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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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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최근연재일 :
2024.06.23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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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0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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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162. 갈색 매

DUMMY

*


“후우우우.”


깊은 숨을 토해내는 소리.


폐부로부터 호흡하고 있는 누군가의 호흡음이다.


호아킨은 창공을 누리고 있었다.


그래, ‘누리’고 있는 게 맞았다. 드넓은 창천이 마치 품에 들어올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 감각은 현실 어디에서도 느끼기 어려운 것이리라.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적당한 안전 장비는 필요했으니까. 사람이 맨몸으로 창공을 고속이동할 일은 거의 없다. 목숨이 한 개라는 전제 하에, 아예 없다고 해도 좋았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다. 높은 고도의 상공에서 뛰어내리고, 자유 비행을 하는 것들. 스카이 다이빙이 가장 비슷한 경험이겠지만, 그것과도 비교가 되지는 않았다. 자유 낙하와 비행은 분명 다르다. 위치 에너지는 아래로 떨어지는 활강을 경험시켜주나 앞으로 뻗어나가는 자유로움까지 주지는 못한다. 그건 추진 장치가 있어야 하는 일이다.


개인용 제트팩 따위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안전상의 이유로 레저용으로 개발되어 있지는 않았다. 쓴다고 하더라도 일정 수준의 높이 이하. 낮은 허공에서 쓰는 게 일반적이었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안전 장치가 먼저 발전하지 맨몸으로 고속 이동을 하는 장치를 만들지는 않는다. 사람의 몸은 기술 발전과 상관 없이 천 년 전이나, 그 이후나 똑같을 테니까 말이다.

SF소설에서 나오는 개조 파츠의 휴머노이드 따위가 아니라면.


그렇다 하더라도, 사람의 몸이 지어진 원리가 있는 이상 아무리 파츠를 붙이고 유전자를 조작한다 해도 일정 강도 이상으로 변하지는 않으리라. 어떤 과학자들의 확고한 단언이었다. 한계를 깨부수려는 노력들은 늘 있었지만. 언제나 열정에는 방향성이 중요한 법이었다.


호아킨 팍스는 창공을 제 것으로 삼았다. 하늘은 누구의 것이었던 적이 없다. 유사 이래로, 인간의 기준에서 보자면 말이다. 하늘 위의 신께서라면, 하늘을 지으신 이라면 혹시 모르겠으나. 인간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그러하다. 자연이란 사람이 다 담기에는 지나치게 거대하다. 그것을 창조한 조물주의 신격을 담고 있는 작품이었다.


창조물은 창작자의 그릇을 넘지 못하지만, 자연은 사람보다 위에 있는 이의 작품이었으므로 사람보다 얼마든지 클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소유할 수 없는 하늘임에도 그렇게 느껴진다. 그 공간을 자유롭게 누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작디 작은 사람은, 자유로이 활개칠 수 있는 것만으로 ‘소유했다’고 말할 수 있는 법이다. 그거면 되니까. 세상 모든 음식을 다 먹어보지 않아도, 자신의 입맛에 꼭맞는, 혹은 감동적인 음식을 한 끼 잘 먹고 나면 그걸로 족하다, 고 말할 수 있는 법이었고.


하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호아킨은 기분이 좋았다. 가볍게 눈을 감고 바람을 느껴보기도 했고, 깊게 숨을 마셨다가 토해내기도 했다. 맞바람이 아주아주 강렬했다.

호아킨은 고글을 끼고 있지도 않았다. 안구에 전해지는 부담이 상당했지만. 개의치는 않는다. 그는 아주 튼튼한 몸을 갖고 있었고, 그건 비정상적인 강도이다. 스탯으로 치자면 제냐보다 조금 더 높다. 물리스탯 위주로 잰다면 말이다.

거기에, 같은 스탯의 캐릭터라고 하더라도 보통은 호아킨의 몸이 더 단단하다. ‘변신술’을 사용하며 육체파로 전투를 이어나가는 그이기에 그러하다. 다양한 종류의 패시브 스킬들이 호아킨의 특색을 더하고 있었다.


‘강체强體’. ‘질긴 피부’. ‘철 골격’. ‘곰의 가죽’. ‘사자의 이빨’. ‘물소의 목’. ‘탄력적 근육’.

그 외에도 여럿. 다 합치면 십 수 개가 넘는 육체파 패시브 스킬들이 그의 몸을 감싼 채였다. 지구력과 근력, 순발력 따위에 포함되어 있는 육체 강화 능력 이외 스킬들의 효과가 그를 강력하게 만들었다. 아마 치명상을 입고도 버티는 힘 역시 다른 파티원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일 테다. 그건 곧 전투에서 쉽게 죽지 않는다는 뜻이었고, HP포션과 힐링 스킬 등 사후 조치를 받을 여력이 있다는 뜻도 된다.


콘란드 대륙은 여러 개의 기적이 있는 곳이었고, 그것들은 죽음 근처에서도 사람을 되살리곤 한다. ‘게임’치고는 상당히 박한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애초에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용사들을 모티브로 유저 캐릭터를 만드는 게, RPG의 흐름이었으니 말이다.

시나리오 온라인도 나름대로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럴만한 역량이 되고, 운이 따라주고. 여러 번의 시련을 넘는다면 그런 용사의 이야기를 지어 자신이 뛰어놀 수 있다. 다만, 그런 승리의 이면에는 호락호락치 않은 고난이 늘 있고, 또 누구나 용사가 되는 건 아니며 이야기의 변두리에는 이름도 없이 쓰러진 말단 병사 따위가 있다는 걸 알려줄 뿐이었다.


인생이라는 건 그런 법이 아니겠는가. 고작 취미로 즐기는 게임에 그런 인생론이 담겨 있는 게 우습기도 하지만. 진지하게 게임 개발사 태Tae의 연구자들은 그런 사상을 담고자 노력했다. 무엇이든 쉽게 얻을 수 없다. Easy come, easy go. 어떤 플레이어도 좋아하지는 않겠지만 적절한 수준의 불편함을 알맞게 구현하려 갖은 애를 쓴 작품이 바로 이 비련의 시나리오였다.


“훕.”


숨을 잘못 들이쉬어서 급하게 먹었다. 호아킨은 말할 수 없는 강풍 속에서도 용케 눈을 뜨며 하늘을 바란다.

찬란한 태양이 그들의 머리 위로 지난 지 오래였다. 낮은 한창이었고, 정오를 지난 지 꽤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뒤켠을 비추는 따가운 햇빛이 그의 거죽을 태웠다. 그렇잖아도 구릿빛의 피부가 더욱 짙어질 법했다.


그는 조류의 등에 타고 있었다. 날짐승. 맹금류. ‘매’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 보통 사람의 두 배 정도는 되는 체격인 그와, 사내 하나 더를 등에 태우고 고속 이동을 하는 거대한 매. 그런 걸 보통 ‘매’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괴물’이라고 부르지.

다만 콘란드 대륙에서는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썬더스’라고 했던 어느 괴조의 동료 혹은 부하인 모양이었다. 그들의 새로운 파티원이 이 매들의 테이머였다. 라이엔 핑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동양인 아가씨였고, 릿샤와 비슷한 나이 또래로 보였다. 아니면 조금 더 어리던가.


직장 생활을 착실하게 하고 있었고, 휴일이나 퇴근 후에 꾸준히 시나리오 온라인을 즐기고 있다고 했다. 레벨은 그들 중 누구보다도 높았고, 그런데 반해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신감은 가장 낮은 이상한 여인이었다.


플레이한 기간도 그들 중 가장 길었다. 비련의 시나리오는 서비스된 지 그리 오래지 않은 게임이었고, 이제 햇수로 3년 째다. 1년 여 정도 플레이를 한 릿샤와 호아킨도 나름대로 베테랑들인데. 둘보다도 조금 더 먼저 게임을 시작했다. 그래서 그런 레벨을 달성할 수 있었으리라.


테이머로서 노련한 모습이 보였고, 같이 지내보면 허점이 그리 많은 아가씨는 아니다. 묘하게 자신감 없어 보이는 헐렁한 태도는 타인들을 방심시키기 위한 자기 방어 기제일지도. 호아킨은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흘려보냈다.


맞바람이 친다.


그 바람에 별 것 아닌 생각들은 다 흘러 가버린다.


이런 시간이 필요했을 지도. 그의 변신 폼Form 중에 아직 날짐승이 없었다. 사자와 곰, 늑대 등이 있었지만 말이다.

‘비행’은 조금 특별한 일이었다. 변신술사라고 모든 동물들의 특성을 그대로 이용할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 비행 동물로서 움직임을 적응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시간이 필요했다. 함부로 변신 폼을 마구 늘리지 못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곰으로서의 전투법에 익숙해져야 결국 그 폼을 익힌 의미가 있었다.

시간과 비용이 상당히 들기도 했고 말이다. 어줍잖은 몬스터를 모체로 삼아 변신술을 빚어내도 그다지 큰 효과를 보지 못한다. 일반 상태에서의 전투력에 비해 별 변화가 없거나, 그보다 못하다면 변신술을 이용하는 의미가 퇴색된다.


가급적이면 비슷한 종족을 많이 사냥하고, 개중에서 가장 강한 놈을 잡아야 효율이 좋았다. 곰과 늑대, 그리고 사자의 모습은 모두 그렇게 만든 폼Form들이다.


비행술은 아직도 익히지 못했다. 덕분에 이렇게 매달려 가고 있는 셈이다. 썬더스, 라고 하는 이 매의 종류라면 아주 좋을 듯했다. 라이엔이 다루고 있는 썬더스가 거대 매 종족 전체를 아우르지는 않을 테니까. 아마 이 비슷한 몬스터를 발견할 수 있다면 잡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런 정도의 경험이라면 언제든 하고 싶었다. 시간을 특별히 더 들여서라도 비행류의 스킬을 익히는 게 좋겠다, 고 호아킨은 생각한다. 시원한 바람에 그의 짧은 머리가 흩어졌다.


그야말로 하늘 속이다. 구름은 위에도 있고, 고도에 따라 아래로도 지나간다. 속력은 지독하게 빨랐다. 보통의 몸뚱이었으면 버티지 못했으리라. 시속 3~400km는 족히 나오는 듯하다. 그래봐야 전 시대의 고속 열차 정도의 속력이었다. 작금의 열차보다도 느렸고.


그러나 자유로운 방향 선회가 가능하고 고도의 AI와 강력한 공격 능력을 가졌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창공을 수직 이동할 때의 속력이 이 정도이고, 아래로 급강하를 해서 공격할 때의 순간 속도는 더욱 빠른 듯하다. 솔직히 이런 정도의 매 괴물이 자신을 노리고 달려든다면 호아킨도 자신이 없었다.

그 역시 만만한 부류는 아니었으니 맥없이 게임 오버를 당할 정도는 아니겠지만. 상처 없이 막아낼 수 있을까? 생각하면 고개가 절로 저어진다.


호아킨의 뒤에는 제냐가 타고 있었다. 호아킨은 특수하게 만들어진 마구와 같은 것을 쥐고 있다. 몸을 바짝 아래로 당겼고, 그의 허리에는 버클 따위가 있어서 고정용 끈이 매져 있다. 가죽 갑옷만을 걸친 맨 살에 바로 닿게끔 매었다. 피부가 거칠기도 했고. 살 역시 단단한 편이며 패시브 스킬도 보통이 아니라 그다지 불편하지는 않았다.


거기에 두 손으로는 매의 목덜미 즈음에서 뻗어 나오는 가죽같은 소재의 손잡이를 쥐고 있었다. 손잡이는 한 쌍이 더 있어서 뒤쪽으로 가, 제냐의 손에도 쥐어져 있다. 제냐 역시 호아킨과 마찬가지로 안전용의 장비를 상체에 매었고, 버클을 채워 단단하게 고정을 시켰다. 시속 수백 키로미터로 날아가는 상공의 이동 물체였다. 여기에서 삐끗해 떨어진다면 그야말로 뼈도 못추릴 것이다.


거기서는 이제, 신체 능력과는 상관 없는 지점이었다. HP가 수만에 달하는 물리 계열의 전투 클래스들이었지만, 스카이 다이빙을 하는 고도보다 높은 데서 떨어졌다간 영 좋지 못한 꼴을 당할 테다.

기적적으로 운이 좋게 어느 대류에 휩쓸려 안전하게 착지한다는 확률이 존재하기는 한다. 물론 ‘기적적으로’ 라는 표현이 딱 알맞는 희박한 확률이기는 하다.


그 외에 제냐라면 방출 계열의 스킬들을 마구잡이로 뿜어내면서 속력을 늦추는 방법이 있겠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일 때 효과가 있는 것이었다. 급소가 부서지면 치명상을 입고, 남아 있는 HP와 관계 없이 게임 오버에 이르게 된다. 인간 포탄같은 느낌이 되어 대륙과 격한 포옹을 하게 될 테였고, 아마 높은 확률로 HP포션의 효력을 보기 전에 죽을 테다.


호아킨도 그렇고, 제냐도 그렇고. 둘 모두 몸을 바짝 앞으로 숙여 엎드리고 있었다. 최대한 공기 저항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그대로 상체의 면적에 맞바람이 닿아도 떨어지거나 하지는 않는다. 안전 장치로 만들어진 버클과 벨트는 의외로 튼튼했다.


그럼에도 어딘지 안심이 가지 않아서 제냐는 승마용의 손잡이 같은 끈을 단단히 쥐고 있다. 사내 두 명이 그 위에 올라탔는데도 매는 아주 안정적이었다. 보조 장치를 더 길게 만들 수 있다면 몇 명 더 타도 좋을 듯하다. 주인인 라이엔의 의견에 따르면 이 정도로 나누어 타는 것이 제일 좋다고 하지만.


매의 등줄기에서 강력한 힘이 느껴진다. 조류는 몸이 가벼워 그 근육이 들짐승이나 수룡에 비해 그리 강력하지 않을 수 있었는데. 그것도 체급에 따른 문제였다. 사람을 태우고 날만한 괴조의 몸뚱이에선 힘이 느껴졌다.


창공을 가르는 매의 날갯짓.


방향을 바꿀 때면 가끔 그 대가리를 옆으로 젖혔고, 날개의 각도를 조금만 틀어도 홱 꺾였다. 공중에서 곡예 비행을 맛보는 느낌이었다.


날씨가 화창한 것이 아주 좋다. 폭우가 쏟아진다거나 했다면 이런 느낌을 받지 못했으리라. 플레이 타임의 대부분을 비행으로 소모하는 라이엔의 말에 따르자면, 빗속의 비행 역시 나름의 맛이 있다고는 하는데.

아무튼 그들이 날 일은 많았고, 또 길었다. 데슈칸 산맥까지 한 시간은 좀 넘게 날아야 했다. 매가 낼 수 있는 최대 속력으로, 직선 거리로 말이다. 말을 타고 움직였다면 지형의 문제도 있고, 말들 역시 쉬어야 했기에 며칠은 걸리는 거리이다.

특수한 종을 사용하고 기력술의 힘을 빌린다면 또 어떻게 될 지 모르지만.


호아킨과 제냐가 탄 매의 앞에 라이엔이 탄 것, 썬더스가 날아가고 있다. 두 마리지만 정확하게 선을 지켜서 날고 있어 편대 비행의 모양이 떠오른다. 마치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것처럼, 대장과 부하의 모습처럼 보였다. 실제로 저 ‘썬더스’라는 개체가 갈색 거대 매의 주장격인 개체인 듯했다.


몇 개의 무리를 이끌고 있는 수장이었는데, 라이엔이 테이밍으로 잡아서 부리고 있는 모양. 거기에 이렇게 일손이 더 필요할 때면 몇 마리를 불러와서 라이엔이 간단한 조작으로 테이밍을 하는 듯했다. 라이엔 그녀 자체는 ‘군단’ 계열의 테이머가 아니었지만, 썬더스를 강력하게 조작하고 있었기에 그의 말을 듣는 부하 개체들을 편법으로 부릴 수 있는 것이다. 썬더스를 다루는 것만큼 완벽한 조작과 호응은 없지만 약간의 방향 전달만으로도 부하 매는 깔끔하게 움직였다.


때로 자연물, 야생 동물들의 움직임은 기계로 짜여진 듯 놀랍고 아름다울 때가 있었다. 그건 자연이 애초에 그렇게 지어진 것이었다. 아날로그로 이루어진 현실 세계에서 무엇보다도 수학적이며 구조적인 탁월함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새들의 비행 역시 그러하다.


두 마리의 새는 앞 뒤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사르삿의 상공에서 데슈칸 산맥의 높은 봉우리 위쪽으로 곧장 이동을 했다.


“어버법.”


제냐는 뒤에 있어서 바람을 조금 적게 받았다. 그러나 앞을 좀 보고 싶어서 상체를 세우다가 다가오는 바람에 고개를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힘이 부족했다기보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대응을 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물리 스텟만 따지자면 호아킨에 비해 그리 부족할 게 없었다.

호아킨 특유의 패시브 스킬들 따위 때문에 실제로 힘 대결을 해보면 지기야 하겠다만.


창공을 나는 두 마리의 거대한 매가 유연하게, 태양 아랠 미끄러지고 있었다.


*


“우아아아아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는 건, 최태현이었다.


이 정도의 속력을 받아도 되나?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창공을 수평 이동할 때만 하더라도 속력이 3-400km대가 나오는 괴랄한 매였다.


현실의 지구에 있는 매로 치자면, 순간적으로 내려 꽂혀 사냥감을 물어 챌 때 나오는 정도이다. 그만한 속력을 시종일관 유지하면서 난다고 하더라도, 초인적인 물리 스텟을 구비하고 있는 플레이어로서는 견딜만했다. 장치 역시 떨어지는 일 없이 몸을 잘 붙잡고 있었고 말이다. 거기까지는 아찔하지만 나름대로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지금은 조금 다르다. 다시 수직 강하를 하듯 아래로 내려 꽂히고 있는 매의 속력은, 일반적인 그것과 아득한 차이다. 최태현은 자신의 몸에 전해지는 부하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이건 맨몸으로 창공에서 느껴도 되는 수준이 아닌 것 같았다. HP가 닳지는 않는듯하다. 그런데, 경험해보지 못한 속력이라 삐끗하면 그대로 게임 오버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매는, 드넓은 창공의 위를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 아래로 팩 내리박히고 있었다. 위치 에너지의 가중을 받아 아래로 때려버리는 매의 움직임. 도끼로 찍는듯한 강렬함이 있는 낙하였다. 대각선으로 쭉 미끌어지고 있었고, 라이엔과 릿샤가 탄 썬더스가 그렇게 떨어지는 중이다.

뒤를 따르는 호아킨과 제냐의 탈 것 역시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어어어어어.’


혈류가 조금 이상해지는 것도 같았다. 빈혈기가 오나?


거진,


음속을 돌파하는 게 아닐까 싶은 정도의 생각이었다. 주변의 시계가 흐릿하게 흩어졌다. 눈 앞에 보이는 작은 점으로 시야가 집중된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블랙아웃이 된다고 하더라도 이상하지는 않으리라.

전투기 조종사들은 음속을 돌파할 때 전투기 내부에 있기라도 하지. 지금 공기압을 그대로 맞고 있지 않느냐는 말이다. 이게 정말 맞는 비행법인가?


최태현은 무언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썬더스의 배 아래에 묶여 있는 그로서는 할 말이 없다. 놀랍도록 튼튼하게 만들어진 가죽 바구니가 찢어지지 않고 그 속력을 견디고 있는 것에 감사할 뿐이었다. 그마저 튿어지고 만다면, 그대로 게임 오버다.


입을 열어 소리를 내는 것도 힘든 대류의 흐름과 중력 에너지 속에서, 최태현은 머리 회전을 빠르게 돌렸다.

살 방법이 있나?

썬더스가 멈추지 않는다면, 아마 없을 것 같았다.


*


“아.”


하고 입을 열어 뱉은 건,


거대한 낙하 에너지를 품고 떨어지는 중인 썬더스의 등 위에서였다. 라이엔의 입에서다. 라이엔은 앞에 릿샤를 품에 안듯 두고 있었다. 적당히 거리를 이격해서 탈 수 있는 충분한 자리가 있었으나, 왜인지 체구가 작은 여성이라 그래야 할 듯했다.


라이엔도 그다지 체격이 큰 편은 아니었지만 릿샤는 더욱 그러했다. 떨어질 것 같아서, 왠지 가련해서 지켜주어야 할듯한 모습이다. 사실 조금만 오래 있어보면 전혀 그렇잖은 성격에 거리를 한참이나 벌리게 되는 것이, 릿샤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취하는 반응이었다. 여자나 남자나 할 것 없이 말이다.


그러나 당장은 릿샤도 귀찮다는 듯 쳐내지 않았고, 그녀보다 조금 더 나이가 어린 라이엔의 치근덕거림을 받아주었다. 어쨌든.

그런 자세로 매의 등 위에서 평소처럼 공격적인 랜딩Landing을 준비하던 라이엔은 문득 평소와 다른 것을 깨달았다. 지금 그녀는 혼자 있지 않았다. 썬더스의 뒤에는 ‘브라운’이라고 부르는 동생 격의 개체가 있었고, 그 위에도 파티원들이 있다.

자신의 품 안에는 릿샤 애드윈이라는 여성이 있었고. 결정적으로 썬더스의 아래에 보조석을 설치해 최태현을 태워두었다.


동양인 아저씨. 그녀 스스로도 동양인이기는 하지만. 심적으로는 멀리 떨어진 지역에 살고 있기에 그저 그런 외국인 아저씨로만 느껴진다.

이대로 떨어져 한 번에 착지를 하는 것도 좋기야 하겠다만. 너무 가까이 지면에 다가가면 최태현이 힘들 가능성이 있었다. 혹여나 잘못해서 지상에 있는 나무 따위에 걸리거나 한다면 그 속력 그대로 공격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인 일이라, 곤죽이 될 테다.

게임 속의 모자이크 처리를 알고 있기에 곤죽을 볼 일은 없으리라 생각되지만. 그야말로··· 흰 빛의 입자로 전신이 화해서 사라져 버릴 것이다.


라이엔이 가장 잘하는 것이 이 부분이기도 했다. 한 마리의 비행종 동물을 다루고 있었으니만큼. 그녀는 비행에 있어 특화된 인재라고 할 수 있었다. 거대한 매답게 질량 에너지조차 충분히 가진 날짐승이었고. 그 위에서 그 강력한 속력 에너지로 지상의 것을 때려버리면 대부분의 몬스터는 한 번에 죽게 된다.

라이엔은 그런 급가속, 급정거, 급선회 따위를 거의 완벽하게 익혔다. 결국은 썬더스가 해내는 것이었지만, 그녀가 컨트롤하는 방향과 지점에 정확하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라이엔의 힘이다.


그녀는 아래로 데슈칸 산맥을 보고 있었다. 그녀로서도 평소에 가보지 않은 심처로 향하는 이들이다. 이들을 사냥터에 데려다주기 위해 온 것이 의뢰의 내용이었고, 그 산봉우리 위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던 차다.

높이 솟은 나무들이 많았다. 제대로 방향을 잡지 못하면 최태현이 죽을 수 있었다. 어지간한 나무야 거대 매의 급강하 공격이라면 그대로 부러뜨려 버릴 수도 있었다. 매 자체의 튼튼함도 있었고, 라이엔이 기력을 돌리고 MP를 사용해 썬더스를 강화시키는 면도 컸다.


뒤에 따라오는 브라운 역시 라이엔의 ‘종’으로서 지금은 존재하기에 그녀의 패시브 스킬들의 강화 영향을 받는다. 두 마리의 강력한 매가 지상으로 내리꽂힌다.


구름보다 위에서 창공을 활보하던 매들의 고도가 점차 낮아진다. 산봉우리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고, 착륙지점이 세세하게 보일 때쯤 라이엔은 일찍이 속도를 줄이고 있었다. 갑자기 급정거를 한다고 최태현이 튀어나가지는 않으리라.

보호장치, 버클, 바구니, 뭐 그런 류는 전부 특수 소재로 지어서 만든 물건들이다. 사르삿의 솜씨 좋은 공방 장인에게 맡겼고, 몇 종류의 고급 소재들을 엮어 만든 특수품들이다. 보호구로 보아도 무방한 수준이었고, 어지간한 기력술사라면 검력을 발휘해도 한 번에 끊을 수 없다. 검기라면 당연히 끊어지기는 하겠지만.


최태현이 죽지 않도록, 또 안전하도록.

평소보다는 조금 심심한 선회를 하며 천천히 두 마리의 매는 내려앉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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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166. 동굴 앞(3) 23.11.23 15 2 15쪽
166 165. 동굴 앞(2) 23.11.23 15 2 15쪽
165 164. 동굴 앞 23.11.22 17 2 14쪽
164 163. 데슈칸 심부 23.11.21 20 2 23쪽
» 162. 갈색 매 23.11.20 20 2 22쪽
162 161. 바구니 23.11.19 20 2 10쪽
161 160. 그와 그녀 23.11.19 19 2 18쪽
160 159. 의뢰(re)Quest 23.11.18 21 2 15쪽
159 158. 그녀, 라이엔 23.11.17 19 2 23쪽
158 157. 스킬러Skiller 23.11.16 24 3 15쪽
157 156. "음." 23.11.16 19 3 12쪽
156 155. 원탁 23.11.14 21 3 17쪽
155 154. 남중국 23.11.12 22 3 16쪽
154 153. 야욕 23.11.11 22 3 14쪽
153 152. 제국 특기特機 23.11.11 21 3 17쪽
152 151. 다시 만나, 담화 23.11.10 20 3 19쪽
151 150. 세르게이 알사드; 또라이 23.11.09 21 3 15쪽
150 149. 흑색장도 23.11.08 22 3 18쪽
149 148. 병실 23.11.08 21 3 14쪽
148 147. 내가 만나 본 고블린 중에 최고였죠 23.11.07 25 3 12쪽
147 146. 프린스 오브(10) 23.11.06 21 3 16쪽
146 145. 프린스 오브(9) 23.11.06 19 3 12쪽
145 144. "아, 그 놈 잘 있으려나?" 23.11.06 18 3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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