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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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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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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40
추천수 :
431
글자수 :
916,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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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7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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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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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11쪽

천계_영진촌 낭원

DUMMY

대명천은 명을 기다린다는 뜻이다. 마음숲과 가까우니 인도자들의 거처로 알맞았다.


다움성 부근이나 염라부에도 천인의 마을이 있지만, 인도자는 처음부터 대명천 영진촌에 머물렀다.


영천옥에서 마음숲으로 가는 길목이며, 북동쪽으로 푸른호수가 반짝이고 남쪽으로는 해람강이 흘렀다.

기운이 좋고 경치가 아름다워 천인들은 대명천에서도 영진촌을 가장 좋아했다.


인도자들의 숙소 낭원은 해람강을 내려다보는 곳에 있었다.


한얼은 낭원 이 층 자신의 방에 앉아 서적을 훑어보았다. 기회가 닿을 때마다 인간세에서 모아온 기록이었다.


서탁 옆에 쌓인 책에는 떠돌아다니는 설화와 전설, 괴담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천신의 아들이라···. 이것도 아니고.”

한얼은 읽던 종이를 치우고 다른 두루마리를 펼쳤다.


“사라진 용왕의 아이. 천수를 누리고 나서 죽을 때가 되자 몸이 하늘로 떠올랐다. 그 모습 그대로 바다로 돌아갔다.”

한얼은 두루마리를 내려놓고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내가 언제 중간자가 되었지?”

이천 년 전? 이천오백 년 전? 적어도 그 이후는 아니다.

그동안 인간세에 전쟁이 끊이지 않아 이천 년 전 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한얼은 두루마리를 밀어놓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분명 거기 살았을 텐데. 이름조차 찾을 수 없다니.’


그는 일어나 방안을 서성였다.

‘스승님은 답을 안 주시고···.’


다훤은 지나간 일에 마음을 두지 말라고 했다.

‘이미 떠나온 곳이다. 지금은 천계가 너의 집이다. 마음을 어지럽히지 마라.’


그러나 알고 싶었다.


회향미곡에 들어서기 전까지 과거에 대해서는 기억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그저 살아있어서 좋았다.


비록 천력을 담지 못해도 천계에서의 삶이 좋았고, 스승을 따라 배우고 익히니 즐거웠다.


사빈을 만난 것도 커다란 기쁨이었다. 두 번밖에 만나지 못했지만, 같은 중간자라며 위로해주었다.


’이 세상에 중간자는 너랑 나뿐이야. 우리는 선택받은 존재야.‘

그녀의 말이 그를 지탱하는 힘이었다.


회향미곡에 다녀와서는 몹시도 과거가 궁금했다.


회오리에 휩싸여 잉걸둥지에 떨어졌다. 그곳이 잉걸둥지인 것은 나중에야 알았지만.

어두운 동굴 속에 희미하게 빛나는 다섯 개의 알이 모여 있었다.


그 알 중의 하나가 물었다.

‘너는 누구인가?’


소리가 아닌 떨림이 동굴을 울렸다.

그 떨림은 한얼을 집어삼킬 듯 다가왔다.


‘한얼입니다. 북방흑천 다훤의 제자이며, 천계의 삶을 배우는 중간자입니다.’


‘어디에서 왔는가?’

‘인간세의 기억은 없습니다. 깨어나 보니 북방흑천이었습니다.’


대답하면서도 의문이 꿈틀거렸다. 중간자라면 인간세에 살았을 텐데, 그때의 기억이 전혀 없다니.


잉걸둥지에서 또 다른 소리가 들렸다.

‘어디로 가느냐?’


마지막 질문이었다. 더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 물음이 마음을 뒤흔들었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다. 왜 중간자가 되었는지.’

스승님이 중간자로 만들 때는 목적이 있었을 텐데···.


기억해내려 애쓰니 서서히 되살아나기는 했지만, 세 가지 장면이 전부였다.


하나는 춤추는 사람들이었다. 무희들이 화려한 천으로 둘러싸인 무대에서 춤을 추었다.


다른 하나는 전쟁이 휩쓸고 간 전쟁터였다. 아무도 살아남지 못한 처참한 광경이었다.


세 번째 기억은 움직이는 수레 속이었다. 나무로 엮은 우리 속에 있었으니 죄인이 분명했다.


‘내가 큰 죄를 지었단 말인가? 스승님은 어디서 나를 찾으셨을까?’

한얼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인간세에 내려갈 때마다 자료를 찾았지만, 세 가지 기억에 어울리는 이야기는 없었다. 괴담조차 피천귀와 관련된 것들뿐이었다.


도깨비를 만나 부자가 되었다거나, 지극정성으로 기도했더니 죽어가는 사람이 살아났다는 이야기들.

신의 사자나 도깨비라고 적혀있지만 모두 피천귀의 수법이었다.


북방흑천의 천사나 서방백천의 선사들은 그런 식으로 사람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

천선계에서는 들여다보지도 못한다.


‘마고의 그믐 외출이라면 가능할까?’

방법은 비슷하지만, 마고의 수명환은 사람이 알아차릴 만큼 표시 나지 않는다.


서탁 위의 자료를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마당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한얼은 손을 뻗어 허공을 휘저었다.


그의 손짓에 따라 책과 종이가 모습을 감추었다.

벽이나 바닥으로 스며 흙이나 돌인 듯 머물렀다. 그가 부르면 다시 모습을 나타낼 것이다.


“이보게, 한얼! 새로운 소식이 있네.”

산여가 성큼성큼 들어왔다. 그의 뒤를 이어 대취도 뒤뚱거리며 들어왔다.


“가시버시 축제와 바람길 연회를 연이어서 한다네. 마음숲이 온통 그 얘기뿐이야.”

산여와 대취가 서탁 옆에 앉자 한얼도 그들의 맞은편에 앉았다.


“초연이 힘들지 않을랑가?”

대취가 몸을 웅크리자 산여가 혀를 끌끌 찼다.


“걱정 말게. 더 힘이 날 테니. 한창 기대하고 있을 걸세. 도우미까지도 힘이 넘치니 좋더군. 우리 다담은 벌써 소매를 걷었을 테지.”

산여도 기뻐하며 한얼을 바라보았다.


한얼은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멍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산여가 손가락 끝으로 서탁을 두드렸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나?”


대취는 방안을 휘이 훑어보았다.

“또 인간세에 다녀온 겨?”


“자주 가는 건 좋지 않네. 아무리 흑천의 능력이 있어도 인간세의 탁한 기운을 마셔서 좋을 게 없어. 자네는 천사도 아니지 않는가.”

산여의 이마에 주름이 지어졌다.


“잠깐 다녀왔습니다. 제가 인도한 혼이 잘 지내는지 궁금해서요.”

“그게 뭐시 궁금혀? 삼도천 딱 건너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겨.”


“제가 없는 동안 두 분이 힘드셨죠?”

한얼이 묻자 대취와 산여가 동시에 손을 흔들었다.


“아닐세. 늘 하던 일이니. 인도자야 어려울 것도 없지.”

“그려. 천사가 힘들제. 인간세에서 삼도천까지 천사들 속을 허벌 썩인다더구만.”


“아하, 그 얘기는 나도 들었네.”

산여가 껄껄 웃었다.


“자기가 없으면 세상이 안 돌아간다던가, 사람들이 자신을 찾고 있을 거라나.”

“그려. 시간이 자기에게만 불공평하댜. 이거여. 허허.”


“그래도 삼도천을 넘으면 깨달으니 다행일세. 중천에 와서야 제대로 후회할 줄 안다니까.”

산여의 말에 대취가 손끝으로 서탁을 두드렸다.


“그려. 삼도천까지는 근거 없는 원망이제. 중천에서의 후회와 미련은 순수하제.”

“그래서 기운이 더 강한가? 중천까지 인간세처럼 어둡고 탁하게 바꾸어 놓다니.”


“중천도 참···. 아름다웠는디.”

대취는 혀를 쯧쯧거리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중천도 마고에게는 다르게 보이나 봅니다.”

한얼은 중천을 함께 다녔던 사빈을 떠올렸다.


비뢰수들이 공격할 때도 사빈은 괴물을 살리고자 했다.

‘귀물씨앗에서 나왔다면, 처음부터 이 모습은 아닐 거예요. 두려움과 상상을 삼키며 모습이 바뀌었을 거예요.’


사빈은 비뢰수의 본래 모습을 찾아주었다. 거대하고 흉포한 괴물이 송아지처럼 바뀌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괴로워하는 혼을 위로해주었고 고사목을 위해 물을 찾아냈다. 알아듣지 못 하는 말로 고사목과 대화를 나누지 않았나.


버려진 땅이라던 중천도 그녀에게는 다정했다.

처음 헤아림문으로 들어설 때부터 그랬다. 설명할 수는 없어도 다른 차사와 다닐 때와는 확실히 달랐다.


사빈을 떠올리자 한얼의 얼굴에 포근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어허, 이 친구, 지금 사빈을 생각하나벼.”

대취가 싱글거리며 눈을 찡긋거렸다.


“좋네, 좋아. 보기 좋네.”

“이, 내도 아까 그거 물어보려 했는디, 사빈님에게 말여. 가시버시날 뭐 할 거냐고. 그날이 고백하기 딱 좋은 날 아니여?”

대취가 한얼의 소매를 슬쩍 잡아당겼다.


한얼은 굳은 얼굴로 말이 없었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던 산여가 허리를 쭉 폈다.

“자네, 사빈에게 마음이 있지 않나?”


“제 마음··· 이요?”

한얼은 탁자 위에 올린 두 손을 맞잡았다. 사빈을 생각하자 가슴이 뛰었다.


“좋은 사람입니다. 같은 중간자이니 누이 같고, 가족 같습니다. 안쓰럽기도 하고···.”

“은애하는 마음이 바로 거기서 시작하제.”

대취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고에게 측은지심이라니?”

산여가 입을 삐죽거리자 대취가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눈에 힘을 주었다.


“벌써 어리화가 나타났잖여. 이런 경우가 없었당게. 중간자라 힘이 없어 그런 겨. 그라고, 그믐마다 나가면서 을매나 힘들간대.”


“그도 그렇군. 중간자는 인간세에서 날지 못하니 힘들겠지. 무기도 없고···. 싸움도 못 하는데, 그런 것 치고는 제법 잘해내지 않나?”


“그라니 백하도 사빈을 사모···.”

대취는 말하다 말고 헛기침을 해댔다.


산여는 한얼에게 어깨를 기울이며 장난스레 웃었다.

“상산대감 백하도 만만치 않지. 황제님도 그가 사빈을 은애하는 걸 알고 계시니.”


백하의 이름이 나오자 한얼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절대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감히 사빈님을!’


“그라믄, 사빈의 마음은 뭐여? 에효, 그걸 물어보려 했는디.”

“그걸 왜 자네가 묻나? 이 친구가 알아봐야지.”

산여가 한얼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두 인도자에게도 말하지 않은 사실이 있다.

한얼은 사빈이 마고가 되기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같은 중간자이면서 스승들끼리도 친하다.

그것만으로도 사빈의 옆은 자신에게 어울린다고 믿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당당히 다가갈 만큼 천력도 키웠다. 흑천에서도, 황천에서도 실력을 인정받지 않았나.


사빈을 떠올렸다.

선한 눈으로 다정하게 웃는 모습, 작고 여린 몸으로 혼을 달래던 모습.


바나를 만든 것은 사빈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인간세에서 자신의 과거를 찾으려 했던 일이다.

백하의 천력으로 틈을 채웠기에 바나는 자신만의 뜻과 의지로 살게 되었다.


마음숲에서도 백하는 크나큰 걸림돌이었다.

사빈과 있으려면 어디서나 튀어나와 방해하니,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골칫덩이였다.


한얼이 비장한 표정을 짓자 대취와 산여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의 주먹에 점차 힘이 들어가자 두 인도자는 서로 눈웃음을 주고받았다.


“길이 없으면 만들면 돼야. 고만 가자고!”

“그렇지. 기다리면 날아간다네. 놓치고 후회하지 말게.”

산여가 한얼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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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천계_중앙황천 대차사들 23.07.21 43 2 11쪽
89 천계_한긋장벽을 따라 23.07.20 42 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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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천계_마음이 가는 곳 23.07.18 44 2 11쪽
» 천계_영진촌 낭원 23.07.17 43 2 11쪽
85 천계_변경된 일정 23.07.16 41 2 14쪽
84 천계_백하의 고민 23.07.15 44 2 12쪽
83 천계_어리화는 짙어지고 23.07.14 41 2 13쪽
82 그믐_그리운 아버지 +2 23.07.13 44 2 14쪽
81 그믐_한 번뿐인 나들이 23.07.13 43 2 13쪽
80 그믐_새로운 일꾼 23.07.12 43 2 10쪽
79 그믐_거리의 소녀 23.07.11 44 2 12쪽
78 그믐_중간자의 사연 2 23.07.10 43 2 9쪽
77 그믐_중간자의 사연 1 23.07.10 44 2 11쪽
76 그믐_운기정 서재에서 23.07.09 46 2 11쪽
75 그믐_흉흉한 소문 23.07.08 44 2 12쪽
74 그믐_백홍선원 부운거사 23.07.07 49 2 11쪽
73 그믐_창성곡의 산적 23.07.06 52 2 13쪽
72 천계_온사랑 팔찌 23.07.05 50 2 13쪽
71 천계_회향미곡 잉걸둥지 23.07.04 51 2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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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천계_피하지 못할 고백 23.06.30 58 2 10쪽
66 천계_뜻밖의 만남 23.06.29 58 2 14쪽
65 천계_다시 시작된 수색 23.06.28 59 2 12쪽
64 천계_천인의 기억법 23.06.27 61 2 12쪽
63 천계_인연이라는 끈 23.06.26 64 2 12쪽
62 천계_마음을 전하는 일 23.06.23 68 3 12쪽
61 그믐_옥구슬의 사연 23.06.22 68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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