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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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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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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3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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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1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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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163. 데슈칸 심부

DUMMY

*


“죽는 줄 알았네.”


최태현이 입을 열었다. 숲속에서였다.


“허허허허허허.”


제냐는 그저 웃었다. 최태현이 하는 말이나 꼴이 때로 웃기기 때문이다. 일부러 웃으라고 그렇게 구는 것도 같았고. 참 성격 좋은 형이었다. 그는.


라이엔은 눈살을 슬쩍 찌푸리며 사과를 했다. 불쾌감을 나타내는 찌푸림은 아니었고, 미안함을 견디지 못한 찡그림이다.


“죄송해요. 사실 잠깐 까먹고 있었거든요. 워낙 혼자 다니는 게 익숙하던 터라. 그대로 갖다 박았으면 정말···.”

“아니, 진짜였단 말이오.”


태현은 뜨악하는 얼굴로 눈을 크게 띄웠다.


그들은 데슈칸 산맥에 무사하게 도착을 했다. 지금부터는 네임드 몹을 처리할 시간이었다. 퀘스트 씬의 진행, 웨이브가 어떻게 올 지 알 수 없으니 같이 모여 방비를 하고 스펙업을 하자는 논리다.

라이엔 핑이라는 새로운 동료도 얻었다. 그녀 또한 함께 다니다보면 퀘스트에 얽히게 될 가능성이 있다. 그것마저 확인을 하고, 괜찮다는 동의 하에 움직이는 중이다.


데슈칸 산맥의 심처. 그 초입 부근에는 ‘로키 산’이 있었다. 관문산이라고도 부른다. 데슈칸은 오랜 옛날부터 산슈카의 마경 중 한 곳이었다. 왕국기와 제국기 너머의 시간에도 여전히 산은 있었으니까. 그 찬란했던 시절에도 이 곳의 몬스터들을 다 소탕하지 못했다.

불가능이 그 이유는 아니었고, 단지 비용이 너무 컸을 뿐이다. 드넓은 산맥 지형은 사람이 정복하기 힘든 구석이 있다. 산을 뒤덮고 있는 숲을 전부 밀어버린다면 모를까. 그렇게 지형을 바꿀 것이라면 산이 산이 아니게 되리라.


고국기와 제국기의 시절. 고강한 마스터 마기아들이 즐비했으며 지금보다 훨씬 거대한 아티팩트들이 나라에 많았던 그 때라면 가능은 했으리라. 산을 날려버려 지형을 바꾸는 일도 말이다. 그러나, 말 그대로 그건 ‘산을 날려버리는’ 일이었다. 급박한 전쟁 상황에서 적국의 요새에 쓰기도 아까운 자원과 여력을 내국의 지형에 낭비할 이유는 없었다.

데슈칸 산맥은 마경이었지만, 산맥 안쪽으로 들어가지만 않으면 내부의 몬스터들이 범람하는 일은 별로 없다.

아주 오랜 기간 방치를 해두면 범람할 지도 모르긴 하다만, 그런 이유로 외곽 지역이나 산슈카 국내 영토들은 정기적인 토벌대의 훈련이 있다. 데슈칸과 어둠숲 외곽은 산슈카의 정규군들이 훈련하는 좋은 모의 전쟁터였다. 완벽하게 갖추어진 상태라고 하더라도 목숨이 위험할 수 있는 훈련이기는 했지만.


실제 전쟁에 비한다면 치밀하게 짜여진 움직임은 아득하게 안전하다. 그들을 공격하는 적국의 움직임은 미리 예상할 수 없지만, 늘 똑같은 패턴을 반복하는 몬스터들의 행동이야 읽을 수 있는 법이었으니.


데슈칸은 릿샤와 호아킨, 제냐와 최태현에게는 익숙한 곳이었다. 산맥이 깨나 넓으니만큼, 모든 곳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근처 지형에 닿았다는 것만으로도 왠지 그런 느낌이 났다.


그 근처 지형에 닿았다는 것만으로도 왠지 그런 느낌이 났다.


나름대로 의미가 깊은 장소다. 퀘스트 도중에 쫓기듯 이곳으로 빠져나왔고, 여기에서 힘을 길렀으니. 애를 썼던 장소엔 늘 피와 땀이 뿌려져 있었다. 피, 라는 건 비유적인 의미다. 게임 내에서의 피라면 실제로 흘렸고.

현실에서 우리의 삶도 늘 그렇다. 열정을 다했던 장소엔 자국이 남아 있다. 다시금 들러 보았을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상을 주는 것이다.


학창 시절에 몸과 생각을 키워냈던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건물 따위를 다시 가보면 느껴지는 감상들이 그것이다. 돌이켜보면 그러하다. 당시에는 몰랐고. 또 흘러가듯 생각하면 모르는 거지만 곰곰이 느껴보면 분명 그렇다.

성장이란 곧 생존과 같은 말이었다. 살아남은 이들만이 커나갈 수 있었고, 내일을 볼 수 있다. 아무렇지도 않은 학창 시절과 생존은 관련이 없는 단어들 같지만, 의외로 어린 아이들은 늘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훌륭하게 자신들의 삶을 살아낸다.


학생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른들이 모든 것을 만들어둔 평화로운 세계 속에 사는 것 같지만. 그 내부에도 나름의 투쟁이 있는 것이다. ‘삶이란 곧 투쟁이다.’ 라는 어느 급진적인 다혈질자의 말과 인생이 많은 부분 닮아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남녀노소, 생명을 가지고 있다면 누구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달리다 넘어져 피를 흘리기도 하고. 땀을 내기도 하고.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고. 돌이킬 수 없을것만 같은 짓을 저지르기도 하고. 그래서, 평생 후회를 하기도 하고. 인생의 온갖 감정과 민낯이 그대로 들어가있기에 그 때 그 시절은 사람이 죽는 날까지 영원토록 기억에 남게 된다. 혼, 넋이 영원히 지속된다면 그야말로 영원히 기억에 남으리라.


미숙했던 시절에 대한 찬란한 그리움은 그렇기에 뒤를 돌아봤을 때 누구나 가지게 된다. 아직까지 미숙한 어른이라고 하더라도. 지금보다도 더 못나고 어렸던 그 때는 있는 법이다. 정직하게 걸어왔다면, 그만큼은 성장을 하는 법이고 그게 다며 중요한 부분이다. 누구보다 빠르게, 누구보다 느리게라는 건 삶에 있어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정직하게 이 스포츠를 대했고, 걸어왔느냐가 중요하지. 삶이라는 긴 경주를.


제냐와 최태현, 릿샤와 호아킨.


릿샤와 호아킨은 이곳에서 수련을 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강한 감상이 남은 것은 마찬가지다. 퀘스트를 플레이하는 유저들이었으나, 이곳에서 분기점이 갈렸다. 애초에 동기 부여가 그렇게 잘 되지 않는 퀘스트이기는 했다.

제대로 사연도 알지 못하고, 그들의 인격(게임 내의 NPC들일 뿐이었지만)도 알지 못하는데 암살을 하라니. 제대로 된 의뢰가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중세 시대의 혼돈을 그려내는 이 게임 속 세계관에서는 그런 일도 흔하다. 사실 현실에서도 양지의 사람들이 알지 못할 뿐 일어나고 있는 일일 수도 있었고. 히트맨, 암살, 돈으로 누군가의 목숨을 사고 파는 그따위 일들 말이다. 모든 창작물들이 결국 현실로부터 나왔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참으로 합리적인 추론이기도 하다.


어쨌건 둘은 길을 틀었다.


선악 수치에 따라 퀘스트 씬을 하나의 이야기 구조로 보고, 또 빌런과 히어로로 나눈다면 암살하는 쪽은 분명 악역이었을 테다. 고작 게임 속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사람의 몰입감이라는 건 중요한 요소였고.

어떤 종류의 이야기에 몰입하는가 하는 건 철저하게 독자의 선택이었다. 시나리오 온라인이라면 플레이어가 되겠고.


두 사람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을 쉽게 할 수 있는 성격은 아니었다. 호아킨은 군인이었던 적이 있지만, 그때도 여전히 그러했다. 상명하복과 조직에 복종하는 건 철저하게 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개인으로서 신념이 존재할 수 없다면 군인일 수 없었다.

군인이기전에 인간이어라.


인간 대접을 받고자 하는 게 아니라, 사람 새끼여야 한 명의 군인Soldier이 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헌신적이고, 자신의 이웃들을 챙길 줄 알고, 사회 관념에 밝고. 도덕적이어야,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싸움에 투신할 수 있다는 거다.

사람 새끼가 아니고서는 동료를 지킬 수 없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없었고. 너의 인간성을 버려라, 는 군인 사회의 격언은 사실은 진짜 인간이 되어라, 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네가 정말 군인이냐, 정말 인간이냐, 는 물음인 것이다.


그렇게 절대적으로 옳은 신념을 따를 때, 올바른 개인이 모여 제대로 된 집단이 된다. 어떤 냉소주의자들의 말에 의하면, 늘 거대한 집단은 병신같은 짓거리만 한다고는 하지만. 그건 사람의 수가 늘어날수록 개개인 하나하나를 통제하기 어려워지기에 그런 것이다.

능력의 부족도 있고, 선의의 부족도 있을 테다.


이상적이었지만, 그런 부류의 엘리트들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집단의 이익과 선의를 추구하는 헌신적인 엘리트들 말이다. 결국 그런 종자들이 없다면 언제나 집단은 주저앉고 만다.


호아킨 팍스는 스스로의 입으로는 담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와 같이 일했던 동료들이나 상관, 부하들에 따르면 그런 편인 인간이었다. 인격적인 군인.


릿샤는 원래 태생부터 조직 사회의 경직성과는 맞지 않는 종자였고 말이다. 도리어 알레르기 반응처럼 학을 떼는 부류다. 언제나 삐딱하고, 남다른 시선으로 사물과 사건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그녀의 천재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주변 사람들의 한숨을 만들기도 했지만, 릿샤 애드윈이 진정으로 망나니였다면 주변에 아무도 없었으리라.

연구를 하는 분야에 몸담고 있다지만 동료들도 없었고, 함께 과업을 이루어나갈 수도 없었겠지.


나름대로 신념이 확고한 사람들이었다. 릿샤와 호아킨 둘 다. 비슷하기에 친구가 되기도 했고. 그렇기에 고작 취미로 즐기공 있는 온라인 게임에서조차 납득가지 않는 플레잉을 할 수 없었다.


로웰 드버는 그런 두 사람에게 마치 잡으라고 내려온 동아줄과 같았다. 애초에 퀘스트가 그렇게 짜여져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정해져 있는 수학 문제의 해답을 적확하게 찾아낸 것처럼. 두 사람은 ‘로웰 드버’라는 천재적인 마물술사와 함께 마음을 바꿔먹었다.


데슈칸 산맥. 바로 이곳에서 말이다.


여기에서 제냐와 최태현, 그리고 그들이 암살 대상으로 노리고 있던 자들과 면을 텄다. 인연이 바뀌었고, 입장이 바뀌었다. 여기서부터 네 명의 플레이어들은 도리어 운트 작힘을 노리기 위한 창이 되었다.


그 사이에 또 몇몇 NPC들의 게임 오버가 있었고, 비극적인 씬의 흐름이 있었지만. 아무튼 즐겁게 잘 풀어냈다. 망나니같던 독사 백작은 기어코 모든 걸 잃고 구렁텅이로 떨어졌고 말이다. 로멜리아 가의 가련한 두 아가씨와 노집사장은 평안하게 집으로 돌아갔다.


데슈칸은 그런 추억이 서려 있었다. 그 때의 인연까지, 고작 시간으로 따지자면 몇 달 정도이기는 했다만. 지금껏 이어졌다.


그들이 있는 곳은 데슈칸 산맥의 등허리. 그 가운데 부분이라 할 수 있었다. 충분한 험지였고 심부였다. 외곽 쪽, 로키산으로 발길을 돌리면 오랜만에 산지기 가문의 가주를 볼 수 있으리라. 그리턴 가의 하이샨 그리턴 자작 말이다. 그 가족들과 가신들, 오랜만에 갈색 사슴 기사단의 용사들을 만날 수도 있을 것 같았고.


어차피 퀘스트를 플레이하다 보면 다시 볼 것 같은 면면들이기는 하다. 지금은 굳이 행로를 돌려 해후를 나누기보단, 사냥에 집중하기로 한다.


기왕 온 험처다.


고수들이 노리러 들어오는 네임드 몹들이 우글거리는 그야말로 마경이다. 플레이어들 수준에서 ‘고수’라고 불릴 정도면, 그야말로 초인 이상의 초인이기에 그런 작자들의 토벌 대상이 된다는 건 어마어마한 말이었다.

과장을 많이 보태어 평범한 인간의 시각으로 보자면 경천동지할 존재들이다. 프린스 오브 고블린이니, 흑사니 백마니 하는 부류도 사실은 그러했다. 손짓 한 번 휘둘러 작은 지형을 만들고 바꿀 정도의 힘들이었다. 몸뚱이만 하더라도 숲을 초토화시킬 수 있는 놈도 있었고.


데슈칸은 깊고 넓은 산맥이었고, 그 안에는 다양한 세기의 네임드 몹들이 있다. 중수 종반부의 플레이어들이 잡을만한 것부터, 지금 고수급 근처에 달한 네 명이 모여 잡기에 좋은 놈들까지.

늘 그렇듯 가장 좋은 선택은 ‘보다 어렵게’이다.

이 멤버로도 성공을 확신할 수 없는 난적들을 상대로 나아가는 것이, 단시간 내에 가장 큰 경험치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다. 양질의 스펙을 완성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고.


호아킨은 그런 플레이에 아주 익숙한 사내다. 그가 다 드러내놓고 다니는 구릿빛 피부의 상체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 자국들이 남은 게 증거였다. HP가 극단적으로 떨어졌을 때 받은 큰 외상 자국들은 나중에 치료를 받더라도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어지간해선 캐릭터의 몸에 자국이 남는 일이 없는데도 말이다.


물론 간단한 조치를 통해 지울 수 있었다. 트라우마를 자극할 수 있는 비쥬얼을 계속 노출시키는 건 이 게임의 방향성과는 조금 다르니까 말이다. 그러나 호아킨은 그게 그냥 멋이라고 두었다. 릿샤는 개폼이라고 늘 놀렸지만.


상처와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는 호아킨 팍스도 늘 할 말이 많은 주제였다. 군인으로서의 삶이 그의 20대 시절에 끼어 있었으니까.


미국에서 ‘군인’이라는 건 곧 직업 군인을 의미했다. 징병제가 아닌 모병제 국가였으니까. 세계 최강대국이라 불렸던 지위는 한 세기가 거의 끝나가는 지금도 변치는 않았다. 헤게모니의 변화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계속해서 변해갔지만. 이전 세대의 패권을 넘볼만한 세력들이 새롭게 떠오르지는 못했다. 시대를 바꾼다는 게 쉬운 건 아니었다. 1등은, 아무나 하는 건 아니었고.


여러 가지 물리적 요소들 외에도 운, 따위의 일이 필요하기도 하다. 그건 정말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전 세기의 냉전 시대를 연상케끔 했던 초중반의 서슬퍼런 시대도 결국은 결론이 났다. 중국은 갈라졌고, 러시아 역시 마찬가지다. 이슬람권을 형성했던 중동 지방의 세력들도 여러 차례 분쟁과 분란이 일어서면서 한 개의 집단으로 서지는 못했다.

유럽은 조금 더 공고해졌다. 결국 서방 세계의 단합, 자유주의의 정치 체제가 시장 경제로 단결하는 것이 길이었다. 동남아 시장의 급진적인 성장이 활로가 되어주었다.


어쨌건 미국은 지금도 가장 많은 부가 나고 지나가는 곳이었으며, 가장 거대한 군사국가였다. 패권을 쥐고 있었다. 이전 시대에 비해 많은 나라들이 성장을 거듭했지만, 1등을 넘지는 못했다. 대신 2등부터 10등까지의 세력들이 조금 더 공고해졌고, 이전에 비해 1등에 가까워지기는 했다.


한국과 일본 역시 시대를 지나며 군사력을 보강했다. 한국이 한 개의 나라로 통일된 것 역시 크나큰 유의미다. 증강되었던 군사력은 한반도의 위쪽 끄트머리로 이동을 했고, 신흥 공업국이자 군사 강국으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만들었다.


기술력의 발전은 거진 군사력의 발전이라 해도 좋았다. 해상력과 공군 전력 역시 시대의 발전상을 감안하더라도 훨씬 늘었다. 세계 어느 지방에서 군사 분쟁이 일어난다면, 통수권자의 의사에 따라 얼마간 개입을 해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국경선 위쪽으로 북중국과 러시아의 일부를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일본도 사정이 많이 나아진 게 사실이었고. 한국과 일본은 결국은 협력하는 것이, 양국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방안이었다. 이웃에 나라를 두고서 견제에 온 힘을 쏟다보면 결국 될 일도 어그러지고 만다. 재빨리 내치를 안정화시키고 같은 경제 체제와 사회 분위기를 가진 나라끼리 협약을 맺는 편이 세계 경제의 이익을 증대시키는 효과로도 이어졌다.


태평양을 중심으로 한 공고한 경제 시장 기구가 만들어졌고, 물산은 끊임없이 이동을 한다. 동남아시아 쪽이 서방 세계에 우호적이며 시장 경제가 완성되자 세계 무역 역시 새로운 활기를 띄며, 새로운 경로가 더 생겼다.

동남아시아는 선진국들의 공업 물품을 받아들이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곳에서 자체적으로 다양한 상품을 만들어 내놓기 시작한다.


그렇게 된 것이 이미 수십 년 전의 일이었다.


미국의 군인은 국토 내 기지에서 훈련을 받고 주둔하기도 하지만, 각 동맹국들의 군사 기지로 파견되기도 한다. 혹은 지구촌 내에 군사 분쟁이 있을 때 파견을 가는 일도 잦았고. 전쟁을 경험해본 자와 경험해보지 못한 자의 차이는 극명하게 갈렸다.

모든 것을 배웠다고 하더라도, 실전을 경험한 이는 다르다.


그 차이는 장점도 있겠지만, 그 개인의 인생으로 볼 때는 단점 역시 있었다. 트라우마라는 게 남는다.


호아킨은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군인으로서의 커리어를 끝마치고, 평범한 사무직원으로 회사에 들어가 일을 하고 있는 지금도 아직까지 그 잔재는 남아 있었다. 약과 정신 병원으로의 길은 끊었다. 이따금씩 발작적으로 몰아닥치는 정신적 고통은 공황장애의 증상과도 비슷했었다. 약이 없으면 평안하게 밤을 보내기 힘든 날이, 지난 몇 년간 조금 있었다. 지금은 거진 호전되었다.

그 때와 비교한다면 완치라고 해도 좋았고, 일상 생활을 평범하게 보낼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호아킨 팍스는 충분한 행복을 느낀다.


비련의 시나리오는 기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여행에 대한 욕망, 스릴에 대한 갈망을 채워주는 좋은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이었다. 시간을 아끼게도 도와주었고. 실재가 아닌 곳에서 마음껏 전투를 치른다는 게, 아이러니하고 근거가 없는지도 모르지만 아주 약간 남았던 그 잔재를 희석시켜 주는 것도 같았다.


상처는 또한 그런 의미였다. 문신을 하는 사람들과 같다. 정신적으로 큰 병력이나 아픈 과거를 가진 인간들. 트라우마를 견디기 위해 고통을 견디고 몸에 제 스스로 상처를 낸다. 문신은 그런 흔적인지도 모른다. 아무런 상처도 과거도 없이 재미로 심는 인간들도 있을 수는 있겠다만은.


호아킨의 몸뚱이에 난 상처는 그런 문신의 대용이다. 실제의 몸에 그따위 짓을 했다간, 아마 빈 구석이 남아나지 않았으리라. 그만큼 그가 지난 날 겪었던 트라우마는 극심했다.


스스로 강인한 편이라고 여기며 살아왔던 호아킨이지만 사실 누구보다도 연약했던 걸지도 모른다. 심지어, 정신적으로도 말이다.


중동 지방의 국지적 분쟁에 휘말려서 전투를 경험했던 날들. 기지가 파괴되고 흩어진 콘크리트 잔해 속에서 바들거리며 지원을 기다렸던 시간들. 웃고 떠들었던 동료들이 무정물이 되어 부서졌던 기억들은 몇 년 동안 꿈에서 사라지질 않았었다. 지금은 다 견뎌낸 딱지진, 그마저도 떨어진 상흔들이다.


어떤 의미에서 상처가 사라지는 건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일상 생활이 안될 정도로 극심한 고통에서는 벗어났다.


“······갈까요.”


제냐가 문득 말했다.


사내들은 감상에 휩싸였다. 릿샤 역시 감회가 있었으나 깊이 빠져들지는 않았다. 그녀는 고찰을 깊게 하는 편이었지만. 때때로 찾아드는 추억에 오래 머무는 편은 아니었다. 현실적이고 냉소적이다. 릿샤와 얼마간 지내본 사람들이 하기 좋은 평가이리라.

그러다가도 이따금씩, 호아킨이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깊은 감상에 빠지는 날도 있었지만은. 세 사내들과는 템포가 조금 다른 편이라고 해두는 게 이해하기 쉬우리라.


라이엔으로서는, 데슈칸 산맥은 그저 지나가며 자주 보았던 지형지물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세슈칸은 최근에 가장 많이 플레이를 한 지역이었지만 가장 오래도록 머문 곳도 아니었고. 레벨을 올리기 위해 주력으로 삼았던 사냥터는 다른 곳이다.

애초에 비행이 취미이자 주 컨텐츠인 그녀는 아주 먼 곳까지를 제 영역으로 삼는다. 안정적으로 시속 3~400km대의 속력을 내는 탈 것이 그녀의 펫이었다. 썬더스는 쉽게 지치지도 않았고, 이 괴물같은 매는 쉬지 않고 수십 시간 이상을 거뜬히 날았다. 마음만 먹는다면 대륙 종단이나 횡단 역시 라이엔에겐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시간이 아주 많이 걸려야겠지만.


일단은 중부 대륙 필리아를 거점으로 삼고 있다. 창공을 노닐다가 좋아 보이는 장관이 있으면 내려가 머물기도 하고. 또 거기에서 사냥을 하기도 하고.

적당히 플레이를 하는 편인 그녀지만 아주 무계획은 아니라서. 필리아 대륙의 전도나, 또 중부 지방의 주요 정보 따위는 머릿속에 넣고 있었다. 로그아웃한 채로 종종 비련의 시나리오 공략법 따위를 찾아보기도 한다.


대충 좋아 보이는 곳에 내렸다가 순식간에 게임 오버를 당할 수는 없었으니까 말이다. 고수로서 갈 수 없는 곳보단 갈 수 있는 곳이 조금 더 많기는 했지만. 그 가면 안되는 곳들 위주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다.


지금 이들을 내려준 ‘데슈칸 산맥’은 애매했다. 레벨 100을 넘은 그녀로서는, 나름대로 활보해도 좋을만한 지형이기는 하다. 허나 이 거대한 산맥의 심처에는 네임드 몹들이 즐비했고, 놈들 중에 까다로운 부류는 전투력이 장점이 아닌 라이엔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놈들도 있다. 재수가 없이 걸렸다가는, 게임 오버를 당할 위험이 충분히 있는 것이다.


아주 위험지까진 아니어도 가급적이면 위에서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이 있는 모양이었다. 라이엔은 산봉우리의 어느 공터에서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불안감에 떨고 있는 이들은 없다. 그녀가 가장 레벨이 높았고, 한 명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고수급에 오르지 못했음에도 말이다.


전투력을 엄밀히 따진다면 라이엔이 이들 중에서 가장 쳐질 지도 몰랐다. 어디까지나 추론이었다. 이들이 하는 이야기나 평소의 기색에서 추론했다. 실제로 전투를 해보고, 또 실력을 다 본 적은 없었다. 가볍게 호흡을 맞춰 사르삿 근처에서 퀘스트들을 하기는 했다.


릿샤 애드윈은 뛰어난 초상술사였고, 네 종류를 다루는 원소술사에 트리플 캐스팅이 가능한 인재였다. 다중 영창은 초상술사들 중에서도 아무나 하지 못하는 기예에 가까웠는데. 남들에 비해 다양한 상황에 더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다. 난전에서 버틸 수 있느냐, 가 주요한 관건이 되는 ‘워 메이지’의 경우에 꼭 필요한 능력이라 할 수 있다.

만일 다중 영창이 불가하다면 한 종류의 초상술을 극한으로 파고들어 유용성을 최대한 늘리는 방법이 있으리라.


호아킨은 강력한 물리성을 내보이는 파괴적인 전사였고. 각종 짐승으로 변신을 해서 싸워대는 그의 모습을 얼핏 보았다. 한 번의 휘두름이었으나 오크가 걸레 조각처럼 변하는 꼴을 보곤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고 느꼈었다. 라이엔은.

최태현이나 제냐 역시 기력술사로서 노련함 이상의 경지에 다다른 것 같았고.


라이엔은 근접 거리에서 전투가 벌어진다면 거리를 벌리는 것이 급선무가 된다. 테이머, 마물술사라고 불리는 클래스는 굳이 따지자면 초상술사의 한 갈래에 속한다. 근접 전투에 적절한 클래스는 아니었다. 일반적인 초상술사도 따로 익혀야 하는 견제기와 스타일이 많을진대. 마물술사는 자신과 적 사이에 직접적으로 투사할 수 있는 공격기가 더욱 적었다. 대부분의 공격은 테이밍된 마물을 사용해서 이루어진다.


썬더스와 함께라면 누구도 잡기 어려운 수준의 기동성을 확보하게 되고, 전장이라 할지라도 활보할 자신이 있었지만 말이다. 고수 중에서도 특별한 수준을 보이는 괴물같은 마스터 마기아가 존재하지 않는 한은.


“위치를 아나?”


호아킨이 그들 가운데서 이야기했다. 제냐는 고개를 저었고. 근육질의, 거대한 체구를 가진 위협적인 사내가 마찬가지로 위협적인 웃음을 씩 지어보였다. 사자나 곰이 웃는듯한 인상이었다. 변신술사로서 갖는 패시브 스킬이라도 있는가. ‘곰의 아우라’ 따위 말이다.

맹수와 같이 웃음지으며 호아킨이 그들을 이끌었다.

릿샤 역시 길은 알았다. 두 사람이 산슈카에서 레벨 업을 해내기 위해 골랐었던 게 데슈칸의 보스 몬스터들이었으니.


호아킨이 입고 지금도 갖고 있는 상처 자국은 대개 ‘데슈칸의 검은 용’을 잡기 위해 싸웠던 날의 흔적이었다.

릿샤도 그 날은 인상깊다.


곰과 같은 사내가 산림 속 길을 먼저 걸어갔고, 나머지 네 명이 뒤를 따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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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 173. 방류의 직후 23.11.29 18 2 20쪽
173 172. 방류 23.11.29 17 2 12쪽
172 171. 괴물의 앞 23.11.25 21 2 22쪽
171 170. 용트림 23.11.25 17 2 11쪽
170 169. 번개와 폭풍, 형성중 23.11.24 21 2 22쪽
169 168. 캐스팅 23.11.24 16 2 19쪽
168 167. 사색 23.11.23 20 2 12쪽
167 166. 동굴 앞(3) 23.11.23 16 2 15쪽
166 165. 동굴 앞(2) 23.11.23 15 2 15쪽
165 164. 동굴 앞 23.11.22 17 2 14쪽
» 163. 데슈칸 심부 23.11.21 21 2 23쪽
163 162. 갈색 매 23.11.20 20 2 22쪽
162 161. 바구니 23.11.19 20 2 10쪽
161 160. 그와 그녀 23.11.19 19 2 18쪽
160 159. 의뢰(re)Quest 23.11.18 21 2 15쪽
159 158. 그녀, 라이엔 23.11.17 19 2 23쪽
158 157. 스킬러Skiller 23.11.16 25 3 15쪽
157 156. "음." 23.11.16 20 3 12쪽
156 155. 원탁 23.11.14 21 3 17쪽
155 154. 남중국 23.11.12 22 3 16쪽
154 153. 야욕 23.11.11 22 3 14쪽
153 152. 제국 특기特機 23.11.11 21 3 17쪽
152 151. 다시 만나, 담화 23.11.10 20 3 19쪽
151 150. 세르게이 알사드; 또라이 23.11.09 22 3 15쪽
150 149. 흑색장도 23.11.08 22 3 18쪽
149 148. 병실 23.11.08 21 3 14쪽
148 147. 내가 만나 본 고블린 중에 최고였죠 23.11.07 26 3 12쪽
147 146. 프린스 오브(10) 23.11.06 21 3 16쪽
146 145. 프린스 오브(9) 23.11.06 19 3 12쪽
145 144. "아, 그 놈 잘 있으려나?" 23.11.06 18 3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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