운이 없는 지 알 수 없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왕성했던 컨디션이 파커 가족을 배웅하고 뚝 떨어졌다.

박상은이 걱정스레 입을 열었다.


“방송제 준비한다고 엄청 열심이더니... 피로가 쌓였나보다. 조퇴하고 병원에 한 번 가봐.”

“그 정도는 아냐.”

“전자상가 가지 말고 방송실에 있을래?”

“아냐.”


류지호는 다시 힘을 내서 기술파트 선배들과 학교를 나섰다.

인현전자상가.

이곳에 올 때마다 장비를 다루는 방송부원들은 가슴이 설레곤 했다.

축연국민학교 담벼락 아래로 죽 늘어선 점포들과 건물 안의 무수한 전자제품 상점들은 서울의 세운상가 못지않은 면모를 과시했다.

상가 골목에 들어서면 먼저 ‘향기’부터 달랐다.

박스에서 막 뜯어낸 신품 전자제품에서 풍기는 그 특유의 냄새.

쇠와 플라스틱이 혼합된 그 냄새는 마니아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또한 팝송에 막 귀가 뜨이던 젊은이들에게 인현전자상가는 꿈의 궁전이자 별천지다.

휴대용 카세트 레코더부터 소위 전축이라고 불리던 고가의 오디오까지.

없는 게 없었으니까.

인현전자상가는 서울의 세운상가를 빼고는 수도권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

세운상가가 잠수함을 만들 수 있다고 으스댄다면, 인현전자상가는 소형 헬리콥터 정도는 조립한다고 맞받아치곤 했다.

그만큼 규모와 매장 숫자에서 대단하다는 자부심의 표현이었다.


“앰프부터 보자.”


인현전자상가 2층에 음향 전문 점포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신포고가 보유하고 있는 음향장비로 신포인의 밤 공연을 소화할 순 없다.

따라서 외부업체에서 대용량 앰프와 공연용 스피커를 렌트해야만 했다.

3학년 선배들까지 모두 인현전자상가로 몰려온 것은 후배들에게 업체와 장비를 알려주기 위함이다.

3학년 기술파트장이 선두에서 후배들을 이끌었다.


“사장님, 저희 왔어요.”


수년 간 거래를 하던 점포인지라 사장과 안면이 있었다.


“JBL 15인치 출력 500와트 가져다주시고.”

“오디오 믹서, 앰프 1조, 스피커 2통?”

“예.”


영상관련 지식은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류지호다.

그런데 음향과 관련해서는 모르는 것이 많았다.


“JBL은 BOSE, 알텍랜싱과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오디오 브랜드야. 얘네 거는 좀 무겁긴 한데 튼튼한 내구성에 가격도 합리적이지. 지호가 하도 사운드가 빵빵해야 한다고 쫑알대서 올해는 이걸로 골랐어. 주로 야마하 거 많이들 쓰는데, 미국식 특유의 단단한 저음과 박력 있는 사운드는 JBL이나 BOSE가 좋아.”


류지호는 한국의 멀티플렉스 상영관 대부분의 스피커가 JBL이었던 걸 기억했다.

물론 공연장, 종교시절, 행사장에서도 BOSE와 더불어 많이 쓰이게 된다.


“다음은 조명하고 필터도 좀 보자.”


신포고 방송부원들이 조명기 판매, 렌탈 점포로 우르르 몰려갔다.

조명은 무대를 밝게 하는 기본적인 기능 말고도 분위기를 연출하는 역할을 한다.

조명은 특정한 정서적 효과는 물론 분위기와 양식을 만들어낸다.

조명이 닿는 곳에 따라 원근감과 공간감, 대상의 강조, 입체감을 만들어낸다.

방송제는 연극, 뮤지컬, 음악 라이브 공연하고 달리 대담이나 강연과 비슷한 면이 많기 때문에 굳이 조명이 화려할 필요는 없다.


“관객들의 집중도를 올리기 위한 스포트라이트가 더 중요해. 그렇다고 무조건 어둠속에서 주인공에만 딱 떨어지는 스포트라이트 조명을 치지는 않아. 1시간 정도 오디오 공연만 하다보면 관객이 지루함을 느낄 수가 있거든. 프로그램에 따라 다채로운 색감으로 무대를 꾸며야 할 경우도 생겨.”


3학년 선배가 친절하게 기본적인 것들을 설명했다.

고등학교 방송제에서 조명을 친다고 해서 대단할 건 없다.

작은 교회 행사보단 조금 화려하고, 대학로 연극 무대 조명보단 소박한 수준.

무대에 색깔을 입히기 위해 무채색의 조명기에 필터를 씌운다.

조명에 쓰이는 필터는 무대조명, 영화촬영, 스튜디오 촬영 등의 사용용도에 따라 확산필터, 색온도 변환 필터, 칼라필터로 분류한다.

확산필터는 빛을 분산 해주는 역할을 하는 필터다.

주로 영화촬영, 스튜디오 촬영, 사진 촬영에 쓰인다.

조명기구에서 나오는 빛보다 더 부드러운 빛을 만들어내기 위해 조명기구 앞에 확산필터를 부착하여 사용하거나, 인물의 얼굴표면이 너무 반짝거릴 때도 사용한다.

광원의 색을 절대온도를 이용해 숫자로 표시한 한 것을 ‘색온도‘라고 하는데, 발광되는 빛 즉 광원이 온도에 따라 색상이 달라지는 것을 흰색을 기준으로 절대온도 표시 K(켈빈)로 표시한다.

빛에 나타나는 따뜻한 느낌의 정도를 수치화한 것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광원의 색온도가 다르면 같은 색상이라도 다른 색으로 보인다.

때문에 각각 다른 광원의 색 온도를 맞추기 위해 사용되는 필터를 색온도 변환 필터(또는 색온도 보정 필터)라고 한다.

또한 임의적으로 색온도를 변화 시키려 할 때에도 이 필터를 사용한다.

마지막으로 칼라필터는 투명한 색의 조명에 색을 입히는 것이다.

칼라필터는 사실적인 조명을 주로 쓰는 프로그램인 대담, 강연회, 드라마 등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무대조명(연극, 무용, 오페라, 콘서트)에 있어서는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류지호는 선배로부터 설명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더 잘 알고 있으니까.

류지호는 홀로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무대 및 인테리어 조명을 렌트하고 시공해주는 업체 몇 곳을 둘러봤다.

류지호가 한 점포로 들어가 사장에게 다가갔다.


“로스코 있어요?”

“동경 거 밖에 없어.”

“젤라틴 색깔별로 주세요.”


점포 사장이 호박색부터 블루계열, 레드 계열을 각 한 장씩 7장을 내놓았다.

일본제 필터인 동경필터와 고보(Gobo)제품은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국내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몇 년 후부터 충무로에서는 주로 미국제 로스코 필터를 많이 사용하게 된다.

참고로 로스코는 무대 작화용품, 조명 소프트웨어, 공연용품, 무대장치, 이펙트 장비 등을 생산하는 미국의 기업이다.

조명에 쓰이는 칼라필터의 색상 시리즈는 많지 않지만, 색감이 뛰어나고, 재질에서 좋은 평가를 받아 주로 전문가용으로 많이 사용되고, 영화촬영에서 많이 사용된다.

영국제 리 필터도 세계적으로 많이 쓰이는 편이다.


“C47도 몇 개 주세요.”

“응?”

“아, 나무집게요.”


영화촬영 현장에서 나무 빨래집게를 C47(씨포티세븐)이라고 부른다.

C47은 조명기에 젤(gel)이라 부르는 칼라필터 또는 씨네 포일(cine foil)을 두를 때 사용한다.

조명기구는 당연히 열이 발생한다.

화재와 화상으로부터 위험을 줄이기 위해 열전도가 잘 안 되는 나무재질로 집게를 만들어 사용한다.


“지호 저놈은 알아서 젤라틴까지 구해 오네.”


신포고 방송부원들은 더는 놀라거나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류지호는 신효정에게 영화서적을 한 권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루이스 자네티의 ‘Understanding Movies’란 책이었다.

영화학도들의 기초입문서라고 할 수 있는 ‘영화의 이해’는 1978년 미국에서 첫 출간되었는데, 아직 한국에서는 번역 출판되지 않았다.

때문에 원서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영화 잡지 스크린, 한국에서 출간된 비디오 촬영 및 편집 가이드 서적도 급하게 구해서 신포고 방송부들 앞에서 꺼내놓았다.

중학교 때부터 난 이런 책을 보고 있다.

그러니 비디오 촬영, 조명, 편집에 대한 것에서 의심하지 마시라.

그 외에 영화진흥공사가 번역 출간한 ‘잉마르 베리만의 비평서’, 피터 울른의 ‘영화의 기호와 의미’, 카렐 라이츠의 ‘5C영화술’ 같은 책들도 서울의 교보문고까지 가서 구매했다.

방송부들에게 공개하진 않았다.

연극영화과 학생도 감당 안 되는 이론서들이다.

의심을 불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욱 키울 가능성이 높았다.

속아 넘어 간 것인지, 아니면 그러려니 하는 것인지.

방송부원들은 류지호의 지식을 따지지 않았다.

경찰서장 표창, 9시 뉴스 사건 이후로.

특이한 녀석에서 특별한 녀석으로 인식이 바뀐 부분도 있었고.

방송부원들은 대동학생백화점에도 들러서 검정 종이를 수십 장 구입해 학교로 돌아왔다.


“휴우~”

“하아~”


기술파트 방송부들의 입에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양쪽 벽면으로 천장에 닿을 듯 뚫려있는 열 개가 넘는 창문마다 검은 종이를 붙일 생각을 하니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신포고 대강당에는 암막 커튼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빔프로젝터로 동영상을 상영하기 위해서는 햇빛을 차단해야 한다.

창문을 가릴 수단이 필요했다.

3학년 선배들은 제 일이 아니라는 듯 어느 틈엔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이날 밤늦은 시간까지 방송부원들은 대강당의 모든 창문에 검은 종이를 붙였다.


“이걸 다 언제 붙이나 싶었는데, 하니까 되긴 하네.”


최원석이 소감을 말했다.


“학교에서 커튼을 달아주면 될 것을.....”


김석민이 투덜거렸다.

절대적으로 맞는 말이라 류지호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비효율의 극치를 보여주는 집단은 대한민국 군대가 최고다.

다음이 대한민국의 학교인 것 같다.

내부 비리 역시 둘 다 만만치 않았고.

어쨌든 앰프와 공연용 스피커의 렌탈 계약을 하고, 대강당 창문까지 가리고 보니 그제야 방송제가 다가오고 있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 ❉ ❉


밤늦은 시간.

시화전 회의를 하고 있는 문예부실 형광등이 환하게 밝혀있다.

졸업생 선배들이 시화전에 낼 시나 산문을 읽고 후배들에게 조언을 해주는 자리다.

문예부 졸업생 중에 신춘문예 출신 작가가 몇 명 활동하고 있다.

교과서에 실릴 만큼의 커리어를 보여준 선배는 아직 없었지만, 나름 촉망받는 문학가 두 서넛이 활동 중이다.

시집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경우가 종종 벌어지던 시기다.

소설과 같은 직설적인 이야기보다는 은유와 고도의 상징성을 내포한 시가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많이 읽혔다.

모든 서점마다 한 섹션에 문학과 지성사, 민음사, 세계사 등 많은 출판사에서 출간한 손바닥 크기의 국반판 혹은 34판의 수많은 시집이 꽂혀 있다.

황재정의 책가방에는 샤르트르의 ‘구토’,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 쇼펜하우워의 ‘인생론’ 초현실주의 서적 등 철학서적 한권과 시집 한권이 항상 들어있다.

황재정은 다른 친구들에 비해 용돈이 넉넉한 편이다.

그럼에도 김준우가 유흥비를 계산할 때 돈을 보태는 일이 거의 없다.

대신 시집이나 인문학 서적을 구입하는 것에는 용돈을 아끼는 법이 없다.


“이게 시냐? 낙서냐?”


졸업생 선배가 독설을 내뱉었다.

1학년들의 고개가 땅으로 꺼질 듯 푹 숙여졌다.


“이건 뭐, 문예부 망신도 이런 망신도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는 모방에서부터 출발한다고 했는데요? 초보 때는 구조적으로 기승전결이 잘 짜여 진 작품이나, 독특한 표현이 많이 들어있는 작품을 갖다놓고 자기 생각을 끼워보는 연습을 많이 해보라고... 전에 선배님이 말씀하셨습니다만?”


황재정이 뻔뻔하게 고개를 쳐들고 반박했다.


“야, 이 새끼야! 내용과 감각을 모방하라는 것이 아니라, 구조와 전개방법과 표현기술을 따라서 해보라는 뜻이었지 무턱대고 끼워 맞추라고 했어!”


얼굴이 벌게진 졸업생 선배가 시가 적힌 노트를 집어 던지며 화를 냈다.


“용기를 북돋아 줘도 시원찮은데, 주눅 들면 할 수 있는 것도 제대로 못한다고요.”


따박따박, 잘도 말대꾸하는 황재정이다.


“네 시는 자신 있다는 말이지?”

“저라고 초보티를 벗어났겠어요?”


황재정의 시는 그의 성격답게 독설과 자학으로 가득했다.

권태에 대한 공격과 그 공격 자체에 대한 권태.

세상과 인간에 대한 냉소.

황재정은 권태라는 주제로 뒤틀림과 야유, 탄식 등의 표현을 남발했다.

딴에는 세상에 대한 저항과 정화의 욕망을 배설의 언어로 그렸다고 주장했다.

졸업생 선배들이 보기에는 치기어린 십대의 직설적인 일기, 딱 그 수준일 뿐이다.


“넌 시가 뭐라 생각 하냐?”

“음... 불가능을 표현하려고 뺑이치다가 결국 실패하는 거...”

“뭐 이런 허무주의에 빠진 놈이 다 있어!”

“그렇잖아요. 현실참여주의 시 백날 써봐야 뭐해요. 세상이 바뀌었나요? 이 시대 시인들은 세상이란 현실에 상상력이란 망상을 은유적으로 표현하지만, 제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하고 침몰하잖아요.”

“낙관적이고 낭만적이고 희망을 노래하는 시도 많아.”

“에이~ 그것도 기만이에요. 세상은 똥통인데 그 속에서 보는 하늘을 보고 참 푸르고 높구나 노래 부르는 게 진정으로 솔직한 건지 모르겠네요.”


어딘지 삐뚤어져 있는 황재정이다.

졸업생 선배는 흥분을 가라앉혔다.

같이 흥분해서는 답이 없다.


“어떤 문인 선배님이 내게 그러더라. 풀냄새라고 있지? 풀을 베었을 때 나는 냄새. 사람들은 그것을 상쾌하고 신선하다고 여기지만, 실은 베인 풀이 옆의 풀에게 경고하는 게 풀냄새라고 하시는 거야. 그렇다고 옆의 풀이 도망칠 수 있겠어? 아무짝에도 쓸모없지만 그럼에도 경고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그게 바로 문학이요 시 아니냐고 하시더라.”

“도덕경 첫 구절에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라고 했잖아요. 저는 시도 그렇다고 봐요. 시는 말할 수 없는 것. 그러니까 낙서라고 폄하하지 말아주세요. 어려도 제 각기 자기 세계가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잘도 지껄이는 황재정이다.

독특한 정신세계를 가진 문예부 출신은 많다.

황재정이 그 명단에 당당히 이름을 올릴 것 같다.


“이 시 그대로 시화전에 낸다는 거야?”

“퇴고는 할게요. 저도 생판 모르는 사람들한테 쪽 팔기는 싫어요.”

“허.. 새끼, 당돌한 건지, 개념이 없는 건지.”


황재정이 슬쩍 눈치를 봤다.


“제 생각을 거침없이 말씀드렸다고 빠따 치실 건 아니시죠?”


직설적으로 그것도 까칠하게 할 말은 다하는 황재정이지만, 선배에게 빠따를 맞는 것은 무서웠다.

졸업생 선배가 황재정이 쓴 시가 적힌 종이를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재정이 넌, 퇴고 한 거 보고 판단하자.”

“감사합니다!”


황재정이 얼른 대답했다.

졸업생 선배가 문예부원들 모두를 향해 입을 열었다.


“글쓰기는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은유일 수 있어. 너희들이 겪는 시행착오는 시란 ‘자기가 경험했고, 보고 느낀 것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게 시다' 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야. 물론 이런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좋은 시를 쓰고 개성적으로 쓰는 데에는 이게 바로 함정이라는 걸 나중에야 깨닫게 돼.”


살면서 하는 경험과 느낌은 대부분 비슷하다.

그러나 상상은 천차만별이다.

상상으로 써야 발전이 빠르고 좋은 시를 계속 쓸 수 있다는 의미다.


“시란 자기가 쓰고자 하는 소재를 두 눈 딱 감고 상상해서 쓰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고 단순하게 생각해. 너희들이 쓴 이것들이 시가 되면 얼마나 다행이겠냐. 그런데 미안하지만 이것들은 그렇고 그런 이야기, 누구나 다 보고 느끼는 형편없는 넋두리, 서사, 풍경 나열일 뿐이야. 모든 예술 활동은 상상력이야. 명심해.”


모든 예술가의 상상은 체험, 허구, 가공까지 드나들어야 한다.

따라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허구, 가공까지 동원해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다.


‘적당히 하고 막걸리나 푸러 갈 것이지....’


황재정이 속으로 투덜거리는 사이, 졸업생 선배의 맨투맨 지적이 시작되었다.


“이거 산문이야 시야? 20행으로 줄여.”


졸업생 선배가 다른 1학년의 시를 놓고 지적을 시작했다.


“초보가 변칙은... 기본에 충실 하는 게 발전이 빠른 거야. 괜히 겉멋 들려서 초보가 사용하는 건 좋지 않아.”


졸업생 선배의 지적이 2학년에게 향했다.


“이상 흉내 낸 거냐?”

“꼭 그건 아니데요. 이중구조로 써 봤어요.”

“고양이가 네가 되어 사고하고 행동하는 거지?”

“예.”

“근데 제목은 좀 깬다?”

“야옹이 이상한가요?”

“시의 제목과 본문이 기본적으로 메타포, 즉 은유관계가 형성되어야 해. 그 둘이 참신한 은유관계가 형성될 때 그만큼 참신한 시로 거듭 태어나게 된다.”

“예. 선배님!”

“그리고 이 시는 누구 거야?”

“제 겁니다.”

“이건 웬 노티 나는 표현이냐. 시조 쓰냐? ···하였나니, ···노니. 늴리리 맘보야? 혼자 술 취해 주정하는 말은 절대 쓰지 마.”

“.....예.”

“마지막으로 퇴고 열심히 해라. 많은 퇴고는 곧 시 창작력의 향상이라는 것을 항상 명심해. 많은 퇴고를 해보지 않으면 그만큼 발전이 느리게 된다. 알겠어?!”

“옛!”

“자, 다들 수고했다. 삼치에 막걸리 한 사발 하러 가자.”

“야호~”


문예부원들이 동인천의 삼치구이 골목으로 몰려갔다.

밤늦은 시간까지 막걸리 사발을 들이키며 세상과 문학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세상의 모든 청소년들은 그 시기에 맞는 자신만의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이 학창시절의 추억이 될 수도 악몽이 될 수도 있다.


❉ ❉ ❉


김준우는 토요일과 일요일에 사진부 선배들과 출사(出寫)를 다녔다.

개성적인 인테리어의 카페들이 들어서고 있는 월미도 카페 거리.

여의도 광장과 서울 시내의 고궁들.

수인선 철길과 협궤열차.


찰칵! 찰칵!


김준우는 인천에서 가까운 사진 명소들을 돌아다니며 열심히 셔터를 눌러댔다.

서해 3대 일몰 촬영지인 강화도 화도면 일대의 너른 갯벌.

밀물 때는 잔잔한 수면 위를 노니는 갈매기를 촬영하고, 썰물 때는 너른 갯벌을 온통 붉은 색으로 물들이는 부드럽고 장엄한 노을을 촬영했다.

틈틈이 교내에서 친구들의 인물 사진도 찍었다.


“증명사진 촬영하는 거 아니거든. 좀 자연스럽게 행동해!”

“난 그냥 칼라 증명사진 찍어줘.”

“흑백이다, 이놈들아!”

“칼라로 찍어. 집도 부자인 주제에!”

“내가 부자냐? 아빠가 부자지!”

“영정사진 찍냐?”


말을 더럽게 안 듣는 친구들이다.


“선배님! 왜 흑백사진만 찍습니까?”


김준우가 사진부에 입부했을 때 처음으로 선배에게 한 질문이다.


“예술 사진은 흑백 사진이 더 좋아. 흑백사진이 필름 가격도 그렇고 인화하거나 인화지 같은 전반적인 장비 가격이 싸기도 하고.”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흑백 사진이 컬러보다 배우기 쉽다는 것이다.

흑백 사진은 색 정보를 빼고 흑과 백으로 단순화시킨다.

때문에 세상 만물과 인물을 좀 더 명징(明澄)하게 보이는 효과가 있다.

색은 사람의 눈을 현혹한다.

반면에 흑백은 사물의 본질을 좀 더 자세히 보게 하는 힘이 있다.

특히 인물사진을 칼라로 찍어 인화를 할 경우 인물의 피부색이나 머리카락 색깔, 눈동자의 색 혹은 얼굴에 난 여러 가지 잡티 등에 시선이 쏠리는 반면, 흑백은 인물의 표정에 좀 더 집중하게 된다.

따라서 이제 막 사진예술을 접한 초보들에게 알맞은 시작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니들 고등학생이 왜 그리 쭈그리 한 건데. 좀 건강한 포즈를 취해보란 말이야!”

“체육복 갈아입고 올까?”

“우리 학교 체육복은 구리잖아!”

“나는 총 쏘는 포즈 좀 찍어줘.”

“교련복 안 벗어! 학군단이냐! 왜 교련복을 입고 제식훈련을 하고 지랄이야!”

“모델 해 준다고 해도 지랄이냐!”

“나 안 해!”


김준우는 윽박지르고 때로는 살살 달래가며 친구들의 모습을 겨우 사진에 담았다.

자유공원과 신포동을 돌아다니며 셔터를 누르던 김준우는 예쁜 여학생들을 찍다가 데이트 신청을 받기도 했다.

수도국산에 올라가 고달픈 삶의 단면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달동네를 사진에 담기도 했다.


‘주제를 무엇으로 잡아야 좋은 그림을 얻을 수 있을까?’


좀처럼 만족할 만한 사진과 심상이 잡히질 않았다.

인물, 풍경 가릴 것 없이 찍어대며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선배들이 학교 축제에 작품을 걸기 위해서는 명확한 주제의식을 담은 사진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을 보는 사람의 감정을 자극해야 하고, 사진을 찍은 사람의 심리가 담겨 있어 작가의 생각을 엿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을 담기 위해 흑백으로 촬영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했다.

김준우가 셔터를 누르면서 투덜거렸다.


‘고등학생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거 아냐?‘


기술은 누구나 배우고 익히면 숙련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결국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세상과 인간, 자연과 문명, 삶과 죽음 같은 좀 더 본질적인 물음에 다가가기 위한 고민의 해답은 누구나 얻을 수 없다.

예술의 시작은 정답이 없는 수많은 질문을 던지는 것부터다.

그렇게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예술작품이 탄생한다.


찰칵!


필름 카메라는 셔터를 누르면 그것으로 끝이다.

한 컷 한 컷, 신중하게 찍는 과정 속에서 의미가 있다.

거기에 의외성이 더해지면 김준우의 사진은 예술로 한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필름으로 사진을 찍다가 예상치 못한 결과물이 나왔을 때, 그것 자체로 하나의 작품이 되는 묘한 매력이 있는 예술이기도 하니까.


‘재밌다.’


김준우는 고가의 카메라를 소유한 것 때문에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진을 찍고 현상하고 인화하면서 점점 사진의 세계에 매료되고 있었다.


“아자! 빠샤!”


찰칵!


김준우가 열심히 셔터를 눌렀다.

용연태권도장을 방문해 친구 고우찬이 수련하는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서클 활동을 하지 않는 고우찬은 태권도에 진심을 보였다.


“오랜만에 목욕탕이나 가자!”

“좋았어!”


류지호와 두 친구가 승기사거리에 위치한 동양장 목욕탕으로 향했다.

발가벗은 셋이 은근히 서로의 몸을 힐끗 거렸다.


“하여간 우찬이 저 놈은... 짐승이야, 짐승.”


뭐든지 우람한 고우찬이 당연 돋보였다.


“멸치대가리에서 북어대가리로 별명을 바꿔주마.”


고우찬의 말에 류지호가 양팔을 들어 올려 제법 틀이 잡히기 시작한 근육을 자랑했다.

단박에 고우찬이 비웃었다.


“크크크. 생선에서 인간으로 변신한 거 축하해.”


일취월장.

늘어난 식사량, 꾸준한 운동.

멸치 혹은 북어라는 별명과 이별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탕 속으로 들어갔다.

몇몇 어른들이 슬그머니 탕에서 빠져나갔다.

당당한 체격, 험상궂은 외모의 고우찬을 조직폭력배로 오해 한 것이다.

셋은 일렬로 쭈그리고 앉아 서로의 등을 밀어줬다.


“와, 우찬이 이 놈 등에서 국수 뽑히는 거 봐.”

“인간이야 지우개야.”


서로의 등을 밀어주며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재정이도 같이 와서 땀을 뺏으면 좋았을 텐데.”

“선배들이 매일 술 사준다고 좋다고 따라다니는 모양이더라.”


넓은 욕탕에 꽐꽐 쏟아지는 물소리.

첨벙첨벙 욕탕으로 사람들이 드나드는 소리.

류지호는 넓은 욕탕 안에서 다양한 소리를 들었다.


[남들의 패턴 따위는 필요 없어. 너만의 길을 찾아봐.]


할리우드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대사다.

정해진 것에 구속받지 말고 자신만의 길을 찾으라는 말이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저 마다 우여곡절을 겪는다.

그 과정에서 성장한다.

류지호는 친구들에게 어떤 길을 가라고 선택해 줄 수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친구들이 가고자 하는 길을 묵묵히 지켜봐주고 응원해 주는 것.

그 길을 옆에서 함께 바라봐 주는 것.

그것이 친구의 몫이다.

기억속의 친구들이 류지호에게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이번엔 아니다.

좀 더 빠르고 곧게 뻗은 길이 있다면.

류지호는 기꺼이 그 길을 친구들과 함께 걸어갈 생각이다.


‘함께 가자. 친구들아...’


작가의말

하루 잘 마무리하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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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밥 먹고 살 팔자... (1) +8 22.01.05 11,304 219 24쪽
31 급하게 먹는 밥은 체하는 법이다. +13 22.01.05 11,144 224 26쪽
30 필요한 초능력은 재력(財力). (4) +10 22.01.04 11,446 224 24쪽
29 필요한 초능력은 재력(財力). (3) +14 22.01.04 11,497 238 24쪽
28 필요한 초능력은 재력(財力). (2) +11 22.01.03 11,474 234 21쪽
27 필요한 초능력은 재력(財力). (1) +8 22.01.03 11,926 235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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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오늘 넌 영화감독 같았어! (2) +8 21.12.31 11,827 235 16쪽
22 오늘 넌 영화감독 같았어! (1) +8 21.12.31 12,596 243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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