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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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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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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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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1쪽

티끌모아 태산이 되는 것처럼... (1)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류지호는 아버지가 출근하기 전에 성적표를 보여드렸다.

전교 10등 안에 드는 월등한 성적은 아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할 당시 등수였던 120등 언저리를 첫 시험에서 유지했다.

그것만으로도 부모님은 무척 좋아하셨다.

류민상이 성적표에 도장을 찍어주면서 물었다.


“이 성적이면 서울에 있는 대학 갈 수 있는 거냐?”


류지호가 대답도 하기 전에 심영숙이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신포고는 서울대에 7,80명씩 보내지 않니?”

“그것도 다 옛날얘기에요.“

“명색이 신포고인데?“

“저희는 뺑뺑이잖아요.”


류민상이 성적표를 돌려주며 말했다


“아빠는 서울에 있는 대학까지 바라지 않아. 인천에 있는 대학교에는 갈 수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어.”

“열심히 할게요.”


류지호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류지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준 류민상이 출근을 서둘렀다.


“다녀오세요!”


이 시대 아버지들은 가부장제하에서 다정하게 말을 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그 때문인지 가족에 친근하게 다가가는 법이 서툴렀다.

어깨를 두드리는 행위 자체도 괜히 어색해 하는 류민상이었다.

류민상이 출근하고 아침이 완전히 밝았다.

영어단어장을 들고 화장실에서 나오는 류순호에게 류지호가 말을 걸었다.


“넌 친구 없어?”

“있는데.”

“근데 왜 집에 안 데려와.”


류순호가 괜히 형의 눈치를 살피며 우물쭈물했다.


“너 혹시 학교에서 왕따냐?”

“왕따가 뭔데?“

“애들한테 따돌림 당하는 거 아니냐고.”

“내가 형처럼 아웃사이더인줄 알아?“

“누가 아웃사이더야. 형 방송부야 방송부!”


류순호가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친구들 집에 데리고 오기가 좀 그래.“

“뭐가 좀 그런데?”

“변소도 밖에 있고... 방도 한 칸짜리 나눠서 형이랑 반반씩 쓰니까 좁기도 하고... 엄마가 부업해서 마루가 항상 복잡하잖아.”

“친구들한테 쪽 팔려서 안 데려온다?“


사춘기의 동생.

처음 듣는 동생의 속마음이다.

류지호는 동생의 그 마음이 얼추 이해가 됐다.


“친구들 끌고 오면 엄마도 괜히 미안해하고 그럴 거 아냐.”


류지호는 동생을 기특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순호 효자네~”


‘그래도 그러는 게 아니다’라는 식의 일장연설을 예상했었던 류순호다.

의외라는 듯 형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뭐라고 안 해?”

“우리 옛날에 하꼬방에 살았던 것 기억하지?”


류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저기 아랫동네 애들이 거지라면서 많이 놀렸잖아. 그때 친구들 살던 집에 놀려 가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

“형도 그랬어?”

“근데 걔들은 내가 전교생 앞에 나가서 태권도 하는 걸 부러워하더라고. 엄마가 태권도 같이하는 친구들 집에 데려오면 맛있는 건 못해줘도 밥은 많이 퍼주셨어. 김치볶음밥도 해주시고. 아직은 너나 친구들이 순수해서 어떤 집에서 사는지 집이 넓은 지 좁은 지 가지고 사람 깔보고 무시 하지 않아.”

“정말 그럴까?”

“친구들 언제 동인천 한 번 데려와. 형이 맛있는 거 사줄게.”

“형이?”

“그래 인마, 넌 내 동생이니까.”


류순호는 망치로 맞은 듯 멍하니 형을 쳐다봤다.


“왜 그래? 내 말이 뭐 잘못됐어?”

“진짜 형한테 무슨 일 있었어? 나 막 감동할 거 같아. 내가 아는 형이 아닌 것 같아. 말을 왜 이렇게 감동적으로 잘해?”

“다행이네 감동하라고 한말은 아닌데 감동했으니. 앞으로 더 멋진 말 많이 해줄게. 형이 한때 시나리오 밥으로 먹고 산 사람이야.”

“또 어려운 말 쓴다.”

“형이 출세해서 우리 식구들 남부럽지 않게 살게 해줄 거야. 형만 믿어.”

“다른 사람 같아. 말도 조리 있게 잘하고. 뭔가 중학교 때랑은 다르게 똑똑해진 것 같아. 자신감도 있어 보이고.”

“철들어서 그래. 형이 좀 조숙했는데, 몰랐어?”


류지호가 웃음 띤 얼굴로 동생의 머리를 헝클었다.

류순호가 재빨리 형에서 떨어지며 소리쳤다.


“거봐, 형 이상하다니까!”


그때 거실 창가에서 두 형제를 지켜보던 막내 류아라가 소리쳤다.


“큰오빠! 작은 오빠랑만 놀아주고, 미워!”


류지호가 ‘쟤 왜 저러냐‘ 하는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류순호는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

등교하기 전까지 이유 없이 심통이 난 막내 류아라를 달래느라 류지호는 진땀을 빼야했다.


“설거지를 다 도와주고 웬일이라니?”

“어머니께 부탁이 있어요.”


심영숙은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류지호를 쳐다봤다.


“워크맨이 필요해요.”

“허리에 차고 다니면서 카세트 듣는 거?”

“그게 있으면 영어회화 공부하는 데 유용할 것 같아요.”


공부라는 소리에 심영숙이 반색을 했다.


“영어공부?”

“방송실에 선배들이 공부하던 영어 테이프가 있어요. 등하교 할 때, 운동할 때 영어 카세트를 들으면 공부가 잘 될 것 같아요.”

“...흠.”


섣불리 들어줄 수 없는 사안이라 심영숙이 잠시 뜸을 들였다.

휴대용 카세트 레코더 소닉(sonic)의 워크맨은 20만원에 달했다.

오성의 마이마이, 금성의 아하프리, 대유전자의 요요는 그 절반의 가격이다.


“마이마이는 7만 원 정도 할 거예요.”

“....비싸구나.”

“인현동 전자상가에 중고도 팔아요.”

“아빠하고 상의해 볼게. 다른 것도 아니고 공부하는 데 필요하다는데 엄마는 빚을 내서라도 사주고 싶구나.”


그렇게 말한 심영숙이 설거지를 마무리했다.


❉ ❉ ❉


류지호는 부모님에게 무리한 부탁을 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사려 깊지 못했다.

7만원이란 돈은 집안 형편으로 볼 때 엄청나게 큰 지출이다.


‘신문배달 월급 모아서 사야 하는 건데... 괜히 말씀드렸어.’


류지호가 학교 운동장 한편에 앉아 자책했다.


“고민 있냐? 엉아한테 털어놔 봐라.”


고우찬이 옆에 쭈그리고 앉으며 물었다.

어디선가 몰래 담배를 피우고 온 모양이다.

역한 냄새가 진동했다.

류지호는 가만히 운동장에 시선을 둘 뿐.


‘이놈도 문제야. 우찬이 이놈... 욱하는 성질머리도 고치고, 열기를 발산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운동을 시킬까? 종합격투기가 세계적인 인기를 얻으려면 한참이 걸리지. 그때쯤이면 우리 나이가 40대일거야.’


고우찬이 류지호의 상념을 깨웠다.


“멍 때리지 말고 말해 보라니까!”

“우리 태권도 배우자.”

“싫어!


고우찬이 고민도 없이 단박에 거부했다.


“왜?”

“태권도 배워서 어따 써먹냐? 배워보나 마나야.”


고우찬의 말이 틀린 것이 없다.

류지호는 반박할 말을 쉽게 꺼낼 수 없었다.


“배운다면 특공무술 아니면 합기도를 배우고 말지. 태권도는 아냐.”


일면 이해가 갔다.

합기도가 태권도와 달리 호신용으로 펼치기 더 좋은 무술인 것도 맞고, 보기에는 특공무술 또한 자세가 화려하고 뭔가 폼 나 보이는 면이 있다.

특히 특공무술은 군용살상무술이라는 환상 때문인지 고우찬이 혹할 만한 요소가 많았다.


“특공무술은 군대 가서 배우고, 태권도 같이 하자니까.”

“싫어. 태권도는 나하고 안 맞아.”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네 꼬락서니 보면 딱 답 나오지 뭘.”

“확! 이놈을 태권도 발차기로 패버릴 수도 없고.”

“흥!”


류지호가 발로 차려고 하자, 고우찬이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 쳤다.

류지호에게 실전성 여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단지 혈기왕성한 고우찬의 기를 좀 누르고, 건강을 증진시키려는 목적이 컸다.

나중에 고우찬이 사범자격증과 생활스포츠 지도사 자격증을 따서 태권도장을 차려 밥벌이를 해도 되고.

류지호는 쉬는 시간마다 고우찬을 찾아가 살살 꼬드겨보았다.

고우찬은 요지부동이다.

사실 류지호도 안다.

고우찬은 투지도 좋고 피지컬도 좋지만 스포츠 격투기를 할 타입은 아니다.


‘야생동물 같은 놈이라 룰이 있는 시합은 못 뛸 거야. 그래도 같이 운동하면서 열기라도 식히면 좋을 텐데.’


❉ ❉ ❉


용연(龍淵)태권도장 앞.

류지호는 살짝 설레는 기분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그 뒤로 내키지 않는 표정의 고우찬이 뒤따랐다.

낡았지만 잘 관리된 태권도장.

저녁 성인반 수련시간이 아니기에 도장 안은 썰렁했다.

털복숭이 홍대용 사범과 정수민 사범 둘이 도장을 정리하고 있다.

류지호는 반가운 마음에 사범들을 향해 넙죽 인사했다.


“사범님, 안녕하십니까!”

“오냐.”


홍 사범이 굵은 목소리로 인사를 받았다.


“응?”


정 사범이 도장 안으로 들어오는 류지호와 고우찬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딘 성격의 홍 사범은 당연히 관원인 줄 알았지만, 꼼꼼한 성격의 정 사범은 두 사람이 수련생이 아님을 눈치 챘다.


“입관하려고요?”

“예?”


살갑게 맞아줄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헌데 기억조차 못하다니.

류지호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다.


“사범님, 실망입니다.”

“......?”

“절 기억 못하십니까?”

“...누구?”


정 사범이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류지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봤다.

성격이 급한 홍 사범이 대뜸 물었다.


“너 누구냐?”

“용연국민학교 태권도부 류지호입니다.”


홍 사범이 험악한 인상의 고우찬을 힐긋 거리며 말했다.


“학생이 국민학생이야? 그렇게 안 보이는데?”


홍 사범은 태권도 외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1년 365일 도장에 처박혀 오로지 태권도만 수련하는 남자다.

또한 단순무식한 구석이 많았다.

반면 정 사범은 똑 부러지는 성격이다.

꼼꼼하기까지 해서 도장 살림을 책임지고 있다.


“거기 아쉽게도 재작년에 해체됐어요.”


정 사범이 진심으로 아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홍 사범이 다짜고짜 류지호의 몸을 주물렀다.


“왜, 왜 이러십니까!”


류지호가 질색하며 물러섰다.

덩달아 고우찬도 멀찍이 물러났다.


“몸 좋다. 팔다리가 길어. 운동했어?”

“태권도했습니다.”

“어디서?”

“여기!”

“우리 도장?”

“용연국민학교 태권도부였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몇 기에요?”


홍 사범이 정 사범을 밀치며 앞으로 나섰다.


“제가 1기였잖습니까.”

“아~”

“류지호입니다. 관장님이 공부도 잘한다면서 사관학교 가라고 하셨던!”

“말라깽이 류지호?”

“많이 마르기는 했었던 것 같긴 합니다.”

“어머나! 그 빼빼 말랐던 꼬마가.....? 너 많이 변했다.”

“혼자 운동 열심히 했습니다.”

“아참, 내 정신 봐. 얼른 사무실로 가봐. 먼저 관장님께 인사드려야지.”


관장실에는 키가 170이 안 되는 호리호리한 노인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환갑을 막 지난 나이, 푸근한 인상에 도복을 벗으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노인.

한때 한국 태권도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떨쳤던 홍대산 관장이다.


“안녕하십니까. 관장님!”

“아, 깜짝이야....!”


책상에 앉아 종이뭉치를 분류하던 홍 관장이 고개를 쳐들었다.


“이리로 앉아요.”


홍 관장이 손으로 소파를 가리켰다.

류지호와 고우찬이 소파로 걸어가 홍 관장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관장님.”

“누구더라?”


홍 관장이 종이뭉치를 정리해 한쪽으로 치우며 물었다.


“용연국민학교 태권도부 출신입니다만.”

“그렇구먼. 이름이 뭐라고?”

“2년 동안 선수생활을 했는데... 이름도 기억 못하십니까?”

“내 제자가 몇 명인데 다 기억하겠느냐?”


홍 관장이 어림 반 푼도 없다며 코웃음을 쳤다.


“이름은 류지호. 1기생입니다.”

“해체 했는데 1기생은 무슨...... 누구한테 맞고 다니냐?”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태권도 중간에 관둔 놈이 돌아오는 경우는 그거 말고는 없으니까.”

“몸이 건강해야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다시 해보려고 합니다.”

“언제부터 나올래?”

“도복도 작아져서 새로 사야하고. 그래서 말인데....”

“용연국민학교 태권도부, 왜 해체했는지 아냐?”

“그건 못 들었습니다.”

“학부형들이 교장선생님께 항의 했다대. 우리 도장이 학교와 짝짜꿍해서 관원 유치한다고. 우리 도장이 돈에 환장했다나 뭐라나.”

“공짜로 가르쳐주는데 고마워하지 못할망정.”

“돈 받았다.”

“저희는 공짜로 배웠잖습니까?”

“니들은 일종의 판촉행사 같은 케이스였고.”

“관장님도 그런 거 하십니까? 무도인의 긍지를 강조하시던 분이 그럴 리가....”

“무도인은 땅 파먹고 도장 운영하는 줄 아느냐?”

“그래도 가오가 있잖습니까.”

“불량서클 양아치들하고 어울려 다녀?”


홍관장이 고우찬을 눈으로 훑으며 물었다.


“친구들 다 착합니다.”

“건달이 쓰는 말은 어디서 주워 배워서는.....쯧.”


홍 관장이 혀를 차며 류지호를 지그시 쳐다봤다.

류지호는 내심 뜨끔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암튼 요즘 도장이 좀 힘들다.”


관비를 깎아보려고 했는데, 홍 관장이 선수를 쳤다.

사람 좋은 동네 할아버지 같아보여도 의외의 구석에 철두철미 하신 분이다.


“1년 치 관비 미리 내는 걸로 깎아 달라고 부탁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야. 중간에 관둬도 안 돌려준다.”

“1년 치 미리 내는 것은 제 각오입니다. 열심히 하겠다는 각오.”

“옆에는 형이냐?”


홍 관장이 턱짓으로 고우찬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는 안 배워요.”


고우찬이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알았다. 홍 사범한테 말해둘 테니까 그렇게 알거라.”

“넵!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진짜 불량서클 애들하고 어울리는 거 아니지?”

“아닙니다.”

“근데 왜 말투가 그래?”

“뭐가 이상... 하십니까?”

“딱 건달 아니면 군바리 말투다, 인석아~”

“철이 좀 일찍 들었습...어요.”

“싱거운 놈. 나가봐.”


류지호는 입관절차를 밟은 후, 새 도복을 지급 받았다.

새로 받은 도복 깃이 검정색이다.

만 15세를 넘겨 1품 자격을 1단으로 바꿀 수 있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검빨간색의 품띠는 사실 품수를 가진 수련생이 차야 하는 띠로 공식적으로는 품수를 가진 수련생이 단띠, 즉 검은띠를 찰 수는 없다.

하지만 만 15세가 넘어 품에서 단으로 옮겨가면 단띠인 검정띠와 검정 도복 깃의 태권도복을 입고 수련하고, 승단시험을 치룰 수 있다.

류지호가 새로 지급받은 단띠를 맸다.

그런데 홍 사범에게는 검은띠가 어림도 없었다.


“흰띠 매라.”

“예?“

“3년 동안 운동 쉰 놈이 무슨 단띠야?”

“그래도 지역협회도 아니고 국기원 가서 정식으로 승단심사해서 딴 겁니다.”

“가라로 품새만 죽도록 판 놈이 초단 자격이 가당키나 해?”

“그래도.....”

“얼른 흰띠로 바꿔 매!”


홍 사범이 엄한 표정으로 명령했다.

류지호는 하는 수 없이 도장 사무실에서 흰띠를 찾아 허리에 매었다.


“설마 다시 초단 심사 봐야하는 건.....아니겠죠?“

“내가 보고 이제 되었다 싶으면 관장님께 말씀드릴 거야.“


태권도는 1단에서 2단은 1년의 연한을 두고, 2단에서 3단은 2년이 경과해야 승단 자격을 부여한다.

류지호가 앞으로 꾸준히 수련한다면 고3이 되는 내후년에 3단 승단심사를 볼 수 있다.

홍 사범이 딴죽을 건다면, 그 계획은 물 건너 간 것이나 마찬가지다.


잠시 후.

저녁 성인반 수련생들이 하나둘 도장을 채웠다.

고우찬은 편안한 자세로 관장실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얼마나 대단한지 한 번 지켜보겠다는 심사다.


“차렷! 국기에 대한 경례!”

“바로!”


마보자세에서 정권지르기를 시작으로 각종 기본 발차기를 수련했다.

홀로 수련할 때와 천지차이다.

수련생들 틈에 섞여 수련을 하다 보니 흥이 절로 나는 것 같았다.

류지호의 입에서 기합소리가 우렁차게 터져 나왔다.


“태권! 태권도!”


날카로운 눈초리로 지켜는 홍 사범을 의식해 태극품세 동작 하나도 허투루 하지 않았다.

마치 이래도 흰띠를 매야하느냐고 보란 듯이 시위 했다.

홍 사범은 그런 류지호를 가볍게 무시했다.

이어서 두 사범이 수련생들에게 발차기 미트를 대줬다.


팡! 팡! 팡!


류지호가 미트에 시원한 발차기를 날렸다.

오랜만에 통쾌함을 맛 볼 수 있었다.


‘그래 바로 이 맛에 태권도 하는 거지!’


기분이 들떠 조금 오버하기도 했지만, 도장에서의 첫 수련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우찬이 이 자식은 또 언제 사라진 거야?’


어느 틈엔가 고우찬이 사라졌다.

류지호는 다시 데리고 올 계획을 궁리하며 마무리 운동을 했다.

자칫 근육이 뭉쳐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수 있었기에 꼼꼼하게 몸을 풀어주었다.


“사범님! 겨루기는 언제 시켜줍니까?”

“때가 되면.”

“친구 놈 꼬시려면 겨루기 하는 걸 보여줘야 할 것 같은데....”

“태권도가 시시하대?”

“아무래도 실전적인 운동을 찾게 되잖습니까?”

“성인반은 평일에 주로 약속겨루기하고, 토요일에 시합겨루기 한다.”

“선수도 있습니까?”

“체대 준비하는 고3 몇 명 있어.”


정 사범이 도저히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지호야?”

“왜 그러십니까?”

“그 말투 좀 어떻게 해주면 안 돼? 닭살 돋아서 미치겠어.”

“제 말투....?”

“다나까 쓰니까.... 되게 이상해. 막 어색하고.”


류지호는 노력해보겠다고 말하고 관장실로 향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류지호가 영문을 몰라 눈을 껌벅거렸다.

홍 관장이 류지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어린놈이 다산 노인네 눈을 하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밤늦게까지 공부하느라 피곤해서 그런가 봅... 봐요.”


홍 관장은 말없이 한동안 류지호의 얼굴을 쳐다만 봤다.

마치 류지호의 비밀을 파헤치기라도 하려는 듯 뚫어져라 바라봤다.


“눈이 깊어졌어. 네 나이 때는 절대 가질 수 없는 눈이야.”

“철이 일찍 들었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류지호가 항상 둘러대던 대로 얼버무렸다.


“눈은 마음에 창이고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라고들 하지.”

“......”

“살아가면서 괴롭고 힘들다고 너 자신을 속이면서 살지는 말아라. 항상 당당하고 타협하지 않고 남자답게 살아.”


옆집 할아버지 같은 푸근한 인상.

때때로 넝마주이처럼 바구니를 둘러맨 채 도장 주변을 돌며 집게로 쓰레기를 줍는 홍 관장이다.

유유자적 한량 같다가도 간혹 이렇게 연륜이 느껴지는 말을 던지곤 했다.


“그리고 인석아, 힘 좀 빼. 어린놈이 무슨 생각이 그리 많아서 힘이 바짝 들어가 있누?”

“....음.”


홍관장 눈에는 지나치게 뻣뻣하게 구는 것처럼 보인 모양이다.

생각해보면, 가족과 친구를 상대할 때 외에는 말투나 태도가 여느 고등학생답진 않았다.


‘이랬어요 저랬어요가 입에 잘 안 붙어서 그랬던 것인데, 외모와 매칭이 잘 안 되나?’


앞으로 좀 더 말투나 행동거지에 신경을 쓰기로 하고 류지호가 태권도장을 나섰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홍 관장과 두 사범에 대해 생각했다.

삶을 영화에 비유했을 때 홍 관장이 주인공인 영화가 있다면.

류지호는 그의 영화에서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엑스트라였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류지호의 이전 삶에서 홍 관장은 스쳐지나가는 인연일 뿐 특별한 의미를 가진 인물은 아니었다.

류지호의 인생이란 영화 속에서 잠깐 스쳤던 단역이었단 의미다.

이번에는 류지호가 어떻게 인연을 이어가느냐에 따라서 홍 관장이 단역이 될 수도 있고, 류지호와 영향을 주고받는 조연이 될 수도 있다.

세상을 무대로 마음껏 주인공의 존재감을 뽐내는 사람들이 있다.

류지호는 그런 이들처럼 독보적인 존재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어벤저스는 몰라도 일레븐 멤버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참고로 <오션과 11>은 1960년에 제작된 영화를 2001년에 리메이크 하게 된다.

막 출소한 오션이 최고의 보안시설을 자랑하는 카지노 금고를 한탕 크게 털 계획을 짜면서 미국 각지에서 동료를 모아 고도의 지능범죄를 저지른다는 스토리의 영화다.

류지호는 그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범죄자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저 작은 인연들을 모아 거대한 이야기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면, 적어도 멀티캐스팅의 한 일원이 될 수는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자신의 인생이 블록버스터 영화가 될지 소소한 휴먼드라마나 다큐멘터리가 될지 알 순 없었지만.


‘어디에 있는 지도 모를 인연은 나중에. 가까이 있는 인연부터 챙기자.’


외롭고 쓸쓸한 인생을 한 번 살아 본 류지호는 작은 인연도 매우 소중했다.


작가의말

즐겁고 행복하고 의미있는 성탄절 맞이하시기 기원합니다. Merry Christ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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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블루오션인 건 확실해! +8 22.01.02 11,982 246 27쪽
25 오늘 넌 영화감독 같았어! (4) +12 22.01.01 11,501 256 20쪽
24 오늘 넌 영화감독 같았어! (3) +11 22.01.01 11,506 246 22쪽
23 오늘 넌 영화감독 같았어! (2) +8 21.12.31 11,781 233 16쪽
22 오늘 넌 영화감독 같았어! (1) +8 21.12.31 12,552 242 24쪽
21 우리는 가족입니다! (3) +13 21.12.30 12,443 258 24쪽
20 우리는 가족입니다! (2) +12 21.12.30 12,477 260 20쪽
19 우리는 가족입니다! (1) +11 21.12.29 13,242 238 21쪽
18 어떤 녀석인지 궁금해지네... (4) +10 21.12.29 13,220 262 23쪽
17 어떤 녀석인지 궁금해지네... (3) +13 21.12.28 13,187 265 16쪽
16 어떤 녀석인지 궁금해지네... (2) +8 21.12.28 13,582 244 18쪽
15 어떤 녀석인지 궁금해지네... (1) +6 21.12.27 14,120 273 20쪽
14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3) +7 21.12.27 14,322 280 22쪽
13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2) +11 21.12.26 14,592 277 21쪽
12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1) +12 21.12.25 15,141 266 22쪽
11 돈을 왕창 벌자! +13 21.12.25 15,578 272 20쪽
10 티끌모아 태산이 되는 것처럼... (2) +9 21.12.24 15,275 275 20쪽
» 티끌모아 태산이 되는 것처럼... (1) +8 21.12.24 15,880 260 21쪽
8 Goodfellas. (4) +10 21.12.23 16,145 279 20쪽
7 Goodfellas. (3) +13 21.12.23 16,669 262 20쪽
6 Goodfellas. (2) +12 21.12.22 17,261 292 19쪽
5 Goodfellas. (1) +20 21.12.22 18,504 295 21쪽
4 Again 1987. (3) +25 21.12.21 19,260 328 20쪽
3 Again 1987. (2) +11 21.12.21 22,046 337 20쪽
2 Again 1987. (1) +20 21.12.20 27,773 398 21쪽
1 프롤로그. +49 21.12.20 40,616 462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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