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새글

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최근연재일 :
2024.06.29 09:05
연재수 :
896 회
조회수 :
3,815,185
추천수 :
118,365
글자수 :
9,922,097

작성
21.12.31 10:00
조회
12,551
추천
242
글자
24쪽

오늘 넌 영화감독 같았어! (1)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지금 당장 류지호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할 필요 없다.

동영상 촬영이다.

당장 맡겨만 주면 온갖 재주를 다 부릴 자신이 있다.

비록 1학년이라서 방송부 카메라를 만지지 못하고 있지만.

누구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있다.

그러나 정말로 자기가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객관적으로 판단해서 결정하고 추진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하고 싶은 일과 잘할 수 있는 일.

즉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서로 괴리가 많이 생기지 않도록 조정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류지호는 웨딩촬영 사업을 고민 중이다.

급하게 서둘다가 오히려 시행착오를 겪을 수도 있다.

때문에 자신에게 솔직할 필요가 있으며 스스로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자신의 역량, 의지, 환경 등 객관적으로 파악해 둘 필요가 있다.

그 첫 번째 테스트가 공부였다.

두 번째 테스트는 방송제다.

류지호는 방송제와 관련한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수첩에 메모를 했다.

모아놓은 메모들은 나중에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그렇게 해서 방송제 기획안이 만들어졌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3일 만에 뚝딱 기획서가 만들어졌다.


“우리 왔다!”


류지호가 고우찬과 함께 김준우의 집 2층으로 올라왔다.


“왔냐?”


김준우가 필름카메라를 손질하며 인사를 받았다.

그의 앞에는 칸논, 나이콘, 미놀타 브랜드 사진카메라가 각각 한 대씩 렌즈와 바디가 분리된 채 놓여있다.

김준우는 에어브로워로 정성스럽게 카메라 바디의 먼지를 제거하고 있어서 친구들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밥은 먹었냐?”

“밥은 됐고, 나 컴퓨터 좀 쓴다?”


공부방으로 들어온 류지호가 망설임 없이 컴퓨터 전원을 켰다.

그리고 플로피 디스켓을 컴퓨터 본체에 꽂았다.


위이잉. 드르륵. 드륵.


컴퓨터가 요란한 기계음을 내며 부팅을 시작했다.

류지호의 어깨너머에서 김준우와 고우찬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지켜봤다.

배다리 헌책방에서 구입한 컴퓨터 가이드 책도 옆에 펼쳐 놨다.

볼일은 없다.

고장이라도 나면 큰일일 텐데, 김준우의 표정은 평온했다.

친구를 믿어서가 아니다.

망가지기라도 하면 자신이 그랬다고 말하면 된다.

누나에게 잔소리 듣는 건 짜증나지만, 부모님은 아무 말 없이 넘어가 주실 거라고 믿었다.

부팅이 끝난 컴퓨터에 ‘C:>’ 프롬프트가 떴다.

도스 워드를 쓰려면 단축키로 된 명령어들을 모두 외우고 있어야 했다.

류지호가 단축키를 암기하고 있을 리가 없다.

때문에 열심히 HELP와 가이드 책을 들락날락거려야 했다.


“오오~ 된다!”


김준우가 놀라 탄성을 터트렸다.

대학생인 둘째 누나가 가끔 사용하는 것을 구경하긴 했어도 김준우 자신은 사용할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류지호는 연습장을 꺼내 방송제 기획안을 펼쳤다.


“이 새끼~ 넌 못하는 게 뭐냐?”


김준우는 너무 놀라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감탄을 토해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류지호가 키보드를 치기 시작했다.


탁탁. 타타타탁!


도스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을까 반신반의 했던 것도 사실.

비록 부팅하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문서 프로그램을 불러오는데 애를 먹기는 했지만, 어쨌든 3장짜리 문서를 작성할 수 있었다.


‘쩝, 한/글만 깔려있어도 훨씬 편했을 텐데.’


류지호가 아쉬움에 살짝 입맛을 다셨다.

국산 워드프로세서 ‘한/글‘은 89년에 처음 출시된다.

류지호가 작업한 컴퓨터는 삼보 컴퓨터가 2년 전 출시한 트라이젬 286이다.

경일모터스의 포니2의 가격보다 비싼 값을 자랑하는 물건이다.

사실 가정집에 있어서는 안 되는 물건이다.

김준우의 집이 얼마나 부유한지 알려주는 모습이다.


‘비싼 카메라를 세 대씩이나 고삐리한테 사줄 정도니 말 다했지....’


여담으로 삼보 컴퓨터는 일본의 냅슨과 합작해서 프린터를 함께 팔았다.

보석글과 냅슨 프린터를 쓰는 경우 다른 워드프로세서보다 한글 문서를 출력하기 쉬웠다.

암튼 류지호는 페이지 세 장짜리 문서를 작성하는데 6시간을 소모해야했다.

고가의 프린트 기기를 사용해 출력까지 한 후 오타와 내용을 확인했다.

글자로만 구성한 조악한 기획서다.

그럼에도 내용이 한눈에 들어오도록 최대한 압축했다.

고우찬이 대충 눈으로 훑은 문서를 김준우에게 넘기며 말했다.


“이것들이 다 무슨 개소리냐?”

“방송제 기획안?”


고등학교 방송제 하나 제대로 못해내면 이번 생도 글러먹은 것이다.

만약 그조차 우물쭈물 헤매기나 한다면 앞으로 나대지 말아야 한다.

까불지 말고 자기 먹을 것만 챙겨먹을 고민을 하는 것이 맞았다.


“애들아, 내려와서 저녁 먹어라.”


1층에서 조성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고우찬이 얼른 대답하고, 2층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저 놈은 뱃속에 거지가 들어앉았나봐.”

“한창 배고플 나이니까.”

“난 안 그런데?”


김준우의 시큰둥한 말에 류지호가 웃으며 대꾸했다.


“넌 매일 고기를 먹어서 그래.”

“좀 싸줄까? 내가 엄마한테 말해줄게.”


류지호가 김준우에게 헤드락을 걸었다.


“됐어. 이 배부른 놈아!”


이래서 김준우가 좋았다.

그대로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친구들에게는 한없이 양보하고 베푸는 것이 그다웠다.


❉ ❉ ❉


“인천 최초의 비디오 영상 방송제?”


2학년 선배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류지호를 쳐다봤다.

저예산 영화 기획서나 PT 문서를 수도 없이 작성해본 류지호다.

뭔가를 기획하는 것은 그에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반면에 고등학생이 기획서를 본다는 건 신기한 체험이다.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다.

왜 해야 하는지 모른다 것이 정확했다.

한수호의 표정이 자못 심각했다.


“이거 진짜 네가 한 거야?”

“병원에 입원하니까 시간이 남아돌더라고요. 방송제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걸 정리해 봤습니다.”


류지호의 대답에 은연중 기합이 들어갔다.

한수호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이거 컴퓨터로 만든 거지?”

“친구 집에 컴퓨터가 있어서...”

“컴퓨터가 집에 있어? 누구네 집에?”

“김준우라고... 사진부 친구가 좀 삽니다.”


좀 사는 걸로는 설명이 부족했지만.


“그렇다 치고. 컴퓨터를 할 줄 안다고? 네가?”

“같은 동네 사는 연하대 다니는 형한테 배웠어요. 그 형이 공대생인데... 형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내용이 어떤가를 보셔야죠. 제 기획이 어떠세요?”


컴퓨터를 다룰 줄 아는 것을 파고들면 골치가 아파진다.


“연하 공대 다니는 대학생이라면....”


연하대는 다른 계열은 몰라도 공대만큼은 알아주는 대학이다.

얼떨결에 둘러 댄 것이 먹힌 것 같다.

방송부원들은 류지호 혼자 했다고 믿지 않는 눈치다.

류지호는 마음을 다잡고, 강하게 나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서둘러 대화의 흐름을 바꿨다.


“문서는 전체적인 컨셉 위주로 요약해서 작성된 거예요. 그것만 봐서는 자세한 내용을 모를 수도 있어요. 제가 형들에게 내용을 따로 브리핑을 해도 될까요?”


뭔가 자신감에 차 있고, 전문가 냄새도 나고.

도깨비놀음도 아니고.

한수호가 2학년들을 돌아봤다.

기술 파트 이재호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비디오 촬영을 하고 그걸 빔프로젝터로 상영한다고?”

“이대로 하면 규모가 거의 신포인의 밤 공연하고 맞먹을 것 같은데?”

“우리 예산이 될까?”

“대학교 방송제도 이렇게는 안 하겠다.”

“이걸 하려면 우리만 가지고는 안 돼. 3학년 형들도 합류해야 해.”

“신방과 다니는 졸업생 선배들도 불러와야 할 걸.”


2학년들이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댔다.

한수호가 2학년들을 향해 손을 들었다.


“......”


그제야 모두 입을 닫았다.


“일단, 지호 네가 자세하게 설명 해봐. 듣고 나서 판단하겠어.”


류지호가 의자에서 일어서서 회의테이블 앞으로 나갔다.


“먼저 SPBS 제7회 방송제는 두 개의 큰 축을 혼합해 진행 합니다. 전통적인 오디오 위주의 공연과 비디오를 상영하는 영상 공연입니다.”


한수호가 기획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오디오 위주 공연은 여기 적혀있는 대로 원래 우리가 하던 라디오 드라마, 토크쇼, 음악 DJ 공연을 말하는 거지?”

“맞습니다. 비디오 공연은 방송제 무대에 스크린을 설치해 미리 촬영한 영상을 빔프로젝터로 쏴 상영합니다. 학교 소개, 방송부 소개는 주로 공연 초반부에 배치가 됩니다. 이것들을 영상으로 만들어 상영합니다. 영상 소스는 이미 방송실에 차고 넘치지 않습니까?”

“어떤 영상 소스?”


계속해서 한수호가 물었다,

류지호는 거침없이 말을 이어갔다.


“각종 학교 행사를 촬영한 VHS 테이프와 지난 방송제를 촬영한 테이프, 방송부 활동도 그런 테이프 속에 조금씩 찍혀있는 것으로 압니다. 방송부 소개는 따로 콘티를 짜서 재미있게 만들어도 됩니다. 그리고 축전도 비디오로 찍습니다. 유명한 동문 연예인 선배님, 평소 친하게 지내는 여학교 방송부, 교장, 교감 쌤 그 외에 학교 친구들 등등.”

“있는 자료를 짜깁기해서 편집해도 되고, 새로 촬영해도 된다?”

“학교 소개와 방송부 소개는 그렇게 해도 됩니다. 축전도 그냥 카메라만 가지고 가서 찍으면......”


류지호가 그게 뭐가 어렵냐는 표정으로 이재호를 바라봤다.

이재호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음악 관련 공연은 두 가지를 생각해 봤습니다. 오디오 공연은 몬데그린을 이용한 개그쇼이고, 비디오 공연은 뮤직비디오 상영입니다.”

“몬데그린이 뭐냐?”

“형들도 코미디언 박재민 알겁니다. 그 사람이 하는 음악 개그가 몬데그린입니다.”


몬데그린(Mondegreen)은 외국어 노래나 발음이 본인이 잘 아는 자신의 모국어처럼 들리는 일종의 착각현상을 말한다.


“‘Rivers of Babylon’에서 ‘By the rivers of Babylon’이란 가사가 있습니다. 그걸 얼핏 들으면 ‘다들 이불 개고 밥 먹어’ 이렇게 들립니다. 물론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게 안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미리 MC가 ‘다들 이불 개고 밥 먹어’ 라고 계속 주지 시켜줍니다. 그러면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들리게 되는 겁니다.”

“그거 되게 유치하던데.”


김석민이 중얼거렸다.


“유치한 게 의외로 잘 먹혀. 이런 공연에서는.”


오철규가 회의적인 얼굴로 물었다.


“뮤직비디오를 우리가 직접 만들자고?”

“만약 ‘촛불잔치’나 ‘하늘이여’ 같은 노래를 뮤직비디오로 만든다고 생각해 보세요. 재미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그것도 고등학생들이.”


류지호는 살짝 흥분된 어조로 물었다.

그런데 2학년들의 표정은 시큰둥하기만 했다.


“만약 ‘담배가게 아가씨’의 가사 내용을 스토리로 짜서 뮤직비디오를 찍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재미있을까요, 없을까요?”

“라디오 드라마하고 차원이 다른 문제잖아.”

“우리가 전문적인 TV 방송국에서 하는 작업을 할 수준은 아니야.”


‘답답한...이 아니고 이런 패기 없는 신포고 방송부를 봤나!‘


옳다구나 달려들 거라고 생각진 않았지만, 이렇게 반응이 미온적일지 몰랐다.


“형들 어렵지 않아요. 방송제에 오는 관객은 고등학생입니다. 우리가 무슨 영화제에 단편영화를 출품할 것도 아니고, 아마추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해내면 되는 거라고요.”


한수호가 류지호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속사포를 쏟아냈다.


“일단 그렇다고 치고, 배우는 편집은 상영은. 어떻게 해?”

“배우가 왜 없어. 수호 너하고 원석이가 있잖아.”


오철규가 손가락으로 한수호와 최원석을 차례로 가리켰다.


“저, 저요?”


최원석이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고, 한수호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하하하.


그 모습을 지켜본 방송부원들이 왁자지껄 웃음을 터트렸다.


“저기요.”


이철웅이 눈치를 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방송부원들의 시선이 이철웅에게 향했다.


“진명여고 방송부에 공다연이라고 있는데요.”

“철웅아, 거기까지! 사감은 끼워 넣지 말자.”


류지호가 마치 이철웅의 속마음을 꿰뚫어 본 것처럼 재빨리 말을 잘랐다.


“지호야, 하자. 아니 해야 돼!”

“그래 하자. 그러니까 더 이상 말하지 말고, 넌 가만히 있어.”

“공다연이 딱 이잖아. 여주인공!”

“니들끼리만 알지 말고 우리도 알아듣게 말해.”


한수호가 나서서 두 사람을 중재했다.

류지호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신포고 방송부원들은 대체로 순둥이들이다.

제멋대로인 공다연과 원만하게 지낼 것 같지 않다.


“진명여고 방송부에 공다연이란 여자애가 있는데 진짜 예뻐요. 뮤직 비디오 여자주인공으로 딱이에요. 딱!”


그때 최원석도 슬그머니 손을 들어 발언권을 요청했다.


“원석이 넌 또 왜?”

“형들 제가 진명여고 방송부하고 친하거든요. 수호형 라디오 드라마 있잖아요. 거기 여자 역할을 그쪽에 부탁하면 어떨까요?”

“오!”


갑자기 방송부원들의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우리 2학년들은 진성여고하고 인애여고 방송부랑도 친하잖아.”

“걔들도 방송제 하는데, 애들을 빼줄까?”

“안돼요!”


이철웅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서서 외쳤다.


“뭐가 안 되는데?”

“그게....요. 죄송합니다.”


무안해진 이철웅이 도로 의자에 앉았다.


“다 좋은데... 장비하고 편집은 어떻게 하냐? 예산이 만만치 않을 거 같은데.”


이재호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류지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신방과 선배님들하고 방송국에 계신 선배님들 있잖아요. 부탁하면 편집실하고 장비 지원 해주시지 않을까요? 그분들이 직접 관여하는 것도 아니니까 반칙도 아니고요.”


2학년들이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수호가 류지호의 어깨에 손을 두르고, 2학년들에게 물었다.


“이야기는 대충 다 들은 것 같은데, 어때 지호 아이디어가?”


방송부원들은 상상만 해도 짜릿하고 소름이 돋았다.

인천의 고등학교 방송부 사상 최초라는 타이틀.


“해보자!”

“재미있겠어!”

“한 달 밖에 안 남았어. 앞으로 바쁘게 움직여야겠다.”


이재호가 제일 먼저 찬성표를 던졌다.

약간의 우려가 있었지만 결국 만장일치로 결정되었다.


“지호야 그렇다는데?”


한수호가 류지호를 돌아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류지호가 방송부원들을 향해 허리를 굽혀 고마움을 표했다.


“지호 네가 올해는 내 부사수다.”

“형 옆에 붙어서 따까리 하라고요?”

“AD야.”

“에이, 상은이가 있는데, 전 기술감독 재호형 서브나 볼 랍니다.”

“하하하. 아무려면 어떠냐? 우리가 다 해먹자.”


한수호가 호기를 부렸다.

2학년들이 삼삼오오 모여 기획안을 놓고 토론하는 사이 류지호는 박상은에게 다가갔다.


“미안하다. 부장인 네가 있는데 내가 좀 나댔어.”

“괜찮아.”

“다음부터는 너와 먼저 상의할게.”


박상은이 대꾸 없이 희미하게 웃음을 보였다.

방송제는 2학년이 주도한다.

우선은 그들이 류지호가 기억하고 있는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먼저다.

방송제를 풍성하게 만드는 것은 그 다음 문제다.


❉ ❉ ❉


신포고 방송부원들의 행보가 빨라졌다.

국장이자 방송제 PD역할을 수행하는 한수호가 가장 바빴다.

한수호는 열심히 졸업생 선배들을 찾아다니며 장비와 편집을 부탁했다.

아나운서 파트장은 오철규다.

그는 라디오 드라마에 출연해 줄 여학교 방송부를 섭외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1학년이라고 놀지 않았다.


“여기 대머리 국사선생 바람에 머리 날린다. 킵 해!”

“저 뒤에 사회선생 자빠지는데?”

“그것도 킵 해놔.”


1학년들은 방송실에 보관 중인 VHS 테이프를 하나하나 확인했다.

학교 소개와 방송부 소개에 쓰일 영상 소스를 추려내기 위함이다.


“Won't you take me to funky town.”

“연탄불 꺼졌을 땐 번개탄?”

“크크. 펑키 타운이 번개탄으로 들리기는 하네요.”


몬데그린 음악쇼를 위한 노래 선별도 진행됐다.

아나운서 파트가 저마다 일로 바쁜 가운데 기술 파트 역시 분주했다.

이재호가 수위실에서 열쇠를 받아와 강당 문을 열었다.


끼이익.


신포고 대강당은 300평이 조금 넘는 크기다.

의자 없이 입석으로 채운다면 최대 1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크기다.

강당 바닥에는 마루가 깔려있다.

류지호가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갔다.

무대 위 천장에는 각종 조명기구를 설치 고정할 수 있는 고정형 라이트 바텐(Light Batten)이 설치되어 있었다.

깡통 모양의 파 조명기(Par Light)와 스포트라이트(Spotlight)가 몇 개 달려있을 뿐.

허술하고 조악했다.

참고로 파 조명기는 빛이 강하고 기기의 가격이 저렴하며 가볍기까지 해서 많이 쓰이는 조명기다.

스포트라이트는 대상물을 강조하기 위해 쓰이는 조명기이다.

바텐을 올려다보던 류지호가 고개를 돌려 강당을 한 눈에 담았다.


“작년에 방송제에 몇 명이 왔어요?”


바로 옆에 서있던 이재호가 대답했다.


“한 200명 정도?”


많은 숫자가 아니다.

여학교 방송제는 저 숫자의 두 배 이상을 불러 모은다.


“재학생 포함인가요?”

“응.”

“물론 교실에서 의자를 가져다 놓았겠죠?”

“1학년 다섯 명이 그것 나르느라 죽는 줄 알았다.”


이재호가 치를 떨었다.


“저녁 신포인의 밤 공연은 의자 빼고 마룻바닥에 앉죠?”

“그래야 많은 사람이 볼 수 있으니까.”


펄쩍.


류지호가 무대 위에서 강당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이재호와 박상은 역시 얼른 뒤따랐다.


‘형들이 몇 인치 스크린을 빌려올지 모르지만, 200인치 이상이 아니면 객석에서 보이지도 않겠네.’


류지호가 턱을 쓰다듬으며 머리를 굴렸다.


“형, 300명이라고 가정하면 의자가 어디까지 배치될까요?”


이재호가 저 만치 걸어가 알려왔다.


“한.... 이만큼?”


류지호가 이재호의 곁으로 다가와 나란히 섰다.

미간을 찌푸리며 머리를 긁적거린 류지호가 중얼거렸다.


“하도 오래되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류지호만 졸졸 따라다니던 박상은이 물었다.


“뭐가 가물가물 한데?”

“아니야.”


류지호의 기억에는 6회와 7회 방송제에 크게 감명 받은 졸업생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이 당시 최고 성능의 빔프로젝터를 기증해 줬다.

류지호 기수는 그 혜택을 받아 좀 더 화려한 방송제를 열 수 있었다.


“뭔데 얘기해봐.”

“여기서 무대 위 화면이 보이려면 스크린 크기가 얼마나 되어야할까?”

“왜?”

“시청각실에 있는 스크린하고 빔프로젝터로는 어림도 없을 것 같아서.”


신포고 시청각실에 설치되어 있는 스크린은 130인치 정도 된다.

이것조차 이 시기에는 대기업 회의실에서나 볼 수 있는 스크린 사이즈다.

그리고 빔프로젝터 역시 아직 LCD가 나오기 전이라 암막을 친 어두운 환경일지라도 화질을 기대하기 힘들다.

시청각실에서 방송제를 한다면 최대한 관객을 채운다고 해도 150명 안팎일 터.


‘역사적인 첫 방송제인데, 시청각실은 좀 아니지.’


완벽만 추구했다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때론 모험임을 알면서도 진행해야 할 때도 있다.

다만 실패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의 일부라고 인식 될 때에만.


“쫄리냐?”


이재호가 짓궂은 표정으로 진지하기만 한 류지호에게 물었다.


“별 거 아닌 줄 알았지?”


이재호가 짐짓 장난스런 어조로 다시 한 번 물었다.

류지호가 대답 없이 강당 음향실로 향했다.

한창 조감독으로 날릴 때 촬영현장에 5대 카메라 돌아가고 사방에서 폭탄 터지고 액션배우와 엑스트라 총 500명이 뛰어다니고 그런 난장판에서 무전기 하나로 통제하던 게 류지호다.

고등학생 200명 앉혀놓고 하는 이벤트에 긴장할 이유가 없다.


“상은아... 왠지 저 놈이 내 선배 같지 않냐?”

“저는 이벤트업체 사람인 줄 알았어요.”


학업 성적이 오르고, 꾸준한 수련으로 태권도도 잘되고, 가족이 모두 화목하고, 선행으로 경찰서장 표창장도 받고.

그런 것들이 쌓이면서 자신감을 가지게 됐다.

정작 류지호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긍정적인 에너지가 자연스럽게 외부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 ❉ ❉


방송실이 3학년들까지 합세해 북적거렸다.


“잠깐 주목!”


방송부원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한수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뮤직비디오 후보에 두곡이 경합중입니다.”


한수호가 칠판에 ‘그녀에게 전해주오’와 ‘담배가게 아가씨’를 썼다.


“두 곡 중 하나를 결정해야 합니다. 모두 모인 김에 거수로 결정하려고 합니다.”


잠시 방송부원들이 고민에 빠졌다.


“먼저 ‘그녀에게 전해줘’ 찬성하는 사람은 손들어 주세요.”


류지호를 제외한 1학년 전원이 손을 들었다.


“다음은 담배가게 아가씨.”


2학년과 3학년들이 모두 손을 들었다.

노래도 흥겹고 가사도 재밌기 때문에 선택은 기정사실이었다.


“압도적으로 ‘담배가게 아가씨‘가 결정되었습니다.”


한수호가 탕! 탕! 칠판을 두 번 두드렸다.

뮤직비디오는 3학년들이 찍기로 했다.

류지호의 기억에 비디오 상영 방송제는 지금의 3학년들이 주도했었다.

하재근의 주도로 뮤직비디오 논의가 시작되었다.

방송부의 역사가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이미지 형식이 아니라 스토리 중심으로 한다고?”


류지호의 방송제 기획안에는 각 프로그램의 콘셉트까지 자세히 적혀있었다.


“드라마타이즈(dramatize) 기법을 생각해 봤어요.”

“......?”


3학년들이 설명해보란 듯이 류지호를 빤히 쳐다봤다.

드라마타이즈(dramatize) 뮤직비디오는 드라마처럼 스토리가 있고, 남녀 주인공이 나오는 스토리 형식의 뮤직비디오다.

미국 MTV의 뮤직 비디오는 노래의 느낌이나 표현을 CF처럼 이미지 형식으로 꾸몄다.

아티스트의 이미지를 극대화해서 보여주고 비주얼을 강조한 뮤직 비디오가 많았다.

현재 한국에서는 가수가 노래하는 모습을 중심으로 야외에서 촬영해 편집한 영상을 방송에서 보여주는 것이 뮤직비디오의 전부였다.

1998년 모 가수의 뮤직 비디오가 가수의 얼굴을 내세우지 않고, 톱스타 주연의 드라마 형식으로 만들어 대박을 터트린 이후로 드라마타이즈 뮤직 비디오가 한국 뮤직 비디오의 대세를 이루게 된다.

아직은 드라마타이즈란 용어 자체가 낯설 시기다.


“그럼 배우가 있어야겠는데?”

“수호가 하면 되겠네.”

“저는 할 일이 많아서 안 해요. 강요하지 마세요.”


반강제적으로 1학년 최원석이 후보에 올랐다.

이철웅이 결의의 찬 표정으로 입후보를 했고, 3학년까지 뛰어들며 불꽃 튀기는 캐스팅 투표가 벌어졌다.

비밀투표 결과 최원석이 1,2학년의 압도적인 지지로 결정되었다.

의외로 3학년 선배가 5표를 얻어 1표를 획득한 이철웅을 민망하게 만들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한수호의 곁으로 류지호가 다가왔다.


“형 말은 틀렸네요.”

“무슨 말?”

“올해는 형들이 주인공이고 내년에는 저희가 주인공이라고 했었잖아요. 이번 방송제는 모두가 주인공일 것 같은데요?”


한수호가 열띤 방송부 분위기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주 토요일에 진명여고 방송부장 만나는 거 알지?”

“예.”

“너도 나와. 2시, 주안, 촛불커피숍.”

“....저는 왜요?”

“나오라면 나와 자샤.”


작가의말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리메이크지만 이미 읽어보신 분들도 재밌게 읽으실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8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Mr. 할리우드!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9 필요한 초능력은 재력(財力). (3) +14 22.01.04 11,453 236 24쪽
28 필요한 초능력은 재력(財力). (2) +11 22.01.03 11,434 233 21쪽
27 필요한 초능력은 재력(財力). (1) +8 22.01.03 11,880 233 20쪽
26 블루오션인 건 확실해! +8 22.01.02 11,982 246 27쪽
25 오늘 넌 영화감독 같았어! (4) +12 22.01.01 11,501 256 20쪽
24 오늘 넌 영화감독 같았어! (3) +11 22.01.01 11,506 246 22쪽
23 오늘 넌 영화감독 같았어! (2) +8 21.12.31 11,781 233 16쪽
» 오늘 넌 영화감독 같았어! (1) +8 21.12.31 12,552 242 24쪽
21 우리는 가족입니다! (3) +13 21.12.30 12,443 258 24쪽
20 우리는 가족입니다! (2) +12 21.12.30 12,477 260 20쪽
19 우리는 가족입니다! (1) +11 21.12.29 13,242 238 21쪽
18 어떤 녀석인지 궁금해지네... (4) +10 21.12.29 13,219 262 23쪽
17 어떤 녀석인지 궁금해지네... (3) +13 21.12.28 13,187 265 16쪽
16 어떤 녀석인지 궁금해지네... (2) +8 21.12.28 13,582 244 18쪽
15 어떤 녀석인지 궁금해지네... (1) +6 21.12.27 14,120 273 20쪽
14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3) +7 21.12.27 14,322 280 22쪽
13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2) +11 21.12.26 14,592 277 21쪽
12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1) +12 21.12.25 15,141 266 22쪽
11 돈을 왕창 벌자! +13 21.12.25 15,578 272 20쪽
10 티끌모아 태산이 되는 것처럼... (2) +9 21.12.24 15,275 275 20쪽
9 티끌모아 태산이 되는 것처럼... (1) +8 21.12.24 15,879 260 21쪽
8 Goodfellas. (4) +10 21.12.23 16,145 279 20쪽
7 Goodfellas. (3) +13 21.12.23 16,669 262 20쪽
6 Goodfellas. (2) +12 21.12.22 17,261 292 19쪽
5 Goodfellas. (1) +20 21.12.22 18,504 295 21쪽
4 Again 1987. (3) +25 21.12.21 19,260 328 20쪽
3 Again 1987. (2) +11 21.12.21 22,046 337 20쪽
2 Again 1987. (1) +20 21.12.20 27,773 398 21쪽
1 프롤로그. +49 21.12.20 40,616 462 14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