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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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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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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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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쪽

오늘 넌 영화감독 같았어! (4)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동네 불량배들과 최원석이 실랑이 하는 장면에서 하재근이 무리해서 액션씬을 넣었다.


“NG!"

"다시!“


하재근의 입에서 연신 NG와 다시라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냥 놀면서 찍으면 된다며!”


고우찬이 지친 얼굴로 류지호에게 짜증을 부렸다.

류지호 역시 답답함을 느끼던 참이다.

한수호가 슬금슬금 류지호의 곁으로 다가왔다.


“지호야.”

“예?”

“재근이형이 방사룡 영화 찍고 싶은가 보다.”

“그러게요.”

“네가 가서 좀 말려봐.”

“제가요?”

“재근이 형이 너를 많이 의지하는 것 같더라. 네가 나서봐.”

“후배가 나대는 게 좋은 모습은 아니죠.”

“오전에는 그런 거 안 따지고 잘만 날라 다녔잖아.”


하하.

류지호가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이러다가 방학 끝날 때까지 뮤직비디오만 찍게 생겼어.”


한수호가 류지호의 등을 떠밀었다.


“재근이형, 잠깐 쉬었다 하시죠?”

“10분만 휴식!”


땅바닥에 털썩 앉는 하재근의 옆에 류지호가 나란히 앉았다.


“할 말 있냐?”


류지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액션장면을 끊지 않고 한 번에 길게 찍을 때 아마 프로 스턴트맨들도 합을 맞추는 데만도 상당히 많은 시간을 들일 걸요. 그렇게 준비하고 막상 찍다보면 가짜 티가 날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런 어색함을 줄이기 위해 핸드헬드 촬영을 많이 한다고 해요. 들고 찍기를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쉐이키 캠 기법이 들어가니까 저절로 트릭이 써지는 거겠죠.”

“넌 그런 건 다 어디서 들었냐?”

“스크린을 창간호부터 죽 다 읽었어요. 배다리에서 비디오촬영 가이드북도 사서 읽고.”


류지호는 당황하지 않고, 시침 뚝 떼고 대답했다.


“책보고 잡지보고 할 수 있으면 난 왜 헤매는데?”

“책임감 때문 아닐까요?”

“넌 오전에 프로처럼 이것저것 잘만 하더라?”

“형은 연출자고 전 구경하면서 잡일이나 하는 입장이고.... 원래 구경꾼이 훈수를 잘 두잖아요.”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그건.”

“아무튼 훈수 두는 입장에서 보니까 형이 욕심만 조금 줄이면 술술 잘 풀릴 거라 생각해요.”

“내가 너무 욕심을 부렸나?”

“우리는 생초보에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안 되는 건 포기하라는 말이냐?”

“포기가 아니라 할 수 있는 것을 하자는 거죠.”

“자식이 말장난은...”

“충무로에서도 방사룡처럼 못 찍을 걸요?”

“넌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

“커트를 나눠야죠. 때리는 모습 따로 찍고, 맞는 장면 따로 찍어서 졸업생 선배들한테 가져가면 그럴 듯하게 붙여주실 걸요? 그게 편집의 기본일 겁니다, 아마도....”

“그것도 스크린에서 봤냐?”

“예. 스크린!”


1984년 3월 창간한 <스크린>은 2010년까지 발행한 영화 잡지다.

한국영화는 재미없어서 안 보는 시절, 대중적인 영화와 충무로 영화계의 현안을 다루고 영화 스타들의 브로마이드 잡지 역할까지 하던 영화 전문 잡지다.


“지호 네가 카메라 한 번 잡아볼래?”

“제가요?”

“밑져봐야 본전이라고. 스크린에서 보고 배운 거 한 번 실전에서 써먹어봐라.”


하재근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하며 류지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형들이 싫어할 텐데요?”

“내가 연출인데 누가 뭐라고 해!”


3학년들은 기분이 상할 만도 했지만, 오히려 잘 된 일이라 생각 했다.

오전 내내 류지호가 보여준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자신들도 복잡하고 머리가 혼란스러운데, 류지호는 알아서 척척 현장을 진행했다.

그들로서는 욕심내고 싶고 더 잘하고 싶다.

하지만 어쩌랴 그들은 학력고사를 준비해야 하는 걸.

한정 없이 후배들 방송제에 매달려 있을 수는 없다.

따라서 누가 나서든 촬영을 마무리 할 수만 있다면 쌍수 들고 환영할 상황이다.


“다시 갈게요!”


촬영의 핵심이 류지호로 바뀌었다.

류지호는 촬영을 해야 했고, 무모한 콘티를 수정해야 했고, 조명 반사판 위치를 지시해야 했고, 연기에 대한 디렉션을 줘야 했다.

류지호의 지시에 따라 방송부원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류지호는 일인 사역을 소화했다.

그만큼 고생도 심했다.


“짧게짧게 끊어서 갈 계획이에요. 때리는 모습 먼저 찍고, 리액션 찍어요. 어려울 거 없어요. 긴장 마시고 시키는 대로만 하세요.”


액션씬의 가장 기본적인 편집은 먼저 때리는 사람을 찍고 나서, 맞은 다음 고통 받는 리액션을 찍어서 이어 붙이기만 하면 실제 맞지 않아도 맞은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때 주의할 점은 맞는 모습을 더욱 크고 과장되게 찍어야 한다는 것이다.

보통 때리는 모습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맞은 모습을 조금 더 길게 보여준다.

이런 리액션의 모습을 보면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바로 ‘할리우드 액션‘이다.

크고 과장된 행동을 하는 것을 할리우드 액션이라 말한다.

액션연출과 액션 편집의 기본이 바로 그 할리우드 액션이다.

여담으로 <본 : 잃어버린 얼굴>(2002)이 기존의 할리우드 액션이라는 교과서적인 액션연출을 뒤집는 전환점이 된 영화 가운데에 한편이다.

그것까지 끌어와서 응용할 건 아니었지만.

잠깐 고민해보긴 했다.


“자, 슛 갑시다!”


류지호는 배우들에게 능숙하게 디렉션을 주고, 촬영장을 장악했다.


“......!”


공다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런 류지호를 지켜봤다.

그녀가 보기에 지금까지의 촬영장은 고등학생 방송부들의 놀이터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못난이(?)가 팔을 걷어붙이자 어딘지 촬영과정이 정돈이 된 것 같다.

이 촬영현장에서 가장 빛나 보이는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니다.

바로 류지호라는 돌아이다.

공다연이 류지호에게 다가갔다.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고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못난이, 너 단편영화도 찍어봤어?

“아니.“

“근데 영화판에서 쓰는 말은 어떻게 다 알아?”


너무 몰입했을 때, 자신도 모르게 디렉션을 주며 충무로 은어를 섞어 썼던 모양이다.


“충무로에서 쓰는 말이란 건 어떻게 알아?”


류지호가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국민학교 때 CF 찍어봤거든.”


공다연이 우쭐대며 대답했다.


“그냥 어른들 하시는 말씀 주워들었어. 내가 한 말은 노가다판에서도 다 쓰는 말.... 스크린에서도 봤고.”


공다연은 믿지 않는 눈치다.

내심 뜨끔한 류지호가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넌 아주 잘하고 있어. 나중에 연예인으로 잘나가면 모른 척 하지마라.”


류지호는 반쯤 아부가 섞인 말을 하며 웃었다.


“흥!“


공다연이 으스대듯 코웃음을 쳤다.


“너는 이런데서 썩기에는 아까운 인재야.”

“이제 알았어?”


류지호가 무의식적으로 올라가던 손을 가까스로 멈췄다.

고양이처럼 도도한 척 하는 공다연이 귀엽게 느껴져 머리를 쓰다듬을 뻔 했던 것이다.


# 가게 안을 기웃거리고, 물건을 사는 척하며 다연을 힐끔거린다.

철웅이 용기를 내서 다연에게 초콜릿을 내민다.

다연은 초콜릿을 철웅에 손에 쥐어 주며 손짓으로 나가라는 시늉을 한다.


“컷!”


이철웅의 분량이 모두 끝났다.

공다연에게 잘 보이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썼다.

소용없다는 것을 안다.

짝사랑치고는 심했다.

류지호가 알았다면 당장 스토킹을 멈추라고 화를 냈을지도 몰랐다.

이철웅은 여러 경로로 그녀의 집 전화번호를 알아내려 애썼다. 그녀가 자주 다니는 분식집과 커피숍을 들락거리기도 했다.

얼마 전에는 무모함과 순수함으로 무장하고 무작정 진명여고로 찾아갔다.

하교하는 공다연을 막아서고 사귀자고 고백도 했다.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공다연 입에서 ‘꺼져‘라는 말이 튀어나오진 않았다.

하교길이라 진명여고생들이 많기도 하거니와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공다연은 타이르듯 좋게 말했다.

그녀는 많은 사람을 만나보고 사귈 사람을 결정해야 후회 없는 선택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거절당한 이철웅은 속으로 혹독한 상처를 입었다.

그 상처가 너무나 큰 나머지 이철웅은 자포자기의 심정에 사로잡혔고, 앞으로는 이런 상처는 절대 사절이라 다짐했다.

‘포기하자’ ‘잊자’를 외치는 이 마당에 공다연을 볼 때마다 그 알 수 없는 미련의 찌꺼기는 왜 불쑥불쑥 고개를 치켜드는 것인지.

이철웅은 짜증이 절로 났다.


‘아, 인생 진짜 뭣 같다!’


누가 그랬다.

짝사랑도 사랑이라고.


‘사랑 좋아 하신다. 고문이다. 고문!’


짝사랑은 마치 등에 칼을 맞은 상황과 다르지 않았다.

혼자서는 도저히 칼을 뺄 수도 없는데, 죽을 만큼 아프고 고통스럽다.

사랑은 서로를 나눈다.

시간을 서로 나누고, 감정을 나눈다.

하지만 이놈의 짝사랑은 일방적으로 한쪽만 내주는 것이다.

그래서 외롭고 슬프다.


“저 놈은 왜 죽상을 하고 앉아있어?”


고우찬이 땅 꺼져라 한숨을 내쉬는 이철웅을 가리키며 물었다.


“철웅이는 어른이 되가는 과정을 겪고 있어. 그렇게만 알고 있어.”

“미친놈. 또 어른 흉내 내고 지랄이야.”


고우찬이 류지호에게 한소리를 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세상의 모든 근심을 짊어지고 있는 얼굴의 이철웅에게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철웅이 고개를 들었다.

웬 고릴라가 한 마리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철웅이 기운 없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혹시 담배 피냐?”

“응.”


고우찬이 이철웅과 함께 골목 쪽으로 걸어갔다.

고우찬은 안 그래도 점심에 먹은 짜장면이 더부룩했던 참이다.

담배 한 대 태우고 오면 왠지 기분이 상쾌해질 것 같았다.


“역시 식후땡은 빼먹으면 섭섭해. 안 그냐?”

“심란하니까, 말 시키지 마.”


신포고 방송부 역사 상 첫 뮤직비디오 촬영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잠시 만요! 편집밥으로 쓸 컷 몇 개만 더 찍고요.”


류지호가 촬영을 마무리하려는 3학년들을 막아섰다.


“힘들어! 진짜 죽을 것 같아! 그만 찍어!”


고우찬이 류지호에게 버럭 화를 토해냈다.


“혹시 모르니까 몇 커트만 더 찍고. 자, 카메라 보고 주먹을 휘둘러봐.”


고우찬은 진심으로 류지호를 한 대 치려는 듯 주먹을 휘둘렀다.

류지호를 향한 감정이 잔뜩 담겨있어서 그런지, 리얼한 표정이 나왔다.


“오케이!“


노을이 지는 배경으로 최원석이 걸어가다가 두 손을 번쩍 치켜드는 장면을 끝으로 모든 촬영이 끝이 났다.


“수고하셨습니다!”

“고생했다.”


고생한 모든 방송부 촬영팀이 서로를 격려하고, 노고를 치하했다.


“내가 바라시 하는 거 도와줄게.”

“바라시가 뭔 줄 알아?”


영화판에서는 촬영이 끝난 후에 짐을 챙기고 장비를 챙길 때 그리고 세트를 허물 때 ‘바라시’ 한다는 표현을 쓴다.


“현장 정리하고 짐 챙기라는 말이잖아.”


류지호가 고우찬을 희한한 놈 본다는 듯 쳐다봤다.


“시마이, 바라시 다 막노동판에서 쓰는 말이야. 우리 아빠가 막노동 짬밥이 몇 년인데 아들이 그런 것도 모를까봐.”

“그러냐....?”


일본식 표현의 잔재는 사회 곳곳에 많이 남아있다.

막노동판, 뒷골목 같은 험한 곳뿐만 아니라, 예술계(영화·방송·출판)에도 여전히 일본식 표현이 널리 쓰이고, 심지어 언론계에서도 버젓이 일본어로 된 은어들이 사용되고 있다.

류지호는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충무로에서 사용하는 일본식 표현을 우리말 표현으로 바꾸는 시기가 언제인지 기억을 더듬으며 오늘 촬영본(VHS 테이프)을 최종 확인했다.

그 사이 촬영팀이 쓰레기를 줍고 장비를 정리한 후, 떠날 준비를 마쳤다.

태양도 완전히 저물었다.

모두가 저녁식사 겸 뒤풀이를 위해 중국집으로 몰려갔다.

중국집 입구에서 공다연이 류지호를 붙잡았다.


“다음 주에 뭐해? 바빠?“

“방송제 준비하겠지.“


공다연의 얼굴에 언뜻 아쉬움이 스쳐지나갔다.

금방 본래의 표정을 되찾았다.

자존심을 굽히고 데이트 신청을 했다.

거절당했다.

그녀로서는 무척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절대 내색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녀가 눈초리를 치켜뜨고 류지호를 매섭게 노려봤다.

류지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밥 먹고 가.“

“됐어!”


공다연이 분한 얼굴로 쳐다보다가 씩씩거리며 돌아섰다.


“류지호 너 진짜 재수 없어! 두고 봐!”


공다연이 톡 쏘아붙이고, 멀어졌다.

중국집 입구 한편에 그 광경을 모두 지켜본 이철웅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씨발!”


기어코 이철웅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남녀 간의 연애라는 건 늘 더 사랑하는 쪽이 약자다.

연애는커녕 짝사랑하는 입장에서는 약자조차 되지 못한다.

아무 존재도 아닌 것이다.

이젠 마음을 접어야 할 것 같다.

그때 옆에서 고우찬의 목소리가 들렸다.


“철웅아.”

“아프냐? 나도 아프다.”


이철웅은 자신을 놀리는 것으로 알고 와락 인상을 구겼다.


“병이야 병. 상사병. 그치?”

“......!”

“그 병을 낫게 할 방법은 두 가지래.”

“뭔데?”

“근데 존나 어려워. 다연이가 널 좋아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다연이보다 더 예쁘고 착한 여자가 널 좋아하게 만드는 거야.”

“절대로 나을 수 없겠네. 그 병이란 게.”


이철웅이 기운 없이 중얼거렸다.

그 반응에 고우찬이 당황했다.

이 말을 듣고 이철웅이 좀 더 사내답게 의욕을 불태울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 말은 그냥 포기한다는 거야?”

“다연이는 그 자체로 완벽한데 어디 가서 그 애보다 예쁜 여자를 찾겠어.”

“그, 그러냐?”


고우찬은 순간 어이가 없어 말을 더듬었다.


“씨발, 내가 상은이나 원석이처럼 지금보다 키가 10센치만 더 컸어도...”


고우찬은 자신이 이철웅을 위로할 처지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네가 어때서? 넌 저기 지호보다 튼튼하고 운동도 잘하잖아. 힘내 인마!”


고우찬이 위로인지 염장인지 모를 말을 남겼다.


“여기 소주도 몇 병 주세요! 저기 남학생들은 고삼이에요. 애기들은 안 마셔요.”


황혜경이 메뉴판을 건네는 종업원에게 말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중국요리가 테이블 위에 차려졌다.

2,3학년 선배들의 앞으로 소주가 몇 병 놓였다.


“오늘 모두 고생했다. SPBS 방송제를 위하여!”

“위하여!”

“난 JBS를 위하여!”


뒤풀이에 참석한 이들 중 술을 마실 줄 아는 이들이 일제히 소주를 목 뒤로 넘겼다.

류지호는 소주 대신 사이다를 마셨다.

모두가 음식에 코를 박고 식사를 시작했다.

류지호가 자신의 짜장면을 고우찬에게 밀어줬다.

하재근 역시 자신의 짬뽕을 양보했다.

파김치가 된 두 사람은 입맛이 없었다.


“땡큐! 땡큐!”


고우찬이 건성으로 고마움을 표하고 짜장면을 흡입했다.

류지호와 하재근만 아니라 다른 방송부원들도 사정은 마찬가지.

평소 같았으면 무서운 속도로 음식을 먹어치웠어야 할 이들이 젓가락을 깨작거리기만 했다.

그만큼 오늘 하루 힘들었다는 걸 알려준다.


“하루에 찍으려고 한 건 확실히 무리였어요. 내년에는 출연자를 줄이든 콘티를 콤팩트하게 가져가든 해야겠어요.”

“오늘 완전히 날아다니더라.”

“나르긴요. 제가 하루 종일 뭘 했는지 기억도 안 나요.”


하재근이 고생한 후배들과 친구들을 둘러봤다.


“네가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한 거, 우리 모두 안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죄송해요. 제가 좀 나댔네요.....”


류지호가 미안한 마음에 말꼬리를 흐렸다.


“네가 잘못했다는 거 아니니까 미안해 할 거 없어. 나라고 안 지쳤겠나? 중간중간 네가 다 알아서 진행한 덕분에 그나마 버틸 만 했어.”

“....”

“내가 방송부하면서 오늘만큼 재미있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아.”

“방송제 당일이 되면 더 뿌듯할 거예요.”

“흐흐흐.”


하재근이 생각만 해도 기대가 된다는 듯 웃었다.


“이론과 실전은 확실히 달라. 너는 이런 거 해본 적 있었냐? 스크린 봤다는 말은 안 믿으니까 하지 말고.”

“비디오촬영 가이드나 사진 관련 뭐 그런 잡다한 책보고 공부했어요. 중학교 때 비디오도 많이 보고요.”

“그게 영화 많이 보고, 책보고 공부한다고 되는 거냐?”

“제가 영문판 잡지로 영어 공부하는 거 형도 알잖아요. 청계천 헌책방에서 촬영감독매뉴얼을 우연히 구해서...”

“그런 게 있었어?”

“A.S.C에서 발간한.... 미국촬영감독협회에서 출간한 매뉴얼북을 우연히 구해서....”

“......?”

“암튼 저도 잘 모르겠어요. 좀 흥분되고 정신이 없는 게... 귀신이라도 들렸나....?“


류지호가 농감조로 얼버무렸다.

대답하기 싫어하는 걸 억지로 추궁할 수도 없는 일이라, 하재근이 화제를 돌렸다.


“너도 방송 쪽으로 나갈 거냐?”

“글쎄요.”


류지호 역시 오늘 하루 정말 재밌었다.

촬영현장에서의 짜릿함과 성취감.

비록 몸은 고되고, 정신적으로 피곤해서 당장에 누워버리고 싶었지만, 상상한 그림을 실제 카메라로 구현하는 과정은 시간이 어떻게 흐른 줄도 모르게 빠져들 만큼 짜릿함을 선사했다.

겨우 VHS 카메라 가지고 무얼 얼마나 할까마는.

중요한 것은 과정에서 재미를 느꼈다는 거다.

거창하게 초심을 찾았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결과가 아닌 과정 속에서 희열과 만족감이 충만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과정을 즐기지 못하면서 성공의 결실만을 바라다가 망했던 한 번의 인생....


“넌 당장 단편영화도 찍을 수 있겠더라.”

“영화는.... 어림도 없을걸요. 아마도.....”


하재근이 생각하는 단편영화와 류지호가 생각하는 단편영화 사이의 간극은 어마어마했다.

때문에 류지호 입장에서는 자신만만한 대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영화과가 실기가 있기는 하지만 한영대학은 학력고사 성적으로 뽑아.”

“진로는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자기가 가고 싶은 학과나 대학을 가야지 선생이 써주는 원서대로 대학에 가는 건 아닌 것 같아. 네가 방송제 준비하면서 촬영한 비디오테이프를 입시실기로 제출해도 될 걸.”


남들이 류지호를 위해 계획해 놓은 것이 있을 리가 없다.

대학에 입학해서 졸업 후 좋은 직장에 취직해 회사에서 나가라고 할 때까지 일만 하다가 때가 되면 은퇴하는 삶.

그것이 사회가 구성해 놓은 일반적인 삶의 루트다.

그렇듯 인생을 스스로 설계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계획에 빠져들 가능성이 크다.

고삼이 되려면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다.

그렇다고 마냥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휩쓸려가서는 곤란하다.


“연극영화과나 신방과는... 고민 좀 해봐야겠어요.”

“아직 1학년이니까.“

“....예.”

“인마, 넌 오늘 진짜 영화감독 같았어.”


하재근의 농담 섞인 말에 류지호는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 사이다 컵만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빠질 뿐.

비록 삼류판에 몸담았던 감독이었지만, 단편, 옴니버스, 상업장편, 19금 등 여러 편의 연출경험이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삼류판이라고 해서 건성으로 작업하지 않았다.

열정적으로 작업에 임했다.

기억 속의 그때와 오늘의 차이점은 하나다.

즐거웠는가.

고통스러웠는가.

전교 100위 안에 들어간 성적표를 부모님께 보여드렸을 때보다 훨씬 행복한 기분을 느꼈다.

더한 설명이 필요 없다.

그것이 진실이다.


‘영화라... 마약이지, 마약!’


충무로에 발을 담그면 우스갯소리로 마약에 중독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중독성이 강해 영화판을 쉽게 벗어나기 힘들다는 소리다.

고우찬의 투덜거림이 류지호의 상념을 깨웠다.


“오늘 진짜 힘들었어. 아버지 따라 막노동하는 것 보다.”

“고생했어.”

“나중에 먹을 거나 크게 한턱 쏴. 오늘 진짜 개고생은 실컷 했으니까.“

“고기 사 줄게.”

“남아일언!”

“중천금!”

“무르기 없기다?”

“내가 언제 말한 거 안 지키는 거 봤어?”


인천의 한 고등학교 방송부.

그들이 가을 축제에서 선보일 방송제를 위한 준비과정.

나는 방법을 이미 깨우치고 있는 류지호다.

하지만 이 어린 새의 작은 날갯짓은 이제 막 시작됐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올 한 해 즐거움과 행복함과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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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우리는 가족입니다! (3) +13 21.12.30 12,443 258 24쪽
20 우리는 가족입니다! (2) +12 21.12.30 12,476 260 20쪽
19 우리는 가족입니다! (1) +11 21.12.29 13,242 238 21쪽
18 어떤 녀석인지 궁금해지네... (4) +10 21.12.29 13,219 262 23쪽
17 어떤 녀석인지 궁금해지네... (3) +13 21.12.28 13,187 265 16쪽
16 어떤 녀석인지 궁금해지네... (2) +8 21.12.28 13,582 244 18쪽
15 어떤 녀석인지 궁금해지네... (1) +6 21.12.27 14,120 273 20쪽
14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3) +7 21.12.27 14,322 280 22쪽
13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2) +11 21.12.26 14,592 277 21쪽
12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1) +12 21.12.25 15,140 266 22쪽
11 돈을 왕창 벌자! +13 21.12.25 15,578 272 20쪽
10 티끌모아 태산이 되는 것처럼... (2) +9 21.12.24 15,274 275 20쪽
9 티끌모아 태산이 되는 것처럼... (1) +8 21.12.24 15,879 260 21쪽
8 Goodfellas. (4) +10 21.12.23 16,145 279 20쪽
7 Goodfellas. (3) +13 21.12.23 16,669 262 20쪽
6 Goodfellas. (2) +12 21.12.22 17,261 292 19쪽
5 Goodfellas. (1) +20 21.12.22 18,503 295 21쪽
4 Again 1987. (3) +25 21.12.21 19,260 328 20쪽
3 Again 1987. (2) +11 21.12.21 22,046 337 20쪽
2 Again 1987. (1) +20 21.12.20 27,772 398 21쪽
1 프롤로그. +49 21.12.20 40,615 462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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