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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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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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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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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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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2쪽

오늘 넌 영화감독 같았어! (3)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이철웅이 옷차림을 점검하며 서성이고 있다.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이철웅이 신포고로 올라가는 언덕길 저 아래를 연신 쳐다봤다.

그러다 누군가를 발견하고 헐레벌떡 달려갔다.


“안녕하세요.”


이철웅이 자신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황혜경에게 넙죽 인사했다.

공다연이 인사는 받지도 않고 대뜸 물었다.


“우리 기다렸어?”

“에스코트 하려고...”

“해 그럼. 뭐해?”


공다연이 매몰차게 말했다.


“깜댕아, 이년이 반반한 쌍판대기 믿고 싸가지가 좀 없다. 그러려니 해.”

“언니!”

“확! 혼날래?”


황혜경이 도끼눈으로 부라리자 공다연이 얌전해졌다.

남학생들이 모르는 사실이 있다.

군기를 잡는 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

여학교 서클 군기가 남고 군기 못지않다는 점이다.


“저를 따라오세요.”


이철웅이 얼굴에 미소를 띠며 앞장섰다.


“그렇게 웃지 마. 변태 같아.”

“넌 친구한테 왜 그렇게 매몰차. 우린 지금 JBS 대표야.”

“언니이~”


공다연이 코맹맹이 소리로 황혜경에게 애교를 부렸다.


“징그러워, 이년아!”

“힝~”

“쟤한테 사과해.”

“알았어요. 깜댕아 내가 좀 지나쳤어. 미안.”

“그, 아니... 괘, 괜찮아.”


갑작스런 사과에 당혹스러움이 몰려와 말까지 더듬는 이철웅이다.

휴일이라 신포고 일대는 한산했다.

공다연과 황혜경은 신포고 방송부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넌 웬일이야?“


한수호의 물음에 황혜경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매니저 자격으로 따라왔지.”

“무슨 매니저씩이나 필요해?”

“사내놈들이 득실거리는 늑대소굴에 우리 예쁜이만 보내라고?”

“.....암튼 잘 왔어.”

“많이 찍었어?”

“오늘 다연이 것만 찍으면 뮤직비디오는 끝.”


신포고 아랫동네에서 자취하고 있는 연정훈의 집을 시작으로 신포고 인근에서 3주에 걸쳐 짬짬이 촬영을 진행했다.

오늘은 뮤직비디오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들만 모아서 촬영할 예정이다.

원래 영상 작업은 막대한 예산이 동원된다.

게다가 집단 창작이기도 해서 배우와 스태프들의 스케줄과 계약이 얽혀 있기 때문에 효율적인 촬영 스케줄을 계획해 실행한다.

따라서 한 장소에서 해당하는 장면을 모두 모아서 찍는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과연 저렇게 앞뒤 장면을 바꿔가면서 순서 없이 마구잡이로 뒤섞어서 찍어도 장면이 이어질까라고 의구심이 든다.

편집된 영상을 보여주면 스토리가 일관되게 정립되고 감정선도 정리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놀라곤 한다.

씬(Scene)끼리 모아서 찍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때론 같은 씬 안에서 커트들을 카메라 셋업(위치)별로 모아서 찍기도 한다.

뭐든 도를 넘거나 지나치면 좋지 않은 법.

몰아 찍는 것을 마구 섞어가며 찍다보면 배우들이 감정을 조절하는 데 애를 먹기도 한다.

가령 방금 전까지 서로 죽일 듯이 싸우다가 다음 씬 촬영에서 서로 그윽한 사랑의 눈길을 주고받아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면, 극단적인 감정을 오가야하는 배우는 매우 곤란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 같은 이유로 연극무대 베테랑들이 처음 영화나 드라마 작업을 할 때 낭패를 본다.

대학로에서는 온갖 찬사를 받는 배우가 영화로 넘어와 연기력 논란에 휩싸인 경우, 영상 매체에 적응을 못했기 때문일 경우가 태반이다.

이는 상업영화나 드라마의 일반적인 촬영형태다.

독립영화나 저예산 예술영화의 경우에는 감독에 따라 첫 번 째 씬부터 마지막 씬까지 시나리오 순서대로 찍기도 한다.

그런 경우 감독들은 작업의 효율성보다는 배우의 감정 흐름을 자연스럽게 담아내려는 의도에 무게를 둔다.

이런 것들을 류지호가 일일이 설명할 순 없었다.

설령 설명한다고 해서 알아들을 것 같지도 않고.


“이렇게 막 섞어서 찍어도 돼?”


신포고 방송부 사이에서도 의구심을 갖는 1,2학년이 많았다.

그들로서는 처음해보는 영상작업이다.

당연히 순서대로 촬영해야 하는 줄 알았다.

류지호가 비디오 데크 두 개를 연결해 거칠게 가편집을 해서 보여줬다.

그제야 방송부원들이 이해했다.

말로 설명한 것이 아니라 직접 결과로 보여준 것이다.


“근데 넌 이런 걸 다 어디서 배웠어?”


다들 류지호더러 ‘대단하다‘ ‘최고다‘라고 칭찬하기 바쁠 때, 김석민이 예리하게 물었다.


“자세히 말할 순 없는데... 스크린도 열심히 보고 배다리에서 비디오 촬영책도 사서 배우고. 나중에 내가 뭔가 하는 걸 보면 알 수 있을 거야.”


당장은 그렇게 둘러댔다.

어차피 웨딩촬영 사업을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설명이 될 테니까.


“자, 오늘도 열심히 달려보자!”

“파이팅!”


학교 주변에 미리 양해를 구해둔 구멍가게로 이동했다.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해가 저물면 조명을 칠 수 없는 열악한 상황이다.

신포고 방송실에는 구색을 맞추기 위해 썬건 라이트가 구비되어 있다.

이 휴대용 조명기는 배터리를 충전시켜 사용하는데, 이동성이 좋기 때문에 뉴스 취재나 다큐멘터리 같이 이동이 많은 촬영을 할 때 효과적이다.

하지만 썬건은 작은 피사체에게만 빛을 비출 수 있기 때문에 야간촬영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거 12시간 이상 충전한 거야?”

“그럴걸. 근데 지호야, 왜 12시간 이상 충전해야 하는 거야?”

“기본이 그래. 한 2년 썼으니까, 완충하려면 더 걸릴 거야. 20분 연속으로 on 상태로 두면 조도가 뚝 떨어질 걸?”

“넌 그런 걸 다 어떻게 아냐? 형들도 잘 모르던데?”

“스크린에 다 나와. 배다리에서 비디오촬영 책 사다가 봤어.”


하재근과 촬영을 담당한 3학년 선배가 촬영 커트를 확인하며 구멍가게를 들락날락 거렸다.

박상은이 하나라도 배워두려고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이철웅은 화장을 하고 있는 공다연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고, 용팔이 역할을 수행해야하는 3학년 선배는 연기연습을 했다.

류지호가 최원석을 데리고 황혜경에게 다가갔다.


“선배님, 원석이도 분 좀 발라주세요.”

“뭐? 미쳤어? 남자가 무슨 화장이야!”


최원석이 질색하며 펄쩍 뛰었다.


“남자가 화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가 분장을 하는 거야. 인마!”


남자배우 역시 여러 가지 화장을 하게 된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색과 촬영한 색은 달라. 그러니까 색온도라는 게 있는데... 암튼 빛의 노출에 따라 색이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과 다르게 보이기도 해. 그래서 배우들이 메이크업을 하는 거야. 배우의 미적인 용도, 이목구비를 또렷하게 보이게 하는 용도 외에 피부톤에 따른 빛 반사율을 조정하기 위한 화장을 하는 거지.”


노인분장이나 피, 멍 따위의 특수분장이 아니더라도 배우 메이크업 역시 전문분야다.

연극·TV·영화 분장 분야를 파고들면 끝이 없다.


“우리 같은 학생이 해봐야 뭘 얼마나....?”


물론 고등학교 방송부처럼 아마추어들이 VHS카메라로 촬영하고 조명도 없이 자연광으로 촬영하는데 메이크업을 한다고 얼마나 화면발을 잘 받을까 의심할 수도 있다.


“아주 기본적인 화장을 한 상태에서 반사판의 빛을 받으면 인물이 훨씬 살아나. 이따 보여줄 게.”


모두가 못 믿는 눈치다.


“결혼식에서 신랑, 신부가 두꺼운 화장을 하잖아. 실물을 볼 때는 짙은 화장에 거부감이 들 수도 있지만 그들이 찍힌 사진이나 비디오를 보면 인물이 살아나지 않냐?”

“조금만 기다려. 다연이 끝나면 원석이도 해줄게.”


류지호의 설명에 모두가 납득했다.

아니 납득할 수밖에 없다.

촬영에 참여한 선배들이 순순히 협조하라는 살벌한 시선을 보내왔으니까.


“다연이 루즈는 분홍색이 좋을 것 같아요. 최대한 은은하게. 볼 터치도 어른처럼 하지 마세요. 촌스러워요.”


황혜경이 사나운 눈초리로 류지호를 쏘아봤다.


“정정할게요. 청순한 이미지니까 과한 화장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남자인 네가 뭘 알아. 거치적거리니까 저리 가.”

“예.”


공다연이 류지호를 향해 혀를 쏙 내밀며 놀렸다.


“못난이.”


ENG 촬영에서 주로 쓰는 파운데이션 번호를 알려주려다 말았다.

너무 두껍지 않은 신부화장, 그 정도 톤이면 충분하니까.

지식, 정보,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흐려지거나 잊어먹게 된다.

그런데 경험은 아무리 시공간을 초월해도 지워지지 않는 모양이다.

파운데이션 넘버까지 떠오르는 걸 보면.


“다연이 가게 안에 앉아있는 커트부터 찍자!”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었다.

어느 날 조용한 변두리 동네 구멍가게에 청순하고 예쁜 여학생(공다연)이 엄마를 대신해서 하루에 일정한 시간 동안 가게를 본다.

여학생의 도도하고 아름다운 외모에 동네는 시끄러워진다.

평소 백수 삼촌의 담배 심부름을 해오던 고등학생 남학생(최원석)이 그녀를 보고 한 눈에 반한다.

그렇게 짝사랑이 시작된다.

최원석뿐만 아니라 동네 모든 남자들의 사랑을 독차지 하는 공다연.

너도 나도 달려들어 고백하지만, 연신 차이기 일쑤다.

동네 남정네들이 고백하는 것을 보며 최원석도 용기 내어 고백하려 한다.

하지만 늘 가게 앞에서 발길을 돌린다.

한편 동내에서 제일 잘나가는 바람둥이 대학생(한수호)은 평소 자신이 찍은 여자는 3일 안에 넘어 온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공다연에게 접근한다.

하지만 그런 대학생 역시 가차 없이 차이고 만다.

한참 짝사랑을 키우던 최원석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옆 동네 불량배들이 공다연을 괴롭히는 것을 발견한다.

호기롭게 나섰다가 그만 대차게 얻어터진다.

그 용기에 마음을 연 공다연은 담배 심부름을 오는 최원석을 향해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준다.

고교생의 순수한 연정을 스토리에 담았다.

대본과 콘티를 작성한 하재근의 설명이다.

류지호 입장에서는 혀를 내두를 만큼 유치한 스토리텔링이다.

류지호가 은근슬쩍 다른 아이디어를 제안했다가 소위 ‘까였다’.

이 당시 고등학생들에게는 하재근의 원안이 훨씬 재미있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자극적인 걸 넣지 않아도 저 정도 가지고 재미있다고 웃는 걸 보면 아직은 청소년들이 순수한 거겠지.’


최원석이 골목길로 들어오는 풀 쇼트(Full Shot)를 촬영했다.

그리고 곧바로 가게 앞에서 망설이는 장면을 찍을 준비를 했다.

류지호가 은박지를 붙여 만들어 놓은 반사판을 이재호에 손에 쥐어줬다.

반사판에 태양광을 반사시켜 최원석의 얼굴에 비췄다.

반사된 빛이 최원석 얼굴에 닿자, 그 각도 그대로 이재호의 손에 반사판을 쥐어주었다.


“이대로 가만히 서 있어요.”

“얼굴에 조명 치는 거야?”

“예.”

“난 잘 모르겠는데...”


류지호가 반사판을 쥐고 있는 이재호의 손을 잡았다.

반사판을 살짝 기울였다가 다시 원래 위치로 각도를 맞췄다.

그 과정을 몇 번 하면서 이재호에게 빛이 닿는 것을 확인시켜줬다.


“흐리지만 원석이 얼굴에 살짝 빛이 닿는 것 보이죠?”

“응.”

“바스트 샷이나 압부, 아니 클로우즈업 찍을 때 이렇게 레프를 대주세요. 원석이 인물 좀 살게.”


레프는 리플렉터를 이르는 말이다.

반사판이라 부르기도 한다.

리플렉터는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하얀색 스티로폼이나 아크릴 판 또는 은박지나 거울을 이용할 수 있다.

주로 야외에서 자연광을 이용해 부족한 빛을 보충해주거나, 빛이 더 필요한 부분만 보충해 줄 수 있다.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어.”

“육안으로 보는 것보다 실제 원석이 얼굴의 콘트라스트(명암대비)의 차이가 커요. 자연광이 직접 닿지 않는 딱딱한 섀도우(그림자)를 밝게 해줘서 전체적으로 부드럽게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하는 거죠.”


회화, 사진, 영상에서는 평면을 입체로 표현하기 위해 그림자 효과를 넣는다.

그림자가 주는 착시에 의해 인간은 약간의 입체감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입체감을 주기 위해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을 의도적으로 넣어 촬영해 입체감을 주는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의 거의 모든 장면에 명암대비 효과를 주는 것을 볼 수 있다.

스릴러, 느와르와 공포영화 장르에서는 아주 강하게 명암대비를 주며, 일반적인 드라마 장르는 보통 효과를 준다.

아동영화나 코미디 장르에서는 명암대비 효과를 아주 약하게 준다.

그것도 과거의 이론이다.

현대 영화에서는 정서와 심리를 묘사하기 위해 장르와 상관없이 명암대비 효과를 선택적으로 사용한다.

예를 들어 전쟁 영화 같은 경우 강렬한 전투씬이 없는 소소한 일상을 다룬 반전영화라면 전체적으로 드라마 장르의 명함대비를 주다가 특정한 장면에서 주인공의 감정과 아픔을 드러내기 위해 강렬한 명함대비를 줄 수도 있다.

또 다른 예로는 범죄영화에서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취조실 장면에서 등장인물의 바로 머리 위에서 비추는 작은 텅스텐 전등 하나가 심리적인 감수성을 느끼게 해주는 효과를 주기도 한다.

이재호도 반사판의 용도를 안다.

다만 류지호가 설명한 것처럼 전문적인 영역까지 알고 있진 않았다.

신포고 방송부원을 제외한 모두가 이재호가 그저 프로 흉내 내며 폼 잡으려고 반사판을 들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인물을 찍을 때 적당한 명암대비를 주면 평면적인 모습에 입체감을 줄 수도 있고, 심리적인 묘사도 줄 수 있다.

현재 카메라 기종이 그걸 얼마나 받쳐줄지 알 순 없지만.


“오빠! 그거 나도 해줄 거죠?”


어느새 공다연이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지호한테 물어봐.”


이재호는 답을 류지호에게 떠넘겼다.


“무슨 효과 때문에 하는 건지 알고 해달라는 거야?”


류지호가 시큰둥하게 물었다.


“다연이가 해달라잖아. 지호야 그냥 해주면 안 돼?”


이철웅이 간절한 눈빛으로 류지호에게 말했다.


“후우, 알았어. 한다 해.”

“싫어. 억지로 할 거면 하지 마.”


류지호는 공다연의 억지에 말문이 막혔다.


“애들아, 촬영에 집중 좀 해줄래?”


한수호의 목소리가 주의를 환기 시켰다.

잠시 중단 되었던 촬영이 재개되었다.


# 설레고 상기된 얼굴의 원석, 장미 한 송이를 들고, 경쾌한 발걸음으로 걸어온다.

가게 앞에 잠시 멈춰 서서 가볍게 호흡을 고른다.


“스탠바이..”


동시녹음을 진행하는 영화나 드라마가 아니기 때문에 스케치북에 씬 넘버와 컷, 테이크 넘버를 적어 첫 화면에 등장시키는 것으로 편집점 마킹을 대신했다.

슬레이트라고도 불리는 클래퍼보드(clapperboard)는 고등학생이 구하기 쉽지 않다.

비디오카메라 앞에서 스케치북이 사라졌다.

하재근이 힘차게 촬영 시작을 알렸다.


“큐!”


방송인을 지망하고 있어서 인지 하재근은 ‘레디 고’나 ‘레디 액션’보다 ‘스탠바이 큐’를 외쳤다.


# 원석이 수줍게 장미 한 송이를 다연에게 건넨다.

다연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원석을 바라보기만 한다.

잔뜩 긴장한 원석은 얼음이 된 듯 굳어있다.

다연, 화사하게 웃는다.


“재근이형, 다연이 위치 좀 옮기죠. 자연광이 닿는 곳하고 어두운 곳하고 경계에 앉아있으니까 아수라 백작 같아요. 느와르도 아닌데 콘트라스트가 너무 강하네요.”

“밝은 데로 옮기는 게 좋겠지?”

“안에 형광등 켜놓을게요. 안쪽이 너무 어둡지 않아요?”

“그래라.”

“다연이 바스트 샷 딸 때 창가 쪽으로 얼굴 조금만 움직이면 안 될까요? 배경이 너무 심심해요.”

“......”

“배우가 앉아있는데 그 높이에서 들고 찍기로 촬영하면 약간 하이앵글이잖아요. 트라이포드 놓고, 아이레벨로 가는 게 안정적인 것 같아요.”

“.......”

“다연아, 고개 살짝만 숙여. 아니 너무 숙였어. 십 원어치만 들어봐. 아니아니, 너무 들었어. 그래 그 정도. 그 상태에서 살짝 자기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아니 반대로.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한쪽이 완전이 먹으로 그림자 진단 말이야.”

“......”

“공다연, 고혹적이고 성숙한 매력은 안 돼. 넌 십대가 보는 뮤비의 여자주인공이야. 성적 욕망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편안하고 부드럽고 따뜻한 그런 느낌을 전달해야 돼. 청순이란 단어의 뜻 몰라? 맑고 순수한... 감정 잡지 마. 눈동자가 촉촉하잖아. 너무 멀게 느껴져 닿을 수 없는 그런 동경... 억지로 너 스스로 빛나려고 애 쓰지 마. 담백하게. 가만히 햇빛이 얼굴을 간질이는 걸 즐기는 느낌을 상상해 봐. 알겠어?”

“으, 응.”


공다연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류지호는 열정적으로 조명에 관여하고 연기 디렉션에 관여했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자연스레 모든 이들의 시선이 모일 수밖에.


‘나도 모르게 버릇이 튀어나왔네.’


류지호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슬그머니 레프 한 장을 챙겼다.

공다연의 얼굴을 향해 레프에 반사되는 빛을 이리저리 맞췄다.

그런 류지호를 공다연이 묘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뭘 봐? 촬영에 집중해.”


언제 흥분했냐는 듯 류지호의 말투가 사무적으로 변했다.


# 잘 차려 입은 원석이 가게 앞을 서성거린다.

간간이 유리창에 두 손으로 빛을 가리고 들여다본다.

몹시 긴장했다.

그때, 가게 안쪽에서 다연이 걸어 나와 담배 파는 곳에 자리를 잡는다.

원석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 반갑게 인사를 한다.

그 모습을 빤히 보던 다연은 콧방귀를 뀔 뿐...


“컷! 오케이!”


연기를 처음 해보는 최원석이다.

당연히 NG를 낼 수밖에 없다.

반면에 공다연의 촬영은 척척 진행되고 있다.


‘원래 싹수가 있었네.’


한동안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다.

최원석이 공다연에게 수줍게 장미를 건네는 장면을 촬영할 때.

하재근이 고민에 휩싸였다.

콘티를 들춰보고, 촬영한 부분을 돌려보며 장고에 들어갔다.


“음...”


하재근이 저도 모르게 엄지손톱을 씹으며 초조해 했다.

찍을 분량은 아직 많이 남았다.

반면에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다.

스태프와 배우로 참여한 모든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무료함을 달래고 있다.

류지호는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프로들이 아니다.

한번 주의가 흐트러지면 곤란하다.

다시 촬영을 재개했을 때 집중력을 끌어올리는데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점은 류지호는 촬영이 지연돼 공다연을 하루 더 불러 촬영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다는 사실이다.


뿌우웅!


류지호는 팔뚝에 입을 대고 입방귀 소리를 냈다.


“뭐야?”

“누가 방귀 뀌었어.”

“누구야?”


금세 촬영장은 방귀 뀐 놈을 찾겠다고 소란스러워졌다.

그러면서 서로 낄낄거리며 농담 따먹기를 시작했다.

축 쳐졌던 분위기가 잠시나마 살아나는 것 같다.

류지호는 시침을 뚝 떼고 홀로 외롭게 고민하고 있는 하재근에게 다가갔다.


“형....”

“....응?”

“우리는 뮤비를 찍는 거지 드라마를 찍는 게 아니에요.”

“알아.”

“이미지만 생각하세요. 스토리의 연속성이나 커트바리도 콘티뉴이티도 머릿속에서 지우세요.”

“....어?“

“예고편 찍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극적인 장면만, 하이라이트만 얻으면 되잖아요. 우린 영화나 드라마를 찍는 게 아녜요. 4분짜리 예고편. 그렇게 생각하면 좀 부담이 덜하지 않을까요?”


하재근은 정신이 번쩍 드는 걸 느꼈다.


“...4분짜리 예고편.”


하재근이 뭔가 깨달았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3학년들에게 달려갔다.

류지호는 기운을 차린 하재근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감독이란 직업에 대한 생각이다.

겉보기에는 감독들이 멋있어 보이고, 폼 나 보인다.

하지만 외로운 직업이다.

촬영이 시작되면 수십 명의 스태프가 감독만을 바라본다.

영화감독은 아주 소소한 것부터 중대한 판단까지 홀로 결정해야 하는 자리다.

연극은 배우의 예술, 드라마는 작가의 예술,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는 말이 있다.

대배우들이 종종 말하곤 한다.

영화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건 감독의 디렉션이라고.

배우의 뜻도 중요하지만,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그건 감독의 결정이라는 의미다.

아주 적은 규모의 단편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현장의 선장은 감독이다. 이것이 영화계의 불문율이지.’


류지호는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모든 감독이 알고 있지만 모든 감독이 유능한 선장은 아니라는 사실.

유능하지 못했던 선장에는 류지호 본인도 포함된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는 분명 그랬다.


“스탠바이~ 큐!”


촬영이 다시 활기를 띠었다.

그러다 점심시간을 훌쩍 넘겨 버렸다.

근처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시켜 먹었다.

여름의 강한 햇빛에 진저리를 치던 공다연이 류지호에게 시비를 걸었다.


“야, 못난이! 일루 와서 양산 좀 들어줘.”


류지호는 공다연을 상대하는 것이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니다.

그냥 다 무시하고 학교 방송실로 돌아가 오늘 촬영분에 대한 편집을 궁리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문제는 내가 촬영장을 떠나기 싫다는 거지.‘


류지호는 공다연의 주변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어디 가? 너는 배우인 내가 중요해. 선배들 심부름이 중요해?”


애초에 시비 자체가 억지였기에, 류지호는 대답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예전 같았으면 이미 화를 내고도 남았다.

어린 애와 투덕거리는 것도 꼴불견이다.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쳇, 잘난 척은.....”


공다연이 시비를 걸고 귀찮게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혹시 얘가 날 좋아하나?’


류지호는 자신이 생각해도 터무니없는 일이라 피식 웃고 말았다.


작가의말

검은 호랑이의 기운으로 작년 한 해 불운을 모두 씻어내고 뜻 하는 걸 모두 이루시는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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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필요한 초능력은 재력(財力). (2) +11 22.01.03 11,434 233 21쪽
27 필요한 초능력은 재력(財力). (1) +8 22.01.03 11,880 233 20쪽
26 블루오션인 건 확실해! +8 22.01.02 11,982 246 27쪽
25 오늘 넌 영화감독 같았어! (4) +12 22.01.01 11,501 256 20쪽
» 오늘 넌 영화감독 같았어! (3) +11 22.01.01 11,506 246 22쪽
23 오늘 넌 영화감독 같았어! (2) +8 21.12.31 11,781 233 16쪽
22 오늘 넌 영화감독 같았어! (1) +8 21.12.31 12,551 242 24쪽
21 우리는 가족입니다! (3) +13 21.12.30 12,443 258 24쪽
20 우리는 가족입니다! (2) +12 21.12.30 12,476 260 20쪽
19 우리는 가족입니다! (1) +11 21.12.29 13,242 238 21쪽
18 어떤 녀석인지 궁금해지네... (4) +10 21.12.29 13,219 262 23쪽
17 어떤 녀석인지 궁금해지네... (3) +13 21.12.28 13,187 265 16쪽
16 어떤 녀석인지 궁금해지네... (2) +8 21.12.28 13,582 244 18쪽
15 어떤 녀석인지 궁금해지네... (1) +6 21.12.27 14,120 273 20쪽
14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3) +7 21.12.27 14,322 280 22쪽
13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2) +11 21.12.26 14,592 277 21쪽
12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1) +12 21.12.25 15,141 266 22쪽
11 돈을 왕창 벌자! +13 21.12.25 15,578 272 20쪽
10 티끌모아 태산이 되는 것처럼... (2) +9 21.12.24 15,274 275 20쪽
9 티끌모아 태산이 되는 것처럼... (1) +8 21.12.24 15,879 260 21쪽
8 Goodfellas. (4) +10 21.12.23 16,145 279 20쪽
7 Goodfellas. (3) +13 21.12.23 16,669 262 20쪽
6 Goodfellas. (2) +12 21.12.22 17,261 292 19쪽
5 Goodfellas. (1) +20 21.12.22 18,504 295 21쪽
4 Again 1987. (3) +25 21.12.21 19,260 328 20쪽
3 Again 1987. (2) +11 21.12.21 22,046 337 20쪽
2 Again 1987. (1) +20 21.12.20 27,772 398 21쪽
1 프롤로그. +49 21.12.20 40,615 462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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