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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2의 서재

사막의 소드마스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완결

922
작품등록일 :
2020.05.11 21:30
최근연재일 :
2021.01.18 22:00
연재수 :
17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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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29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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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117. 보일러실

DUMMY




01.

까맣게 정적이 내려앉았다.


'드디어 조용해지셨군.'


사자가 생각했다. 그에게 새빨간 마나의 돔을 씌었던 사내가 완전하고도 영원한 침묵에 빠진 것이다. 사자는 확신했지만 그래도 확인하기 위해 다가갔다. 무너져내린 1층 복도의 잔해들이 그의 부츠 아래서 마른 나뭇가지 터지는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이윽고 사내의 몸이 보였다. 집을 나설 때 얹고 나오는 것을 잊은 듯 목 위에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몸은 머리를 잃어버린 것을, 그리고 마지막 숨을 내쉴 틈도 없이 생명이 훅 꺼져버렸음을 아직 깨닫지 못한 듯 부르르 떨었다.


사자는 무심하게 그 모습을 눈에 담은 뒤 등을 돌렸다. 그리고 아이에게 돌아갔다.


"다 끝났단다. 혼자서 잘 견뎌주었구나. 괜찮니, 아이야?"


사자가 물었다. 오비에는 얼굴 위로 떨어지는 잔모래들이 거슬렸는지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네, 아저씨. 목이 좀 부었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아이가 대답했다. 그리고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아까 그 남자는...... 이제 우리를 쫓아오지 않을까요?"


오비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이의 상상력이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을 떠올리는지 입술이 애처롭게 부들거렸다. 죽음을 너무 많이 보았다. 비록 아이를 죽이고 싶어 안달을 냈던 사내의 죽음이라도 결코 유쾌할 일은 아니었다. 오비에의 생각을 알아차린 사자가 잠시 주저하다가 대답했다.


"이제 괜찮을 거다. 남자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단다."


사자가 무릎을 꿇고 아이의 얼굴 위에 붙은 가루들을 조심히 털어준 뒤 아이를 안아 들었다. 아이는 반사적으로 사자의 목을 끌어안기 위해 손을 들었다가 그마저도 힘이 없어서 풀썩 내려놓았다. 사자가 그 모습을 보고 안쓰럽게 웃은 뒤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갈 길을 찾아봐야 할 텐데. 애야, 너는 궁전에서 일하는 아이지?" 사자가 물었다.


"네. 언니들 (그러니까, 메이드 언니들 말이에요.) 과 시종 분들의 심부름을 했었어요. 오늘은 그런데 일이 별로 없었어요. 왕자님께서 가드님들을 모두 데리고 나가셨거든요. 왕궁이 휑하니 비었었어요. 가신들도 오늘은 하나도 없었고요. 그런데......"


다시금 끔찍한 일이 떠올라 아이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꼭 감은 눈꺼풀 안쪽으로 아까의 기억들이 떠오르는지 고개를 돌려 사자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사자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제 푹 쉬렴. 병원으로 데려가 주마."


"안돼요!"


별안간 아이가 소리쳤다. 진이 완전히 빠져서 맥 없이 쉰 목소리긴 했지만 오비에는 있는 힘껏 소리쳤다. 사자가 의아한 눈으로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소리냐? 안된다니."


"우리 이대로 나가면 안 돼요...... 도망치려고 하긴 했지만, 밖에서 왕자님을 모시고 다시 올 생각이었거든요."


"어째서냐? 왕자님을 데려 오려고 한 이유가?" 사자가 물었다.


"그 사람들이 찾는 것이 있었어요. <방>을 찾는다고 했어요. 궁전 안의 사람들을 다 죽이면서까지 꼭 찾아야 하는 모양이었어요. 그래서 언니들도, 메이드장님도......" 아이가 울먹거렸다.


"방이라니, 무슨 방을 말하는 거니?"


사자가 물었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많은 고통을 받은 아이를 한시라도 빨리 병원에 데려다주어야 했지만 그래도 사자는 물어봐야 했다. 어쩌면 그들이 왕궁을 비운 이유가 이 순간 밝혀질지도 모르니.


이윽고 오비에가 한 번 더 괴로운 기억을 더듬더니 부은 눈을 뜨고 사자를 올려다보았다.


"...... '보일러실'이랬어요. 그 사람들이 찾는 방은 보일러실이에요."



02.

"왕궁으로 돌아갔단 말이냐?"


알란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답을 구하기 위한 질문이 아니었다.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자문해보았다.


'왕궁에? 왕궁에 뭐가 있지? 알라딘, 내 어리석은 동생이 왕궁에서 구하려는 것이 뭐지? 나는 이미 도시로 나왔는데?'


그 순간 알란의 머릿속을 스친 생각은 좀 허무맹랑한 것이었다. 왕궁을 태워버리려는 건가?


'그런 짓을 해서 뭐 하려고? 왕궁을 태운다고 해서 무슨 이득이 있지? 적폐의 상징을 태우고 새로운 적자로서 양위를 이어받겠다는, 뭐 그런 뜻에서?'


하지만 알란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 짓 따위 해봐야 행위 예술적 퍼포먼스 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마할란트라에 끝없는 혼돈을 가져오겠다면 의미가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알라딘이 바라는 것은 도시의 멸망이 아닐 것이다. 왕위를 이어받는다 한들 도시와 시민이 없으면 무슨 의미가 있나?


입을 꾹 다문 채 생각에 잠긴 왕자를 가드들이 조심스럽게 바라봤다. 사자가 왕궁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전한 마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리안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확실하게 알았던 것은 아닙니다. 단지 일련의 폭탄 테러가 왕궁을 비우는 것이었다면 반드시 의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드가 고개를 돌려 길 위를 바라보았다. 인기척이라고는 없었다. 그들과 제압당한 도시 가드들의 시체, 그리고 새까맣게 타버려 이제는 형체도 제대로 알 수 없는 시신뿐이었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애초에 저희는 왕가의 가신들을 노린 테러라고 보았으나, 지금은 도시민들을 소개(疏開)하고 왕궁을 비우는 것에 더 목적이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사리안은 왕궁부터 확인하겠다고 했습니다."


"...... 그렇다면 우리도 왕궁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겠느냐?"


"외람되지만 제 의견을 말씀드리자면 시민들의 혼란을 수습하는 것이 먼저일 것입니다. 시민들의 대피를 도와야 할 도시 가드들 중 누가 알라딘 왕자의 편으로 돌아섰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시민들이 대피한 곳으로 가셔서 상황을 수습하고 이후를 대비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드가 말했다. 세이마르의 민병 대장으로서 빠르게 의견을 내놓았다. 혼란스럽기로 따지자면 그녀의 도시도 마할란트라 못지않았으니.


'더했으면 더했지.' 마드는 쓴웃음이 났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도시 가드들 중 몇이나 등을 돌렸는지 파악이 안됩니다. 수습이 먼저입니다." 가드장 바이런이 마드를 거들었다.


알란이 고개를 돌려 왕궁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왕궁의 지붕은 위대한 천정의 빛 아래서도 색이 바래 보였다.


"세라자드 대장의 의견을 수용하겠다. 시민들이 대피한 곳으로 가자."


알란이 말했다. 그의 머릿속은 속을 알 수 없는 동생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문제는 <보일러실>에 대한 생각은 떠올리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03.

아이가 사자의 품에서 내려왔다.


오비에는 얼마나 두껍게 얼었는지 알 수 없는 호수 위에 발을 딛듯 조심스럽게 땅 위를 디뎠다. 아이의 고개가 자기도 모르게 므시엘이 쓰러진 방향으로 향했다.


'그 무서운 사람은 지금쯤......'


오비에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리고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방인 아저씨를 올려다보았다.


"저는 괜찮아요. 몸은 이제...... 별로 안 아픈걸요. 다친데도 없고."


'쥐구멍'을 기어 나오는 동안 팔꿈치와 무릎이 다 까지기는 했다. 자기들의 세계에 침범한 침입자를 내쫓으려는 듯 날벌레와 다리 많은 벌레들이 몇 군데 물기도 했다. 하지만 오비에는 어른스러운 아이였고 그래서 굳이 걱정시킬만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네가 병원을 먼저 갔으면 좋겠구나." 사자가 말했다.


"음...... 아니에요. 그러면 늦을걸요."


뭐가 늦는다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아이는 확신했다. 병원에 다녀오면 늦는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거야. 귓가에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어쩌면 아이의 마음속에 직접 말을 걸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빠의 목소리일지도 몰랐지만...... 아무튼 그 무서운 남자들이 찾던 방을 지금 당장 찾아야 했다.


"우리가 같이 찾아야 해요. 제가 알려드릴 수 있어요. 저는 이 왕궁 구석구석을 다 알고 있거든요. 보일러실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들이 보일러실이라고 했단 말이지?" 아이가 제대로 걸음을 떼는지 살펴보며 사자가 물었다.


"네. 보일러실이라고 했어요. 보일러실이 뭔지 아저씨는 아세요?"


"그래, 알고 있단다. 하지만 그 자들이 왜 보일러실을 찾았을까? 그건 아저씨도 모르겠구나."


'보일러실이라니. 어딘가를 지칭하는 암호인가?'


사자가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에게 직접 물었다고 했다.


'아이에게 암호명을 말했을 리가. 그렇다면 진짜 보일러실을 찾았다는 건데...... 보일러는 찾아서 어쩌려고?'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사자를 왕궁으로 돌아오게끔 한 직감이 다시 강력하게 그의 머릿속에 경보를 울렸다. 당장이라도 움직여라. 뭐가 뭔지는 몰라도.


"그럼 애야."


"오비에에요. 제 이름은 오비에." 오비에가 말했다.


"그래, 오비에. 아저씨를 도와주겠니? 우리 같이 보일러실을 찾아보자꾸나." 사자가 빙긋이 웃었다.



04.

오른손은 이제 다시는 쓸 수 없을 것이다.


'이제 딸은 평생 왼손으로 쳐야 하는 거지.'


사내가 생각했다. 지금까지 평생 다섯 개로 부족함이 없었던 그의 오른손 손가락은 이제 그보다 절반 조금 못 미치는 개수만이 남았다. 검지와 중지, 약지가 있어야 할 자리가 휑하니 비었다. 손가락이 날아간 자리에 손가락 마디 뼈가 부러진 분필처럼 허옇게 드러났다.


중지가 날아가면서 가문의 반지도 함께 날아갔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는 순간부터 항상 끼고 다녔던 물건인데 다시는 찾을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손가락도 뭉텅이로 잃어버린 마당에 반지는 무슨.' 사내가 생각했다.


사내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쉴 새 없이 부들거리긴 했지만 다리는 아직 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심하게 벽에 처박혔는데 허리가 나가지 않은 것은 기적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마지막 순간부터 한 30여 초 정도 기억이 날아가 버리긴 했지만 대충 짐작이 갔다.


'속박의 힘? 개 쪽박이라고 해라.'


속으로 빈정거리던 사내에게 갑자기 욕지기가 올라왔다. 그는 온통 피로 가득한 침을 뱉으려다가 꾹 참고 도로 삼켰다. 그를 이 지경으로 만든 남자가 지금 저 지하 바닥에 있었다. 지금 소리를 냈다간 저 예민한 남자에게 그가 깨어난 것을 들통날 것이다.


사내는 가만히 선 채로 미동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 기절하기 전에는 분명히 없었던 구멍이 1층 로비 바닥에 뻥 뚫려 있었다. 구멍 위로 남자와 아이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올라왔다.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저들의 평화롭기까지한 목소리를 들으니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그의 동료는 이제 이 세상에 없는 것이다.


'차라리 잘 됐어. 그 새끼 뒤치다꺼리하는 것도 이제 신물이 나니까.'


솔직히 사내는 이제 숨 쉬는 것도 귀찮았다.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물이 났다. 그런 사내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놀랍게도 '임무'였다. 임무를 완수하면 이 지겨운 것들로부터 모조리 안녕할 수 있었다.


'나 혼자서라도 하고 만다. 대충 어딨는지 알 것도 같으니까.'


마치 부녀지간처럼 오손도손 이야기하던 남자와 아이가 마침내 걸음을 뗐다. 걸음 소리, 대화소리, 그들의 숨소리가 점점 그가 선 위치에서 멀어졌다. 충분히 멀어졌다고 생각했을 때 마침내 사내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천만다행으로 함께 무너지지 않은 왕궁 중앙 계단에 조심히 발을 디뎠다.


'그래, 이제 다 안녕이다. 내가 기꺼이...... 빌어먹을 천정을 활짝 열어주마.'


오조가 생각했다. 그리고 한 걸음씩 계단을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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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139. 클라이맥스 3 +3 20.12.05 401 16 13쪽
138 138. 클라이맥스 2 +7 20.12.04 386 12 13쪽
137 137. 클라이맥스 1 +9 20.12.03 396 12 13쪽
136 136. 사냥꾼들 3 +4 20.11.29 403 14 13쪽
135 135. 사냥꾼들 2 +10 20.11.28 403 12 13쪽
134 134. 사냥꾼들 1 +2 20.11.27 400 14 13쪽
133 133. 악몽 4 +6 20.11.26 395 13 12쪽
132 132. 악몽 3 +2 20.11.22 422 15 12쪽
131 131. 악몽 2 +4 20.11.21 418 17 12쪽
130 130. 악몽 1 +6 20.11.20 418 15 12쪽
129 129. 시가전 3 +4 20.11.19 420 13 13쪽
128 128. 시가전 2 +4 20.11.15 445 17 12쪽
127 127. 시가전 1 +4 20.11.14 446 15 12쪽
126 126. 재회 3 +10 20.11.13 440 17 13쪽
125 125. 재회 2 +6 20.11.12 460 21 12쪽
124 124. 재회 1 +7 20.11.08 489 20 12쪽
123 123. 드러난 음모 2 +8 20.11.07 453 20 12쪽
122 122. 드러난 음모 1 +8 20.11.06 459 16 12쪽
121 121. 트리거 2 +4 20.11.05 465 17 12쪽
120 120. 트리거 1 +4 20.11.01 498 20 12쪽
119 119. 연극 2 +4 20.10.31 469 15 12쪽
118 118. 연극 1 +4 20.10.30 505 19 13쪽
» 117. 보일러실 +8 20.10.29 512 18 12쪽
116 116. 징벌 +13 20.10.25 543 28 12쪽
115 115. 구원자 2 +10 20.10.24 507 28 12쪽
114 114. 구원자 1 +12 20.10.23 518 26 12쪽
113 113. 오비에 +14 20.10.22 518 29 13쪽
112 112. 침입자 4 +15 20.10.18 629 29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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