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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2의 서재

사막의 소드마스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완결

922
작품등록일 :
2020.05.11 21:30
최근연재일 :
2021.01.18 22:00
연재수 :
17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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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964,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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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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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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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120. 트리거 1

DUMMY




01.

사자는 아직 지하에 있었다. 사막을 건너는 동안 만난 동료 중 가장 어린 파트너가 얌전히 그의 손을 쥐고 걸었다. 아이는 곤란한 듯 한쪽 눈썹을 비죽 올리며 어둠 저편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아이는 종종 사자의 손을 놓고 몇 걸음 어둠 가까이 다가갔다가 다시 돌아오곤 했다. 돌아오는 아이의 어깨가 불균형하게 흔들렸다.


"아이야, 오비에. 다리가 불편한 모양이구나. 아저씨에게 다시 안기는 것이 어떻겠니?"


"아니에요. 이 정도는 끄떡없이 걸을 수 있어요." 오비에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재깍 대답했다. 사자가 대견한 듯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저씨. 아저씨는 보일러실이 뭔지 알고 계신다고 하셨죠?"


"그래."


"제게도 알려주실 수 있나요? 혹시 아이들은 알면 안 되는 비밀스러운 곳인가요?"


"아니, 그럴 리가." 사자가 빙긋 웃었다.


"보일러실...... 그러니까 보일러란 공기를 따뜻하게 만드는 물건이란다."


"공기를 따뜻하게요? 위대한 천정의 빛을 쬐는 것처럼요?"


오비에가 고개를 돌렸다. 예상외의 쓰임새에 놀랐는지 눈이 반짝거렸다. 공기를 따뜻하게 만드는 물건이라고? 그런데 그 무서운 남자들은 거길 왜 찾았던 걸까? 추워서?


"어떻게 공기를 따뜻하게 만들 수 있어요?"


"음......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아저씨의 나라에서 보일러는 석탄을 넣어서 불을 피우고 그것으로 물을 끓이는 물건이었단다. 끓는 물이 내뿜는 뜨거운 열기가 공기를 데우는 것이지."


사자가 공화국 시민청의 보일러실을 떠올렸다. 아이가 보일러를 알 수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석탄과 같은 화석 연료로 불을 떼오는 건 그야말로 고위층이나 부유한 이들만 가능한 일이니까. 공화국에서도 일반 시민들은 여전히 장작을 때서 겨울을 난다.


"석탄이 뭔데요?"


오비에가 물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해방되고 나니 아이 특유의 호기심이 계속해서 커지는 모양이었다.


"석탄은...... 까만 돌이다. 여기 마할란트라의 돌들처럼 까맣지. 빛은 나지 않지만. 나무나 풀들이 땅에 묻혀 아주 오래오래 썩으면 석탄이 된단다. 아저씨도 들은 이야기에 불과하다만."


사자가 아이가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말을 골랐다.


"마할란트라의 돌은 불에 타지 않아요."


"그래. 여기 돌들은 훨씬 대단하지."


사자가 아이를 향해 빙그레 웃어주었다. 사자는 오비에를 만난 후로 미소를 자주 지었다. 오비에는 사자의 대답이 마음에 드는 듯 흐응하고 콧소리를 내고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위에서 내려오는 불빛이 보였다. 중정으로 향하는 계단이었다.



02.

"아저씨. 그 남자들은 왜 보일러실을 찾았을까요? 보일러를 훔쳐 가려고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아이가 궁금증을 털어놓았다. 사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은 아저씨도 그게 몹시 궁금하단다. 보일러가 흔하지 않은 물건인 것은 맞지만, 사람을 해치면서까지 가지고 싶은 물건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사자는 놈들의 목적에 대한 그의 생각을 말해주어도 될까 망설이다가 말해주었다.


"어쩌면 이곳에 불을 내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오비에가 깜짝 놀라 사자를 올려다보았다. 지하실 복도 벽에 붙은 등불이 일렁이며 아이의 얼굴을 비추었다. 아이의 하얀 얼굴이 붉게 보였다. 마치 땅 위에 사는 사막의 아이들처럼.


"불을요? 왕궁에 불을 낸다고요?"


"그래. 아마 보일러실에 가면 아까 말한 석탄같이 불을 키울 수 있는 연료들이 잔뜩 있을 게다. 그곳이라면 아주 큰 불을 낼 수 있을 테지."


"사람들을 해치려고요?"


"그래."


"하지만 사람들은 이미...... 다 죽었는걸요. 그 남자들이요. 그런데 또 불을 붙이려고 하다니......"


아이의 얼굴이 다시 창백해졌다. 사자가 아이의 어깨를 꼭 끌어당겨 토닥여 주었다. 오비에는 무의식적으로 어깨 위의 손을 꼭 붙들었다. 아이의 손이 애처롭게 떨렸다.


"혹시 그 사람들은 그냥 왕궁을 없애고 싶어 한 건 아닐까요? 눈에서 보이지 않게요."


말하는 아이의 얼굴에 근심과 걱정이 가득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너무 무서운 일이라는 듯이.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데 왜 그렇게 생각하니?"


"...... 저희 집에는 아빠의 서재가 있어요. 아빠는 거기서 책도 읽고 제게 책도 읽어주셨죠. 가끔은 엄마랑 저 몰래 술을 마시기도 하셨고요." 아이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아빠가 돌아가시고 저는 한 번도 서재에 들어가 본 적이 없어요. 지금까지도요. 엄마는 그쪽으로 시선도 잘 주지 않으려고 해요. ...... 왜 그런지 아세요?"


"글쎄. 왜지?"


"그곳엔 아빠의 추억이 가득하니까요. 서재가 아빠를 생각하게 만들어요. 그리고 나면 마음이 너무 아프죠. 그러니까," 아이가 사자를 돌아보았다.


"그 사람들도 왕궁을 보면 가슴이 아팠는지도 몰라요.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게 하려고 했을지도 몰라요."


"네 생각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저는 왕궁을 지키고 싶어요. 제가 좋아했던 사람들은 이제 없지만...... 그 사람들과의 추억은 여전히 이곳에 가득하니까요. 집에 돌아가면 아빠의 서재에도 다시 들어가 볼 거예요. 추억은 외면한다고 해서 빛이 바라는 것이 아니니까요."


아이가 부들거리는 입술로 이야기를 마쳤다. 사자는 감탄했다.


'이 아이는 녀석들이 저지른 수많은 끔찍한 일들을 보았을 것이다. 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혼자서 견뎌야 했지. 그럼 장소에 트라우마가 생기고도 남았을 텐데...... 이토록 마음이 단단한 아이가 또 있을까.'


공화국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아이가 만약 지하 세계가 아니라 공화국에서 자랐다면 어땠을까?


'요크라면 참 좋아했을 거다.' 사자가 생각했다.


목이 완전히 쉬어버린 탁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03.

2층까지 올라오는 동안 얼마나 자주 숨을 참았는지 모른다.


오조는 끊임없이 뒤를 돌아보고 발걸음을 멈추고 놈이 그 새까만 사슬을 휘두르며 쫓아오는 것은 아닌지 확인했다. 다행히 놈은 아이와 함께 아직 지하에 있는 모양이었다. 오조는 이제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죽어버린 오른손을 축 늘어트린 채 중앙 계단을 힘겹게 올랐다.


오조의 눈에 중정에서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 보였다. 놈이 올라온다면 저쪽으로 올 것이다. 갑자기 이방인 검사의 머리가 불쑥 계단 위로 올라오는 불길한 상상을 하며 오조는 한 걸음씩 천천히 내디뎠다. 그러고 보니 알라딘 왕자가 지하실에 대해서도 얘기해 준 적이 있었다.


'나는 항상 숨바꼭질을 할 때마다 아버님의 눈을 피해 지하로 숨었다. 알란은 지하실에 도통 내려가려고 하지 않았지만 나는 지하가 좋았거든. 너도 가보면 알 것이다. 왕궁에서 가장 따뜻하고 아늑하며 음울한 상상을 하는 인간들이 숨어들기 딱 좋은 곳이 지하라는 걸 말이다.'


오조가 중앙 계단 위를 겨우 올랐다. 므시엘과 함께 일일이 열어보았던 문들, 그 안에 새빨간 죽음을 피워냈던 방들을 성큼성큼 지났다. 그리고 마침내 2층 서쪽 복도의 끝자락에서 아직 한 번도 열어보지 못한 작은 문을 발견했다. 굳이 열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여기다. 그들이 그토록 찾아 헤맸던 <방>이 문 너머에 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영원한 안식을 찾을 곳이.


'이렇게 쉽게 찾을 것을, 아주 괜한 짓을 했지.'


그의 집착 쩌는 사이코 동료가 아이에게 꽂히지만 않았다면 이렇게 오래 걸릴 일이 아니었다. 아니 므시엘이 아이에게 말을 붙이기 전에 먼저 아이를 처리했다면 그의 오른쪽 손가락은 여전히 다섯 개였을 것이다. 오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목 뒤쪽에서 바늘로 찌르는 듯 날카로운 통증이 솟았다.


'어디 하나 멀쩡한 곳이 없구만......'


오조가 문 손잡이를 틀어쥐었다. 문 너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손잡이를 잡은 손바닥이 따뜻하게 데워졌다. 그냥 열기가 아니었다. 이 안에 든 것이 뿜어내는 것은 그저 열기 뿐이 아니었다. 오조가 허리춤에서 달그락거리며 까만 마황탄 한 개를 꺼냈다. 그 무지막지한 이방인 놈의 사슬에 날아가 처박히면서도 용케 부서지지 않았다.


'이것도 위대한 천정의 의지일지 모르지. 언제까지 이 답답한 지하 동굴을 내려다보고 싶겠어.'


당장 문을 열고 내려가고 싶었지만 오조는 손잡이를 쥔 채 머뭇거렸다.


"그런데 문제가 있지."


오조가 나지막하게 혼잣말을 했다. 대수롭지 않은 듯한 말투였지만 사실은 심각한 문제였다. 그의 동료가, 최후의 피날레를 함께 열어야 할 파트너가 지금 그의 곁에 없는 것이다. 놈이 죽은 것은 솔직히 속 시원한 일이었지만, 문제는 그가 <트리거>였다는 것이다.


트리거. 축포를 쏘아 올릴 방아쇠. 방아쇠는 지금 지하 어딘가에서 나뒹굴고 있을 텐데 (오조는 목이 똑떨어진 므시엘을 떠올렸다. 우연이겠지만 정확히 맞춘 것이다.) 오조에게는 지금 여분이 없었다. 또 하나의 트리거가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은...... 그 이방인 검사였다.


"해보자. 어차피 이판사판이니까."


오조가 목을 가다듬었다. 편도가 퉁퉁 부어 침을 삼키는 것조차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침을 삼키면 침이 넘어가는 길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마치 바늘을 씹어 삼키듯이.


'두 번 지를 수는 없겠다. 목이 아파서 골로 갈지도 모르니. 그러니까 한 큐에 가자, 한 큐에.'


오조가 아래층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가 할 수 있는 한 힘껏. 부디 이방인 검사가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힘껏.



04.

"들리냐! 나는 여기 있다, 이 빌어먹을 놈아! 어서 올라와 봐라!"


사자와 오비에는 중정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와 있었다. 검사와 아이가 동시에 서로를 돌아보았다. 아이의 눈이 다시 공포로 탁해지기 시작했다. 목소리는 2층에서 들려왔다. 맛이 가버린 성대를 힘껏 찢으면서 간신히 질러대는 소리였다. 목소리에 절박함이 가득했다. 그리고 어딘가 모를 음흉한 계략도 함께 느껴졌다.


"그 사람이죠? 아저씨가 사슬을 휘둘러서 날려버렸던 사람. 그 사람이 부르고 있어요."


오비에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필사적으로 도망쳐야 했던 순간이 아이의 눈꺼풀 안쪽으로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네가 말한 그자가 맞는 모양이다. 꽤나 몸이 튼튼했던 모양이야. 아저씨가 사정을 봐주기는 했지만 말이다." 사자가 무릎을 굽혀 아이와 눈을 맞추었다.


"오비에. 아무래도 이제부터는 아저씨 혼자 가야겠다. 네가 정말 많은 도움을 주었다만 이제부터는 많이 위험할 것 같구나."


아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불만족스러운 얼굴이었지만 사자의 말을 이해하는 것 같았다.


'석공이 많으면 곰이 문이 될 수도 있는 법이란다.'


오비에가 아빠의 말을 떠올렸다.


"알겠어요, 아저씨. 끝까지 아저씨에게 도움이 되고 싶지만...... 제가 따라가면 도리어 방해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아이가 말했다. 꼭 붙인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울컥하는 모양이었다.


"금방 다녀오마. 저 자가 지금 어디서 날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게야. 그러니 어디 가지 말고 여기서 잠시 기다려다오."


오비에가 무릎을 꿇고 자신을 보는 사자에게 다가와 목에 손을 두르고 꼭 안아주었다. 사자가 아이의 등을 토닥였다.


"부디 무사히 다녀오시길 빌게요, 아저씨."


사자가 오비에에게 한 번 더 미소를 지어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오조의 목소리가 들리는 2층을 향해 한달음에 올라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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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137. 클라이맥스 1 +9 20.12.03 396 12 13쪽
136 136. 사냥꾼들 3 +4 20.11.29 403 14 13쪽
135 135. 사냥꾼들 2 +10 20.11.28 403 12 13쪽
134 134. 사냥꾼들 1 +2 20.11.27 400 14 13쪽
133 133. 악몽 4 +6 20.11.26 395 13 12쪽
132 132. 악몽 3 +2 20.11.22 422 15 12쪽
131 131. 악몽 2 +4 20.11.21 417 17 12쪽
130 130. 악몽 1 +6 20.11.20 418 15 12쪽
129 129. 시가전 3 +4 20.11.19 420 13 13쪽
128 128. 시가전 2 +4 20.11.15 445 17 12쪽
127 127. 시가전 1 +4 20.11.14 446 15 12쪽
126 126. 재회 3 +10 20.11.13 440 17 13쪽
125 125. 재회 2 +6 20.11.12 459 21 12쪽
124 124. 재회 1 +7 20.11.08 488 20 12쪽
123 123. 드러난 음모 2 +8 20.11.07 453 20 12쪽
122 122. 드러난 음모 1 +8 20.11.06 459 16 12쪽
121 121. 트리거 2 +4 20.11.05 465 17 12쪽
» 120. 트리거 1 +4 20.11.01 498 20 12쪽
119 119. 연극 2 +4 20.10.31 468 15 12쪽
118 118. 연극 1 +4 20.10.30 504 19 13쪽
117 117. 보일러실 +8 20.10.29 511 18 12쪽
116 116. 징벌 +13 20.10.25 543 28 12쪽
115 115. 구원자 2 +10 20.10.24 507 28 12쪽
114 114. 구원자 1 +12 20.10.23 518 26 12쪽
113 113. 오비에 +14 20.10.22 518 29 13쪽
112 112. 침입자 4 +15 20.10.18 629 29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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