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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2의 서재

사막의 소드마스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완결

922
작품등록일 :
2020.05.11 21:30
최근연재일 :
2021.01.18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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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2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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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116. 징벌

DUMMY



01.

왕궁의 복도가 폭삭 내려앉기 전, 그리고 지저인 아이의 등에 새까만 나이프의 꽃을 피우기 직전. 므시엘의 진짜 노림수는 마나였다. 므시엘은 그의 마나에 대해서, 그의 시뻘건 마나가 가진 <속박의 힘>에 대해서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아까는 등을 돌아보고 있었으니까 그래, 아까는.'


그렇게 므시엘이 한 번 더 마나의 돔을 사자에게 씌우고자 했을 때 사자는 그의 노림수를 훤히 다 알았다. 그리고 신경 쓰지 않았다.


아, 놈이 마나를 쓴다고? 알란 왕자처럼 짓누르는 힘이라도 쓸 수 있는 모양이지? 그래서 뭐?


사자가 오직 집중한 것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아이였다. 지저인 소녀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겨우 그를 향해 뛰었다. 언제라도 앞으로 고꾸라질 것만 같은 위태로운 움직임. 사자는 소녀의 앞발, 달리면서 내딛는 앞발의 위치에만 신경을 썼다. 가급적 아이와 가까운 위치를 무너트려야 했다. 그래야 놈의 비열한 수작으로부터 아이를 지킬 수 있었다.


그리고 아이가 마침내 오른쪽 앞발을 내디디며 크게 휘청였다. 아이의 뒤에서는 지저인 사이코가 무언가 번쩍이는 것을 뽑아들었다. 사자의 머릿속에서 스위치가 찰칵하고 들어갔다.


'말이 통할 상대가 아니니까.'


사자가 들고 있던 사슬을 힘껏 휘둘렀다. 이번엔 벌떼가 날아드는 소리가 아니었다. 시커먼 뇌운(雷雲)이 으르렁대는 소리였다. 그리고 '일개' 공화국 검사가 '한낱' 사슬을 휘두르자 폭풍과 같은 바람이 일었고 천둥과 같은 굉음이 터져 나왔다. 까만 사슬이 로비 바닥에 시뻘건 자국을 새기며 로비 바닥을 부수고 파고들었다.


'이게 얼마 만이지?'


마지막으로 마음껏 힘을 썼던 순간을 떠올렸다. 기억나지 않았다.


대신 마할란트라 왕궁 로비 1층이 폭삭 내려앉았다.



02.

사자가 휘두른 사슬에 왕궁의 1층 로비가 무너졌다.


바닥이 무너지며 아이는 물론 그 뒤의 지저인까지 한꺼번에 삼켜버렸을 때 사자는 사슬을 내던지고 몸을 날려 아이를 구했다. 균형이 무너지면서 아이는 다리를 살짝 접질렸다. 그리고 아마 어둠 속에서는 확인할 수 없는 여러 가지 타박상과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그래도 아이는 정신을 잃지 않았고 사자에게 말을 걸어왔다.


"아빠죠? 저를 구하려고 아저씨를 보낸 사람이요."


아이가 물었다.


"아빠에게 간절히 기도했는데...... 아빠는 없으니까요. 대신 누군가를 보내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사자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래, 맞다. 너를 구하라고 내게 말을 걸더구나. 어떻게 알았니?"


"아빠는...... 항상 저랑 함께 있으니까요. 위대한 천정 아래라면 언제나 제 곁에 있겠다고 약속했거든요. 아저씨도 위대한 천정 아래 있으니까 아빠가 말을 걸어줬을 거라 생각했어요."


아이가 침을 꼴깍 삼키며 말했다.


"그리고 왠지 아저씨를 보내줄 것 같았어요. 왕자님이 아니라 아저씨를요...... 왠지는 모르겠지만."


아이가 힘에 겨운 지 불규칙하게 얕은 숨을 내쉬었다. 사자가 품에 안은 아이를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우리, 이야기는 조금 있다가 하자꾸나. 지금은 좀 쉬렴.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구나. 여기 잠시만 누워있거라. 뒤척거리면 안 된다."


품에서 내려놓는 손을 아이가 꼭 쥐었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떠 사자를 바라보았다.


"이제 저 남자를 혼내주실 건가요?"


사자가 아이의 얼굴을 다정하게 내려보았다. 그리고 삐뚤빼뚤 귀엽게 잘린 앞머리를 손으로 가만히 빗어주었다.


"그래. 금방 돌아오마."


위를 올려다보니 뻥하니 뚫린 천정이 보였다. 빛이 가느다랗게 떨어지는 가운데 잔모래가 우수수 떨어졌다. 큰 잔해들은 이제 떨어질 것이 없었다. 사자가 한 번 더 아이가 누운 자리를 봐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둠 너머에서 지저인의 기척이 느껴졌다. 추락 중에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은 모양이었다. 녀석은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짐승을 만나 잔뜩 털을 세운 고양이처럼 살기 어린 눈빛이 느껴졌다.


사자가 내려오는 빛을 지나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떨어진 로비 바닥의 잔해가 밟혀 부서졌다. 사자가 부서진 돌조각 하나를 주워들었다.


이윽고 푸른 안광(眼光)이 어둠 속을 밝혔다.



03.

산에서 호랑이를 만난 사슴이 어떻게 행동할 것 같은가? 여러 가지 생각이 사슴의 머릿속에 스쳐지나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사슴은 꼼짝도 하지 못할 것이다.


호랑이가 운 좋게 스쳐 지나가든, 오늘의 저녁 메뉴로 사슴을 정하고 어슬렁 어슬렁 다가오든, 사슴은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 호랑이가 태연하게 뿜어내는 안광을 본 사슴은 마치 주박에라도 걸린 듯 달아날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완전히 혼이 나가버린 녀석은 침을 줄줄 흘리며 얌전히 호랑이의 이빨에 목을 바칠 것이다.


하지만 호랑이의 사냥감이 '미친 개체'일 경우는 좀 다르다. 정신이 반쯤 나간 사냥감은 자신을 노리는 포식자를 향해 마구 반항할 것이다. 몸부림을 치고 심지어 물려고 이빨을 들이밀지도 모른다. 놈은 호랑이를 이기려고 들 것이다. 자연이 정한 엄중한 법칙에 당당히 반기를 들 것이다. 그럼 호랑이는 어떻게 반응하냐고?


호랑이는 생각할 것이다.


'오, 이번 사냥감은 반항이 심하네. 파닥거리는 것 봐.'


그리고 놈이 그러거나 말거나 포식에 대한 기대감으로 몸을 부르르 떨 것이다.


'...... 씹을 맛이 나겠는걸.'


호랑이는 원래 그렇다. <공화국의 검>도 마찬가지다.



04.

므시엘은 어둠 속에 파랗게 뜬 안광을 보자마자 자신이 가진 최대한의 힘을 발휘했다.


힘을 좀 남길 필요도 있지 않을까? 므시엘은 지금 그런 생각을 할 수조차 없었다. 처음으로 전장에 나선 햇병아리 병사가 여력을 생각 않고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듯 므시엘은 가지고 있는 힘을 모두 쏟아부었다. 햇병아리 병사도 므시엘도 지금 그들을 지배하는 감정은 하나였다.


공포.


므시엘의 손을 떠난 마나가 피로 물든 새처럼 날개를 활짝 펼치고 사자의 머리 위로 곧장 떨어졌다. 속박의 힘이 사자를 단단히 묶었다. 그의 오감을 빼앗고 운동 능력을 급격하게 떨어트렸다. 눈과 귀가 멀었다. 냄새도 맡을 수 없고 입안에 감도는 쓴맛조차 맛볼 수 없다. 바깥에서 기어든 건방진 이방인이 마침내 므시엘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 여야 할 텐데. 왜 꿈쩍도 안 하는 거냐! 내 힘이 느껴지지도 않는 거냐?'


므시엘이 마구 경악했다. 그를 뚫어져라 노려보는 푸른 안광이 점점 커지며 다가왔다. 건방진 이방인은 그가 펼친 마나의 돔 따위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므시엘이 두 손을 모두 치켜들고 힘을 방출했다. 이제 마나는 죽은 시체에서 갓 꺼낸 심장처럼 검붉은 색으로 빛났다.


'제발, 제발, 제발! 위대한 천정이여 제발!'


위대한 천정을 날려버리기 위해 왕궁에 침입했던 그가 위대한 천정에게 빌었다. 신을 믿지 않는 살인마가 신에게 몸을 기대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므시엘의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절박했다. 살짝 벌어진 입가로 침이 흘렀다. 부릅뜬 두 눈에서 실핏줄이 마구 터져나갔다.


그때 풀피리를 부는 듯한 소리가 어둠 속을 갈랐다. 그것도 마치 거인이 나무를 뽑아 만든 거대한 풀피리. 뜨뜻하고 불쾌한 느낌이 왼 손바닥에서 느껴졌고 엄청난 통증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크아악!"


므시엘의 손바닥 사이로 바람이 드나들었다. 연못의 개구리가 크게 벌린 입처럼 손바닥 한가운데에 휑하니 구멍이 뚫렸다. 어둠이 손바닥 사이의 공백으로 스며들었다.


"맞았나? 하지만 살아있는 모양이군. 이 귀찮은 힘 때문에 조준이 빗나간 모양인데."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바닥에서 무언가를 찾아 주워드는 기척이 느껴졌다.


'뭔데...... 뭐냐고?'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엄청난 격통 속에서 므시엘이 생각했다.


"이거면 되겠군."


이방인이 나지막이 중얼거렸고 또 한 번 풀피리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소리는 순식간에 므시엘을 지나 어둠 너머 어딘가 있을 벽에 가서 처박혔다. 동시에 구멍 난 손바닥의 통증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대신 그보다 조금 더 위쪽으로 소름 끼치는 통증이 벼락처럼 내리쳤다.


어둠 속에서 날아온 무언가가 므시엘의 왼쪽 손목을 송두리째 날려버렸다.


"아악! 시발!"


"이번에도 빗나갔나? 운이 좋은 녀석이군. 어디......"


이제 사슴은 알았다. 제아무리 미친 사슴이라도 모를 수가 없었다.


호랑이에게서는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그것도 모처럼 마음껏 힘을 발휘하며 '포식하겠다고' 마음먹은 호랑이로부터는.



05.

마침내 므시엘이 들었던 손을 내려놓았다. 왼손은 이제 이 세상에서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내려놓으려야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잘려나간 손목에서 피가 끊임없이 흘렀다. 당장 지혈해야 했지만 지금은 한가하게 응급조치나 할 때가 아니었다. 대신 그는 몸을 돌려 허겁지겁 달아나기 시작했다.


<속박의 힘> 따위 온데간데없었다. 항상 누군가를 속박하고 집요하게 괴롭혔던 그가 도리어 '공포'라는 주박에 걸려 버렸다. 마나를 온통 쏟아낸 바람에 므시엘은 제대로 뛸 수 없었다. 온몸이 후들거렸다. 눈앞이 가물가물했다. 하지만 그저 달아나야 한다는 생각뿐. 어둠 속에 떠오른 푸른 안광으로부터. 사슴을 보며 입맛을 다시는 호랑이로부터.


한 번 더 피리 소리.


이번엔 므시엘의 머리 가까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왼손이 날아간 므시엘은 이제 귀도 오른쪽만 남았다.


"......!"


일일이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소리를 내면 소리를 쫓아 날아올지도 몰라.


생존에 대한 집착이 고통을 앞질렀다. 입술을 꾹 깨물고 새어 나오는 신음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찢긴 귀가 너덜거렸다. 왼손이 손목째로 떨어져 나간 왼쪽 팔을 내려뜨린 채 비틀거리며 달아났다. 뒤에서 이방인이 또 뭔가를 중얼거렸지만 찢어진 귀에서 들리는 이명이 너무 커서 알아들을 수 없었다.


대신 퍽 하고 부서지는 소리가 어둠 속을 울렸다.


"흐억."


무겁고 단단한 것이 므시엘의 오른쪽 허벅지를 스쳤다. 호랑이가 크게 한입 베어 문 듯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날렵하게 움직이며 살인에 크게 공헌했던 므시엘의 허벅지 근육이 무방비하게 드러났다. 찢긴 근육 사이로 힘줄과 핏줄들이 홍수에 쓰러진 나무뿌리처럼 드러나 대롱거렸다.


그때 므시엘의 눈앞이 환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웬 빛일까? 이제야 마침내 달아날 수 있게 된 것일까?


므시엘이 생각했다. 그가 이곳에 왔던 이유를. 알라딘 왕자와 '그분'이 오조와 자신의 앞에서 열심히 설명해 주었던 임무를.


알라딘 왕자는 칼보다 붓을 잡는 것이 나았을 거야. 이렇게 그림을 잘 그리는데. 나는 왕자가 탑 너머의 도시를 그린 것도 본 적이 있지. 음울하지만 끝내주게 감동적인 그림이었는데.


오조. 내 동료. 오조는 죽었나? 아니면 살았을까? 너를 놔두고 도망치는 나를 용서해라. 그래도 살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니?


그리고 그 아이. 나쁜 녀석. 길만 좀 알려주면 됐을 것을. 아주 쉬운 일을 너무 어렵게 만들어버렸어. 나쁜 꼬맹이가.


아 참, 그리고 놓고 온 것이 있었지. 그거 다시 가지러......


빛이 사라졌다. 빛을 바라보았던 므시엘의 눈에 온통 까만 어둠이 들어찼다. 갑자기 사라진 빛을 보고 므시엘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답은 이제 영원히 알 수 없으리라.


풀피리 소리가 그의 머리를 정확히 겨냥했다. 목이 날아간 지저인 사내가 추운 듯 온몸을 떨다가 조용히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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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139. 클라이맥스 3 +3 20.12.05 401 16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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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137. 클라이맥스 1 +9 20.12.03 396 12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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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135. 사냥꾼들 2 +10 20.11.28 403 12 13쪽
134 134. 사냥꾼들 1 +2 20.11.27 400 14 13쪽
133 133. 악몽 4 +6 20.11.26 395 13 12쪽
132 132. 악몽 3 +2 20.11.22 422 15 12쪽
131 131. 악몽 2 +4 20.11.21 417 17 12쪽
130 130. 악몽 1 +6 20.11.20 418 15 12쪽
129 129. 시가전 3 +4 20.11.19 420 13 13쪽
128 128. 시가전 2 +4 20.11.15 445 17 12쪽
127 127. 시가전 1 +4 20.11.14 446 15 12쪽
126 126. 재회 3 +10 20.11.13 440 17 13쪽
125 125. 재회 2 +6 20.11.12 459 21 12쪽
124 124. 재회 1 +7 20.11.08 488 20 12쪽
123 123. 드러난 음모 2 +8 20.11.07 453 20 12쪽
122 122. 드러난 음모 1 +8 20.11.06 459 16 12쪽
121 121. 트리거 2 +4 20.11.05 465 17 12쪽
120 120. 트리거 1 +4 20.11.01 497 20 12쪽
119 119. 연극 2 +4 20.10.31 468 15 12쪽
118 118. 연극 1 +4 20.10.30 504 19 13쪽
117 117. 보일러실 +8 20.10.29 511 18 12쪽
» 116. 징벌 +13 20.10.25 543 28 12쪽
115 115. 구원자 2 +10 20.10.24 507 28 12쪽
114 114. 구원자 1 +12 20.10.23 517 26 12쪽
113 113. 오비에 +14 20.10.22 518 29 13쪽
112 112. 침입자 4 +15 20.10.18 629 29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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