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탈출
오는 길에 일진들과 작은 소동이 있었지만, 헐레벌떡 집에 돌아온 나는 거친 숨을 내쉬며 전처를 찾았다.
그러나 귀여운 토끼 앞치마를 입고 요리를 하고 있던 신하연을 발견했을 뿐이다.
“어머, 오셨어요? 마침 식사 준비 중인데 같이 드세요.”
“.... 전처는 어디에 갔습니까? 설마 전처를 만났어요?”
“네- 저랑 마주치더니 그냥 나가시던데요.”
“그래요?”
“어머, 그런데 뺨에 상처가... 잠시만요. 구급상자 가져올게요.”
두 여자가 서로 만난 것도 놀랍지만
그 기 쎈 여자가 내 집에서 젊은 여자를 보고 조용히 물러났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극대노해서 경찰이 올 때까지 깽판을 쳐야 정상인데..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전자레인지가 부서지긴 했지만, 벌써 돌아갔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나한테 다시 전화를 걸어 따지지도 않고...
나는 신하연의 보드라운 손길로 치료를 받으며 고민을 했지만 더 캐묻기도 뭐해서 침묵했다. 그녀도 어째서 이런 상처가 생겼는지 묻지 않는 게 고맙게 느껴졌다.
이 나이에 고딩들과 실랑이를 벌였다는 걸 설명하기는 좀 곤란하니까..
그때 치료를 마친 신하연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다 됐어요. 물만 묻히지 않으면 금방 나을 거예요. 상처가 깊지는 않으니까요. 그럼... 어서 앉으세요. 오늘 점심은 바삭바삭한 탕수육과 콩나물국이랍니다. 바로 튀겨서 맛있을 거라고요-”
“... 예. 고맙습니다. 아침도 그렇고.. 하연씨는 요리를 좋아하시나봐요?”
“예. 언젠가 만나게 될 남편님을 위해서 틈틈이 요리를 배웠거든요. 아침은 맛있게 드셨나요?
“예... 감사합니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그러실 필요없습니다. 하연씨도 바쁘실텐데.”
눈치를 보며 슬쩍 부담스럽다는 말을 건네자, 그녀는 도리어 웃으며 말했다.
“어맛, 맛있게 드셔주셨다니 정말 기뻐요! 그리고 사랑하는 남편에게 요리를 해주는 건 여자의 기쁨이랍니다. 전혀 걱정하지 마세요. 오히려 더 힘이 나는걸요? 덕분에 촬영 잘하고 왔어요.”
역시 은근히 완고한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심 고마운 마음이 더 컸다.
참나... 내가 전생에 무슨 덕을 쌓아서 이렇게 예쁜 여자와 호강을 하는지... 아니, 현생의 전처 때문에 고생을 해서 하늘이 불쌍하게 여기셨나?
어쨌든 그녀가 좋다고 하니 됐다고 생각하며 조금은 편해진 마음으로 나는 수저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바삭바삭한 탕수육은 정말로 맛있었다.
모든 시름과 걱정을 잊을 정도로.
**
점심 먹고 그녀가 나오는 드라마를 같이 보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때 신하연이 내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참, 저 신촌에 한번 나가보려고요.”
“뭐 살게 있으면 그냥 매니저에게 시키면 되지 않아요?”
“그렇기는 한데 직접 돌아다니는 게 더 예쁜 물건을 직접 고를 수 있거든요. 서방님도 같이 가시겠어요?”
“... 제가요?”
순간적으로 머릿속에서 뇌정지가 왔다.
명목상은 쇼핑이지만 이건 데이트 아닌가?
계약결혼의 거리감이 무너질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거절했다.
“저는 조금 피곤해서 집에 있겠습니다.”
“어머, 그럼 저 혼자 가야겠네요. 근데 뭘 타고 가야할지 모르겠어요. 지하철은 한 번도 안 타봤거든요.”
“... 버스도요?”
“예. 어릴 때부터 아역배우로서 매니저님 차를 타고 다녀서... 저 너무 바보같죠? 아무것도 혼자 할 줄 모르고..”
“......”
결국 나는 그녀를 따라 나왔다.
번화가는 주차가 쉽지 않기에, 차는 집에 두고 같이 마스크를 쓰고 지하철에 타고 신촌역으로 향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데도 주위에서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저 커플 봐봐. 너무 멋져.
-그러니까 특히 여자는 너무 여리여리하고 분위기 여신인데? 마스크를 써서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예일 거야. 얼굴이 주먹만해-
-수근수근... 대박. 너무 멋있어. 남자도 개존잘일 듯?
혼자일때도 이런 시선을 받은 적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건 정말 수준이 달랐다.
주위에서 수근대는 소리를 들었는지, 그녀도 얼굴이 토마토처럼 붉어졌고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덩달아 귀가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신촌역에 내렸다.
“내리죠.”
“... 네.”
정말 신혼부부가 다시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 어...? 서방님.”
많은 사람들 사이에 끼여 빠져나오지 못한 그녀가 애타게 나를 부르자, 주위에 가득 몰려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설마 저렇게 어린 여자가 벌써 결혼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웅성웅성... 어머 벌써 결혼한 사이인가봐?
-그러게. 정말 보기 좋은데?
-정말 보기 좋은 예쁜 커플이다. 남자도 너무 멋지고 여자도 너무 예쁜 것 같아. 근데 왠지 여자 얼굴이 익숙하지 않아?
-그러니까. 분명 어디선가 본 얼굴인데...
대체로 사람들은 우호적인 반응이었다.
문제는 사람들 사이에 완전히 끼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그녀의 정체가 탄로날 상황이었다는 것.
-그러고보니 어제 드라마에서 본 여자 주인공하고 얼굴이 비슷한 것 같은데...
-어! 그러고 보니...
-설마 신하연 아냐? 신하연하고 외모가 비슷해?!
-에?! 설마?!! 근데 그러고보니 비슷한 것 같아. 근데 저 남자는 신하연 약혼남과는 인상착의가 다르잖아? 이게 어떻게 된거지??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아직 언론에 결혼을 발표하기 전에 우리 사이가 알려지면 큰일이다.
“잠시만요!”
나는 급하게 사람들 사이를 밀며 뚫고 들어갔다.
-아이씨. 왜 이렇게 매너가 없어?! 다른 사람들도 다 바쁜 사람들이야!!
중간 중간에 짜증을 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정말로 진지하게 시간이 없었다.
나는 그녀를 알아보기 시작하는 대중의 시선을 뚫고 간신히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 서방님!”
놀란 그녀가 겁을 먹고 손을 빼려고 했지만,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일단 여기부터 탈출하고 나서 다시 얘기하죠.”
-끄덕
그녀도 위험한 상황이라는 걸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작은 그녀의 손을 잡고 사람들 사이를 뚫고 나왔다.
콩나물 시루처럼 빽빽하게 밀집한 사람들이 불평을 토로했지만 건장한 남자의 근력에는 버틸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먼저 좀 지나갈게요. 죄송합니다.”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하고 있었지만 내 얼굴은 계속해서 붉어져 있었다.
한쪽 손에 고스란히 잡혀있는 그녀의 손이 용광로보다 더 뜨겁게 내 피를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여자 손을 잡아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도 연애, 결혼 다 해봤으니까. 그렇지만... 정말 이 여자는 달랐다.
붙잡고 있는 작은 손마저도 부드럽고 매끈매끈하며 지나치게 사랑스럽다.
“헥헥.. 서방님!”
간신히 지하철역을 빠져나와 내 앞에서 숨을 헐떡이며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여자를 보니 절로 애정이 샘솟았다.
“후... 간신히 빠져나왔네요. 손을 잡아서 미안합니다. 어쩌면 결혼계약서 위반일지도 모르는데.”
나는 설레는 감정을 감추기 위해 쓸데없는 말을 했다.
신하연은 웃으며 말했다.
“긴급상황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죠.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는데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예. 그렇죠."
나도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씨앗이 싹을 피운 걸까?
한숨 돌린 나는 의식적으로 그것을 억누르며 화제를 전환했다.
“... 이제 어디로 가야합니까? 먼저 앞장서세요.”
“후후. 네. 이쪽으로 오세요. 여기부터 가야해요.”
그녀가 나를 이끌고 간 곳은 정말 의외의 장소였다.
나는 고개를 들어올려 간판을 읽으며 아연질색했다.
“... 캐릭터샵? 이런 곳을 좋아해요?”
“네. 저는 이 박쥐 히어로 캐릭터를 좋아해요. 주인공의 선악에 대한 고민과 악에 대한 징벌이 화끈해서 마음에 들어요!”
“뱃트맨...? 저도 어릴 적에 좋아했는데.”
“어? 정말요? 부부 사이에 가장 중요한게 공통된 취미래요. 우리는 꽤 잘 맞는 것 같은데요? 뱃트맨은 제 최애 캐거든요. 정말 너무 귀엽지 않아요? 이 박쥐 코스튬”
“귀엽습니다. 정말 어떻게 숨기기 어려울 만큼.”
“.... 예? 그게 무슨..”
순간적으로 진심이 툭 튀어나왔다.
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갔지만, 다행히 지하철과 다르게 우리에게 집중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모두 진지하게 자신의 캐릭터를 찾으러 돌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뚜벅
-뚜벅
-뚜벅
덕분에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발소리 속에서 온전히 서로만을 바라볼 수 있었다.
나는 그 순간 그 누구보다도 더 뜨거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내가 왜... 지금 이런 표정을 하고 있지? 이건 마치... 사랑에 빠진 남자의 표정이잖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얼굴 표정이 경직되고 이상하게 달아 올랐다.
그녀도 그걸 느꼈는지, 내게 다시 한 번 물었다.
“그건 저한테 하신 말씀인가요?”
“......”
나는 망설였다.
이대로 마음을 밀고 나가고 싶은 충동과 이혼의 상처가 계속해서 서로 부딪히며 거대한 폭풍을 일으켰다.
그때 나는 떠올렸다.
결혼계약서.
분명 거기에는 상대를 좋아하는 것은 금지라고 되어있다.
그렇다면 내가 괜히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계약 위반.
뭐가 잘못되어 지금 눈앞의 그녀가 나를 떠나는 것이 두려워졌다.
게다가 이런 여자를 두고 사랑에 빠지지 않는 남자는 없을 거야.
일시적인 감정인지 뭔지... 아직은 알 수가 없다.
나는 온 몸에 차오르는 마음을 다시 빗자루로 쓸어 내리며 인위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 고양이 캐릭터 말입니다.”
“피- 너무해요.”
그녀는 서운한 티를 내었지만 오히려 안심한 표정이었다.
그 얼굴을 보고 내가 정답을 맞췄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그 계약서를 제안한 건 그녀다.
겨우 며칠 되지도 않은 사이에 그녀가 나를 사랑할거라고 생각한 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그녀는 나를 이상한 짓을 하고 선을 넘지 않을 사람으로 보고 계약결혼을 제안했는데 그 기대를 배신할 수는 없다.
게다가... 이제와서 그녀를 잃어버린다면 어쩌면 나는 다시 삶을 살아갈 의욕을 잃어버릴지도 모르지.
며칠 사이 내 삶에 그녀가 송곳처럼 깊이 파고든 것 같은 기분..
나는 다시 경계심을 끌어올리며 그녀와 쇼핑을 계속했다.
서로 웃으며 좋은 시간을 보내다 보니 벌써 늦은 밤이 되었다.
마침 출출해졌기 때문에 우리는 호프집에 가서 치킨과 맥주를 마셨다.
평일이라서 손님이 별로 없었고 그녀도 편하게 마스크를 벗고 술을 마셨다.
특히 이 치킨집은 모든 것이 셀프서비스라 더 편했다.
취중진담... 술을 마시면 진심이 튀어나온다는 말이다.
나 역시 모처럼 서로의 진심을 터놓기에 좋은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신하연이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탁자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탁
“크... 얼마 만에 마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정말 맛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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