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뒤지려고
남궁세가의 평가전은 공방이 오가는 비무가 연달아 이어졌어도 그리 살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참가자들도, 구경하는 이들도 즐기고 있었다.
검을 맞대긴 하지만 양쪽 모두 남궁세가의 소속이며, 은원 때문이 아니라 무공을 뽐내기 위한 비무였기에 열렬한 응원을 받으며 무공을 펼쳤다.
부정행위를 하지만 않았다면 당연히 승패와 무관하게 비무 당사자들은 환호를 받았다.
이윽고, 남궁호의 차례가 되었다.
‘아, 이 자식들 사람 서운하게 만드네.’
남궁호가 비무대 위로 올라오자마자 왁자지껄하던 목소리가 미리 입을 맞춰놓기라도 한 듯 조용해졌다.
마치 그가 지금 비무를 하는 것 자체가 부정행위라도 된다는 양.
어느 정도 예상은 했기에 평정심이 크게 흐트러지진 않았지만,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가 소릴 질렀다.
“공자님, 힘내십쇼!”
유일하게 남궁호를 응원하는 음성.
오경문이었다.
남궁호는 그 익숙한 목소리에 피식 웃었다.
‘짜식....’
남궁호가 은근히 감동하려는 순간, 오경문의 외침이 이어졌다.
“그래도 이기시면 안 됩니다! 저 공자님이 지는 쪽에 걸었단 말이에요!”
오경문의 응원은 응원이 아니었다.
때문에 장내는 순간 폭소로 가득 찼다.
“푸하하하!”
“쟤는 자길 모시는 하인한테도 업신여김 당하는구나!”
“남궁호 공자가 이길 리 없으니까 똑똑한 거지!”
오경문 덕분에 분위기는 한결 밝아졌지만, 그렇다고 남궁호에게 호의적으로 변하진 않았다.
그러나 남궁호는 오경문이 밉진 않았다.
‘저놈, 진짜로 내가 진다에 걸진 않았네.’
어차피 말 한 마디로 사람들의 적대감이 사라질 순 없었다.
남궁호는 기존에 가문에서 힘이 있던 일공자와 삼공자의 경쟁자였고.
또래 혈족들과는 실컷 싸운 상대였으며.
같은 교육과정을 거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는 불공정의 산물이었으니까.
하지만 오경문이 소리를 쳐준 덕분에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눈총 받으면서 싸우는 거랑 웃음소리 사이에서 싸우는 건 천지차이잖아?’
서운한 기분이 좀 나아진 남궁호는 비무대 반대편에서 올라오는 상대를 보았다.
남궁호가 등장할 때와는 반대로 엄청난 환호를 받으며 한 소년이 나타났다.
‘그래, 뭐.... 인기 많은 것까진 좋다 이거야. 근데 저놈, 왜 저렇게 날 죽일 듯이 노려봐?’
남궁호의 비무 상대는 두 눈에 활활 타오르는 분노를 드러내고 있었다.
녀석과 초면인 남궁호로서는 억울한 일이었다.
하지만 남궁호는 이내 소년이 왜 불타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남궁호. 네가 내 동생을 비무도 아닌데 때려눕혔다면서?”
녀석은 남궁호가 고된 훈련을 넘기기 위해 제물로 삼은 녀석의 형이었던 것.
그러나 내용의 일부를 잘못 알고 있는 듯했다.
“아아.... 혼자서는 안 되겠으니까 여럿이서 나 하나 족치러 왔다가 또 처맞고 간 놈들 중 하나 말하는 거구나? 쪽팔린 줄도 모르고 이젠 형한테까지 일러바쳤어?”
남궁호는 또래들을 다짜고짜 패지 않았다.
교묘하게 상황을 만들어 놈들이 먼저 덤비게 했다.
그러니 명분상으론 때린 남궁호가 피해자이고, 맞은 녀석들이 가해자였다.
이 말을 처음 들은 소년은 움찔하더니 얼굴이 붉어졌다.
“아, 민철이 이 새끼.... 돌아가면 뒤졌다. 아무튼, 그거랑은 별개로 내 동생을 건드린 넌 오늘 내가 교육 좀 시켜주마.”
소년이 으르렁거리듯 말하자 비무대 밖에서 교육생들이 소리쳤다.
“남궁민수 형! 본때를 보여줘!”
“오, 철검대 대주님네 장자잖아?”
“소문엔 벌써 일류 수준에 가까워졌다던데!”
남궁민수는 실력이 출중하기로 이미 유명한 모양이었다.
녀석은 구경꾼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남궁호를 보며 이죽거리며 말했다.
“어찌저찌 해서 남궁태를 이겼다고 기고만장해졌나 본데. 삼공자는 가문에서의 권력 때문에 실력보다 고평가를 받은 거지. 사실 아무것도 아....”
“입 닥쳐, 남궁민수.”
남궁호는 남궁민수가 동생 흉보는 걸 끊어버렸다.
형이란 족속들은 아무리 꼴 보기 싫은 동생이어도 남이 까는 건 못 참는 법이었다.
“어디서 뒤지려고 직계 공자를 까?”
“훗, 꼴에 자존심은 있나 보네. 이제 직계 공자를 까기만 할 뿐 아니라 패주기까지 할 생각인데 어쩌지?”
비아냥거리는 남궁민수에게 남궁호는 검을 뽑아 기수식을 펼치는 것으로 답해주었다.
이젠 입으로 떠들지 말고 실력으로 말하라는 의미였다.
남궁민수도 이를 알아듣고 검을 뽑아 천풍검법의 기수식을 내보였다.
여전히 놈의 얼굴엔 자신감이 충만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직계 공자님의 자존심을 지킬 능력이 있나 보자!”
비무가 시작되자마자 남궁민수가 바람처럼 움직였다.
살랑거리는 산들바람처럼 가볍게 남궁호의 주변을 맴돌다가.
소슬바람처럼 표홀히 사라진 뒤 이내 사각으로 접근했다.
이어 폭풍과 같이 검격을 쏟아내는 남궁민수.
-휘휙! 후욱!
비무에 사용하고 있는 검은 날을 세우지 않은 철검이었다.
베이지는 않겠지만 자칫하면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그야말로 쇠몽둥이로 후려치는 것 아니겠는가.
남궁호의 코앞으로 철검 휘두르는 섬뜩한 소리가 지나갔다.
묵직한 바람이 얼굴을 덮을 정도였다.
하지만 남궁호는 차분히 대응했다.
-스윽, 슥, 탱!
아직 방어에 치중하고 있었지만, 천수제 때와는 확연히 다른 몸놀림이었다.
적절한 보법으로 거리를 벌리고 필요할 땐 검초를 써서 공격을 막았다.
확실히 기본공은 충분히 익힌 모습.
이에 남궁민수는 속으로 제법 놀랐다.
‘이게 정말 기초 교육을 받은 지 얼마 안 된 놈이라고? 하, 재능이 뛰어난 건 사실이구나! 하지만 나한텐 안 되지. 난 남궁태처럼 조급해져서 큰 빈틈을 내주지 않을 거거든.’
처음에 흥분했던 것과는 달리 남궁민수의 검격은 정석대로의 우직함을 담고 있었다.
때문에 화려하지는 않아도 압박감이 엄청났다.
어떻게 보면 일방적인 남궁호와 남궁민수의 비무.
진중하게 비무를 보고 있던 가주 남궁천에게 옆자리 귀빈석에 앉아있던 승려가 말을 걸었다.
“허허, 저 남궁민수란 아이의 중심이 잘 잡혀있어서 쉽사리 반격하기 어렵겠구려. 마치 부동명왕 같으니 하늘의 무를 지향하는 남궁에 꼭 맞는 솜씨일세!”
남궁천은 승려가 아들의 상대를 칭찬하자 기분이 이상했다.
이 승려는 소림사의 방장과 같은 항렬의 무승.
심지어 불경보다 무공에 깊이 빠지는 바람에 무광선사(武狂禪師)라는 별호를 얻은 인물이었다.
무광선사가 칭찬할 정도면 남궁민수는 확실히 뛰어난 실력이라는 소리였다.
‘철검대는 태아를 따르고 있지. 호아의 평가를 비무로 한다는 소식을 듣고 손을 쓴 모양이구나. 그래, 남궁이 더욱 단단해지려면 어느 정도 서로 다투는 것도 있어야겠지.’
남궁호가 비무를 하게 된 건 이 자리에서 가주가 독단적으로 결정한 일이 아니었다.
교관들과 의견을 나눈 뒤 이미 정해두었던 사항.
이게 다른 이들에게 전해졌고, 남궁호를 견제하려는 철검대 측에서 대주의 아들을 비무 상대로 붙인 것이었다.
남궁민수는 거의 10년을 수련한 녀석이었다.
어엿한 한 명의 검수(劍手)라고 불러도 좋을 수준이었기에 남궁호의 상대론 급이 맞지 않았다.
‘이번에 호아가 패배를 맛본 뒤,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에 따라 앞으로가 달라질 터. 실패를 딛고 일어설 줄 알아야 더 강해질 수 있는 법이야.’
남궁천은 남궁호의 패배를 기정사실로 생각하며 비무를 보았다.
어느새 남궁민수가 강(强)의 묘리를 담아 검을 횡으로 베었다.
“천풍파지(天風破枝)!”
초식명까지 외치며 집중하는 남궁민수.
그에게선 상대를 얕보는 태도를 일절 찾아볼 수 없었다.
이번 공격은 비무대의 끝까지 몰린 남궁호에겐 몹시 위험해 보였다.
그때, 남궁호가 양손으로 쥐고 있던 검을 왼손으로 옮겼다.
그러고는 오른손을 펼쳐 남궁민수의 검면을 후려쳐버렸다.
-따앙!
범종이 울리는 것처럼 엄청난 굉음이 터졌다.
서로의 수에 공력이 담긴 까닭에 음공과 같은 효과가 생겼다.
미리 대비를 하지 않았던 남궁민수는 속이 진탕이 되었다.
“큽...!”
동시에 남궁민수의 검이 세차게 요동치면서 그의 양 손아귀를 찢었다.
단 한 번의 공방으로 엄청난 이득을 챙긴 남궁호.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곧장 반격을 개시했다.
검을 다루는 열 가지 방식을 담은 철검십식이 펼쳐졌다.
-쌔액! 부웅!
매섭게, 묵직하게, 부드럽게, 강하게.
기본공이지만 검법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게 한눈에 보이는 움직임이었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것 같은 검초였음에도 남궁민수는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마치 남궁호가 철검십식만큼은 남궁민수보다 훨씬 높은 수준에 오른 것처럼 보였다.
이에 남궁민수를 응원하던 녀석들이 경악했다.
“아니, 남궁민수가 철검십식으로 밀린다고?”
“철검대 대주가 직접 철검십식을 가르쳐줬을 텐데!”
“이건 이공자 실력이 미쳤다고밖에 할 수가 없겠는데...?”
그만큼 경탄할만한 일이었다.
남궁세가에서 검왕을 제외하곤 철검십식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다고 평가받는 게 철검대의 대주였다.
그런데 그 아들인 남궁민수가 남궁호에게 철검십식으로 밀리고 있었으니까.
이런 상황이 펼쳐진 정확한 이유는 오직 남궁호만 알고 있었다.
‘남궁민수가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당하는 바람에 손이 작살 난 덕분이지!’
무기를 잡고 있는 건 손.
손에 이상이 생기면 검법에도 지장이 생기는 게 당연했다.
고수가 되면 지금 남궁민수 정도의 부상은 내공을 이용해서 급한 불을 끌 수 있지만, 애들 수준에서는 불가능이었다.
그러니 손아귀가 찢어진 순간 전투력이 급감할 수밖에.
만약 남궁호가 검으로 공격을 받아쳤으면 미리 경계를 해서 이런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남궁호가 장법으로 막는 걸 보고 남궁민수는 찰나에 방심을 했다.
‘내가 활철신법(活鐵身法)을 익혔다는 걸 몰랐을 테니까.’
활철신법은 황석일에게 전수받고 있는 외공이었다.
몸을 살아있는 강철로 만들어준다는 이 무공은 남궁호가 철검을 향해 주저 없이 손을 뻗을 수 있게 해주었다.
게다가 완력까지 향상되어 엄청난 충격을 일으켜 남궁민수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제 남궁민수는 검을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하는데 어찌 비무를 이어갈 수 있으랴.
얼마 가지 않아 남궁호는 검의 끝으로 남궁민수의 목을 겨눌 수 있었다.
“져, 졌다...!”
결국 남궁호가 승리를 거머쥐었다.
모든 비무에서 누가 이기든 무관하게 박수를 치던 구경꾼들이 잠잠했다.
의외의 결과에 놀라기도 했고, 남궁호의 승리를 반기는 이들도 없었기 때문.
그때, 어디선가 천둥 같은 박수 소리가 나왔다.
이어서 용의 포효처럼 커다란 웃음까지.
귀빈석에 앉아있던 무광선사가 무척이나 즐거워하며 갈채를 보내는 것이었다.
“왜들 그리 경직돼있어? 뭐가 문제야? 이토록 통쾌한 비무를 보았는데!”
무광선사는 앉아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검왕, 내 잠깐 실례하겠네.”
그는 그 자리에서 바로 비무대 위로 도약했다.
-후욱, 쿵!
단숨에 남궁호의 앞에 떨어져 내린 무광선사.
그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남궁세가의 검이 날카로운 건 나도 인정하지만, 외공을 갈고닦는 데엔 소홀한 게 항상 아쉬웠지! 그런데 이 아해는 아주 균형도 잘 맞췄고, 자신의 능력을 대범하게 쓸 줄 알지 않는가! 아주 대단해! 크하하하!”
무광선사는 다시 웃음을 터트리며 남궁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순간 남궁호가 움찔했다.
무광선사가 은근히 내공을 흘려 그의 내력을 파악하려 했으니까.
‘무광선사는 예전에 천마랑도 손을 섞어본 적 있는 인간이야. 만약 천마건공의 기운을 감지하기라도 하면....’
남궁호는 무광선사가 갈! 하고 호통치며 수도(手刀)로 자신의 머리통을 쪼개버리는 상상을 했다.
그 순간, 무광선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허어...!”
“...!”
무광선사의 탄식에 남궁호도 덩달아 긴장했다.
- 작가의말
남궁민수야 고맙다.
Comment '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