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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2의 서재

사막의 소드마스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완결

922
작품등록일 :
2020.05.11 21:30
최근연재일 :
2021.01.18 22:00
연재수 :
17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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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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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964,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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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4 10:00
조회
447
추천
15
글자
12쪽

127. 시가전 1

DUMMY



01.

이제는 확실해졌다.


'아무렴, 확실하지. 저 위대한 천정의 빛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만큼 확실하지.'


시진이 괴로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일이 완전히 어그러졌다. 신호는 없을 것이다. 성공을 알리는 (보일러실을 점령했고 마황탄은 가지런히 황동 보일러 안에 넣어두었으며 트리거가 될 마나를 뿜어낼 준비가 되었다는) 봉화는 올라오지 않을 것이다. 왕궁은 위대한 (흥, 위대한? 시진이 코웃음쳤다.) 천정의 빛 아래 다만 얌전히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입안이 썼다. 노인이 가느다란 입술을 들어올리며 입을 쩝쩝 다셨다. 시진의 눈이 방금 전 그의 옆을 지나 테라스로 나간 여인의 뒷모습에 머물렀다. 왕가의 무녀 (그래봤자 대리인에 불과한 반쪽짜리 무녀) 시알라 랑그레이가 무대에 올랐다. 탑 아래 군중들은 그녀의 등장에 한 번 더 크게 술렁였다. 그들은 이제 울고 절망하고 더 큰 분노에 휩싸여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댔다.


하지만 시진은 시큰둥했다. 솔직히 지하 세계의 왕가 따위 뒤집어지든 폭삭 망해버리든 관심 없었다. 그의 목표는 오직,


'저 빌어먹을 천정을 열어젖히고 싶단 말이다! 대체 어디서 일이 꼬인 거지? 누가 방해를 한 거지? 놈인가? 역시 그놈이야?'


시진이 격정과 분노로 눈을 부릅떴다. 그의 눈이 머리카락과 똑같은 탁한 잿빛으로 일렁였다. 눈이 파란 이방인을 떠올렸다. 왕궁의 대연회실에 있는 운동장 만한 원탁을 번쩍 들어 던지려고 했던 그 무자비한 녀석. 놈이다. 놈이 일을 그르쳤어. 아마 우리 아이들도 놈에게 당했을 테지.


노인의 입이 살짝 벌어지더니 가르릉거리는 소리를 냈다. 옆에 있던 가드가 흠칫거리며 돌아보았다. 시진이 입을 꾹 다물고 시치미를 뗐다. 하지만 이글거리는 눈과 씰룩이는 볼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지금 그를 방해하는 것은 공화국 검사만이 아니었다.


'불순한 자가 이 안으로 들어왔어. 이곳에서 완전히 손을 뗀 것이 아니었나? 왜지? 왜 이 시점에 뱀이 개입하느냔 말이다!'


시진이 속으로 마구 고함쳤다. 검은 탑 앞에 모인 지저인들도 함께 소리를 질렀다. 시진은 어리석은 자들이 질러대는 절규와 무의미한 함성이 듣기 귀찮아졌다. 그가 테라스로 천천히 걸어갔다. 옆에 서 있던 가드에게 나지막이 명을 내렸다.


"너, 가서 저 무녀를 치워라."


가드가 재깍 고개를 숙인 후 테라스로 뛰어갔다. 그리고 눈이 멀어 앞을 볼 수 없는 가련한 무녀의 팔꿈치를 잡고 끌어당겼다. 한창 그녀에게 죄를 덮어씌우고 매도하느라 신이 났던 왕자가 의아한 눈으로 가드를 노려보았다.


"이봐, 너 뭘 하는......"


그때 시진이 왕자의 옆으로 가서 섰다.


"시진? 너는 아직 등장할 때가 아니잖느냐? 어서 들어가서......"


"일이 틀어졌습니다. 왕자님." 시진이 말했다.


알라딘이 눈을 부릅떴다. 눈 안에 가득한 승리감과 도취감 위로 당혹감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시진의 말이 무슨 뜻인가 가늠하려는 듯 노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냐. 일이 틀어지다니?"


"정해진 시간이 많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신호가 올라오지 않습니다. 므시엘과 오조가...... 실패한 모양입니다."


알라딘이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왕궁 쪽을 바라보았다. 궁의 과시적인 황금색 지붕이 색이 바래긴 했어도 여전히 건재했다. 이제 가물해지기 시작한 위대한 천정의 빛을 받으며 왕의 위엄을 뽐내듯 황금색 빛을 뿌렸다.


"제기랄. 조금 늦는 걸 수도 있지 않겠느냐?" 알라딘이 물었다.


"...... 실패한 것이 확실합니다."


알라딘이 그 말에 고개를 돌려 시진을 노려보았다.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이렇게 확신을 한단 말이야? 그의 몸에서 붉은색 마나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진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왕자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눈을 똑바로 쏘아보는 시진의 잿빛 눈동자에 왕자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졌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이미 무대는 올려졌다. 시민들의 여론도 내게 돌아섰어. 이대로 밀고 나가야 하지 않겠느냐."


"...... 맞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눈과 귀를 더 오래 통제해야 합니다. 그들을 계속 검은 탑 앞에 붙들어두십시오. 그 사이 우리는 알란 왕자를 찾아야 합니다. 찾아서...... 왕좌를 돌려받으십시오."


"...... 놈은 어떻게 하느냐? 공화국 검사 말이다."


"그 자가 문제지요...... 이미 바깥에서 사람들을 들여왔습니다. 이름이 있는 자들로요. 그리고 우리에겐 <미식가>도 있지 않습니까."


왕자와 시진이 동시에 테라스 안쪽 어둠에 잠긴 방을 돌아보았다. 어둠 너머에 흉흉한 기운이 꿈틀댔다.



02.

도시 곳곳에 시체가 쌓였다. 사막의 모래땅 이면을 지배하는 지저인들의 도시는 이제 시체들이 산처럼 쌓인 거대한 '카타콤(지하 묘지)'이 되었다.


쌓이는 시체들은 거의 대부분 가드들의 것이었다. 알란파와 알라딘파로 나뉜 가드들 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마치 왕당파와 공화파 간의 내전처럼 보였지만 사실 누가 승리하든 그들 위에 새로운 왕이 들어앉을 뿐이었다. 회색 정복을 입은 도시 가드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칼을 겨누었고 어제까지만 해도 친구였던 자의 등에 칼을 꽂았다.


골목과 골목마다, 사거리와 사거리마다, 중앙 시장에서 상점가로 이어지는 메인 스트리트가 온통 전쟁터가 되었다. 도시의 양쪽 끝에 우뚝 선 왕궁과 검은 탑 사이에서 가드들이 피를 흘렸다. 시민들의 절반은 검은 탑 앞으로 몰려갔다. 남은 절반은 도시 구석구석에 숨어 겁에 질린 눈만 내민 채 숨을 죽였다.


"왕실 가드들을 모두 모아라!" 알란이 외쳤다.


알란 역시 전투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전투는 혼전이었다. 알란은 도시 내 벌어지는 모든 싸움에 관여할 수 없었다. 알란이 이끄는 왕실 가드의 숫자는 겨우 스물에 불과했다.


"지휘선이 전혀 닿지 않습니다. 흩어진 가드들을 모을 방도가 없습니다!" 바이런이 말했다. 절박한 보고였다.


알란에게 합류하지 못한 왕실 가드는 모두 서른이었다. 그마저도 셋, 넷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알란은 그들에게 아무런 명령도 내릴 수 없었다. 흩어진 왕실 가드들은 각자 개별적으로 적들에게 대항해야 했다. 왕실 가드의 푸른색 정복을 발견한 알라딘파 가드들이 쉴 틈 없이 달려들었다.


개인의 무용이 압도적이었다고 한들 수에서 워낙에 차이가 났다. 게다가 알란파 도시 가드들조차 왕실 가드들과 연계할 수 없었다. 조직의 핵심이 되어야 할 가드장 바이런이 알란과 함께 움직이고 있을뿐더러 알라딘파의 가드들이 집요하게 알란의 무리들을 고립시켰다. 그 결과 알란과 합류하지 못한 왕실 가드 다수가 목숨을 잃었다. 알라딘파 도시 가드들도 쉴 새 없이 전선을 뒤로 물렸다.


알라딘파 가드들은 서로의 영역을 할당하여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일이 틀어진 것을 확인한 시진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가드들의 편제를 새롭게 하고 도시 안에서 진을 짜도록 했다. 그들은 이제 테러가 아니라 <시가전>을 상정하고 움직였다.


이미 몇 달 전부터 시가전을 준비해온 알라딘에게 알란은 완전히 허를 찔렸다. 의식적으로 검은 탑을 외면해왔던 알란으로서는 뼈아픈 실책이었다. 그가 현실을 외면하고 있을 때에도 알라딘과 시진을 가드들을 훈련시켜왔다. 형의 목을 조르고 혈육의 목을 베기 위해서.


알라딘파 가드들이 전쟁에 참전하는 마음가짐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갑자기 발생한 테러에 떠밀리듯 나온 왕실 가드들과는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보병과 창병, 궁병으로 이루어진 가드들의 부대가 천천히 알란을 압박해 밀고 나왔다.


'아주 우유부단한 남자지.'


눈먼 왕가의 무녀에게 속삭였던 '미식가'의 평가는 틀리지 않았다.



03.

상황이 모두 알란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알란도 그것을 알았다. 상황을 이 지경까지 악화시킨 것의 책임 역시 자기에게 있다는 것도 알았다. 자신의 우유부단함과 혈육에 대한 끈질긴 미련이 만들어 낸 환장할 콜라보레이션이라는 것도.


그런 그가 지금 기댈 곳이라고는 역시 왕실 가드들이었다. 알란의 곁을 단단히 지키고 선 스무 명의 왕실 가드들이 용맹하게 싸웠다. 블랑과 즈린, 가드장 바이런이 각자 조를 짜서 알라딘의 병력에 끈질기게 저항했다. 급하게 조성된 진용이 조금씩 합을 맞춰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한 명. 지금 가장 눈부신 무용을 보여주는 것은 갈색 피부의 여인이었다. 세이마르의 민병 대장 마드 세라자드는 가드들의 가장 선두에서 막힌 활로를 뚫기 위해 종횡무진 활약했다.


"궁수입니다! 2시 방향의 2층 옥상에서 날아옵니다!"


바닥에 화살이 날아와 꽂혔다. 즈린이 길 위에 널브러진 부서진 문짝을 집어 들고 재빨리 왕자의 앞을 막았다. 그가 든 문짝 위에도 몇 발의 화살이 꽂혔다. 알란이 <중력의 힘>을 사용하려고 했으나 타깃을 노리기가 쉽지 않았다.


"제기랄, 구석구석 꼼꼼하게도 막아놨구나. 아무래도 고층 건물들마다 궁수들을 배치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지금 뚫지 못하면 완전히 고립될 것입니다."


바이런이 말했다. 아까부터 그가 전달하는 보고는 하나같이 절박하고 절망적이었다.


'가드장에게 무슨 죄가 있겠느냐. 다 내 탓이지.' 알란이 씁쓸하게 혀를 찼다.


바이런의 말대로 요충지마다 틀어막은 궁수 병력을 뚫어낼 수가 없었다. 가드들이 각자 엄폐한 상태로 궁수들을 눈으로 좇았다. 조금이라도 고개를 내밀었다가는 곧장 화살이 날아들었다. 알란이 고립된 사이 멀리서부터 또 한 무리의 가드들이 천천히 다가왔다.


'위에서 놈들을 요격할 수만 있다면!' 블랑이 안타깝게 속으로 외쳤다.


그 순간 옥상에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솟았다. 갈색의 곱슬머리를 휘날리며 골목 안으로 뛰어들어갔던 마드가 어느새 옥상에서 나타났다. 세이마르의 민병 대장이 아침에 보았던 사자의 움직임을 흉내 냈다. 벽을 박차고 뛰어 반대편 돌담 위로 올라가는 신기를 간신히 성공하려던 찰나, 마드의 몸이 기우뚱거렸다. 밑에서 바라보고 있던 블랑의 심장이 철렁했다.


'으아...... 안돼, 여기서 넘어지면!'


돌담 위에서 부츠가 미끄러질 뻔 한 순간 마드가 양 팔을 붕붕 휘둘러 다시 균형을 잡았다. 그리고 기세를 몰아 2층 옥상 위로 뛰어올랐다. 올라오는 계단에 바리케이드를 쳤던 궁수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길 어떻게 올라온 거야? 길이 없는데!'


궁수들이 그제야 활을 내려놓고 엉거주춤 칼을 빼들었다. 마드는 조금의 여유도 줄 생각이 없었다. 세이마르 민병 대장의 칼이 빠르게 날아들었다. 마황탄을 받아들 때부터 조금씩 몸속을 채우기 시작한 아드레날린 덕분에 마드는 여유롭게 궁수들의 손목만 노려 벨 수 있었다. 동맥을 잘라낸 손목에서 잇달아 피가 솟구쳤다. 불시에 습격을 당한 궁수들이 가볍게 제압당했다. 마드가 옥상에 서서 땅 위의 가드들을 향해 여유롭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클리어! 옥상 위는 모두 제압했습니다."


블랑이 그 모습을 보며 휘파람을 나지막이 불었다. 왕실 가드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알란조차 그녀의 모습에 넙죽 경례를 올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일이 모두 끝나고 나면 꼭 왕실 가드로 추대하고 싶은데요. 1급 위에 특급으로요."


곁에 다가온 바이런을 돌아보며 블랑이 말했다. 바이런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할란트라에 남아주기만 한다면 가드장도 기꺼이 내놓을 용의가 있다."


자기를 향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마드가 방긋 웃어 보였다. <전장의 여신>이 지하 도시에 현신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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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134. 사냥꾼들 1 +2 20.11.27 402 1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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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132. 악몽 3 +2 20.11.22 425 15 12쪽
131 131. 악몽 2 +4 20.11.21 419 17 12쪽
130 130. 악몽 1 +6 20.11.20 421 15 12쪽
129 129. 시가전 3 +4 20.11.19 421 13 13쪽
128 128. 시가전 2 +4 20.11.15 446 17 12쪽
» 127. 시가전 1 +4 20.11.14 448 15 12쪽
126 126. 재회 3 +10 20.11.13 441 17 13쪽
125 125. 재회 2 +6 20.11.12 461 21 12쪽
124 124. 재회 1 +7 20.11.08 490 20 12쪽
123 123. 드러난 음모 2 +8 20.11.07 454 20 12쪽
122 122. 드러난 음모 1 +8 20.11.06 460 16 12쪽
121 121. 트리거 2 +4 20.11.05 466 17 12쪽
120 120. 트리거 1 +4 20.11.01 499 20 12쪽
119 119. 연극 2 +4 20.10.31 472 15 12쪽
118 118. 연극 1 +4 20.10.30 508 19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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