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_사육당하다
스킨십이 금지된 파라다이스라니!
<34화>
사육당하다
* * * * *
“제가 경하 씨에게 관심이 없었더라도 이렇게 갈등을 했을까? 오래도록 생각했어요.”
“지금 저에게 관심이 있어서 갈등이 있으셨단 말씀인가요? 아니면 갈등하지 않았을?”
“윤리적으로 보자면 갈등이 있어야 했겠지만 그냥 업무적으로 파악하는 정도로 생각했다면 갈등이 적었을 것 같습니다. 우리들은 파라의 시스템 안에서 살고 있으니까요.”
화면에 보이는 검진실이며 검진 캡슐 내부의 화면은 아무리 봐도 무서운 현실이었다. 내일 검진을 온다면 누군가 몰래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유린되고 있을 것이었다.
경하는 화면으로 눈길이 가자 몸서리가 쳐졌다.
“아, 미안합니다.”
안지훈이 버튼을 누르자 시시티비 화면은 사라지고 아름다운 초원의 풍경이 펼쳐졌다. 작은 바람소리까지 함께 들려왔다. 아주 작은 바람소리까지 화면에 따라 숨을 쉬는 것 같았다.
“휴우...”
자신에게 닥친 위험이 어디까지일지 가늠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의 일은 더 큰 위험일 것 같았다. 앞으로 벌어질 일은 결코 작아질 수 없는 위험일 것이었다.
“경하 씨는 한 달에 한 번 정기검진을 받았습니다. 전 사실 검진에 대한 인계를 받을 때 특별한 지병이 있어서 그런 관리를 받는 거라 생각했습니다.”
“특별관리 대상이긴 해요.”
“저도 단순히 생각해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이상하게 항상 채혈이 있었습니다. 요즘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채혈을 하지 않습니다. 오메가 선이 나와서 모든 진단이 가능해진 까닭이지요.”
“채혈은 저의 건강을 위해 하는 것이라고 들었어요.”
“네....”
“아니었던 건가요?”
그때였다. 갑자기 실내에 무언가가 반짝이기 시작했다.
“경하 씨, 어서 나갑시다. 나가는 길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내일 경하 씨 점검이 있는데 그것을 준비할 것 같습니다.”
“시스템이 있는데 뭘 더 준비하죠?”
“그럼 한 가지만 더 보고 나가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더 놀랄 일이라 그저 가슴이 아플 뿐입니다.”
안지훈은 옆의 버튼을 한 번 터치했다. 그러자 경하의 채혈에 대한 영상이 보였다.
경하는 검진 캡슐에 잠들어 있고 채혈을 위한 바늘이 경하의 팔에 꽂아져 있고 라인에서는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피는 라인을 통해 어떤 기계를 통과했다. 그리고 몇 단계의 라인으로 피가 지나가고 있었다. 몇 단계의 기계장치는 매우 정교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고요했다.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만 검진실에서는 푸른 초원을 달리는 바람의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한없이 자유로운 바람의 소리는 한 인간을 유린하는 순간과 너무 대조적인 음향이었다.
이제 기계를 거친 어떤 라인의 피는 작은 유리캡슐에 담기고 어떤 라인은 다시 경하의 혈관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아주 긴 시간동안 느리게 움직이는 과정이었다. 사실 인간의 몸이 이런 과정을 견디려면 이런 느린 시간조차 엄청난 충격일 것이었다.
잔인한 일이었다.
옛날 미개한 시절에 살아있는 곰의 쓸개를 채취하기 위해 쓸개에 빨대를 뽑고 인간이 그 쓸개를 빨아먹었다는 기록이 있었다.
경하는 마치 몸이 결박당한 채 빨대에 꽂혀 있는 곰과 같았다.
경하는 눈물이 쏟아졌다. 그러한 이유로 자신은 긴 시간 동안 기억이 없었으며 몸이 늘 힘들었던 것이었다.
안지훈이 경하의 어깨를 토닥였다. 경하는 이제 자신의 몸에 닿는 터치가 조금은 익숙해졌다. 온몸에 천둥처럼 몰아닥친 충격은 너무도 컸다.
“울지 말아요.”
경하는 조금 더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큰 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그저 암담한 충격과 공포가 온몸의 소름으로 옥죄이고 있었다.
“저건 혹시?”
경하가 흐르는 눈물을 닦지 않고 그것이 맞냐는 물음의 표정을 지었다.
“네, 맞아요. 필요한 혈청을 분리하는 작업이에요.”
안지훈은 화면을 껐다. 다른 장치들도 모두 원상복귀시켰다.
“나가요. 산책길에서 이야기해요.”
“산책길요? 이런 상태로 산책을 어떻게 해요? 저에게 대체 뭘 원하시는 거예요?”
“원하는 거 없어요.”
“그럼 왜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차라리 모르는 게 좋았어요.”
“그래도 전 경하 씨를 위해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저 이만 돌아갈게요.”
“위험해요. 이제 파라가 경하 씨에 대한 감시를 조금 더 강하게 할 것 같아요.”
“이 이상 더 어떻게요? 이 정도면 사람을 사육하는 거 아닌가요? 거의 사육인데 얼마나 더 강하게요?”
“경하 씨, 진짜 사육처럼 식물인간이 될 수도 있어요.”
“식물인간요?”
“혈청 확보를 위해서라면 그것이 더 관리가 쉽다고 했어요.”
“누가요? 팀장님도 그런 일에 직접 관여를 했던 건가요?”
“아, 아니에요. 저는 그저 실무자 정도의 입장인데 어떻게 그런 일에 관여하겠어요. 우연히, 진짜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이에요. 그리고 전 경하 씨의 혈청이 이렇게 분리되어 다른 곳에 쓰이는 줄은 몰랐어요.”
“몰랐다는 것이 말이 돼요?”
“경하 씨도 아시잖아요. 검진 캡슐에 들어가면 저희 의료진도 모두 퇴장해요. 왜냐면 3시간 넘는 시간 동안 경하 씨를 위한 치료를 한다고 했었어요. 경하 씨에게 특별한 광선치료를 한다고 들었어요. 모두 그런 줄만 알았어요. 그래서 우리들은 모두 검진실에서 나와야 했어요. 그 광선이 의료진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칠 거라 했어요. 그리고 광선치료가 모두 완료된 다음에 검진실에 돌아올 수 있었으니 이런 일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그 말이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세요?”
“그 시간에 항상 공식적인 일정이 있었어요. 경하 씨가 검진실에 들어간 후에 우리들은 항상 보건국 회의실에 있었어요. 항상 세미나를 했어요. 굳이 그 시간에 세미나를 한다고 싫어했는데 사실, 힘든 과정이 아니고 차크가 관리했던 사람들의 유형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어요. 경하 씨의 혈청 분리시간 동안에요. 그래서 우리들은 자유롭지도 않으면서 자유로운 시간을 누렸던 것이지요. 아무도 시간을 구속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지 못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아신 거예요?”
“지난 번 오류가 떠서 검진하지 못한 때 있었죠? 바로 그 전에 있었던 검진에서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저도 그날은 검진에 오류가 나도록 나름 장치를 했던 것이고요.”
‘뭔가? 행정국장은 자신이 준 약물 때문에 오류가 나왔다고 말한 것 같았는데? 누가 거짓을 말하고 있는 거지?’
무엇이든 경하를 위한 일이었다고 행정국장도 안지훈도 지동일도 말을 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서는 누구도 믿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었다.
“그럼 제 검진과정에서 오류가 있었던 것은 팀장님이 이유인가요?”
“사실은 그것만은 아니었어요. 전 그날 장치에 살짝 어떤 조치를 취하긴 했는데 그것이 작동하기도 전에 오류가 떴어요.”
‘그럼 행정국장의 말이 맞았던 것인가?’
그런데 안지훈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져가고 있었다.
“경하 씨, 지금 나가면 안 될까요? 나가야 할 것 같아요.”
“산책요? 아니요. 산책 싫어요. 이만 들어가서 쉬고 싶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이런 것이...”
<안지훈 보건팀장, 이경하 씨 심화 검진을 위한 TF팀에 배정되었습니다. 지금 진료실로 오시기 바랍니다>
안지훈은 자신에게 날라온 메시지를 보여줬다.
“결국 제가 이경하 씨의 혈청 분리작업에 동원되는 팀에 배정되었나 봅니다. 전 결코 그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지 않을 수 없는 구조...”
“알죠, 그런 구조. 우린 모두 자유롭지만 파라에 예속되어 있으니까요. 그럼 어떻게 하실 건가요?”
“일단 이곳을 피하고 상황을 보려고 합니다.”
안지훈은 경하의 등을 밀었다. 둘은 안지훈의 진료실로 나왔다.
“경하 씨, 이런 문자까지 와서 산책은 제가 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네요. 일이 어떻게 되는지 상황을 보고 다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안지훈은 진심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가시죠.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경하는 안지훈의 뒤를 따랐다.
지금은 여유롭게 진료실을 나서고 있지만 잠시 후면 사육당하는 자신의 혈청 채집을 위해 이들이 행할 일들은 너무 끔찍한 일이었다.
“전 과연 파라다이스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사육당하는 이런 상태에서 살아남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요?”
날 그냥 둘 수 없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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