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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2의 서재

사막의 소드마스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완결

922
작품등록일 :
2020.05.11 21:30
최근연재일 :
2021.01.18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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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2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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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3쪽

113. 오비에

DUMMY




01.

"애를 죽여야겠어."


남자가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까지 아이에게 끊임없이 미소를 지어주던 남자가 아이를 죽이겠다고 선언했다. 오비에는 그 말을 모두 듣고 있었다.


'죽여야겠다고? 누구를? 나를?'


물론 아이가 그들을 피해 도망친 것은 맞다. 누구라도 그럴걸? 잠깐 업혔던 것뿐인데도 몸에 피비린내가 잔뜩 베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쉽게 사람을 죽이겠다고 하다니. 아빠. 이 사람들 너무너무 나쁜 사람들이에요.'


오비에가 창백해진 얼굴로 생각했다. 아이는 복도 모퉁이를 돌자마자 염두에 둔 '쥐구멍'으로 재빨리 뛰어들어왔다. 아이가 간과했던 것이 있다면 그 쥐구멍이 쓰인 지 한참은 된 길이라는 것이다. 쥐구멍 속에는 죽은 쥐 시체가 가득했다. 쥐가 죽기 전에 부지런히 옮겨놓았을 음식의 썩은 잔해도 가득했다.


식빵 위에 난 구멍 위로 고개를 빼꼼히 내민 이름 모를 벌레가 오비에를 빤히 바라보다가 다시 쏙 들어갔다. 녀석의 몸에는 수 십 개의 다리가 제각기 다른 모양으로 움직였다.


오비에는 소리를 지를 뻔 했다. 재빨리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끅끅대는 비명 소리가 아이의 입에서 애처롭게 흘러나왔다. 아이는 입을 막은 손을 내려놓지 못한 채 므시엘이 나지막이 속삭이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아이가 사라진 모퉁이를 한참 서성이던 침입자 듀오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분명 아이를 찾아 수색을 시작한 것이리라. 오비에가 손을 내리고 숨을 얕게 내쉬었다. 복도의 등이 다 꺼져서 쥐구멍 너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컴컴했다.


'아무것도 안 보여...... 하지만 분명히 나가는 길이 있을 거야.'


오비에가 어둠 속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보이지 않는 벌레들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명체들이 그 안에 가득했다. 하나도 보이지 않았지만 전부 알 수 있었다. 이 길 위에는 다리가 수십 개 달린 아까 그 녀석이 가족을 이루고 있을 테고 눈이 커다란 날벌레가 투명한 날개를 정신없이 퍼덕거리고 있을 것이다. 아이의 상상력이 안 좋은 쪽으로 마음껏 발휘되었다.


하지만 오비에는 기어이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엎드린 자세로 천천히 앞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별 수 없었다. 이 앞에 무엇이 있다고 한들, 그래도 그건 산 것들이니까. 오비에의 뒤에는 오직 수많은 죽음과 그 죽음을 빚어낸 두 명의 살인자 듀오뿐이었다.


아이가 살기 위해 움직였다.



02.

"가만있어 봐. 인기척이 느껴져."


므시엘이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그의 얼굴에 슬픔인지, 배신감인지, 아니면 즐거움인지 모를 표정이 떠올랐다. 사내의 뜻 모를 표정에는 그러나 딱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었다. 살의였다.


"아직 멀리 가진 못했나 봐. ...... 어린애가 이렇게 거짓말이 능숙하다니. 완전히 속았어. 내가 그렇게 웃어주었는데. 애가 힘들까 봐 재촉도 않고. 근데 배신했어. 나를."


오조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므시엘이 혼잣말을 늘어놓으며 벽을 천천히 더듬어갔다. 벽 가까이 코를 가져다 대고 냄새도 맡았다. 오조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동료의 뒤를 따랐다. 오조는 몇 번이나 므시엘의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그가 상처받은 표정으로 뭔가에 홀린 듯 끊임없이 중얼거리던 모습을.


오조에게도 신나게 읽어주며 밤새 써 내려간 편지를 정중하게 거절한 어떤 귀부인의 앞에서, 그의 실력과 진심을 의심했던 지저인 가드 앞에서, 그리고 별 돼먹지 못한 수많은 이유들과 이해할 수 없는 정황 속에서, 녀석은 이렇게 정신이 나가버리곤 했다.


그 끝이 어땠냐고?


'생각하기도 싫은 기억이 떠오르네. 제기랄, 이 미친놈이 이번엔 애한테 꽂혔어.'


오조가 생각했다. 므시엘은 이제 뭔가를 감지하려는 듯 손을 내밀어 벽에 갖다 댔다.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채로 므시엘이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멀리 못 갔어. 아마 기어가고 있겠지. 배신자 년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바닥을 기는 것뿐일 테니까. 어린 것이 아주 못된 것만 배워서...... 누구한테 배웠을까? 누가 그래도 된다고 했을까? 자기한테 웃어준 사람한테 침을 뱉으라고 말이야. 응?"


"그래, 네 말이 맞아. 하지만 시간이 길지 않아. 그러니까......"


"닥쳐, 순교자 놈아." 므시엘이 으르렁거렸다.


"집중해야 하니까 말 시키지 마. 왜? 너도 나한테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


므시엘이 오조를 돌아보았다. 사내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오조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다. 내가 실수했어. 잘 더듬어서 애를 찾아보자."


"내가, 내가...... 잘했잖아. 지금까지도 잘했잖아. 앞으로도 잘할 건데, 나를 배신하면 안 되지. 누구도 그러면 안 돼. 너는 알지? 응? 알고 있지?"


므시엘이 다시 고개를 돌려 벽에 거의 코를 박은 채 중얼거렸다. 그의 손가락이 아주 연약한 것을 만지듯 조심스레 벽을 훑었다. 사내의 입이 천천히 벌어지고 침이 조금 흘러내렸다.


"그래." 오조가 말했다.


그리고 이제 말을 붙이지 말자고 생각했다. 뭐가 됐건 녀석의 기분이 풀릴 때까지.



03.

엄청나게 다리가 많은 벌레가 손가락에 달라붙는 느낌은 욕실 수챗구멍을 막은 머리카락 뭉치를 만지는 것과 아주 비슷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이쪽은 움직인다는 것. 그것도 수십 개의 다리가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아이가 조용히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거의 주먹만 한 날벌레가 입안으로 들어가서 날개를 한번 퍼덕거린 이후로 아이는 절대 입을 열지 않았다. 작은 빛도 없이 꽉 막힌 어둠이 주는 공포에 숨이 답답했지만 아이는 꾹 참았다. 코로 숨을 조금씩 들이쉬어야 하는 것이 정신적으로도 몹시 힘들었지만 혀로 나방의 날개를 맛보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맙소사. 신이여, 위대한 천정이여, 왕자님, 그리고 아빠!'


오비에가 마구 소리 질렀다. 물론 속으로. 쥐구멍 속을 기어 어둠 속을 지나면서 오비에는 벌써 몇 번이나 비명을 내지를 뻔했다. 그때마다 아이는 놀라운 침착함으로 위기를 넘겼다. 마음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이 속에 있었을까? 그리고 얼마나 더 있어야 할까?


오비에는 궁금했다. 실제로는 겨우 5분 남짓 한 시간이 지났을 뿐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하루가 이미 꼬박 지나버렸대도 믿을 것이다.


'눈이 보이지 않으면 시간도 알 수 없게 돼버리는구나.' 오비에가 생각했다.


어둠은 좀처럼 눈에 익숙해지지 않았다. 아이는 그냥 이곳에 숨어 시간을 보낼까도 생각했다. 지금까지 얼마나 기어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꽤 거리를 걸린 모양이고 (아니었다. 오비에는 '위대한 천정이 웃었습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할 때 술래와 띄우는 거리 밖에 오지 못했다) 여기에 오래 숨어 있으면 그 남자들이 포기하고 갈지도 몰랐다. (므시엘의 표정을 보았다면 아이도 그런 생각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를 다시 움직이게 한 것은 이번에도 아빠의 목소리였다.


시작이 반이고 첫걸음만 떼면 위대한 천정도 코앞이란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아빠?


집 밖을 나갔으면 최소한 마할란트라 벽은 만지고 와야 사람들에게 할 말이 있다는 뜻이지.


그 말을 하고 아빠가 씩 웃었다. 오비에도 지금 어둠 속에서 아빠를 따라 씩 웃었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앞을 향해 기어가기 시작했다. 입은 꾹 다문 채였다.



04.

마침내 빛을 보았을 때 오비에는 야광으로 빛나는 날벌레도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날벌레가 전혀 요동치지 않고 제자리에 고요하게 떠 있는 것을 보며 아이는 지금까지보다 훨씬 빠르게 기어가기 시작했다. 날벌레는 결코 낼 수 없는 따뜻하고 선명한 빛을 향해 열심히 기었다. 마침내 오비에는 2층 중앙 계단으로 향하는 마지막 복도 모퉁이로 나올 수 있었다.


아이가 종종 꾸벅 인사를 하곤 했던 하사딘 왕가의 문장이 오비에의 앞에 떡하니 나타났다. 그리고 오비에가 므시엘과 오조 듀오를 딱 마주친 곳이기도 했다.


'......'


쥐구멍을 빠져나가기 전에 오비에가 고개를 먼저 빼꼼히 내밀었다. 아이는 마음속으로도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았다. 중앙 계단에서 올라오는 빛이 모퉁이 너머에 비쳤다. 무서운 남자들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안심하면 안 돼. 우선 중앙 계단을 소리 없이 내려가야 하는데......'


오비에는 재빨리 달려내려갈까 하다가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 기괴하게 웃는 남자에게 딱 들킬 것 같았다. 그렇다고 살금살금 걸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이미 체력을 많이 써버린데다가 다리가 후들거려서 반드시 소리가 날 것 같았다. 왕궁의 부드러운 카펫도 아이의 두려움을 모두 숨겨주지는 못할 것이다.


결국 오비에는 쥐구멍을 빠져나와서도 계속 기었고 마침내 아무 소리 없이 중앙 계단에 다다를 수 있었다. 총 서른 개의 (오비에는 매번 계단을 세면서 올라오기 때문에 정확히 알고 있었다) 계단. 오비에가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이제 탈출의 순간이었다.


오비에는 주저하지 않고 계단 난간을 탔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으면서 최대한 빨리 내려갈 수 있는 방법이었다. 급사 아이들이 입는 펑퍼짐한 치마를 왼손으로 틀어쥐고 다리를 양쪽으로 벌린 채 난간을 재빠르게 타고 내려갔다. 남자, 여자 구분 않고 함께 놀 나이의 아이답게 날렵한 몸놀림이었다. 그래도 왕궁 계단 난간을 타게 될 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이제 메이드장님도 안 계시고......'


오비에의 어색하게 자른 앞머리가 바람에 휘날렸다. 아이의 둥근 이마가 훤하게 드러냈다. 앞으로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아이는 여성의 매력을 조금씩 갖게 될 것이고 도시의 여드름이 숭숭 난 지저인 소년들의 꿈이나 상상 속에서 종종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물론 아이가 살아서 무사히 나이를 먹게 될 때의 일이었지만.


마침내 계단 끝에 다다랐다. 더 이상 주저할 필요 없었다. 오비에가 양손을 앞으로 쭉 뻗어 난간을 딛고 뛰어내렸다. 아이는 능숙하게 양발을 모아 왕궁 1층 복도에 착지했다. 경쾌한 발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그리고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중앙 현관을 향해 내달렸다.


'아빠, 내가 무사히 왕자님을 만날 수 있게 해주세요!'


오비에의 앞머리가 너풀너풀 휘날렸다. 아이의 달음박질이 더욱 빨라졌다. 위대한 천정의 빛이 강렬하게 현관 밖 정원을 내리쬐었다. 어찌나 눈부신지 정원이 하얗게 불타는 듯했다. 그리고 마침내 아이가 현관문에 발을 내디뎠다.


"기다리고 있었어, 오비에."


현관 뒤에 숨어 있던 사내가 불쑥 튀어나왔다. 오비에가 멈추지 못하고 그대로 사내의 품에 안겼다. 사내가 품에 안긴 소녀를 으스러질 듯 부둥켜안았다.


"여기로 올 줄 알았거든. 어차피 갈 데라곤 뻔하니까." 므시엘이 웃었다. 아이가 그토록 끔찍해하던 바로 그 표정이었다.


오비에는 이제 완전히 정신을 놓았다. 침입자의 품에서 아이가 발버둥 쳤다. 작은 손으로 사내의 품을 연신 때렸다.


"그래, 그렇게 발버둥 치렴. 넌 이제 네가 저지른 끔찍한 일의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므시엘이 입을 찢으며 미소 지었다.


'아빠......'


아득해지는 정신 속에서 오비에가 아빠를 불렀다. 아이의 아빠는 이 순간 아무런 얘기도 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대신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애가 싫어하는 것 같은데 그만 놔주지 그래?"


므시엘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이는 꽁꽁 얼어버린 사내의 품에서 간신히 얼굴을 떼고 사내의 등 뒤로 목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눈이 파란 남자가 어색하게 해후한 사내와 아이를 동시에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남자는 까만 사슬을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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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131. 악몽 2 +4 20.11.21 418 17 12쪽
130 130. 악몽 1 +6 20.11.20 419 15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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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127. 시가전 1 +4 20.11.14 446 15 12쪽
126 126. 재회 3 +10 20.11.13 440 17 13쪽
125 125. 재회 2 +6 20.11.12 460 21 12쪽
124 124. 재회 1 +7 20.11.08 489 20 12쪽
123 123. 드러난 음모 2 +8 20.11.07 453 20 12쪽
122 122. 드러난 음모 1 +8 20.11.06 459 16 12쪽
121 121. 트리거 2 +4 20.11.05 465 17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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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118. 연극 1 +4 20.10.30 506 19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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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114. 구원자 1 +12 20.10.23 519 26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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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112. 침입자 4 +15 20.10.18 629 29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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