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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2의 서재

사막의 소드마스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완결

922
작품등록일 :
2020.05.11 21:30
최근연재일 :
2021.01.18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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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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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124. 재회 1

DUMMY



01.

서로 사이가 서먹한 달이 창백하게 떠올라 낯선 이방인을 내려다보았던 그날 밤. 사자가 처음으로 그와 마주친 그 밤, 오아시스. 그곳에서 사자는 자신의 본능을 잠재우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었다.


침착해라, 침착해. <공화국의 검>이여. 지금 네 손에는 변변한 검도, 그럴듯한 명분도 없으니.


머릿속의 스위치를 누르기는커녕 검을 뽑아들고 싶은 마음조차 자제했다. 노인은 그런 사자가 몹시 만족스러웠다. 공포를 이해하고 완벽하게 제어한 공화국의 검사에게 단박에 호감을 느꼈다. 검사는 그가 오랜 세월 기다렸던 <불확정 요소>였으니.


하지만 지금 노인은 그날과 완전히 다른 검사의 모습에 한 번 더 놀라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와는 완전히 다르구만, 그래. 이제 본모습을 숨길 필요가 없다 이건가?'


사자의 눈에 서슬 퍼런 안광이 떠오른 것을 보며 노인은 자기도 모르게 기운을 뿜을 뻔했다가 가까스로 자제했다. 잠깐, 자제? 자제라고? 이 내가 필멸자 앞에서 힘을 내보이길 주저했단 말인가?


'정말 이토록 완벽한 사내가 또 있을까. 이만치 내 마음에 쏙 드는 인간이 또 있었을까. 그야말로 사막을 위해 <저 위>에서 내려준 인물이 아닌가!' 노인이 생각했다.


"화가 많이 난 모양이군. 난 반갑게 맞아줄 줄 알았는데, 아닌가?" 노인이 짐직 정색하며 물었다.


사자는 명치를 짓누르는 듯한 분노와 차오르는 짜증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그날은 자못 공손해 보이기 위해 단어까지 골랐으나, 지금은 글쎄.


"당신에게 화가 났다기보다는...... 너무나 순진하게 속아버린 나 자신에게 울화가 치미는군. 잘도 태연하게 나를 아우바로 이끄셨더군. 뭐? 세상엔 미식가라는 욕심쟁이들이 있다고? 잃어버린 검을 찾고 싶지 않느냐고?"


사자가 울분을 꾹꾹 눌러가며 말했다. 그의 눈이 더욱 뜨겁게 이글거렸다.


"그래도 만났잖은가? 오랜 친구를! 그리고 맹약을 저버렸던 <미식가>를! 나는 거짓말이라고는 하나도 한 것이 없어. 아니, 고맙다고 선물이라도 건네주지는 못할망정 말이야."


노인이 혀를 찼다. 이번엔 가식이 아니라 어느 정도 진짜 마음이 상한 것 같기도 했다.


"난 당신의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 때문에 하마터면 목이 따일 뻔했소. 적지 않은 희생도 경험했고 말이오."


아우바에서 희생된 소인족 '토드'를 떠올리며 사자가 으르렁거렸다.


"그냥 솔직하게 이야기해 줄 수는 없었던 거요?"


노인이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로 사자를 바라보았다. 머릿속으로 뭔가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말할까, 말까. 괜한 이야기를 꺼냈다가 우리의 사이가 틀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그리고 마침내 결심한 듯 노인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그럼 재미없잖나."


아, 시발.


사자가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가기 시작했다.



02.

"그리고 외부인은 안되거든."


사자가 걸음을 멈추었다. 노인에게 몇 걸음도 남지 않은 거리였다. <달빛을 먹고 사는 자>에게 어떤 공격이 먹힐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한방 먹이겠다고 다짐한 참이었다. 그 순간에 노인이 말했다. 선언하듯 던진 말이 사자를 멈춰 세웠다. 노인의 표정은 태연했다.


노인이 보일러실 입구에 걸쳐있는 계단에 걸터 앉았다. 아픈 허리를 한번 구부리려면 큰 결심이라도 해야 하는 노인처럼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자리에 앉았다. 공화국의 검이 달려들지도 모르는 위험은 이제 사라졌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실제로 사자의 눈에 계속해서 일렁이던 불꽃이 어느덧 잠잠해졌다.


"외부인은 안된다네. 아름답고 신성한 사막을 정화하는 일을 외부인이 해서는 안 되네."


자리에 앉은 노인이 말을 이었다. 사자는 잠자코 들었다.


"자네는 엄연한 외부인이었네. 나를 만날 때까지만 해도 그랬지. 그, 뭐였더라...... 그렇지! 알레르기아. 그곳에서 처음으로 변질된 사막의 참혹한 실상을 목격했지만 그걸로는 부족했지. 구더기 같던 무법자들을 놈들이 해친 이들의 곁에 나란히 묻어주었어도, 부족하긴 마찬가지네. 그런 일을 백날 해봤자, 불의를 처단하고 정의를 행해봤자, 자네는 공화국의 검사일 뿐 사막의 일원이 아니란 말이네."


"그건 당연한 것 아니오? 나는 공화국 사람이오. 사막의 제국에 귀의하기 위해 사막을 건너는 것이 아니란 말이오."


사자가 말했다. 이미 많이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안광도 어느새 사라져버렸다. 그의 눈은 피곤에 지친 평소의 파란 눈으로 돌아와 있었다.


"물론 자네는 '공화국의 검'이지. 사막이 미쳐 돌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조사하러 온 특수 수사관. 심지어 단순히 수사권만 부여받은 것이 아니더군. 외국에서 행하는 거의 모든 일에 대해서 면책권까지 가지고 있다지? 일개 검사에게 주어지기에는 좀 과한 권한이지. 아무튼 난 자네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네. 다 자네 친구 덕분인데......"


'친구?'


노인이 스치듯이 슬쩍 꺼낸 말을 사자는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물어볼 때가 아니었다. 그의 말을 얌전히 모두 듣는 것이 더 중요했다.


"아무튼 광기의 달과 타락한 사막을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은 아무리 공화국의 검이라고 해도 가능한 일이 아니네. 이건 자네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야. 그냥 일이 그렇게 돌아가도록 돼있다는 것일 뿐. 사막의 정화는 철저하게 사막의 사람이 해야 하네."


"그럼 내게는 자격이 없다는 말이오?"


사자의 질문에 노인이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아니, 자네도 사막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일세. 그리고 사막의 사람이란 사막에서 나고 자란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네."


"대체 그게 무슨......"


"좀 더 쉽게 예를 들어볼까? 지금 <아라비아>...... 그러니까 이곳 사람들 말로 마할란트라의 중앙 병원에 누워있는 자로 예를 들어보지. 지금 그곳에 자네의 동료가 있네. 그 언변이 가볍고 엉성하지만 심지가 굳고 눈이 무척이나 밝은 사내 말일세."


"유마 올리오 말이오?"


"그래, 그래. 이제 한쪽 눈이 완전히 녹아버려서 윙크는 꿈도 꿀 수 없게 된 유마. 그도 사막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야. 올리오 가문은 사막 밖에서 꽤 이름이 높았던 일족이지. 하지만 그는 어엿한 사막의 사람이네. 차이를 알겠나?"


노인이 물었다. 대답을 바라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사자는 묵묵히 기다렸다.


"자, 그럼 사막의 사람과 외부인을 가르는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사자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답을 알 것 같았다.



03.

입도 뻥긋 않고 가만히 그의 말을 기다리는 사자를 보며 노인이 빙그레 웃었다.


"역시 대화를 할 줄 아는 남자야. 사람을 애타게 할 줄 안단 말이지."


노인이 한쪽 눈썹을 우스꽝스럽게 들어 보이며 말했다.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파트가 무엇인 줄 아나? 바로 듣는 쪽이네. 압도적으로 듣는 이의 역할이 크지. 말하는 이가 꺼내놓는 이야기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어떤 정적을 줄지, 어떤 템포로 어떤 질문을 던질지. 대화의 흥망성쇠가 모두 듣는 이의 역할에 달려 있단 말이네. 아무튼 자네는 대화의 흥을 돋울 줄 아는 사람이야. 이토록 과묵하면서도 말이지!"


노인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크게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가 보일러실 내부를 가득 메웠다. 자못 신경질적으로 들리는 웃음소리가 불난 집에 연기가 새어나가듯 궁전 바깥으로 번져나갔다. 왕궁 현관 계단에 얌전히 앉아있던 지저인 소녀의 귀에까지 들렸다. 오비에의 귀가 쫑긋거렸다. 하지만 그뿐, 오비에는 무릎을 가지런히 세우고 앉아 꽤 늦어지고 있는 구원자 아저씨를 계속 기다렸다.


"자,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지. 사막의 사람과 외부인을 가르는 기준. 그건 결국 '자각'일세. 쉽게 말해 나는 사막의 사람이라고 자각만 하면 된다는 것일세. 어때, 이제 알아듣겠나?"


"알아는 듣겠는데 그게 끝이 아닐 것 같소만." 사자가 말했다.


"맞아. 자각은 결코 의식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거든."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냐면 자각은 내면의 자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일이니까. 자네가 아무리 사막의 사람이다,라고 자신을 속인다고 한들 자네의 자아는 결코 속지 않지. 반대로 철저하게 외부인이라고 선을 긋더라도 이미 자아가 사막의 사람이 되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어. 그렇게 되면 자네가 아무리 위대한 공화국의 검이라고 뻐기고 다녀봤자 소용이 없는 걸세."


"......"


"이런! 전혀 동의하지 않는 얼굴이군. 참으로 솔직한 친구야. 그래서 자네를 좋아하지만." 노인이 말했다. 수줍기까지 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난 자네의 자아부터 바꾸어놓기로 마음먹은 걸세. 변질된 사막의 한복판에 던져놓는 식으로 말이지. 죄 없는 사람들을 제물로 삼는 버러지들 몇 단죄하는 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네. 공화국이 자네에게 황제를 만나라는 임무를 내렸다고? 사막의 변질을 조사하고 원인을 알아내고 시간이 남으면 겸사겸사 해결도 하라고?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그래서는 사막의 모래알 하나조차 깨끗이 할 수 없네. 암, 없고 말고."


"...... 그래서 나를 아우바의 제단에 직접 밀어 넣으신 거로군. 제물로서 말이야. 까딱하면 정말 제물로 희생되어 사막의 광기에 일조할 뻔했지만 말이오."


이번엔 노인이 침묵할 차례였다. 그는 마치 게임을 즐기듯 설렘 가득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문 채 사자의 말을 기다렸다.


"사막에는 제단이 수도 없이 많을 텐데 왜 하필 아우바였을까? 그건 당연히 그곳에 <미식가> 짐 레이건이 있었기 때문이겠지. 제물이 되어서 제단도 경험하고 하는 김에 사막의 변질에 직접 관련된 인물도 만나고 말이야. ...... 혹시 내가 마녀의 <환상>에 걸려든 것도 당신이 의도한 거요?"


사자가 물었다. 노인은 대답 대신 눈썹을 씰룩였다. 그의 가느다란 눈썹이 연극적인 모양으로 일그러졌다. 사자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해주시오."


"어쩜 그 짧은 순간에 이토록 많은 것을 알아차렸을꼬. 자넨 정말 영특한 친구일세. 이건 칭찬이야. 이 사막에서 내가 누군가를 마지막으로 칭찬한 것이 언제였더라...... 아마 100년도 넘었을걸!"


노인이 또 한 번 크게 웃었다. 이번엔 오비에가 확실하게 웃음소리를 들었다. 아이가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불안한 눈으로 궁전 로비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1층 로비 바닥에 사자가 뚫어놓은 구멍이 휑하니 보였다. 웃음소리는 명백히 그곳에서 흘러나왔다.


노인이 말했다.


"자네의 기운은 너무나 강하네. 아무리 사막의 마녀라고 해도 (혹시 그녀의 이름을 아나? '로즈'라고 하네. 사막의 창녀에게 딱 어울릴 것 같은 이름이지.) 자네를 그렇게 쉽게 현혹시킬 수는 없었을 걸세. 그래서 내가 도움을 좀 주었지. 마녀 자신은 조금도 의심하지 못했지만 말이야."


대답이 부족했다고 느꼈는지 노인이 덧붙였다.


"자네를 아주 깊이 잠들게 만들었던 그 향초 말일세. 효능은 원기회복, 심신 안정, 체내 혈류 속도의 완화 등이 있지. 그리고 또 한 가지 효능이 바로...... '마나에 대한 저항력을 크게 낮추는 것'이네."


"대체 왜 그런......!" 사자가 버럭 소리쳤다.


"아, 하나 더 이야기해 줘도 되려나?"


노인의 눈썹이 또 한번 장난스럽게 씰룩였다.


"그 향초 사실은...... 보통 사람이 맡으면 몇 분도 안 되어 절명할 수도 있다네."


노인이 다시 크게 웃었다. 또다시 터진 웃음소리에 오비에가 결국 왕궁 안으로 다시 발을 들였다. 행복보다는 절망이, 유쾌함보다는 불길함이 훨씬 컸지만 아이는 용감하게 웃음소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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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130. 악몽 1 +6 20.11.20 418 15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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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127. 시가전 1 +4 20.11.14 446 15 12쪽
126 126. 재회 3 +10 20.11.13 440 17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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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4. 재회 1 +7 20.11.08 489 2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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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120. 트리거 1 +4 20.11.01 498 2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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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118. 연극 1 +4 20.10.30 505 19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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