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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2의 서재

사막의 소드마스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완결

922
작품등록일 :
2020.05.11 21:30
최근연재일 :
2021.01.18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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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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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125. 재회 2

DUMMY



01.

당신이 곰에게 죽을 뻔했다고 생각해보자. 그리고 겨우겨우 살아돌아왔다고 가정해보자. 이제 문제. 당신은 죽기 살기로 겨우 도망쳐 나온 곰의 굴로 다시 기어들어가야 한다. 얼마나 힘들 것 같나?


혹시 좀 쉬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가?


그 곰은 울창한 소나무 숲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흑곰이었다. 손바닥 하나가 당신의 몸통을 통째로 덮을 만큼 크고 땅 위에 굳게 박고 선 다리는 마치 기둥과 같았다. 보기만 해도 두꺼운 거죽은 실제로도 두터워서 당신이 들고 있던 어떤 날붙이로도 조금의 흠집도 낼 수 없었다. 당신이 경솔하게 허리춤에서 뽑아든 45구경 리볼버는 아무런 효과도 주지 못하고 놈의 화만 돋우었다.


놈의 화를 돋운 대가로 놈은 당신의 손가락 두 개를 뚝 떼어가 애피타이저로 먹었다. 머리가 쭈뼛쭈뼛 서고 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 엄청난 통증 속에서 당신은 당신의 손가락이 아작아작 씹히는 소리를 들었다. 마치 ASMR 같았다. 잠이 드는 대신 기절해버릴 것 같았지만.


놈의 앞발에 달린 발톱은 하나하나가 거대해서 어린 나무 정도는 맨손으로 벌목할 수 있을 정도였다. 놈은 당신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땅에 엎어 트린 후 그 무지막지한 발톱을 등짝에 박고 질질 끌고 갔다. 놈의 두꺼운 발톱이 깊이 파고드는 고통에 당신은 안타깝게도 기절조차 하지 못했다. 대신 정신이 번쩍 들었다.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 머릿속을 맴돈다. 놈의 발톱이 척추와 허리의 신경을 건드렸다. 앞으로 다시는 걷지 못하리라. 아마 그것은 사실일 것이다.


놈은 그 자리에서 당신을 바로 해치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왕에 생긴 만찬을 포근한 보금자리에서 즐기기로 결정했다. 곰에게 그 정도의 지능은 없지만 할 수만 있다면 콧노래도 불렀을 것이다.


"요호이! 이 달콤하고 연약한 살코기를 보세요. 너무 보들보들해서 따로 살을 발라야 할 필요도 없을 정도죠."


하지만 아뿔싸, 녀석은 너무 여유를 부렸다. 당신을 잡아먹기 전에 너무 많은 시간을 지체해버렸다. 그 사이 푸른 눈과 넓은 어깨를 가진 구원자가 라이플을 들고서 놈을 찾아왔다. 그가 왜 당신을 구하러 왔는지는 알 수 없다. 그건 단순한 정의감일 수도, 어쩌면 그저 곰 사냥이 하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곰의 이마에 커다랗게 구멍이 났다. 폭풍과 같은 소리와 함께 놈의 두개골은 박살이 났다. 동시에 굴 안에서 놈의 동반자가 으르렁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라이플을 든 사냥꾼은 당신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건넨 후 성큼성큼 용감하게 굴 안으로 들어갔다.


자, 다시 물어보겠다. 당신은 곰의 굴로 다시 기어들어갈 수 있을 것 같나? 당신을 구해준 구원자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혹시나 위험에 빠졌다면 기꺼이 도움을 주기 위해서 시커먼 곰의 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가?


지하 세계의 지저인 소녀, 오비에는 그 일을 해냈다.



02.

"보통 사람이라면 몇 번 들이키자마자 절명했을걸!"


노인이, '달빛을 처드시는 자'가 유쾌하게 웃었다. 사자는 별로 분노조차 일지 않았다. 사자의 표정이 의외로 평온하자 노인이 웃음을 서서히 멈추며 사자의 눈치를 보았다. 농담이 제대로 먹혀든 것인지, 아니면 다시 화나게 만든 것인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 그거 진짜인 것 같은데. 농담이 아니라." 사자가 말했다.


"글쎄, 뭐 편할 대로 생각하게나."


다행히 분위기가 다시 딱딱해지지 않은 것을 확인한 노인이 슬며시 미소 지었다.


"그럼 만약 내가 아우바의 제단에서 그대로 희생되었다면 어쩔 셈이었소? 그럼 다른 체스 말을 찾으면 된다고 생각했소?"


"본인을 너무 그렇게 과소평가하지 말게. 솔직히 그다지 겸손한 성격도 아니지 않는가?" 노인이 말했다.


"자네가 그 사막의 창녀와 힘만 센 우둔한 선출직 공무원에게 당한다고? 내가 선택한 남자가? 그런 재미없는 일은 생각한 적도 없네."


정말로 재미없는 상상이었는지 노인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딱딱한 거죽을 한껏 찢듯이 웃던 입가도 어느새 내려와 있었다.


"그럼 세이마르는? (이미 알고 있겠지만) 그곳은 황제에게 반목한 도시요. 사막의 변질에 대해 좀 더 많은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 들렸지. 덕분에 여정이 훨씬 길어지게 되었지만. 이 역시 당신의 계획 중 하나였소?" 사자가 물었다.


"아우바의 제단을 경험하고 <미식가들>을 만난 순간 자네는 <사막의 사람>으로 변모할 모든 준비를 마친 셈이었어. 타락한 사막을 그냥 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체험했으며 지금 사막을 지배하고 있는 인물들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들인지도 알게 되었기 때문일세. 그때 자네에게 남은 일은 딱 한 가지였네."


"사막의 사람과 팀을 이루는 것. 그것도 공통된 목적을 가진." 사자가 그의 말을 대신 이었다.


사자의 대답에 노인이 크게 웃었다. 그 순간 노인의 눈에서 황금색의 빛이 스물거리며 흘러나왔다.


"맞네, 맞아! 역시 훌륭한 학생이라니까. 자네에게 플러스 100점을 주지."


노인이 얼굴 가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막에서 노인의 웃음을 처음 보았을 때 사자는 노인의 얼굴에 '역병'이 퍼지는 것 같다고 느꼈었다. 지금 보니 평가를 수정해야 했다. 그건 땅 위의 모든 곡식과 재화를 썩게 만드는 '재앙'과 같았다.


"딱 한 끗만 추가하면 되었네. 외부인인 자네를 완전히 '사막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노인이 차갑고 기다란 손가락을 사자의 눈앞에 들어 보였다.


"자네 고양이를 개처럼 굴게 만드는 방법을 아는가? 바로 개들과 함께 키우면 되네. 쉬운 일이지. 원래 사람은 환경에 영향을 받기 마련이네. 특히 주변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많이 받지. 사상, 사고, 감정, 이념 같은 것들은 원래 전염성이 강해. 마른 들에 불을 붙인 듯 삽시간에 번져버리지."


사자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도 같은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보아하니 자네는 자네가 그 젊고 영민한 민병대 대장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던데."


맞지? 하는 표정으로 노인이 바라보았다. 사자는 짐짓 모르는 척 태연하게 가만히 있었다.


"천만에! 사실은 자네가 그들에게 물들어가고 있었네. 지금 자네가 있는 곳을 보게나. 여기가 어딘가? 자네가 원래 건너가려던 사막이 아니잖나? 사막 아래 펼쳐진 지하 세계의 보일러실에서 뭘 하고 있는 건가? 응? 말해 봐. 자네가 여기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대답할 수 없었다.


"보게나. 자네는 이미 훌륭한 사막의 사람이 되었어. 사막을 막 건너기 시작한 때의 자네라면 결코 여기까지 오는 일은 없었을 걸세. 지저인들의 내전이 벌어지든, 지하 세계가 피로 물들건 말건 자네의 임무에는 별로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거든. 하지만 지금 자네는 지하 세계의 왕자와 시민들을 위해 불철주야 뛰고 계시는 중이지."


노인이 씩 웃었다.


"<공화국의 검>? 아, 그건 이제 과거의 잔향 정도로 생각해두게. 이제 자네는 더 이상 공화국의 검사가 아니야. 말하자면,"


노인이 눈을 번뜩였다. 그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황금색의 빛이 보일러실 안을 가득 채웠다.


"<사막의 소드마스터>가 된 걸세."



03.

"그딴 유치한 이름은 들이밀지도 마시오." 사자가 말했다.


부루퉁한 얼굴이었지만 그렇다고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비로소 알게 된 진상들이 탐탁지 않았을 뿐. 어쩐지 너무 정교하게 돌아간다 했어. 여기까지 오는 내내 이 달빛을 먹는 아무개 씨의 손에서 놀아났단 말이지.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꼭 놀아났다고만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사막의 변질을 해결하는 일이 (사실 그의 임무는 사막의 변질을 '조사'하는 것이었지만 언젠가부터 계속 '해결'로 생각해왔다.) 그의 말마따나 외부인이 개입할 수 없는 일이었다면 어차피 거쳐야 할 과정이었을 뿐.


게다가 마드 세라자드의 멘토 역할을 자처한 이유가 무엇이던가? 사막을 바꾸어야 하는 것은 결국 사막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몫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닌가. '사막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범주에 그도 들어가게 될 줄은 정말 몰랐지만.


"유치하기는." 노인이 클클 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꽤 멋진 이름이 아닌가? 사실 여태까지 사막에는 마스터급 검사가 나타난 지 꽤 오래되었거든. 몇몇 후보들은 있지만. 아무튼 자네는 이제 공화국의 검이 아니라 <사막의 검>으로서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는 말일세."


"그럼 하필 지금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무엇이오? 일이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것이오?"


"일이 무르익었다기보단......" 노인이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보일러실 내부를 한번 휘휘 둘러보고 말했다.


"일이 너무 지체되고 있어. 자네가 너무 미적거리는 거지."


"미적? 내가 미적거리고 있다고?" 사자가 눈썹을 씰룩였다.


"무슨 스케줄표라도 가지고 있소? 월별로 일별로 일정이라도 짜놓고 있느냔 말이오. 왜, 내가 다음 달 초까지는 황제의 성도에 도착하기로 짜 놨더이까?"


"너무 그렇게 몰아붙이지 말게." 노인의 얼굴이 샐쭉해졌다.


바로 이렇게 언제 돌변할지 모른다는 점이 이 달빛을 먹는 아무개의 또 다른 멋진 점이었다. 언제 갑자기 속이 뒤틀려서 독이 잔뜩 든 입을 쩍 벌릴지 모른다는 점이.


"사실 자네를 지하 세계로 보낸 것도 내 아이디어였네. 아마 그들은 여태 입을 꾹 다물고 있었겠지만......"


"마드와 유마님 앞에 나타났던 게로군." 사자가 노인의 말을 가로채며 말했다.


"그날 세이마르의 지하 유치장에서 보았던 파란 마나. 누구의 것인가 궁금했는데 역시 당신의 것이었군."


"맞아. 생각보다 훨씬 입이 무거운 친구들이었나 보군. 아무튼 내가 그들의 앞에 나타났던 것은 그들과 자네를 사막의 모래땅 아래로 보내기 위해서였네. 그 '미식가' 나부랭이들이 점점 더 자네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거든. 그래서 그들의 눈을 돌릴 필요가 있었네. 이곳의 왕과 왕자와는 친분이 좀 있거든. 정확하게는 그중 첫째와."


"알란? 알란 왕자와 당신이 아는 사이라고?"


"그렇네. 어떻게 친해졌는지는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니 관두지. 어차피 궁금해하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아무튼 알란에게 자네들을 잠시 의탁하려 했었네. 그리고 알겠지만, 그 친구도 여러 가지 골칫거리가 있거든. 자네의 도움이 필요한."


"...... 그렇담 알란 왕자도 우리가 들어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 군. 대체 무대를 조종하는 이들이 왜 이리 많은 거지?"


사자가 날카롭게 물었지만 노인은 짐짓 듣지 못한 척 무시했다. 어차피 사자도 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튼 알란의 동생, 그 어리석은 동생 놈이 제 형을 계속해서 노리고 있지. 멍청한 놈이 욕심은 또 어찌나 많은지. 하지만 그 녀석뿐이었다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네. 알란 혼자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지. 하지만 알라딘에게 아주 귀찮은 자가 들러붙었거든."


"알라딘 왕자에게? 더 자세히 말해줄 수는 없소?"


"그러니까 말이네. ...... 이런! 귀여운 불청객이 들어오셨군."


노인이 말했다. 그리고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오직 노인과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던 사자도 그제서야 노인의 시선을 따라 보일러실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오비에가 창백한 얼굴로 서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와 노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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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139. 클라이맥스 3 +3 20.12.05 401 16 13쪽
138 138. 클라이맥스 2 +7 20.12.04 386 12 13쪽
137 137. 클라이맥스 1 +9 20.12.03 396 12 13쪽
136 136. 사냥꾼들 3 +4 20.11.29 403 14 13쪽
135 135. 사냥꾼들 2 +10 20.11.28 403 12 13쪽
134 134. 사냥꾼들 1 +2 20.11.27 400 14 13쪽
133 133. 악몽 4 +6 20.11.26 395 13 12쪽
132 132. 악몽 3 +2 20.11.22 422 15 12쪽
131 131. 악몽 2 +4 20.11.21 418 17 12쪽
130 130. 악몽 1 +6 20.11.20 418 15 12쪽
129 129. 시가전 3 +4 20.11.19 420 13 13쪽
128 128. 시가전 2 +4 20.11.15 445 17 12쪽
127 127. 시가전 1 +4 20.11.14 446 15 12쪽
126 126. 재회 3 +10 20.11.13 440 17 13쪽
» 125. 재회 2 +6 20.11.12 460 21 12쪽
124 124. 재회 1 +7 20.11.08 489 20 12쪽
123 123. 드러난 음모 2 +8 20.11.07 453 20 12쪽
122 122. 드러난 음모 1 +8 20.11.06 459 16 12쪽
121 121. 트리거 2 +4 20.11.05 465 17 12쪽
120 120. 트리거 1 +4 20.11.01 498 20 12쪽
119 119. 연극 2 +4 20.10.31 468 15 12쪽
118 118. 연극 1 +4 20.10.30 505 19 13쪽
117 117. 보일러실 +8 20.10.29 511 18 12쪽
116 116. 징벌 +13 20.10.25 543 28 12쪽
115 115. 구원자 2 +10 20.10.24 507 28 12쪽
114 114. 구원자 1 +12 20.10.23 518 26 12쪽
113 113. 오비에 +14 20.10.22 518 29 13쪽
112 112. 침입자 4 +15 20.10.18 629 29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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