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922의 서재

사막의 소드마스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완결

922
작품등록일 :
2020.05.11 21:30
최근연재일 :
2021.01.18 22:00
연재수 :
170 회
조회수 :
210,184
추천수 :
7,135
글자수 :
964,671

작성
20.10.31 10:00
조회
468
추천
15
글자
12쪽

119. 연극 2

DUMMY




01.

여기가 어디일까?


노인은 궁금했다. 며칠을 갇혀 있었는지 모른다. 위대한 천정만 아니라면 아무런 빛도 들지 않는 마할란트라에서도 그는 가장 깊고 어두운 곳에 갇혀 있었다. 한때 온몸을 가득 채웠던 은색의 마나는 사라진 지 오래다. 그들은 그의 몸에서 마나는 물론 수분도 피도 겨우 살아남을 만큼만 남겨두고 모두 뽑아가버렸다. 속박과 방치라는 더할 나위 없이 괴로운 방법으로.


문이 열렸을 때 노인은 그제야 고통과 결핍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스스로 봉인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아...... 나는 그날...... 그들에게.'


지저인 사내들이 들어왔다. 도시 가드의 회색 정복을 입은 사내들. 똥, 오줌을 치울 길 없는 방에서 기어이 남겨야 했던 노인의 치욕스러운 흔적을 보며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이런, 제기랄. 먹인 것도 없는데 푸지게도 누어놨네. 이봐, 저리 비켜."


사내가 마치 더러운 것을 건드리듯 부츠의 앞코로 노인의 머리를 툭툭 찼다.


아, 나는 엎드려 있었구나.


노인은 그제야 자신이 엎드려 위대한 천정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었음을 떠올렸다. 그에게서 비정하게 눈을 돌린 마할란트라의 천정에게 그는 무엇을 기도했던가. 말할 것도 없었다. 부디 이 질기고 구차한 목숨을 걷어가기를.


"저리 비키라는 말 안 들리나!"


가드가 세차게 노인을 걷어찼다. 통증에 노인이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팔꿈치와 무릎으로 엉금엉금 바닥을 기어 또 한 번 날아들지 모를 발차기로부터 몸을 피했다.


위대한 천정에게 무슨 기도를 했다고? 목숨을 걷어가달라고?


웃기는 개소리였다.


노인은 울었다. 하지만 눈물이 나지 않았다. 눈물 같은 것이 남았을 리 없었다. 노인이 비탄에 잠긴 목소리로 절규했다. 하지만 소리도 나지 않았다. 완전히 메마른 성대는 소리를 짜낼 여력조차 없었다. 노인이 등에 들러붙은 단전에 힘을 모아 마나를 자아내려 했다. 혹시나 우연히 검은 탑에 시선을 둔 누군가에게 닿기를 기도하며.


하지만 마나가 나올 리 없다. 그들이 모두 뽑아가 버렸다. 뽑힌 마나는 알뜰하게 옮겨졌다. 세상에서 가장 불길한 모양의 새까만 구체들에게.


"이봐. 왜 이리 굼뜨나? 어서 마법사를 데리고 나와라!"


누군가 열린 문밖에서 그들에게 소리쳤다. 지저인 가드들이 움찔하며 서둘렀다. 그들은 쓰러진 노인의 (온통 오물과 토혈, 그리고 겨우 남은 숨이 구차하게 들러붙은) 몸에 손대기를 주저하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다가 하는 수 없이 동시에 노인을 양쪽에서 들어 일으켰다. 왼쪽에 선 사내가 흡하고 숨을 참았다. 오른쪽에 선 사내가 조용히 노인에게 말했다.


"이제 걸어, 이 양반아. 무대가 당신을 기다린다고."


그들에게 이끌려 노인이 걸었다. 저 멀리 빛이 보였다. 끝내 그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은 위대한 천정의 빛이 가득했다.


이윽고 마법사가 검은 탑의 테라스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02.

마법사가 포박된 채로 비틀거리며 왕자의 옆으로 걸어 나왔다. 가드들이 그를 부축하듯 뒤에 서 있었지만 사실은 채 써먹기도 전에 쓰러질까 봐 대기할 뿐이었다. 마법사의 두 눈은 퀭하고 온몸에는 생채기가 가득했다. 고문의 흔적이었다. 그것도 아주 지독하게, 그리고 집요하게.


"마법사다! 왕실의 수석 마법사, 후산이야! 죽었다고 들었는데...... 살아있었어!"


군중 속에서 목소리가 득달같이 치솟았다. 마법사는 자신을 부르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멍하니 군중들을, 그리고 그 너머의 왕궁 쪽을 바라볼 뿐이었다. 가늘고 다 부르튼 입술이 힘없이 벌어졌다. 노인의 고개가 점점 가슴 쪽으로 떨어졌다. 가드들이 뒤에서 그를 거칠게 끌어당겼다. 그러자 노인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도 알라딘은 연못에 돌을 던져 넣고 파문이 이는 것을 감상하듯 군중들 사이에 의문과 정보가 만들어지고 퍼져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마법사라고? 후산? 그분은 돌아가시지 않았어?"


"이봐, 모르나? 마법사가 죽었다는 발표가 공식적으로 난 적은 없어. 그저 행방이 묘연하다고만 했지."


"그런데 왕실의 수석 마법사가 왜 알라딘 왕자님과 함께 있는 거지? 게다가...... 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충분히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싶을 때 알라딘이 다시 불끈 쥔 주먹을 공중에 치켜들었다. 그의 퍼포먼스에 익숙해진 군중들이 재깍 입을 다물었다.


"맞습니다! 이 자는 후산 오브레임입니다. 왕실의 수석 마법사 말입니다. 나는 사라졌던 마법사를 찾아냈습니다. 아니, 사로잡았습니다. 내가 마법사를 추적하여 체포한 이유를 아십니까?"


그때 왕자의 뒤에 서 있던 시진의 몸에서 기운이 일렁였다. 마나였다. 시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마나가 탑의 2층 테라스를 뒤덮었다. 군중들 사이에 마나를 지각할 수 있는 지저인은 없었다. 그들이 마나를 볼 수 있었다면 그 빛이 어떤 색깔이었는지 알았을 것이다. 그것은 보라색이었다. 음모와 배신의 색깔이었다.


"바로 이 자가 폐하의 행방불명에 대한 진실을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자, 말하라. 후산. 네가 고백한 너의 죄를 말하라!"


알라딘이 말했다. 그 순간 테라스 위를 넘실대던 보라색의 마나가 후산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생기를 잃고 빛이 꺼져가던 후산의 눈동자가 보라색으로 반짝였다. 마법사가 천천히 입술을 부들거리며 입을 열었다.


"나는...... 그저 왕자님의 명에 따랐을 뿐이오......"


"뭐라? 크게 말해라, 후산! 지금 네 앞에 있는 마할란트라의 시민들에게, 마땅히 진실을 알아야 할 권리가 있는 그들에게 들리도록 말하라!" 알라딘이 소리쳤다.


"나는 명에 따랐소...... 알란...... 아비보다 훨씬 훌륭한 하사딘 왕가의 적자에게......"


맙소사. 대체 저 노인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몇몇 눈치 빠른 지저인들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주변으로 전파했다. 군중들이 크게 술렁였다. 그들 사이에 경악과 충격이 파도처럼 출렁이며 퍼져나갔다. 벼락처럼 깨달은 진실에 울음을 터트리는 지저인도 있었다. 아이들도 따라 울기 시작했다.


굳이 군중 속에 넣어둔 목소리들이 역할을 할 필요도 없었다. 이제는 시민들 스스로가 알라딘의 의도대로 말하는 목소리가 되었다.


"말해라, 후산! 더욱 크게 말해라!"


알라딘이 재차 소리쳤다. 시진의 마나가 더욱 짙은 색깔로 왕실의 수석 마법사를 뒤덮었다. 후산이 눈을 크게 부릅떴다.


"...... 알란 왕자님이오! 알마르 하사딘 폐하를 암살하라고 지시한 사람은 알란 전하였소!"


마법사가 마지막 숨을 토해내듯 외쳤다. 그리고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제자리에 쓰러졌다. 후산의 눈에 마지막으로 비친 것은 위대한 천정이었다. 마할란트라에 붙은 거대한 종기와 같은 그것이 무심한 표정으로 마법사의 최후를 내려다보았다.


알라딘이 무표정하게 쓰러진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지저인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혀를 찼다.



03.

쓰러진 마법사의 머리가 알라딘의 발치에 떨어졌다. 알라딘은 군중들에게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솔직한 표정을 한순간 지어 보이고는 노인의 머리를 훌쩍 넘어 다시 테라스로 향했다.


뒤에 서 있던 가드들이 테라스 난간 밑으로 몸을 숙인 채로 노인을 질질 끌어냈다. 혹독하게 고초를 당한 늙은 피부가 바닥에 쓸려 벗겨지면서 가느다란 핏자국을 남겼다.


'시발, 이따 닦아야겠네.' 지저인 가드가 생각했다.


그 사이 알라딘은 다시 군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시민들은 이제 무대 위의 왕자가 또 어떤 놀라운 사실을 알려줄지 기대에 가까운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알라딘은 그들의 눈빛과 그들의 기대감과 흘러넘치기 시작한 알란에 대한 불신을 음미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여러분! 마할란트라의 시민들이여, 위대한 천정 아래 선 훌륭한 국민이여! 나는 간을 씹고 심장을 꺼내놓는 아픔을 견디며 여러분들 앞에서 '진실'을 말합니다."


알라딘이 주먹을 치켜들었다. 그 손에 든 것이 검이었다면 좀 더 폼 나지 않았을까? 그가 손을 번쩍 들며 생각했다. 하지만 시진이 뭐라고 말했던가.


'왕자님,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말'로 왕자를 끌어내려야 합니다. 말이 곧 칼입니다. 말은 독보다 깊이 그리고 빠르게 퍼져나갑니다. 잘 닦인 말은 무엇보다 치명적입니다. 그러니 왕자님. 말로 왕좌를 도모하십시오.'


네가 뺏어간 나의 자리는 너의 시민들이 내게 가져다 줄 것이다. 알라딘이 최후의 승부수를 던졌다.


"나의 아버지이자, 마할란트라의 지존이자, 여러분과 도시를 위해 봉사했던 알마르 하사딘 폐하는...... 저의 형, 알란 리 하사딘의 칼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럴 리 없어!"


"거짓말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찔렀다니...... 왕자가 폐하를 돌아가시게 했다니!"


지저인들이 절규했다. 목놓아 울고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마법사가, 후산이 제 입으로 털어놓지 않았나!"


"듣고도 모르겠어! 우린 다 속았던 거야!"


군중 속의 목소리가 울부짖었다. 눈빛을 희번덕거리며 피를 토하듯 그들이 내뱉었다. 무대의 클라이맥스가 다가왔을 때 내놓아야 할 대사를. 관객이 열광할 때, 벅찬 가슴에 불을 붙일 결정적 한마디를!


"왕자가 폐하를 죽였다! 아들이 아버지를 찔렀다! 낳아준 아비를, 마할란트라의 지존을!"


군중 속의 목소리에 더 많은 지저인들이 동조했다. 그리고 어느새 그들의 머릿속엔 하나의 메시지가, 정말 잘 만들어진 선명한 메시지가 둥지를 틀었다.


왕자가 폐하를! 아들이 아버지를!


알라딘은 이제 더 할 말이 없었다. 이제부턴 그가 하고 싶은 말을 군중들이 대신 해줄테니까. 벅찬 격정으로 알라딘이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군중들의 목소리가 그의 가슴을 뜨겁게 데웠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고개를 숙인 채 끅끅대며 웃었다.


"푸하하하!"


알라딘이 폭소를 터트렸다. 너무 웃어서 눈물이 다 났다. 그의 어깨가 즐거운 비명으로 들썩였다. 군중들은 대신 울먹이는 듯 들썩이는 어깨를 볼 뿐이었다. 군중들의 함성이 더욱 커졌다.


왕자가 폐하를! 아들이 아버지를!


광장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테라스 너머 어둠에 잠긴 방에서 시진이 활짝 웃었다. 그가 유쾌하게 고개를 젖힌 채 왕자에게 박수를 보냈다. 브라보, 왕자님. 브라보, 마할란트라.


어느새 군중들은 한목소리로 외쳤다. 그들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커졌다.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왕자와 시진이 함께 웃었다.


왕자가 폐하를! 아들이 아버지를!



04.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왕자는 웃고 싶을 만큼 웃었고 군중들은 분노할 만큼 분노했을 때 왕자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번진 눈매가 위대한 천정의 빛을 받아 반짝였다.


"여러분!"


군중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그들은 관객도 아니고 먹이를 기다리는 충실한 개처럼 왕자의 말을 기다렸다. 그들의 눈이 이글거렸다. 주인의 손만 떨어지면 곧장 튀어나갈 것처럼 안달나 보였다.


"나는 이제 연달아 도시를 더럽힌 테러에 이방인들이 관여했다는 증거도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알란 왕자가 이방인들을 데리고 무엇을 도모했는지도 알려드리겠습니다. 이 일의 진상을 알고 또한 깊이 관여한 자를 여러분 앞에 데리고 왔습니다."


알라딘이 가드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데리고 와라!"


왕자의 뒤에서 시진이 고갯짓으로 지시를 내렸다. 마법사가 끌려나간 어둠 너머에서 가드들이 다시 한 사람을 끌고 나왔다. 이번엔 여인이었다. 창백한 얼굴엔 희망의 빛이라곤 하나도 없고 두 눈의 빛마저 모두 꺼진 여자.


왕가의 무녀, 시알라 랑그레이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4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사막의 소드마스터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41 141. 두 번째 조커 1 +3 20.12.10 382 15 13쪽
140 140. 클라이맥스 4 +3 20.12.06 413 16 13쪽
139 139. 클라이맥스 3 +3 20.12.05 401 16 13쪽
138 138. 클라이맥스 2 +7 20.12.04 386 12 13쪽
137 137. 클라이맥스 1 +9 20.12.03 396 12 13쪽
136 136. 사냥꾼들 3 +4 20.11.29 403 14 13쪽
135 135. 사냥꾼들 2 +10 20.11.28 403 12 13쪽
134 134. 사냥꾼들 1 +2 20.11.27 400 14 13쪽
133 133. 악몽 4 +6 20.11.26 395 13 12쪽
132 132. 악몽 3 +2 20.11.22 422 15 12쪽
131 131. 악몽 2 +4 20.11.21 418 17 12쪽
130 130. 악몽 1 +6 20.11.20 418 15 12쪽
129 129. 시가전 3 +4 20.11.19 420 13 13쪽
128 128. 시가전 2 +4 20.11.15 445 17 12쪽
127 127. 시가전 1 +4 20.11.14 446 15 12쪽
126 126. 재회 3 +10 20.11.13 440 17 13쪽
125 125. 재회 2 +6 20.11.12 460 21 12쪽
124 124. 재회 1 +7 20.11.08 489 20 12쪽
123 123. 드러난 음모 2 +8 20.11.07 453 20 12쪽
122 122. 드러난 음모 1 +8 20.11.06 459 16 12쪽
121 121. 트리거 2 +4 20.11.05 465 17 12쪽
120 120. 트리거 1 +4 20.11.01 498 20 12쪽
» 119. 연극 2 +4 20.10.31 469 15 12쪽
118 118. 연극 1 +4 20.10.30 505 19 13쪽
117 117. 보일러실 +8 20.10.29 511 18 12쪽
116 116. 징벌 +13 20.10.25 543 28 12쪽
115 115. 구원자 2 +10 20.10.24 507 28 12쪽
114 114. 구원자 1 +12 20.10.23 518 26 12쪽
113 113. 오비에 +14 20.10.22 518 29 13쪽
112 112. 침입자 4 +15 20.10.18 629 29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