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_혈청의 비밀
스킨십이 금지된 파라다이스라니!
<31화>
혈청의 비밀
* * * * *
금방 장혁의 방문으로 피곤한 상태였다. 안지훈의 방문이 아닌 영통인 것만도 다행이었다. 요즘은 혼자일 수 있는 시간이 아예 없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어쩐 일이세요? 휴일에 영통을 하셨네요.”
안지훈의 표정이 어두웠다. 어두운 표정이 경하의 가슴을 철렁하게 했다.
“경하 씨.”
염려가 담긴 목소리였다. 경하는 순간 긴장이 되었다.
‘대체 또 얼마나 놀랄 일이 있을까?’
“경하 씨...”
말끝이 흐려졌다. 무슨 일인 것이지 말을 꺼내기 어렵다는 의미였다.
“무슨 일이에요? 팀장님, 괜찮아요?”
경하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야 했지만 안지훈의 표정이 너무 안 좋다 보니까 오히려 안지훈의 안부를 물어야 할 상황이었다.
“아니요. 제가 아니라 경하 씨가 걱정되어서.”
‘내가 염려된다고 얼굴에 저렇게 수심이? 뭘까? 왜 내 걱정을 저렇게?’
경하는 자신에 대한 걱정으로 어딘가 아픈 것처럼 보이는 안지훈의 얼굴이 걱정되었다.
“아니에요. 어디 아픈 것처럼 보여요.”
“경하 씨, 바비로부터 컨디션은 체크 받았어요. 그런데 보건국에서 정밀검사를 해야 한다는 지시를 받았어요. 월요일이 되면 보건국에 오셔야 할 거예요.”
“아, 정밀검사.”
보건국의 정밀검사를 받은 날은 늘 컨디션이 뭔지 모르게 좋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시간이 기억나지 않아 또한 좋지 않았다.
“네. 정밀검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뭐가 또 있나요?”
“사실 이런 말을 하면 안 되는데 경하 씨가 걱정되어서....”
“저에게 무슨 일이 있나요?”
“아, 아닙니다.”
안지훈은 뭔가 말하려다 말을 참는 것 같았다. 경하에게 좋은 일은 아닐 것이었다. 걱정스러운 일이 무엇인지 경하는 궁금했다.
“말하기 곤란하면 괜찮아요. 말할 수 있을 때 해주세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지훈은 말하지 못하는 것이 괴로운지 고개를 푹 숙였다. 경하는 그러한 안지훈에게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되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자신과 관련한 일이 아니라면 고민하지 않을 일일 것이었다.
“경하 씨, 혹시 괜찮으면 내일 오전에 좀 뵐 수 있을까요? 보여드릴 것이 좀 있습니다.”
“보여줄 것이 있어요? 어떤?”
“내일 모시러 오겠습니다.”
“그런데 장혁 팀장님이 만나러 올지도 몰라요.”
“아, 내일 장혁 팀장에게는 제가 양해를 구했습니다. 보건국에서 일이 있다고.”
“그럼 일 때문에 보건국에 가는 건가요? 월요일에 검진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월요일의 검진은 맞습니다. 내일 보건국에 가는 것은 저와 개인적인 일입니다.”
“개인적으로 보건국에 일이 있어요?”
“아, 걱정하지 마세요. 경하 씨를 위해 제가 준비한 것이니까요.”
“알았어요. 내일 특별한 일이 없어요.”
경하는 영통을 끊었다. 이제 잠시 쉬고 싶었다.
자작나무 왕자를 만나고 돌아와 컨디션은 매우 좋았다. 하지만 머리가 복잡했다.
자신은 나무의 아이였고 자신의 혈청은 특별했고 그 때문에 자신은 살아남았고 파라가 특별 관리를 하고 있다고 했다.
파라는 자신의 혈청에 대한 비밀을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혈청에 비밀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파라와 무슨 연관일지는 알 수 없었다.
하루빨리 엑스트라의 리아를 만나야 했다. 리아가 그 비밀을 알고 있다고 했다. 어쩌면 지동일도 그 비밀을 알고 있어서 자신에게 이렇게 대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직은 모든 것이 오리무중이었다.
생각에 잠겨있다 보니 바깥은 벌써 어둠이었다. 휴일에 이렇게 긴 시간 생각에 잠겨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으면 바비가 와서 말을 걸곤 했었다. 오늘은 어쩐 일인지 바비도 조용히 있었다. 바비는 아무래도 경하에게 생각이 필요한 시간임을 직감했기 때문일 것이었다. 이럴 때 보면 바비의 공감과 직감 능력은 너무도 놀라웠다.
생각에 잠겨 있는 순간이었다. 다시 자작나무 숲의 바람이 곁을 스친다고 생각했었다.
‘자작나무 왕자?’
자작나무 왕자가 곁에 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뜨자 과연 앞에 자작나무 왕자가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내가 이렇게 앉아 있는 것은 품위에 결코 맞지 않아.”
‘세상에 자작나무 왕자가 현실적인 농담을 하다니.’
지동일의 농담보다 더 기절할 지경이었다. 놀랍고 반가웠다. 경하의 눈이 동그래졌다.
“자작나무 왕자님.”
“내가 사랑하는 나무의 후손이여. 내가 그리 반가운가. 눈이 커졌구나.”
“자작나무 왕자님께서 이곳에 이렇게 오실 줄은.”
“그동안 그대를 오랫동안 기다렸다. 드디어 그대를 보게 되었구나.”
“그동안은 왜 저를 찾아오지 않으셨어요?”
“네가 살아있는 줄은 알았다. 우리가 너에게 준 선물이 빛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 파라다이스는 자연의 힘이 닿기엔 너무 먼 곳이었다.”
“지금은 어떻게?”
“지난 번 네가 자작나무 숲에 왔을 때 우리가 너의 몸에 강한 힘을 실어 주었다. 이제 우린 언제든지 널 찾을 수가 있단다. 하지만...”
“하지만요?”
“파라다이스의 환경처럼 자연이 너무 멀어진 곳에서는 우리도 힘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땐 어쩔 수 없단다. 그래서 그 말을 하려고 이렇게 온 것이다.”
“제가 되도록 자연의 환경 속에 있어야 한다, 이 말씀인 거죠.”
“잘 아는구나. 나무의 후손이여.”
“그런데 궁금해요. 제가 어떻게 나무의 아이이고 나무의 후손인가요?”
“예전의 인간들은 우리 나무들과 너무도 가까웠지. 나무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인간은 불을 발견했고 그 순간부터 인간은 자연과 멀어졌지. 물론 인간의 문명 발달을 위해 불은 필요했지. 인간은 너무 나약한 존재였으니까.”
“인간에게 불이 없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어요.”
“인간이 불을 쓰지 않았을 때는 우리 나무들이 인간들을 보호했지. 나약한 인간의 힘이 되어 주었어. 하지만 인간은 불을 쓰게 되자마자 나무들을 먼저 버리지 시작했어.”
“아....”
경하는 인간이 불을 사용하게 되면서 얼마나 많은 나무들을 훼손했는지에 크게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엄마가 환경운동을 해서 정글이 점점 사라진다는 둥의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지만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었다.
인간이 사용하는 불의 남용은 나무들에게 이렇게 큰 아픔이 있었던 일이었다.
인간은 경작을 위해 나무를 태워 없앴다. 밀림 역시 소를 키우기 위해 태웠고 건물을 짓기 위해 숲을 태웠다. 많은 숲이 인간의 불에 의해 사라졌다.
“인간이 추위로 괴로워할 때 가장 먼저 희생이 되어준 나무는 바로 우리 자작나무였어. 우리 자작나무는 기름을 많이 갖고 있어서 아주 잘 탔거든. 인간들은 우리 자작나무와 가장 친했는데 자작나무를 점점 많이 필요로 했어. 급기야 자작나무 숲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었지.”
“........”
“예전에 우리 자작나무는 인간들과 얼마나 친했는지 몰라. 알아? 우리 자작나무들이 인간의 편지가 되어주었던 사실?”
“읽었어요. 자작나무 껍질을 벗겨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연서를 썼다고.”
“우리들은 그런 아름다운 일에 쓰일 때 무척 행복했어. 기꺼이 껍질이 벗겨지는 고통을 감수하며 인간을 위해 연서의 수단이 되어 주었어.”
“그런 아름다운 일이.”
“팔만대장경이라는 경판도 우리의 몸에 새겼잖아. 우리들은 그런 아름다운 역사와 함께하는 일에 보람을 느꼈어. 그리고 알아? 화촉을 밝힌다는 말.”
“역시 자료에서 읽었어요. 자작나무로 횃불을 밝혔다고요. 그래서 그 횃불로 결혼을 축하했다는.”
“맞아. 우리는 인간을 너무 사랑했어. 인간의 사랑의 결실인 결혼의 순간에도 우리는 우리의 몸을 태워 화촉을 밝혔어.”
“그런 사랑이 있는 줄 몰랐어요.”
“나무의 후손이여, 우리는 여전히 인간을 사랑했지.”
“나무를 배신한 인간이 너무 미웠겠어요.”
“물론, 우리는 인간을 향해 전쟁을 선포하려고 했지. 그런데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는 인간이 있었어. 소수였지만 그들은 우리 나무를 진정 사랑하고 숭배했지. 아주 선한 인간이었어.”
“다행이에요.”
“나무의 후손이여. 너는 바로 그 후손의 피를 이어받은 인간. 천 년의 시간이 흐른 다음에 나무의 후손이 태어난다고 했는데 바로 그 후손이 경하, 너였지. 그 후손은 우리 나무와 이야기를 할 수 있고 또한 인간을 위기에서 구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해.”
“인간을 위기에서 구해요? 제가요? 설마요. 전 이렇게 나약하고 능력도 없는데요.”
“넌 아직 너의 능력을 쓰지 못했을 뿐이야. 곧 너에게 힘이 있음을 알게 될 거야.”
“초자연적 힘이 존재한다는 것은 자작나무 왕자님을 보면서 알게 되었어요. 하지만 제게 어떤 힘이 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인 것 같아요.”
“나무의 선물을 받는다는 것이 이미 큰 힘인 것을 잘 모르는구나.”
“아, 나무의 선물. 그런데 제 혈청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시기가 도래했다고 했어. 그래서 자연은 인간에게 여러 가지 경고를 했어. 그러나 인간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지.”
“자연의 경고라고 하는 것은 자연의 재해를 말하는 건가요?”
“자연의 재해는 직접적 경고에 해당하고 간접적인 경고가 더 많았지.”
“코로나는..”
“그중 바이러스가 전쟁을 먼저 시작했어. 인간을 쓰러뜨리지 않으면 인간이 자연을 망칠 것이 뻔했거든. 바이러스는 먼저 동물들에게 침투해서 인간에게 경고를 했어. 그러나 역시 인간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지.”
“맞아요. 바이러스가 먼저 동물들에게 왔었어요. 그 세력은 미미해서 인간들은 위험을 알아차리지 못했어요.”
“하지만 우리 나무들은 인간들을 사랑했어. 그중에서 우리 자작나무숲을 불길의 죽음에서 구해준 인간의 후손이 태어나길 기다렸지. 그런데 그 아이가 태어난 순간에 하필이면 바이러스가 전쟁을 선포했어. 인간의 멸망을 꿈꾼 어마어마한 전쟁이지.”
“인류의 50%가 사망했어요.”
“우린 어린 너를 만났고 너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어. 넌 우리를 잊지 않겠다고 했어. 그래서 우린 너를 지켜주기 위해 너에게 선물을 줬지. 하지만 인간의 악행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어. 너의 혈청을 이용했으니까.”
“저의 혈청을 이용해요?”
“변이 바이러스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항체가 너에게 있었으니까.”
“그래서 제가 파라의 특별 관리를 받은 건가요? 저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파라다이스를 떠나면 되는 일이 아닐까요?”
“곧 리아로부터 연락이 갈 거야. 그리고 누구도 믿으면 안 돼. 모두 널 노리고 있으니까.”
“절 노려요?”
“안녕, 난 이만 갈게. 곧 다시 자작나무 숲으로 오게 될 거야. 그때 만나. 난 잠시 너의 꿈을 빌려 온 거야. 너의 안전을 위해. 잊지 마. 누구도 믿으면 안 돼. 널 지켜야 해. 알았지? 너만이 인류의 희망이야.”
“왕자님..”
경하는 눈을 번쩍 떴다. 아침이었다.
<경하 씨, 좋은 아침. 미안하지만 전 경하 씨의 왕자님이란 이야기를 듣고 말았습니다. 꿈에서 왕자님을 만난 건가요? 너무 로맨틱합니다. 너무 멋진 꿈입니다. 인간의 꿈은 정말 신기한 영역인 것 같습니다.>
곁에 바비가 와 있었다. 경하가 깨어날 때면 늘 바비가 인사를 했었다.
“내가 왕자님, 그랬어? 기억이 나질 않네.”
<인간은 꿈을 기억하지 못하고 대부분 잊는다고 하는데 하필 왕자님의 꿈을 잊었다니 너무 아쉽습니다.>
“나도 아쉬워. 왜 하필 왕자님 꿈이.”
경하는 꿈이어서 잊었다고 말할 수 있으니 좋았다. 그리고 갑자기 옛날에 어려서 들은 남도민요가 생각이 났다. 왜 어린 시절의 기억이 갑자기 돌아왔는지 모를 일이다. 이 시점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갑자기 떠오른 노래였다. 흥타령이란 노래였다.
꿈이로다 꿈이로다 모두가 다 꿈이로다
너도 나도 꿈속이요 이것 저것이 꿈이로다
꿈 깨이니 또 꿈이요 깨인 꿈도 꿈이로다
꿈에 나서 꿈에 살고 꿈에 죽어 가는 인생
부질없다 깨려거든 꿈은 꾸어서 무엇을 헐거나
아이고 데고 허허 어허루 성화가 났네 헤
‘세상에 고전문헌 속에서나 나올 노래가 생각나다니. 내 기억장치가 어떻게 된 거지?’
경하는 자신의 기억장치에 뭔가 변화가 있는 걸 알 것 같았다.
날 그냥 둘 수 없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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