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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의 별

웹소설 > 일반연재 > 전쟁·밀리터리

조휘준
작품등록일 :
2020.05.27 22:55
최근연재일 :
2024.06.17 12:00
연재수 :
37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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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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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31
글자수 :
2,030,531

작성
20.07.01 12:00
조회
1,678
추천
36
글자
8쪽

그대가 머문 그 자리 3

DUMMY

북한 간첩들이 강릉에서 나온 반 삐트를 뭐 30분이면 파내 어쩌내 하지만 말만 그런 거 안다. 그 필름에서 보면 역시, 파낸 흙을 멀리 갔다 버렸고 주변의 나무를 천연 은폐물로 썼다.


비슷했다. 김상사도 겨울에 천리행군 하다 시간이 지체되어 당일 취침시간이 줄어들자, 팀원들과 짚단 깔고 덮고 잔 기억이 있다. 그거 무척 따뜻하다. 그러니 강릉 사건에 짚단 더미를 수상히 안 여길 수가 없었을 거다. 하여간, 칼바람 몰아치는 태백산 같은 곳에서 삐뜨 파고 들어가 바람 피하고, 거기에 양초 하나 켜면 고되고 어둡던 마음이 밝게 변하는 놀라운 희망을 본다.


참 그때 김상사는 공도 많이 들였다. 결과적으로 2위를 했지만, 파놓고 보니 참 훌륭했다. 비트는 파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주변환경 정화?도 중요하다.


비트를 향해 자주 군화가 찍혀 ‘길’이 나면 안 된다. 비트는 산길이 없어 보이는 위치에 있어야 우수하다. 게릴라 이동도 같다. 같은 산길을 반복해 사용하는 건 위험하다.


훈련 때 힘들면 그냥 대충 하지만, 전시에는 길을 계속 섞어나 루트를 변경해야 한다. 모든 자국은 선명하면 안 된다. 자국이 세다 싶으면 근처 나무에서 떨어진 낙엽이나 풀을 뿌린다. 아주 ‘근처’여야 한다. 저 나무에서 이 잎사귀가 여기 떨어졌구나 논리가 맞아 보여야 하는 거다.


그 외에 여러 수칙들이 있고, 당시 경연대회에서는 모든 걸 적용했다. 비트 뚜껑도 두꺼운 생 풀 덩어리를 뗏장처럼 사용했고, 풀 계속 싱싱하라고 물도 줬다. 비트 근처에 오르거나 도달할 때, 피곤하다고 나무를 자꾸 잡거나 만지면 안 된다. 손기름이 묻어서 반들반들해진다.


비트 근처에 오면 나도 모르게 몸이 가지를 부러트리거나 해서 인공 분위기를 만들면 안 된다. 비트는 주변 모든 것이 천연으로 보이면 좋은 점수다. 비트에서 퍼 낸 흙도 군장에 담아 멀리 갔다 버리고, 버린 흙 위로 위장도 해야 한다. 파낸 흙의 마른 정도만 봐도 판 시간을 가늠할 수 있다.


최종 수상 결정자인 대대장은 김상사(하사) 비트를 점검하는 데만 15분 이상 썼다. 순위에 들 가능성이 생겼다. 비트 경연대회는 ‘저기 있습니다. 보십시오!’가 아니라, ‘이 근처에 있습니다. 찾아보십시오.’로 시작한다. 눈으로 금방 찾고 지적이 죽죽 쏟아지면 3분도 안 되어 대대장은 “간파! 사망!” 바로 판정해 버렸다. 그러면 삼과장과 주임상사가 씨익 웃는다. 좆뺑이 까느라 수고했어. 탈락!


다가오는 풍경으로, 과거에 여기 머물렀던 기억이 김상사 눈에 선하다. 팀원들과 모닥불 자리로 사용했던 비트 위쪽 평평한 곳. 그때 먹었던 것과 모닥불가의 두런두런 이야기. 중대장이 밤에 내려가서 부식조달 하자고 우기던 장면. 두들겨 패고 기합 주던 사람인지도 모를 분위기로 형 동생처럼 주고받던 말들. 그러면서 한 기수 위 고참의 눈빛에 내가 잘못한 건 없나 살피던 시간들. 장발에 수염에 얼굴이 때로 물들고, 위장모와 야상 컬러가 시커멓게 기름때 칠을 하고. 먹고 뒹굴고, 병과 장교와 부사관, 그렇게 스쳐간 사람들.


김상사는 회한에 젖었다. 진짜 저기 그 비트 자리가 보인다. 옛날로 돌아간 것 같다. 불야성을 이룬 저 멀리 도심을 보면서 고로쇠 물이나 빨아야 했고 배고파서 뱀도 잡아먹었던 자리. 그 자리는 살아서 움직이며 옛날을 기억해주는 것 같다. 정말 고정된 것이 아니라 움직인다.


그리고 김병장이 먼저 빵 빠바바방~~!! k1을 당겼다. 먼저 본 것은 김상사가 아니라 김병장이었다. 아직도 움푹 들어간 그 비트 자리에.... 한 명이 있었다. 김상사는 본능적으로 비트 자리 앞에서 밑으로 미끄러져 내려갔고, 정적이 흘렀다. 김상사는 옛 생각에 넋이 나갔던 자신을 자책하면서 곧바로 총을 들었다. 놀랍게도 옛날, 비트에서 퍼 낸 흙 지어나르다 미끄러졌던 바로 그 자리다.


신음소리가 들린다. 김상사는 방아쇠 울에 검지를 넣고 소리쳤다.


“어이 거기! 항복하라...... 투항하라?”


북한군이 그런 단어를 듣고 북한 언어적 귀로 요해(이해)할지 의문이었다. 그리고 다시 번개 섬광처럼 주변이 동요했다. 놈이 총을 한 방 쐈다. 그 다음에 들린 말을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대충 ‘내래 기럴 것으로 보이네...’ 비슷한.


다시 고요 속에 파장을 일으키는 움푹 들어간 곳의 급격한 움직임. 호의적이지 않은. 공기의 자연스런 흐름을 깨는. 뭔가 사건이 예상대로 흐르지 않을 것 같은...


그 한 3초 사이, 김상사는 결심하고 k1을 머리 위로 들어 비트를 향해 수평으로 놓고 방아쇠를 연신 당겼다. 다른 병사들도 그 움푹 들어간 곳을 향해 계속 당겼다.


어느 순간 김상사가 소리쳤다.

“사격 중지!”


고요.


“내가 볼 테니, 모두 방아쇠에서 손 떼... 사주경계!”


김상사는 머리 위 수평으로 든 총을 자기 발이 올라감과 보조를 맞추어 천천히 가슴까지 내렸다. 그리고 봤다.


무전기가 울린다.

“칙~~칙~~~. 깔꾸리 김. 오발이야 교전이야?”


김상사가 상대를 보며 입을 어깨로 돌려 조용히 읊조렸다.

“교전....”


몇 분이 흘렀을까, 다른 병사들이 사주경계로 거총하고 있는데, 한소령이 부하 둘을 거느리고 헐레벌떡 나타났다. K2를 든 소령은 말하지 않았다. 조심스레 다가와 구덩이 안에 웅크려 생을 마감한 자를 천천히 살핀다.


그러더니, 일단 쓰러진 자 어깨 근처에 있던 AK를 잡아끌어 2미터 옆으로 떼어 놓았다. 총의 나무 덮개는 박살이 났다. 김상사가 자세히 보니 그 옛날 비트 자리를 약간만 파서 삐뜨를 만들었다. 당시 팠던 비트는 3인용이었는데, 여기 이 놈 혼자인가 의문도 든다.


김상사는 피가 흥건한 AK를 잡아 탄창을 분리하고 노리쇠를 후퇴해 약실의 실탄을 배출하면서 말했다.


“소령님이 잡으신 겁니다. 너희들도 봤지? 소령님이 잡는 거!”


병사들은 고개를 끄떡거렸다.


“허접한 소리 그만 둬. 장교는 명예야. 잡은 사람이 잡은 거야.”


그러나 곧 김상사 말대로 되었다.


순간, 병력 반대편 20미터 지점에서 두 놈이 치솟듯이 돌출해 나타났고, 이어 어두운 산악 그림자 속에서 섬광이 번쩍였다. 병사들과 김상사와 한소령 모두 상대의 첫 몇 방에 주춤하다가 이내 방아쇠를 당겼다.


충격의 소용돌이.

무엇이 무엇이고 어떤 것이 어디로 날아가는지 모를 소용돌이. 나무 잎사귀들이 소스라쳐 떨었고 총을 든 동물들은 괴성 대신 총구로 포효했다. 그건 동시에 모두가 죽을 수 있는 지근거리 섬광 결투였다. 공포. 난감. 살의. 공격성. 말 없는 비명. 피.


이번에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 사격이 끝나고 고요가 찾아왔다. 총격의 잔상 메아리가 귀에서 영원할 것처럼 지속된다. 귓속에서는 누군가 계속 총을 갈기고 있다.


총성보다 고요가 더 두려웠다.


솟아오른 둘은 쓰러져 요동이 없었으나, 반대편 일병이 맞았고 김상사도 팔에 맞았다. 한소령은 숨을 길게 내쉬면서 인상을 긁었다. 정말 잠깐이었다.


“하나는 내가 잡았어.”


한소령이 앞으로 쓰러졌다.


김상사가 달려들어 빨리 지혈하려고 어디 맞았나 살핀다. 그때 한소령이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내 꺼, 들어가는 거, 정확히, 봤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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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가 머문 그 자리 3 +2 20.07.01 1,679 36 8쪽
17 그대가 머문 그 자리 2 +3 20.06.30 1,739 36 8쪽
16 그대가 머문 그 자리 1 +1 20.06.29 1,951 40 7쪽
15 지역대가 14 +3 20.06.26 1,830 46 8쪽
14 지역대가 13 +2 20.06.25 1,806 43 8쪽
13 지역대가 12 +4 20.06.24 1,813 39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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