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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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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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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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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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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6쪽

급하게 먹는 밥은 체하는 법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9월 15일 월미도 해군기지.

해군 제2함대 사령부가 진행하는 인천상륙작전 기념식이 한창이다.


‘개천에서 용 났네, 용 났어. 내가 이런 기념식에 귀빈으로 초대를 다 받고.’


류지호의 오른쪽으로 미육군정복을 정갈하게 차려입은 윌리엄이 앉아있고, 왼쪽으로는 제임스 부부와 레오나가 앉아있다.

참석자들은 미리 자유공원에 있는 맥아더 장군 동상에 헌화를 하고, 인천상륙작전을 승리로 이끈 고인들을 기렸다.

초대받은 미해병 및 육군 참전용사와 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 2함대 사령관, 해병대 사령관, 인천시장 등 요인들과 한국전쟁 참전용사들도 귀빈석에 함께 자리하고 있다.


“노병들께서 단상으로 올라오고 계십니다. 힘찬 박수 부탁드립니다.”


윌리엄이 지팡이를 짚으며 단상으로 걸어갔다.

이어 정복을 입은 노병들이 그 뒤를 따라 단상으로 향했다.

그들의 가슴에 달려있는 온갖 훈장들이 전공과 용기만큼이나 찬란하게 반짝거렸다.

기념식에 초청 받은 생존 노병들이 한 명씩 연단에 서서 90 명의 전사자 이름을 부르고 참가하지 못한 노병의 육성을 미리 녹음한 소리를 번갈아 틀었다.

전사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는 것은 참전용사 모두를 기리는 의미다.


“We believe that the echo will remain here forever and that at last.”

(호명된 이름과 목소리는 메아리로 영원히 남을 것으로 믿는다)


윌리엄이 대표로 마이크 앞에 섰다.


- 대한민국은 아직도 휴전상태에 있습니다. 다시는 이 땅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세계 평화를 위해 전 세계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거듭 당부합니다. 그리고 전혀 알지 못하고 만나본 적 없는 나라의 국민을 지키기 위해 나라의 부름에 응한 미국의 아들과 딸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윌리엄은 입술이 마르는지 잠시 연설을 멈췄다.

이어 마이크 위치를 조정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 나는 이 땅에서 수많은 전우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37년이 흘러 최근에 새로운 친구를 얻었습니다. 저기 소년이 다시 나와 한국을 연결해 주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기념식 참석자들의 시선이 윌리엄의 손가락을 따라서 류지호에게 향했다.

류지호는 애써 태연한 척 단상에 시선을 고정했다.

다만 살짝 붉어진 얼굴을 감출 수는 없었다.


-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고통과 슬픔이 사라지고, 축복이 함께 하길 기원하겠습니다.


참석자들에게 거수경례를 붙인 노병들이 단상을 내려왔다.


짝짝짝!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찰칵!


기념식이 끝나고, 귀빈들과 참전용사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류지호는 윌리엄의 손에 이끌려 이곳저곳으로 불려 다녔다.

노병들은 따뜻한 손길로 류지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인터뷰 요청도 받았다.

신효정의 조율을 거쳐 간단한 언론 인터뷰도 했다.

기념식 참석자들이 해군에서 마련해준 차량을 타고 인천역으로 하나둘 이동하기 시작했다.

인천역에서부터 동인천역까지 ‘참전용사 호국보훈 시가행진’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한국전쟁 참전용사와 참전국 무관, 해군·해병대 군악대·의장대, 주한미군 장병 등 500여 명이 시가행진을 준비했다.

윌리엄이 지팡이를 짚고 일어서며 류지호에게 물었다.


“좀 걸을까?”


재빨리 신효정이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37년 전 바닷가 마을이었던 블루비치가 발전된 도시가 되어 감회가 남달랐어.”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은 세 방향에서 상륙작전이 벌어졌다.

지금의 월미도인 Green Beach, 인천항 방면의 Red Beach와 인천 남동부 해안인 Blue Beach 세 방향이었다.

블루 비치는 루이스 풀러 대령이 지휘하는 미 해병대 제1연대가 상륙해 교두보를 마련했는데, 윌리엄은 상륙작전 개시 후 다음날 아침까지 인천을 수복하는데 공을 세운 미육군 7사단 소속이었다.


“그 폐허를 딛고 일어나서 올림픽까지 개최하는 나라가 되었다니 정말 놀라울 뿐이야.”


모든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은 대한민국의 발전에 대해 남다른 감동을 받았다.

류지호는 감회의 젖은 윌리엄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가만히 듣기만 했다.


“저 쪽에 잠시 앉을까요?”


류지호가 해군기지 한편의 투박한 통나무 의자를 가리켰다.

자리를 잡고 앉은 두 사람은 잠시 해상에 정박해 있는 해군 함정을 구경했다.


- 우리 가문은 대대로 비즈니스를 한단다. 재물을 탐하는 비즈니스는 고객과 제품을 거래해 수익을 계산하지. 하지만 사람들은 사람 자체와 유무형의 각종 거래를 하는 것이 훨씬 더 수지 남는 장사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놓치고 있어.


신효정이 통역하는 것을 잠시 기다렸던 윌리엄이 다시 말을 이었다.


- 누군가에게 무엇을 주었는데, 그 사람으로부터 아무 것도 받지 못했다면 속상하지. 속이 상한 나머지 자신은 왜 바보같이 당하고 살까 자책하기도 하고. 나도 세상을 조금 더 약게 살아야지 하고 결심할 수도 있어. 그렇다고 지호가 약아 빠졌다는 건 아냐.


목소리가 살짝 갈라진 윌리엄이 경호원을 향해 손을 뻗었다.

경호원이 윌리엄에게 물통을 건넸다.

물을 조금 마시고는 윌리엄이 말을 이었다.


- 이 늙은이가 해주고 싶은 말은 조금 더 넓게 보라는 거야. 이 세상에는 아무 것도 돌려주지 않는 사람보다 돌려줄 사람이 더 많아. 나는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준다는 행위를 '행복'을 구입하는 비용을 치르는 행위라고 생각한단다.

“......”

- 우리 가문은 고객에게 물건을 잘 파는 사람은 훌륭한 장사꾼이 되지만,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잘 줄 수 있는 사람은 훌륭한 인생 경영자가 된다고 가르친단다. 장사는 전투고 인생은 전쟁이야. 전투에서 이기고 전쟁에서 지는 바보가 되지는 말자는 것이 우리 가문에서 내려오는 가르침이지.


세상의 온갖 풍파를 겪고 정상에 선 비즈니스맨의 깨달음인 걸까.

아니면 성공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들만의 마음가짐 일까.

류지호는 윌리엄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 한 가지 더 부언하자면, 훌륭한 인생 경영자가 되려면 줄 것이 많은 사람이 되어야 돼. 그리고 줄 것이 많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지고자 하는 것이 작아야 하지. 행복의 의미를 진정으로 되새겨 보거라. 그러면 줄 것이 없는 줄로만 알았던 내 인생이 갑자기 줄 게 넘치는 인생으로 변할 지 누가 알겠느냐.


전생이든 꿈이든 뭐든.

지천명을 살아봤던 류지호다.

과연 윌리엄처럼 저런 충고를 할 수 있는 어른이었을까.

윌리엄은 전장에서 죽어간 전우의 몫까지 치열하게 살아왔을 지도 모른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삶에 얽매이지 말자.’


과거를 돌아보며 반성만 하기에 인생은 짧다.

소중한 시간 고민과 번민으로 흘려보내봐야 나중에 후회만 남을 뿐.

류지호는 치열한 삶에 대한 각오를 새롭게 다졌다.


❉ ❉ ❉


여느 날과 다를 것 없는 새벽.

류지호는 고우찬과 함께 신문보급소로 들어갔다.

보급소장이 반색하며 신문을 받고 있는 류지호에게 다가왔다.


“아이고~ 지호학생. 학생 기사가 우리 신문에 났더라.”

“제가요?”

“여기 정치면에 떡 하니 사진까지 박혀 있잖아.”


보급소장이 인천상륙작전 기념식에서 노병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실린 한국신문 정치면을 펼쳐 보여줬다.


“어디, 저도 좀 봐요?”


고우찬이 신문을 낚아채듯 받아들고 정치면을 훑었다.


“류지호, 이 자식.... 사진발 좀 받는데?”

“근데 왜 사회면도 아니고 정치면인데...”


류지호가 투덜거렸다.

한국전쟁과 북한의 위협은 독재자와 군사정권이 수십 년 간 우려먹는 정치 이슈다.

고등학생과 미군 참전용사의 미담이 반공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는데 꽤나 유용한 뉴스였던 모양이다.

신문마다 1면 톱으로 류지호와 윌리엄 파커가 함께 찍힌 사진이 걸렸다.


“정치면이면 어떻고 사회면이 어때. 신문에 난 거로 대단한 거지. 내가 처음부터 지호학생은 뭔가 큰 인물이 될 관상이라고 생각했다니까. 장해. 암, 장하고말고.”

“소장님, 저희 빨리 신문 받아서 나가봐야 합니다.”


보급소장의 설레발이 길어질 것 같아, 재빨리 끊어버리는 류지호다.


“그래야지. 오늘도 수고해.”


보급소장이 보급소 밖으로 나와 뒷짐을 진 채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려가는 두 고등학생을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봤다.

자신의 보급소에서 일하는 고등학생이 신문에 났다.

그것도 사건사고가 아닌 미담 기사다.

자신의 일도 아닌데 괜히 뿌듯한 기분을 느끼는 보급소장이다.


류지호가 교통사고가 날 뻔한 소녀를 구한 사건은 전국적으로 관심을 끌만한 사건은 아니다.

기껏해야 단신으로 다룰 만한 별거 아닌 뉴스다.

어제는 KBC 방송국에서 인터뷰를 촬영해 갔다.

그 기사는 9시 뉴스에서 윌리엄의 연설과 함께 편집되어 짧게 보도되었다.


“어제 텔레비전에 나오더라!”


학교에서 난리가 났다.


“에휴, 괜히 인터뷰는 해가지고...”


9시 뉴스에 나온 것만으로 학생들은 류지호를 마치 연예인 보듯 했다.


“매점에서 라면 한 그릇씩 돌려!”

“왜?”

“유명해졌잖아.”

“뉴스에 잠깐 나왔다고 유명해 진거냐?”

“학교에 난리 난 거 안 보여?”

“동인천 나가봐라 날 알아보는 사람 있는 지. 아침에 등교할 때 아무도 못 알아보더라. 그런데도 내가 유명해 진거냐?”

“시끄럽고. 유명해졌다고 튕기면 재미없을 줄 알아.”

“사인 미리 받아둘까?”

“유명해졌다고 모른척하는 건 아니겠지?”


친구들이 부러워죽겠다는 표정으로 마구 떠들어댔다.


“쉰 소리 할 거면 다들 꺼져! 나 공부해야 돼.”


집으로 돌아온 류지호에게 심영숙은 온 종일 외가 친척들에게서 전화가 쇄도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이가 없다 못해 황당했다.


“뉴스에 아무나 나오니? 그만큼 네가 훌륭한 일을 했다는 거 아니겠어?”


용연태권도장 사람들도 류지호에게 다가와 한마디씩 축하인사를 해왔다.


‘뉴스에 나온 것이 축하 받을 일인가?’


홍 관장에게 그간 있었던 파커 가족과의 일들을 이야기 해주었다.


“살아간다는 건 인연(因緣)에 연속인 게지. 세상을 살다 보면 많은 연(緣)이 따를 거야. 특히 사회생활은 인연의 연속이란 말이 있듯 항상 다가오는 인연에 대해서는 조심하고 감사하게 여겨야 한다. 소중하게 여긴 인연은 언젠가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법이니까.”

“예.”

“우찬이 너도 명심해.”

“저요?”

“괜히 사고 쳐서 9시 뉴스에 나오지 말고. 악한 인연은 멀리하고 선한 인연을 가까이 하거라.”

“네. 사고 안칠게요.”


좋은 말을 해줘도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리는 고우찬이다.


“쯧쯧.”


홍 관장이 고우찬을 보며 혀를 찼다.


“아. 왜요? 다 알아들었다고요.”


고우찬이 불퉁거렸다.


“소귀에 경 읽기인 게야.”


홍 관장이 껄껄 웃으며 말하자, 고우찬이 발끈했다.


“욕하지 마세요. 저 소 아니에요!”

“우찬아, 너 소 아냐. 돼지야.”

“북어대가리, 너 죽을래? 죽탱이 한 번 털려볼래?”


류지호와 고우찬이 티격태격 태권도장을 빠져나갔다.

유명세로 귀찮았던 것도 며칠뿐이다.

일주일이 지나자 평상시로 돌아갔다.


❉ ❉ ❉


파커 가족이 미국으로 떠나는 날이다.

조퇴를 하기 위해 담임에게 정기검진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김포공항으로 향하는 공항리무진 안에서 류지호는 월스트리트저널을 꺼냈다.

접힌 부분을 펼쳐 다시 한 번 읽기 시작했다.

스위스 경제학자가 미국 증시 대폭락을 예견하는 칼럼이다.

류지호의 기억대로라면 얼마 후 미국에서 ‘블랙 먼데이’(black Monday)가 발생 한다.

역사상 최대, 최고 이런 수식어가 붙은 대사건은 대부분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보통 주가가 폭락하면 몇 년도 무슨 사건 이후로 최대라는 표현을 쓴다.

대표적인 것들이 블랙먼데이, 일본의 잃어버린 20년, IMF, 미국발 금융위기 같은 것들이다.


“Monday.... 한 달에 월요일은 네 번. 그 중 하루일 텐데.”


류지호는 정확한 날짜를 알지 못했다.

블랙먼데이라는 월가의 재앙을 월스트리트저널을 읽으면서 떠올렸을 뿐.

언제 어떻게 일어나는지 모른다.

9월 중순인 현재까지 일어났다는 뉴스를 보지 못했다.

앞으로 1달 혹은 2달 안에 일어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참고로 블랙먼데이는 87년 10월 뉴욕의 다우지수가 전일대비 22.6%가 폭락하는 증권역사의 대재앙 중 하나다.

폭락 직전의 수준으로 회복하는데 3개월이 걸리고, 최고치에 다시 도달하는데 2년이 소요되는 등 세계 증시까지 암울한 영향을 끼친 대사건이다.


‘어떻게 알려줘야. 의심을 사지 않을까?’


파커 가족에게 많은 것을 받았다.

류지호는 무언가 도움이 되고 싶었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류지호가 그들을 도울 방법은 하나 밖에 없다.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힌트를 주는 것.

제임스 파커는 투자은행 CEO이며 그 스스로 투자전문가다.

앞으로 일어날 사건을 미리 알게 된다면, 그걸 토대로 다양한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설사 이익을 얻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손해는 보지 않을 것이다.

주식을 사준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해도 좋고.

Give and Take.

거래라고 해도 좋았다.

수없이 망설였다.

과연 제임스에게 블랙먼데이에 대해 경고해도 될 것인지.

예지로 의심해도 문제, 무시해도 문제다.


“제임스, 제가 어제 꿈을 꿨는데요. 아씨... 캐서린 혹시 마크 파버라는 사람 알아요? 이것도 아니고. 윌리엄 할아버지 블랙먼데이가 무슨 뜻이에요?”


류지호는 공항리무진 안에서 수없이 많은 시뮬레이션을 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은 남을 속여먹거나 연기 부분에 재능이 없다는 것을.

결국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승객 중에 제임스 파커씨 좀 불러주시겠습니까?”


퍼스트 클래스 라운지에서 류지호가 담당 직원에게 말했다.


“무슨 용무십니까?”

“류지호가 작별인사를 하러 왔다고 전해주세요.”


직원이 안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 제임스와 함께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학교에 있을 시간 아니었어?”

“미국으로 돌아가시면, 언제 또 볼지 모르잖아요. 작별인사는 해야죠.”


류지호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영어로 대답했다.

제임스가 류지호를 VIP라운지로 이끌었다.

국회의원과 대기업 오너 등 특권층만이 드나드는 라운지다.

쉽게 들어올 수 없는 공간이다 보니 이용객이 거의 없었다.

퍼스트 클래스 승객들은 탑승수속 및 출국수속 전 과정과 수화물까지 전담하는 직원이 전면지원하고 탑승 게이트 안 라운지까지 안내를 한다.

참고로 이 시기는 해외여행 금지 상태다.

때문에 대기업 오너도 비즈니스 외의 용무로 출국할 경우 까다로운 심사를 거쳤다.

류지호는 윌리엄, 캐서린과 차례로 가볍게 포옹인사를 나눴다.

레오나가 쪼르르 달려와 류지호의 다리에 매달렸다.


“큰오빠!”


류아라가 말끝마다 큰오빠를 불러대는 것을 어느 샌가 레오나가 배워 따라했다.

딴에는 류지호의 애칭이라고 여긴 것 같다.

류지호가 푹신한 소파에 앉자, 신효정이 음료를 가져왔다.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내가 사는 것 아니니까 나한테 감사할 건 없어요.”


신효정은 예의 사무적인 태도로 보였다.


‘이 아줌마는 사무용 복사기도 아니고, 왜 이리 인간미가 없지?’


하버드까지 나와서 비서 노릇하는 것이 자존심 상해 더 사무적인 척 하는 것일지도.


“손에 쥐고 있는 건 뭐지? 월스트리트저널?”

“이거요? 맞아요.”

“지호는 항상 노력하네.”


한국에 체류하는 동안 몇 번 식사도 하고, 류지호에게 호감을 품은 지라 캐서린은 매우 살갑게 대했다.


“제가 칼럼을 하나 보다가 흥미로운 걸 발견했어요.”


어설픈 연기는 집어치우고 당당하게 말하기로 했다.

매사에 긍정적으로 자신 있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

긴가민가하고 우물쭈물 자신감 없는 모습보다는 나중에야 어떻게 되든 간에 일단 자신 있게 행동하는 것.

그것이 상대방에게도 믿음을 주고 자신에게도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는 법이다.


“이걸 한번 읽어보시겠어요?”


류지호가 월스트리트저널의 접힌 부분을 펴 제임스에게 보여줬다.

제임스가 칼럼을 눈으로 훑었다.


“뭐예요?”


캐서린이 제임스에게 물었다.


“뉴욕증시 대폭락을 예견하는 마크 파버의 칼럼.”


류지호가 다시 제임스에게 물었다.


“혹시 보셨나요?”

“....흠”


어째 제임스의 반응이 떨떠름했다.


“신변호사님, 저 좀 도와주세요.”

“말해요. 통역해 줄게요.”

“매번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제 업무에요.”

- 마크 파버라는 사람 말고도 타임이나 이코노미스트에서도 비슷한 전망을 내놓은 기사를 봤어요. 미국이 대규모 군비확장으로 재정적자 중이고, 해마다 외채와 무역수지 적자가 증가해 국제수지적자가 쌓인다고 하는 것 같았어요. 시세차익 프로그램이라는 자동주식거래 장치에 연계된 주가지수 선물거래가 위험 수준에 이르렀다고 하더라고요. 물론 전 시세차익프로그램이 뭔지 주가지수 선물거래가 뭔지는 몰라요.


제임스 부부는 가만히 신효정이 전해주는 통역을 들었다.

류지호가 아무런 이유 없이 이러한 얘기를 꺼냈을 리는 없다.

때문에 캐서린의 마음속에 기대감이 부풀기 시작했다.


- 혹시 월가에서는 주가가 계속 오르는 것이 떨어질 때가 되었다는 사인으로 받아들이고 있나요? 금리가 인상될지 모른다는 불안심리가 정말로 팽배한가요? 전문가들이 그렇게 분석하는 것 같던데....


류지호의 질문은 캐서린의 기대에 완벽히 부응했다.

캐서린은 점점 더 흥미진진한 표정이 되었다.

제임스가 입을 열었다


- 우리도 뭔가 불길한 감을 느끼고는 있어. 하지만 주식투자는 감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거야.

- 그렇죠. 저는 미국 증시에 뭔가 위험신호가 있나 하고 궁금했어요. 무려 1억 원을 투자해서 주식을 샀는데 마크 파버란 사람 말처럼 미국 증권시장에 문제가 생기면 안 되잖아요.


호호호.


캐서린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 역시 이들은 내가 하는 말을 어린 애가 하는 말로 무시하는구나.’


류지호는 하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이에 걸맞지 않은 생각과 지식탐구욕이 있는 것을 암시한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캐서린이 호기심어린 얼굴로 류지호를 향해 입을 열었다.


- 지호, 지금 한 말들이 무슨 내용이고 어떤 의미인지 알고 하는 말이야?

- 말씀드렸잖아요. 국제수지적자니 시세차익프로그램이니 선물거래 같은 전문용어는 잘 몰라요. 그냥 전체적으로 대강 이런 뜻이구나 하는 정도....

- 지호가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밑져야 본전이라는 말이 있어요. 음... You have nothing to lose라고 해야 하나요? 아니면 Trying wouldn't hurt?”


호호호.


캐서린이 정말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캐서린 아줌마.”

“아줌마는 빼는 게 좋겠어요.”


신효정이 류지호의 호칭을 정정해 주었다.


- 캐서린... 1929년에 검은 목요일이 있었고, 19세기에도 검은 월요일이 있었다면서요? 대충 주기를 따져보니까 57~58년이더라고요. 57년 주기면 작년이고 58년이면 올해예요. 작년에 뉴욕증시 대폭락이 없었으니 올해 대폭락이 있을 수도 있지 않겠어요?


캐서린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 우연에 일치일까요? 묘하게 둘 다 10월이에요.


제임스의 입가가 씰룩 거렸다.

비웃음은 아니다.


- 저는 다만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큰일을 겪게 되는 것보다 미리 준비를 해 두는 편이 백번 나은 거라고 생각해서....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게 제일 좋지만요.


레오나와 놀아주던 윌리엄이 류지호에게 다가왔다.


- 만날 때 마다 우리 가족을 놀라게 하는 구나.

- 아니에요. 영어를 배우려고 읽기 시작했는데 어려운 용어가 너무 많더라고요. 주변에 물어 볼 사람도 없고... 중국 속담에 유비무환이라고 있어요. 미리 대비해서 나쁠 건 없잖아요.

-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되지. 많은 사람들이 파산을 하고 거리로 내몰리는 일이 있어서야 되겠느냐?


신효정의 통역을 들은 류지호가 얼른 영어로 대답했다.


- 맞아요. 제가 경솔했어요.


윌리엄이 대견하다는 듯 류지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제임스, 회사에 수십만 달러의 연봉을 받는 유능한 인재들을 두고 뭘 고민해? 밑져야 본전이라잖아.

- 내부적으로 이런 전망에 따라서 위험군을 따로 분류하기 시작했어요.

- 그럼 지호의 예측이 맞을 수도 있다는 거야?

- 아버지가 말한 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야죠.


류지호는 통역해주는 신효정의 말을 듣고 생각했다.

역시 보통 사람들이 아니라고.

블랙먼데이는 류지호가 일어날 일을 기억하고 있던 대사건 중 하나다.

순전히 분석을 통해 예측하고 대비를 하고 있는 것이 괜히 전문가는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블랙먼데이라는 대사건을 일으킨 금융자본의 보이지 않는 손과 한통속일수도 있고.

음모론적인 생각이지만.


- 빨리 뉴욕으로 돌아가고 싶군.

- 난 마음에 안 들어. 한동안 레오나와 나는 일 속에 파묻힌 아빠와 남편을 지켜볼 수밖에 없잖아.


짐짓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캐서린을 제임스가 안아줬다.

껴안고 있는 부부의 품 사이로 레오나가 파고들었다.


“들어가실 시간입니다.”


제임스 부부가 멜로영화인지 가족영화인지 실사판을 찍고 있을 때, 신효정의 사무적인 목소리가 들여왔다.

때마침 팬암 항공 승무원이 라운지로 들어왔다.

류지호는 다시 한 번 파커 가족 한명 한명과 작별인사를 나눴다.


“지호?”

“예. 캐서린.”

- 경황이 없어 말을 못 꺼냈어. 지호 넌 우리 그레이엄의 아이 레오나를 살려 준 큰 은인이야. 그런데 아무런 보답도 없이 이대로 미국으로 떠나기에는 염치가 없어서 말이야.


신효정의 통역을 들은 류지호가 뭐라 대꾸할 틈도 없었다.

그녀는 류지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봐.

- 원하는 거 말입니까?

- 그래, 차라도 한 대 뽑아 줄까?

- 한국은 18세부터 운전면허를 딸 수 있어요.

- 그럼 미국으로 넘어올래? 뉴욕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대학도 그곳에서 마칠 수 있도록 전폭적으로 지원할 게. 뭐든 말만 해. 다 들어줄 테니.


빠른 어조로 제안하는 캐서린의 말과 그걸 전해주는 신효정의 통역에 류지호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 이미 충분히 보상을 해주셨어요. 더 욕심을 부리는 건 아닌 것 같아요.

- 그건 그것이고. 나와 그레이엄 가문의 보상은 다른 문제야. 뭐든 말만 해.


류지호는 또 한 번에 백지수표를 받아든 상황이다.


‘이 사람들은 자꾸 뭘 해 주려고 안달이지?’


이제 와서 재력을 과시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추측하길, 가문의 배포와 관대함을 보여 주려는 뜻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상황을 이해한 류지호가 잠시 뜸을 들였다.


- 나중에 말씀드려도 될까요?

- 의외야. 호기롭게 미래를 진단하고 당당하게 주식을 사달라고 요구하더니. 이런 면에서는 조심스러운 거야?

- 말씀은 감사하지만, 전 아직 고등학생이에요. 벌써부터 돈 맛에 취하는 것도 문제가 되고요. 안락한 삶에 안주하고 싶지도 않아요.

- 나중에 어른이 돼서 더 큰 기회에 써먹겠단 말이야?

- 그건 그때 가 봐야 알 것 같아요.

- 거래를 할 줄 아네. 역시 신중하단 말이야.


그녀는 핸드백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금테가 둘린 네모난 명함엔 그레이엄이라는 가문의 이름과 캐서린의 이름이 그리고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

조심스럽게 명함을 받아 드는 류지호에게 캐서린이 말했다.


- 나중에라도 부탁할 일이 생긴다면 언제든 연락해. 그건 파커와 상관없는 내 개인 명함이니까.”


말하자면 그레이엄 가문의 일원으로서의 개인 명함이라는 소리다.

파커 가족은 팬암 항공의 여승무원의 안내를 받아 퍼스트 클래스 라운지를 나섰다.


“잘했어요. 급하게 먹는 밥은 체하는 법이에요.”


신효정이 나지막한 어조로 칭찬했다.


- 캐서린, 팬암 주식도 가지고 있어요?

- 그건 왜?

- 아니에요. 그냥 요.


류지호는 팬암이 몇 년 후에 파산한다는 걸 말하려다 말았다.

이유를 물으면 대답할 근거가 궁색했기 때문이다.

팬암 항공의 파산은 하이재킹 영화 시나리오를 쓰면서 알게 되었던 사실이다.

전생에 하이재킹의 사례를 찾다가 우연히 알게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다시 뵐 때가지 건강하세요.”


떠나기 전 윌리엄은 마지막 한마디에 진심을 담아 당부했다.


- 자신을 마음껏 드러내지 말거라. 세상에는 싹이 자라기 전에 밟아버리는 못된 짐승들이 얼마든지 존재한단다.

- 명심할게요.

- 다음 만남은 미국에서 봤으면 하는구나.

- 가까운 시일에 찾아뵐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그렇게 파커 가족은 팬암 항공의 퍼스트 클래스에 탑승해 한국을 떠났다.


‘왜 이런 감정이 드는 거지?’


류지호는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마음 한편이 뭉텅 잘라나간 듯 상실감이 밀려왔다.

허전한 마음을 안고 김포공항 청사를 나와 공항리무진에 올라탔다.

인천으로 향하며 지갑 속에 넣어 둔 캐서린의 명함에 대해 생각했다.


‘과연 이 명함을 쓰게 될 일이 있을까?’


미래의 일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류지호가 정말로 하고 싶은 것.

이전 삶에서 미쳐 못 해 봤거나 이루지 못했던 것.

일일이 꼽아보자면 한도 끝도 없다.

그 중 당장 무엇이 최우선인지 조차 확실치 않다.

만약 류지호가 세상에 나가 넘을 수 없는 벽에 부딪치게 된다면, 캐서린이 주고 간 이 특별한 명함이 또 하나의 히든카드가 될 것이다.

그렇기에 류지호는 좀 더 신중해질 필요가 있다.

이 카드를 언제,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사용할지에 대해서.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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