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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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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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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9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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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9,922,0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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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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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
글자
22쪽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1)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죽마고우(竹馬故友).

대나무로 만든 말을 타고 놀던 오랜 친구를 이르는 사자성어다.

사인방은 류지호의 둘도 없는 죽마고우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엔 그랬다.

이번에도 똑같이 오랜 친구로 남을 것이라 장담할 수 없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절대 가라앉지 않는 배(ship)를 우정(friendship)이라고 한다.

하지만 좋을 때는 둘이 타지만 나쁠 때는 한 명만 탈 수 있는 배이기도 하다.

서로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관계는 인맥이다.

진정한 친구라고 할 수 없다.

우정은 수많은 추억을 함께하고, 희로애락을 공유하는 유대감 속에서 끈끈해진다.

류지호는 하루하루 바쁜 일과를 보내고 있다.

그렇다보니 사인방과 어울리는 시간이 없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어울리며 수많은 추억을 쌓았던 이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무조건 친구들과 보내야해.”


이런 상태라면 일반적인 동창들처럼 되어버릴 것 같아 불안했다.

류지호는 생각난 김에 사인방에게 연하대 후문으로 모이라고 통보했다.

그 외에 다른 공통점을 찾을 수 없었다.

시꺼먼 사내 놈 넷이서 월미도에 놀러갈 수도 없고.

왜 하필 모일 곳이 술집밖에 없는지 답답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6월의 마지막 날 친구들을 아네모네로 불렀다.


“우찬이는?”

“요새 야자 째서 잘 못 봤어.”

“우찬이가 우리만 아니었으면 진즉 광렬이 새끼 들이받았을 거다. 우리까지 똥개 패거리한테 찍힐까봐 불같은 성질 참고 있는 거지.”

“내가 그 동안 바빠서 우찬이를 챙기지 못했어.”


류지호가 미안함을 담아 말했다.


“네가 우찬이 보모냐? 챙기긴 뭘 챙겨?”


황재정이 까칠하게 쏘아붙였다.


“친구잖아. 친구니까......”

“지랄! 친구는 뭐 존심도 없냐? 자기 일은 지가 알아서 하겠지. 우찬이 네 꼬붕 아냐.”

“누가 꼬붕이래? 걱정이 되잖아 걱정이!”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네가 이러는 게 더 오바야.”


두 친구가 언쟁을 벌이자 김준우가 끼어들었다.


“왜 니들끼리 싸우고 그래.”


류지호는 답답했다.


‘이 답답한 친구들아, 우찬이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아니까 내가 이러지.’


고우찬이 뒷골목 세계에 발을 담갔다가 평생 감옥에서 썩게 된다는 사실을 류지호는 속으로 삼켜야만 했다.

물론 친구들에게 말을 해봐야 믿지도 않을 테고, 미쳤다며 병원에 가네 마네 난리를 칠 것이 뻔했다.

황재정이 심드렁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넌 우찬이 신경 끄고, 하던 공부나 열심히 해.”


김준우가 웃으며 말을 보탰다.


“지호가 처음에는 날라리인줄 알았는데 완전 모범생이었어.”

“우찬이는 범생이는 쌩까는 놈이야. 불알친구라고 친하게 지내는 거지.”

“지호는 공부 잘하는 방송부하고 놀아야지 성적 안 떨어져.”

“맞아. 날라리 짓거리 하다가 성적 떨어지면 선배들한테 뒈지게 맞는다.”

“지호 너는, 우찬이 신경 끄고, 그냥 기말고사 준비나 잘해라.”

“.....신경 끄라고?”


류지호는 쇠망치로 뒤통수를 후려 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


“그래, 무슨 자격으로 참견이냐?”


황재정의 무심한 듯 툭 던지는 말이 더욱 아프게 다가왔다.

우정은 관리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성을 가지고 함께 하는 거다.

단순히 몰려다니면서 노는 것으로 깊은 관계로 맺어지는 것도 아니다.

친구들이 류지호와 인연을 맺은 것이 이제 겨우 반년이다.

류지호는 친구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깊이 이해하고 있다.

반면에 친구들은 아니다.

아직 서로의 아픔을 공감해 줄 정도로 정이 쌓이지 않았다.

고뇌에 빠진 류지호의 표정을 보며, 김준우가 의문 섞인 표정으로 물었다.


“왜 인상을 박박 긁고 있냐? 똥마려워?”


김을 빼는 김준우의 말에 류지호가 버럭 화를 냈다.


“내가 누구 인생 때문에 고민을 하는데!”


하지만 친구들 입장에서 그런 류지호의 고민이 이해가 될 턱이 없다.


“후우, 우리 앞으로 서로 신경 좀 쓰고 살자. 너희들도 놀 생각만 하지 말고, 공부 좀 하고, 운동도 좀 해.”


류지호가 당장 해 줄 수 있는 말은 이 정도였다.


“난 먼저 가볼게.”


고우찬이 빠진 술자리는 빠르게 시들해졌다.

류지호 홀로 아네모네에 남아 복잡한 심사를 달랬다.

사장 채연지가 계란말이 안주를 가져왔다.


“어린 녀석이 웬 청승이야?”


채연지가 양해도 구하지 않고, 류지호의 맞은편에 앉았다.

류지호가 고개를 들어 술기가 도는 눈으로 채연지를 바라봤다.

농염한 중년 미부인의 하얗고 긴 목덜미와 쇄골 아래로 가슴골을 슬쩍 내비치고 있다.


“맛있겠지? 공짜야 먹어봐.”


류지호는 문득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분식집 아줌마가 주인공을 유혹하는 장면.

분식집 아줌마가 고등학생 주인공을 유혹하기 위해 윗옷을 벗어 가슴골을 드러낸다.

급기야 주인공의 허벅지를 쓰다듬다가 키스까지 하며 주인공을 덮치듯 올라탄다.

순진한 주인공은 아줌마의 유혹을 뿌리치고 분식집을 떠난다.


“한 녀석이 안 보인다? 그 놈 사고 쳤어? 학교에서 잘렸어?”

“멀쩡히 학교 잘 다닙니다.”

“친구들이 걔 잘 이끌어줘라. 팔자가 아주 드센 놈이야.”

“아줌마가 뭘 안다고 그러십니까? 점도 봅니까?”


기분이 상한 류지호의 말투가 거칠어졌다.


“걔 양아치들하고 여기 자주 와.”

“양아치요?”

“학생과 양아치도 구분 못할까봐서?”

“언제 왔습니까? 와서 술만 마셨습니까?”

“술만 마시면 좋게. 연하대 학생들하고 여러 번 싸울 뻔했어.”

“고우찬 이 미친놈이... 뭘 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도대체.”

“너 날라리 아니지? 너는 친구들하고 다른 것 같아 보이는데.”

“......”

“친구라면 네가 필요할 때만 찾고 그러면 안 되는 거야.”

“......”

“날라리 흉내 내고 싶다고 친구들 이용해 먹고 그러면 못 써.”

“누가 이용해 먹는다고 그럽니까.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럼 어린 녀석들이 발랑 까져서 어른처럼 벌써부터 술친구냐?”


채연지의 일침에 류지호는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한 잔 받으시겠습니까? 손님도 없는데?”


류지호가 소주병을 들고 말하자, 채연지가 소주잔을 내밀었다.

류지호가 자조적으로 말했다.


“압니다. 친구라면 곁에서 든든한 편이 되어주는 거죠. 적어도 진정한 친구라면 방황하게 내버려 두면 안 되는 거죠. 같이 화내고 같이 슬퍼하고 같이 기뻐해야 하는 게 맞지요.”

“범생이 맞았네. 그런 멋진 말도 할 줄 알고.”

“아직도 저는 애송이인 것 같습니다. 다만 진짜 어른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준비하는 애송이라는 점이 예전과 달라졌다고 할까.....”

“호호호, 뭐니? 애늙은이 같은 말을 잘도 하네.”


성장은 젊은이만 하는 것이 아니다.

나이를 먹어도 계속 경험을 쌓다보면 성장하고 성숙해진다.

도전과 그에 따른 경험이 멈추는 순간.

성장도 멈춘다.

류지호는 이 당시에 몰랐던 것들을 하나하나 알아가며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

성장이 아니라 변화라고 해도 좋다.

달라지고 있는 것만큼은 틀림없다.

고등학생이 발랑 까져서 술집을 출입하는 것 빼고.


“아줌마, 고마워요.”

“고맙긴. 단골이라고 내가 주제넘게 참견했어.”

“제가 아줌마를 좀 오해했습니다.”


류지호는 아네모네의 주인을 삶을 포기한 무기력한 중년 여인인 줄로만 알았다.

절망 속에서 의지를 꺾은 사람은 이렇듯 주변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여전히 세상과 교류한다는 것은 삶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


“무슨 오해?”

“그냥 아줌마는 친절한 분이셨습니다.”

“술장사 하는 년이 불친절하면 손님이 오겠니?”

“매사에 의욕이 없었잖아요. 억지로 장사하는 것 같던데....”

“손님이 통 없어서 그래.”


6월 한 달간 대학가에서 연일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자연스럽게 최루탄 연기가 자욱할 수밖에.

그러자 대학가에는 사람의 발길이 끊어졌다.


“앞으로 잘 될 겁니다.”

“네 친구들 모두 연하대 입학해서 가게 매상 좀 많이 올려줘.”

“오늘 마신 건 외상으로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나중에 많이 팔아드리겠습니다.”


호호호.

눈치가 다른 속사정이 있는 것 같았지만, 채연지는 모른 척 웃으며 주방으로 돌아갔다.

류지호는 쓰디 쓴 소주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크!”


류지호는 떠올렸던 영화의 주인공처럼 순진하지 않다.

아네모네의 여사장은 영화 속의 분식집 아줌마처럼 류지호를 유혹하지도 않았다.

영화는 아무리 현실을 투영하고 반영한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판타지를 담는다.

류지호가 과거로 돌아온 것은 판타지다.

하지만 류지호가 앞으로 살아갈 삶은 엄연한 현실이다.


그날 밤.

류지호는 쉽게 잠들지 못하고, 머릿속은 복잡한 생각들로 가득 찼다.


“일단은 내 자신부터 똑바로 서야해. 실력 배양이 우선이야.”


류지호는 지천명이라는 50년을 살아 봤다.

겉보기에는 화려한 삶처럼 보이지만, 속은 빈 깡통이었다.

스스로 내린 그 평가를 부정하거나 외면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뼈대를 바로 세우고, 내실을 채우기 위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가짐을 가지려고 애썼다.

무리한다 싶을 정도로 하루를 바쁘게 보내고 있는 것 또한 변하기 위해서다.

그것은 본인을 위한 몸부림이다.

타인의 삶을 바꾸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골초에 말술이었던 황재정은 눈에 띄게 술담배가 줄어들었다.

사인방과 어울리면서 사진부 활동에 소홀했던 김준우는 적극적으로 서클활동을 하고 있다.

고우찬이 양아치와 어울리고 있는 것 말고는 대체로 좋게 흘러가고 있다.

류지호가 전혀 다른 1학기를 보냈던 것처럼 친구들도 분명 달라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류지호는 고민 끝에 결론을 냈다.

실천에 옮길 차례다.


❉ ❉ ❉


일요일은 신문이 나오지 않는 날이다.

때문에 류지호는 늦잠을 자는 편이다.

그래봐야 두 시간 더 자는 정도였지만.

놀아 달라 떼쓰는 여동생 류아라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

류아라가 오랜만에 놀아주는 큰오빠의 손을 잡고 수봉산으로 이끌었다.

수봉공원은 명색이 공원이지만, 낮에는 인적 없이 한적해서 재미가 없다.

그런데 류아라는 뭐가 그리 좋은 지 껑충껑충 뛰며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오빠랑 산책하니까 좋아?”

“응. 좋아!”


류아라가 천진난만한 눈으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오빠가 자주 놀아줄게.”

“약속!”


류지호가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했다.

사인방과 어울리는데 바빠 동생과 잘 놀아주지 않았었던 것 같다.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는 동생들을 데리고 곧잘 오락실도 가고, 수봉산을 탐험한다고 이리저리 산속을 누비기도 했었던 것 같았는데,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완전 달라졌다.


“그만 놀고 집에 가자. 다음에 또 놀아줄게.”


집으로 돌아온 류지호는 여동생을 어머니에게 넘겼다.

다시 집을 나서는데, 등 뒤로 심영숙의 잔소리가 들려왔다.


“나쁜 친구들하고 어울리지 말고. 항상 차 조심하고.”

“제가 어린 앤가요.”

“그럼 네가 어린애지 어른이니?”

“다녀오겠습니다!”


그랬다.

겉모습은 분명 어른은 아니다.

류지호는 쓰게 웃으며 30여분 거리의 종합버스터미널로 향했다.

경인고속도로 종점에 위치한 인천종합버스터미널은 1997년 하반기에 구월동으로 이전할 예정이다.

터미널 옆으로 수인선 화물기차가 다녔는데, 그 기찻길을 따라 조금만 걸어가면 고우찬의 동네가 나온다.


‘시간이 너무 흘러 어디가 어디인지 헛갈리네.’


다행히 고우찬의 아버지 고성재를 집 앞에서 만날 수 있었다.

고성재는 부리부리한 눈, 떡 벌어진 어깨, 럭비선수 같은 체형의 중년 남자로 막노동판에서 목수 일을 하고 있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그렇게 사람이 좋을 수가 없다.

그러나 술에 취하면 주사가 몹시 심했다.

그 때문인지 아내가 몇 년 전 집을 나가 소식이 완전히 끊어졌다.


“안녕하세요. 혹시 저 기억하세요? 우찬이 친구 류지호입니다.”

“안다.”


고성재가 걸걸한 목소리로 짧게 대답했다.


“우찬이 집에 있습니까?”

“퍼질러 자고 있을 거다. 들어가 봐라.”


부자는 샛방에 살고 있었다.

류지호가 단칸방 안으로 들어가서 본 광경은 고우찬이 팬티 차림으로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이다.


“우찬아 나 왔다! 일어나봐!”


류지호가 고우찬을 흔들어 깨웠다.

고우찬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류지호를 쳐다봤다.

인상을 한껏 찌푸린 후에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류지호가 계속해서 고우찬을 흔들어 댔다.

요지부동이다.


“이걸 그냥 확!”


그때 방으로 들어온 고성재가 고우찬의 다리를 발로 ‘툭’ 쳤다.


“고우찬, 일어나.”


그제야 고우찬이 몸을 일으켰다.

류지호를 발견한 고우찬이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고성재가 다시 한 번 발로 걷어차며 말했다.


“세수하고 옷 입어.”


고우찬은 아버지의 명령을 고분고분 따랐다.

고우찬이 부엌에서 세수를 하는 사이 고성재가 담배를 피워 물었다.


“밥 먹었냐?”

“저는 먹고 왔습니다. 식사 하셨습니까?”

“라면 끊여 먹었다.”


류지호는 고성재와의 자리가 불편했다.

산적 같은 외모는 접어두더라도 툭툭 던지는 대화법은 쉽게 말을 걸기 힘들었다.

다행히 고우찬이 금방 세수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왔다.


“왜 왔어?”


고우찬이 툭 던지듯 류지호에게 말을 걸었다.

단순하고 고집스런 성격은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다.


“같이 운동 가자고.”

“무슨 운동?”

“태권도.”

“싫어.”


그럴 줄 알았다.

류지호는 고성재를 공략할 생각이다.

공략대상을 바꾼 이유는 간단했다.

무서울 것 없는 고우찬도 아버지 말에는 고분고분해지기 때문이다.


“아버님, 제가 새벽에 신문을 돌리고, 태권도를 배웁니다. 우찬이하고......”

“짧게.”


고성재가 말을 끊었다.


“우찬와 새벽에 함께 운동도 하고 신문 돌려도 되겠습니까?”


고성재는 천성이 살가운 성격이 아니다.

그런 탓인지 외아들인 고우찬과도 데면데면 했다.

어디 가서 말은 못하지만 고성재는 아들에 대한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어미가 집을 나가 그 충격으로 잘못되지는 않을까.

삐뚤어지지는 않을까.

고성재는 자신의 인생 따위 관심 없었다.

아들 고우찬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성재는 류지호가 자신의 아들을 위하는 마음씀씀이에 큰 고마움을 느꼈다.


“싫어요!”


고우찬이 끼어들자 고성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신문 쎄 빠지게 돌려봐야 얼마 못 벌어요. 태권도비도 안 된다고요.”


고우찬은 류지호가 끼어들 틈도 주지 않고 항변했다.

류지호는 표정이 변하는 고성재를 가만히 바라봤다.


“아빠....”


고우찬이 그 답지 않은 애절한 표정으로 고성재를 바라봤다.

한동안 고민하던 고성재가 류지호를 향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하면 내 아들 놈에게 좋은 게 뭐냐?”

“우찬이 대학 보내고 싶지 않으십니까?

“불가능하지 않겠냐?”

“가능합니다!”


류지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어떻게?”

“체대를 노리면 됩니다. 아버님도 아시잖습니까? 우찬이가 힘 하나는 타고 났다는 걸.”

“막노동에나 쓸 만하겠지.”

“지금부터 시작하면 학력고사 보기 전에 3단까지는 가능합니다. 틈틈이 지역대회 나가 메달도 따놓으면 좋습니다. 실기위주 학과를 지원하는 거라 학력고사 부담도 적습니다. 우찬이한테 억지로 공부하라고 하면 절대 안 할 겁니다.”


고우찬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류지호를 사납게 째려봤다.

류지호는 모른 척 말을 이어갔다.


“유도학과로 유명한 학교가 있습니다. 내년에 4년제로 바뀌고, 우리나라에서 무도 쪽으로는 알아주는 학교가 될 거라고 들었습니다. 그 학교만 졸업할 수 있으면 나중에 태권도 체육관 차려 충분히 제 앞가림하며 살 수 있습니다.”


말한 대로 다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최대한 긍정적인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다.

고우찬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수가 없었으니까.


“얼마냐?”

“...예?”

“태권도 배우는 값이 얼마냐고?”

“아~ 감사합니다!”


류지호는 흥분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서서 허리를 굽혔다.

고성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렇게 고마워할 일 인거냐?”

“정말 잘 생각하신 겁니다. 제가 옆에 찰싹 붙어서 열심히 하나 안하나 감시하겠습니다. 맡겨주십시오.”

“그래.”

“아빠!”

“입 다물어. 만약 농땡이 치거나 설렁설렁 한다는 소리가 들리면 태권도고 뭐고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려 병신으로 만들 줄 알아.”


류지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고, 고우찬은 인상을 구겼다.


“고우찬, 남자라면 자기 한 몸쯤은 건사할 줄 알아야 한다.”


고성재가 아들을 향해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태권도 가지고는 건사 못할 텐데.....’


고우찬은 차마 아버지한테 그렇게 대들지 못했다.


❉ ❉ ❉


고우찬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용연태권도장의 입관절차를 밟았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류지호가 지켜보고 있다.

류지호의 모습은 어린 자녀를 억지로 끌고 온 영락없는 학부형의 모습이다.

홍 관장은 그런 류지호를 팔짱을 끼고 지켜보고 있다.


‘고놈 참...’


류지호는 평소에는 십대 청소년 같다가도 간혹 지나치게 어른스러울 때가 있었다.

나이에 비해 조숙한 아이들이 없진 않다.

그런데 류지호란 녀석은 조숙한 것 정도가 아니다.

어른 그 자체처럼 보일 때가 간혹 있었다.

고우찬이 입관서류를 내밀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다 썼는데요?”


홍 관장은 입관서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고우찬에게 물었다.


“태권도가 재미없을 것 같으냐?”

“솔직히 말해도 되요?”


홍 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없을 것 같아요.”


한 치에 망설임도 없는 고우찬이다.


“관장님, 탁 까놓고 말해... 무술 중에 뭐가 제일 세요?”

“그런 거 없어. 뭐든 한 가지를 오랜 시간 깊이 수련한 사람이 세겠지.”

“그럼 써먹기 쉬운 무술은 뭔가요?”

“권투나 합기도가 좋겠지.”

“그것 봐요.”

“인석아, 태권도가 왜 약해. 태권도 품새에 다 들어있는데. 정권지르기 하나를 깊이 오래 수련한 사람하고, 권투를 한 달 배운 사람하고 싸우면 누가 이길 것 같아?”

“권투선수요.“

“왜 그렇게 생각해?”

“그거 태권! 태권! 가만히 기합만 지르면서 그냥 서서 하잖아요. 어디에 써먹겠어요?”


고우찬이 정권지르기를 흉내 내며 불퉁하게 말했다.


“정권지르기가 태권도만 있겠냐? 다른 무술도 다 있어. 정권을 가장 효과적으로 지르거나 찌르는 운동이 뭔 줄 아냐? 복싱이야 복싱. 몸통을 찌르면 복부 블로우 상단을 찌르면 얼굴에 잽이나 스트레이트. 태권도는 왜 그렇게 쓰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


고우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홍 관장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돌려차기, 뒤차기, 내려차기, 몸통지르기... 스포츠 태권도에서는 제한된 겨루기 기술이 사용되지. 그런데 그것만 가지고도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위력을 지닌다. 하지만 사람 수가 많거나 강한 상대를 만나면 태권도 스포츠 룰에 제한된 공방 방식으로는 당연히 한계가 있겠지? 그때는 기본동작과 품새에서 나오는 주먹, 손날, 팔굽, 무릎 등의 공격 수단을 총동원하면 되는 것 아닐까?“

“그게 쉬우면 태권도가 제일 세게요?”

“정권을 단련하기 위해서 격파를 수련하고, 발차기를 수련하기 위해 미트를 차고, 실전을 대비해 겨루기를 하고, 정확한 자세와 호흡을 몸에 각인시키기 위해 품새를 수련해. 무술수련에서 더 뭐가 필요할까?”


고우찬은 미심쩍은 눈으로 홍 관장을 쳐다봤다.

홍 관장은 그런 고우찬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넌 뭐가 되고 싶으냐?”


고우찬이 한 번도 고민해 보지 않은 문제다.


“네 나이 또래에 꾸는 꿈도 있고, 장래 희망이 있을 것 아니냐?”

“그런 거 없는 데요.“

“없어?”

“학교 졸업하고 취직해서 결혼하고 뭐 그러는 것 아니에요? 다 그렇게 살잖아요?”


고우찬은 생각 없이 사는 놈이다.

미래에 대한 설계도 준비도 꿈도 없다.

걱정도 없다.

류지호가 더는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야망 없어? 남자잖아?”

“없어.”

“대학은 가야할 것 아냐?”

“공부를 못 해서 못 갈걸.”

“대학 나온 사람하고 고졸하고 월급 차이가 얼마나 많이 나는 줄 알아?”

“우리 아버지는 노가다 하시는데 잘만 먹고 살아.“


고우찬이 속편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홍 관장은 어이가 없었다.


“어린 녀석이 뭐 이리 매가리가 없어. 창창한 나이에. 기회가 많은 만큼 진지하게 나아갈 길을 미리 고민하고 정해야지. 아주 솔직한 자세로 너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단 말이야. 내말 알아들어?”


고우찬은 오늘 처음 보는 관장이 자신에게 왜 이런 말을 하는 지 알 수 없었다.


“그건 그거고요. 저는 양아치들한테 다구리를 당해도 다 이겼으면 좋겠어요.”

“허허... 고 녀석 참.”


홍 관장은 험악한 외모와 달리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고우찬의 패배감을 엿보았다.

사춘기를 어떻게 보냈는지 몰라도 고우찬이란 어린 녀석의 마음에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강한 척, 만사 부질없는 척 하는 것이다.


“너는 건달 할 테냐 형사 할 테냐 군인 할 테냐?”

“선택하면 할 수 있어요?”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류지호는 홍 관장의 의미심장한 표정을 보며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관장님! 우찬이는 태권도학과 갈 겁니다!”

“그러냐? 알았다.“


홍 관장이 손을 들어 나가라는 시늉을 했다.

관장실 벽에 걸려있는 사진들.

사진 속 홍관장의 주변에는 현직 조폭도 있고, 강력계 형사도 있고, 군인도 있다.

사회 곳곳에 그의 인맥이 상당했다.

태권도 태동 초창기부터 수십 년간 제자를 배출한 홍 관장은 맘만 먹으면 고우찬을 그들처럼 만들어 줄지도 몰랐다.

류지호는 찜찜한 기분을 안고 관장실을 나갔다.

홍 관장이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그 놈 커서 뭐가 되려고.”


작가의말

일요일에는 한 편만 올릴 예정입니다. 즐거운 성탄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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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오늘 넌 영화감독 같았어! (1) +8 21.12.31 12,551 242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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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우리는 가족입니다! (2) +12 21.12.30 12,476 260 20쪽
19 우리는 가족입니다! (1) +11 21.12.29 13,242 238 21쪽
18 어떤 녀석인지 궁금해지네... (4) +10 21.12.29 13,219 262 23쪽
17 어떤 녀석인지 궁금해지네... (3) +13 21.12.28 13,187 265 16쪽
16 어떤 녀석인지 궁금해지네... (2) +8 21.12.28 13,582 244 18쪽
15 어떤 녀석인지 궁금해지네... (1) +6 21.12.27 14,120 273 20쪽
14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3) +7 21.12.27 14,322 280 22쪽
13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2) +11 21.12.26 14,592 277 21쪽
»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1) +12 21.12.25 15,140 266 22쪽
11 돈을 왕창 벌자! +13 21.12.25 15,578 272 20쪽
10 티끌모아 태산이 되는 것처럼... (2) +9 21.12.24 15,274 275 20쪽
9 티끌모아 태산이 되는 것처럼... (1) +8 21.12.24 15,879 260 21쪽
8 Goodfellas. (4) +10 21.12.23 16,145 279 20쪽
7 Goodfellas. (3) +13 21.12.23 16,669 262 20쪽
6 Goodfellas. (2) +12 21.12.22 17,261 292 19쪽
5 Goodfellas. (1) +20 21.12.22 18,503 295 21쪽
4 Again 1987. (3) +25 21.12.21 19,260 328 20쪽
3 Again 1987. (2) +11 21.12.21 22,046 337 20쪽
2 Again 1987. (1) +20 21.12.20 27,772 398 21쪽
1 프롤로그. +49 21.12.20 40,615 462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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