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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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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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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7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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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147. 내가 만나 본 고블린 중에 최고였죠

DUMMY

프린스 오브 고블린은 참 빡센 새끼다.


더럽게 단단하고 잘 죽지도 않는 데다가, 검기를 몇 방이나 먹였는데 공격력은 여전하다.

손에는 지형을 바꿀 수 있는 요술 지팡이를 들고 있고, 그것으로 마기를 뿜어내면서 거대한 폭발을 일으킨다.


바깥의 요란함은 마치 별세상의 일처럼 느껴진다.


전혀 아니었고, 고작해야 엉성한 흙더미 정도만이 외부와 제냐를 차단해주는 보호막의 전부였다. 눈을 떠도 보이는 건 없다.

지금, 제대로 서 있나?


방향 감각을 찾으려 애를 써본다. 눈을 지긋이 감았다가 다시 떠본다. 기감氣感을 사용하는 게 가장 빠르기는 하다. “······.” 아까 전에 나무에 처박혔을 때처럼 대충 뒤집혀 있는 모양이었다. 피가 아래로 쏠린다.

초인적인 기력술사의 신체에 MP가 제대로 돌고 있다면, 거꾸로 뒤집혀진 상태에서 아무리 오래 있어도 현기증이나 그 외 신체적 이상을 느끼지는 않는다. MP라는 건 그야말로 초인적인 힘이었고, 사용자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움직인다.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서 움직이는 힘이었으니 말이다.


바깥을 더듬던 기감은 어딘가의 공사 현장을 보는 듯한 장면을 제냐에게 보여주었다.


숲을 개간하려는 거대한 중장비들이 몰려와서 이 구역을 초토화시켜 놓은 것 같은 꼴이었다. 거목들은 우습게 넘어졌다. 그 충격에 다른 거목들도 기운 것이 많았고. 지면의 검은 흙은 완전히 뒤집어져 거대한 크레이터가 하나 생겼다. 크레이터의 주변으로는 원래의 지형보다 더 높은 흙더미들이 잔뜩 생겨났고, 제냐가 처박힌 곳도 그런 흙더미 중 하나였다.


고블린은 어디에 있지. 구덩이의 경사면 위쪽에 서 있는 것 같다. 곧 발견했다. 놈은 멀쩡하지 않았다.


상반신 여기저기에 화살을 꽂아두고 있고, 단검으로 인해 받았던 상처 역시 그대로인 모양이다. 무엇보다 손에는 저주의 나뭇가지가 없었고, 흰 빛의 입자들이 흘러내린다.

검붉은 마기 역시 세가 줄었고, 그 눈빛 역시 형형함이 조금 사라졌다. 독기를 품은 잔뜩 일그러진 인상이나, 흉악한 낯짝은 그대로였지만 그마저도 기운을 잃어버린 듯한 모습이다.

갑자기 고블린 프린스가 착해졌다는 건 아니었고, 죽어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화를 낼 힘마저 없을 때, 지독한 성정을 표출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색감이 없는 기감으로서의 데이터가 제냐에게 들어왔다.


땅의 울림은 저 멀리에 진원지가 있는 모양이었다. 거기가 어디지, 잠깐 생각해보며 기감으로 여기저기를 더듬고 방향을 찾던 제냐는 그게 최태현이 있던 방향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


입을 열어 뭔가를 말하고 싶었지만 흙이 밀려들어와 씹혔다.

“······.”


입 안에 들어오는 생생한 흙의 질감에 뱉고 싶었지만, 뒤집혀진 상태로 콧구멍으로도 들어오는 것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기력을 돌려 내부에 들어오는 것들을 밀어내고 안정감을 찾는다.


후우.


자세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이대로 체력을 회복할 수 있을 정도. 다리가 한 쪽 금이라도 간 것 같았다. 감각이 이상했다. 갈비도 몇 대는 나간 것 같았고.

다행히 MP가 남아 있었고, 아주 천천히 회복되고 있다. 마셔두었던 MP포션의 효력이 소량 남아있는 것 같았다.


끙,


제냐는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흙더미 속에서 꿈틀거리니, 온 몸의 옷 틈새로 흙이 밀려 들어온다. 끔찍한 감각이었다.

차라리 편해지기로 했다. 그냥 감각을 받아들인 것이다.

색다른 종류의 목욕법인 셈 치자, 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현실은 전혀 바뀌지 않았지만, 어쨌든 마음이라도 바꾸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둠숲의 토양이 좋은가보다, 뭐 그런 헛소리같은 생각을 한다. 약간 습기가 찬 검은 색의 흙 입자들이 온 몸의 촉각으로 느껴진다.


바지 쪽으로도 조금 들어오는 것 같다. 움직일 때마다, 흙들이 부스러진다. 바지춤으로 파고든 녀석들이 거꾸로 스멀스멀 올라온다. 빌어먹을.


허허허허허.


제냐는 짜증 섞인 웃음을 속으로만 지으면서, 천천히 몸을 돌리고 또 기력을 운용했다.


흙더미의 한 부분이 바깥에서 바라보면 꿈틀거렸지만, 고블린의 시야에는 닿지 않았다. 별로 외부 환경에 집중하고 있지도 않았고 말이다, 고블린이. 고블린은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겠는가.


프린스 오브 고블린에게 과연 철학적 사색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NPC들은 고도로 프로그래밍되어 그런 사고를 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계산한 움직임과 행동들을 보여준다. 깊은 수준의 감정 묘사들이다.

그리고 다시 NPC들 중에서도 인류와 몹들은 갈래가 나누인다. 악마종은 아무리 인류를 닮게 바꾸었다곤 하더라도 그 근본이 짐승이었다. 본질적인 의미에서 사고라고 할만한 것은 불가능하다. 본능이 있을 뿐이다. 교활한 계산은 가능하더라도.


죽음으로부터 태어나서 죽음으로 돌아간다.


태초에 악마종의 모습은 신이 만들어 낸 어떤 피조물이었겠으나, 신에게 내쳐진 반역자, 귀신의 손을 거쳐서 처음의 모습을 찾기 어려울 정도의 변종으로 바뀌었다.


아마 귀신이라는 존재가 종말을 맞이하고, 그것의 영향력이 이 땅에서 전부 사라진 뒤에 오랜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최초의 모습을 찾을런지는 모른다.


프린스 오브 고블린의 교활한 지성은 귀신으로부터 기인한 부자연스러운 것이었고, 그 사고 체계는 어떤 긍정적인 반응과 결론을 내놓지 못한다.

무언가를 죽이기 위해서, 특히 인류를 적대하기 위해서 심어진 악성 프로그램 같은 것이었다.


고블린은 자신의 끝을 짐작했고,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MP가 조금 남아 있었다.


발출하는 기운이 기세를 더한다.


덜그럭 거리면서, 그 몸에 꽂혀 있던 화살들이 떨어졌다. 심장을 파고들었던 검날들 역시 고블린이 기력을 운용해 내부에 물리력을 발휘하자 서서히 밀려났다.


밀려나면서 내부 장기를 한 번 더 긁었지만, 이미 초토화가 된 내부였다.


툭, 투둑.


고블린은 크레이터의 한쪽 경사면에 서 있었다. 발을 땅에 박아넣듯 하고 꼿꼿이.


블랙 리틀즈와 최태현이 날린 적철시들이 떨어져 나왔다.


그것들이 모두 나오고, 그와 함께 이어서 고블린의 몸 속에 있던 남은 피들이 떨어져 내렸다.

프린스의 눈에는 제 색으로 보이고, 플레이어들의 눈에는 흰 빛의 입자들로 보일 것이다.


혹은 각도에 따라 무지갯빛의.


피는 생명을 뜻한다.


고블린의 생명이 다해 흘러나왔다.


땅을 적시었고, 유기물인 그것은 다시 유기물의 배합에 도움을 주며 다른 생물의 자양분이 되리라.

귀신에 의해 변질되었던 고블린은 죽어 사라지고, 태초에 만들어졌던 기본적인 단위로 돌아가게 된다.


눈 앞이 어른거리면서 시야가 저물어갔다.


태양이 지듯, 고블린의 시계에서 빛이 사라져간다.


빛의 종말은 곧 암흑이었고, 고블린은 자신의 게임 오버를 받아들였다. 게임 내의 데이터였으니, 곧 죽음이라는 비유가 가장 잘 어울리는 현상이었다.


퍽,


하고 고블린이 바라보기 힘든 각도, 크레이터의 테두리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의 한 구덩이에서 제냐가 튀어나왔다.


그 즈음, 귀까지 멀며 프린스가 죽었다.


*


“아야야야야야야야······.”

“엄살이 심하십니다.”


최태현은 사르삿의 병동에 있었다.


병원실. 희고 깔끔한 톤으로 인테리어와 외벽까지 일치를 시킨 단정한 건물이었다. 사르삿의 중심가에 있는 치료술사들의 병원이다.


회복술이라 불리는 초상 스킬 사용자들이 있었고, 약재나 다양한 외과적 지식을 이용해서 상처를 치료하는 의사들도 있었다.


콘란드 대륙에 자생하는 여러가지 신비한 식물들은 현대 과학에 버금갈 정도로 놀랍고 또 다양한 효능을 보여주기도 한다.

전근대의 시대를 그려내는 컨셉이라고 하더라도 걸맞지 않게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보통 플레이어들의 신체는 NPC들의 평균과는 달라서 이런 병원 신세를 지는 일이 길거나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HP 포션을 잔뜩 때려박아서 손실을 멈추고, 회복 스킬을 받고, 그러고 나서 적당한 데서 잠이라도 청하고 로그 아웃이라도 오래 하다 돌아오면 어느새 회복되어 있는 것이 플레이어들이다.


최태현과 제냐는 프린스 오브 고블린과 싸우면서 사람의 몸으로는 버티기 어려운 다양한 꼴을 당했다.


휘두르기만 하면 폭발이 일어나는 신비의 지팡이를 가진 괴물놈과 싸웠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지막 순간, 최태현은 게임 오버마저 생각을 했지만 다행히 준비해갔던 보호 아티팩트가 위력이 잘 나와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사실 좀 간당간당하기는 했었다.


최후에 고블린이 던져낸 투사체는 최태현이 있는 곳으로 곧장 날아와서 대폭발을 일으켰고, 제냐가 당했던 것에 못지 않은 범위가 터져나갔다. 최태현은 제냐보다 조금 더 직접적으로 그 범위 내에서 휩쓸렸고, 보호막은 제 소명을 다한 뒤 사라졌다.


최태현은 다른 부유하는 흙, 바위, 모래, 나무조각, 다양한 물질들과 함께 뒤섞여 소용돌이 쳐졌고, 높이 떠올랐다가 형편없이 추락을 했다. 보호막이 날아간 것은 당연하고 가지고 있던 MP들도 거진 소모되어 주인의 육체를 지키기 위해 쓰였다.


여기저기 골절상을 입었고, 다행히 그 외 외상이 깊지 않아서 HP 포션으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제냐도 최태현도, 거진 초주검이 되어서 기듯이 움직였고, 가진 HP 포션을 전부 털어 마시거나 몸에 바른 뒤 어둠숲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가지고 갔던 포션 류들은 모두 사용했다. 어둠숲에서 나오기 위해서 또 잠깐의 요양이 필요했으니 실제로 나오기까지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프린스 오브 고블린이 남겼던 아이템들을 챙기고, 적당한 은신처를 찾아 약간 몸을 회복한 뒤에 도망치듯 필드를 떠난 것이다.


별다른 이동물, 길들이는 기승동물 따위가 없는 둘이라 숲에서 사르삿까지 먼 거리를 제 두 발로 움직여야만 했었다. 긴 시간 얼마나 걸릴 지 모르는 사냥을 하면서 말 따위를 무작정 데려올 수도 없었고 말이다.

사냥터 근처에 두었다가는 반드시 휘말려서 죽을 테고 외곽지에 세워둔다고 하더라도 테이머 스킬이 없는 이상 제대로 통제나 보호가 안될 테니까.


사냥보다도 더 지루하고 길게 느껴지는 복귀의 과정과 시간이었다.


그렇게, 간신히 도달해서 치료술사들에게 스킬을 받고 여러 처치 후에 이렇게 누워있는 참이다.


그 과정 중에 몇 번 로그아웃을 했다가 다시 들어왔다가를 반복했다.


사냥 중이 아니라면 필드에서도 로그아웃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제대로 쉬고 있는 상태를 만들어둔 채 로그아웃을 한 게 아니라면 딱히 HP가 차오르거나 하진 않았지만.


어둠숲에서 사르삿까지의 황무지 길을 걸으면서도 몇 번 재접속을 했다.


최태현도 제냐도, 악마종의 네임드 몹에게 당한 것이라 마기로 인한 상처도 조금 있었다.


기본적으로 프린스 오브 고블린의 공격에는 ‘독’처럼 추가적인 상태 이상을 일으키는 속성이 붙어 있는 셈이다.

물론 그것은 MP를 활용해 기력술사들이 충분히 쳐내고 저항할 수 있었다.

이제 방호력을 넘는 공격들을 받았을 때 나중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리 심각한 것은 아니었고, 치료술사들의 스킬에 다시 마기를 밀어내는 저항력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시간을 두고 치료가 된다.

나중에 그런 독기를 특징적으로 발휘하는 특수 몹이나 네임드 몹을 만났을 때 조심해야 하는 부분들이다.


압도적으로 강하면 상관이 없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치유 스킬을 얻거나 다양한 소모형 아이템으로 부족한 상성 싸움의 역량을 채울 수 있었다.

치유 스킬을 써먹을만한 수준으로 익히는 게 어려운 상황이라면 보통은 HP포션 중에서 힐링 포션Healing potion이라고 불리는 종류를 가져가 쓰는 게 대다수의 선택이었다.

HP포션 중에서 체력 손실을 막아주는 효과가 적은 대신 마기 따위의 특수 공격으로 인한 데미지damage를 줄여주는 포션이었다.


전투를 하고 난 뒤에 골병이 드는 것을 막아주는 힘이 강하다, 라고 이해하면 쉬웠다. 레벨 높은 악마종 몬스터들과의 싸움에서는 필요한 팁tip이었다.

piron-guillaume-U4FyCp3-KzY-unsplash.jpg


작가의말

고니,

고블린...

같은 고씨 아닙니까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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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 168. 캐스팅 23.11.24 16 2 19쪽
168 167. 사색 23.11.23 20 2 12쪽
167 166. 동굴 앞(3) 23.11.23 15 2 15쪽
166 165. 동굴 앞(2) 23.11.23 15 2 15쪽
165 164. 동굴 앞 23.11.22 17 2 14쪽
164 163. 데슈칸 심부 23.11.21 20 2 23쪽
163 162. 갈색 매 23.11.20 20 2 22쪽
162 161. 바구니 23.11.19 20 2 10쪽
161 160. 그와 그녀 23.11.19 19 2 18쪽
160 159. 의뢰(re)Quest 23.11.18 21 2 15쪽
159 158. 그녀, 라이엔 23.11.17 19 2 23쪽
158 157. 스킬러Skiller 23.11.16 24 3 15쪽
157 156. "음." 23.11.16 20 3 12쪽
156 155. 원탁 23.11.14 21 3 17쪽
155 154. 남중국 23.11.12 22 3 16쪽
154 153. 야욕 23.11.11 22 3 14쪽
153 152. 제국 특기特機 23.11.11 21 3 17쪽
152 151. 다시 만나, 담화 23.11.10 20 3 19쪽
151 150. 세르게이 알사드; 또라이 23.11.09 22 3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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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148. 병실 23.11.08 21 3 14쪽
» 147. 내가 만나 본 고블린 중에 최고였죠 23.11.07 26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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