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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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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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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88
추천수 :
431
글자수 :
916,352

작성
23.07.08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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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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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그믐_흉흉한 소문

DUMMY

여인과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야 했다.


어떤 이는 한마삼국의 다른 지방에 친척이 산다고 했고, 한마일국으로 가는 사람도 있었다. 또 다른 이는 한마이국 어딘가 의지할 사람이 있었다.


찾아갈 친지가 없는 사람은 아랫마을에서 일자리를 알아본다고 했고, 아이들은 모두 부모를 찾아가기로 했다.


마고로서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지.


조금이라도 여비를 들려주고, 그쪽으로 떠나는 상인들에게도 부탁해야 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 당연히 상인들에게도 얼마씩 챙겨줘야 한다.

아랫마을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여인에게도 며칠간의 생활비를 나눠주고.


“왈, 주인님, 그러려면 황금이 몇 덩어리는 있어야지라. 왈.”

바나는 나를 쫓아다니며 왕왕거렸다.


강아지가 짖거나 말거나 나는 죽간에 사람들의 이름과 행선지, 대략적인 거리를 적어나갔다.

어릴 때 한마삼국에 살긴 했어도 그게 언제 적인데, 기억날 리 없다.


선원의 청지기가 나와 함께 다녔다.

나이 지긋한 청지기는 귀가 어두운지 개 짖는 소리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그 정도도 없을까 봐?”

“헤엥, 주인님한테 돈이 어디 있어라?”

나는 들고 있던 죽간을 촤르륵 접고 허리에 양손을 걸쳤다.


“산적의 동굴까지 들어갔는데, 그냥 나올 내가 아니지.”

지금까지 다닌 그믐 외출이 이만 번이 넘는다. 도적 떼를 만난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당연히 쓸 만큼 가져와야지.

내가 쓸 것도 아니고, 그들이 괴롭힌 이들이 쓸 것이니 도적의 마지막 선행으로 해두자고.


“에? 그러니끼니. 도적이 빼앗은 걸 다시 빼앗아 생색내는 거여라? 왈.”

“바나, 너 말이 삐딱하다?”


“예예. 주인님. 어서어서 하시어라. 삽살이를 찾으러 가야 하여라.”

“삽살이한테 못 갔다고 나한테 투정하니?”


“왈, 그럴 리 없어라. 빨리 끝내시라는 거여라.”

말은 아니라고 해도 투정 맞았다.


바나는 머리를 축 늘어뜨리고 선원 뒤쪽으로 돌아갔다. 빈터에는 선원에서 키우는 개와 고양이도 있었고, 닭장도 있었다.


싸움도 끝났겠다, 고요한 선원에는 더 이상 색다른 일도 없겠다, 벌써 무료해진 것이다.


‘아휴, 한얼은 상상도 못 할 거야. 자신이 만든 강아지가 어떤지···.’

위험할 때만 도움이 되고 평온한 때에는 주인을 괴롭히는 도우미라니. 입맛이 썼다.


그 사이, 여비로 얼마나 필요한지 대충 정리가 되었다. 청지기가 계산한 비용을 보여주었다.

“이 사람들 여비를 다 대시려구요?”

“예. 그 정도는 충분할 거예요.”


청지기를 데리고 내가 묵는 손님방으로 갔다.

방 한가운데 상자 두 개를 가져다 놓았다. 내가 들어가 웅크리면 딱 맞는 크기였다.


공기와 바람이 도와주니 옮기는 거야 어렵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들의 염원이 해낸 일이니 나 혼자의 힘은 아니지만.


커다란 상자에 수십 가지 옷감과 금과 옥, 여러 보석이 들어있었다. 어디서 훔쳤는지 모르나 주인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내 기억대로라면 이때의 부자들은 남의 손을 탄 물건은 깨끗하지 못하다고 여겼다. 자신이 직접 도적을 처벌했다면 모를까.


“히이익! 이렇게나 많이?”

청지기가 이빨 사이로 끼이익 쇳소리를 냈다.


“이, 이 정도면 마을 하나를 사겠습니다요.”

“여기 두고 갈 테니 근처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주세요.”


청지기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 그럼 아가씨는?”

“전 이런 거 필요 없어요.”


내가 너무 태연하게 말했나? 청지기는 얼음이 된 듯 그 자리에 서서 상자만 바라보았다.


*


길 떠날 사람들과 함께 산 아랫마을로 내려갔다.

청지기와 나는 말을 탔고, 사람들은 수레 두 대에 나눠 탔다. 두 명의 호위가 우리를 안내했다.


당연히 바나도 따라왔다. 이런 일에 빠질 바나가 아니었다.

“장터에 가신다고라? 왈. 그러면 제가 주인님을 지켜드려야지라.”

“바나, 거기서는 변신도, 싸움도 안 돼. 절대로. 알지?”

“왈, 왈. 당연하여라.”


그래도 바나는 마차에서 오래 버티지 못했다. 답답하다며 수레에서 뛰어내렸다.

바나야 뛰다 걷든 말든 사람들은 모두 즐거워 보였다.


“살아서 돌아간다니 믿어지지 않아요.”

“여비도 챙겨주시고. 평생 잊지 않을게요.”

여인들은 주머니를 소중하게 품에 넣었다.


바나는 춤을 추듯 통통 튀며 앞장서 걸었다. 혼자 오솔길로 들어섰다가 우리와 한참 멀어진 다음에 돌아 나오기도 했다.


“강아지가 너무 귀여워요. 말을 알아듣는 것 같아요.”

아이들의 말을 듣고 바나는 바짝 다가왔다. 그때부터 수레와 속도를 맞춰 의젓하게 걸었다.


*


아랫마을에 들어서자, 청지기와 마부는 나루터부터 찾아갔다.

“한마사국에서 한마육국까지는 배로 가는 편이 낫습니다요. 은실강을 따라 내려가니까 며칠이면 도착합니다요. 배가 하루에 한 번밖에 안 다니니 어서어서 타십시오.”


십여 명의 여인들이 나루터에서 내렸다. 그들은 우리가 돌아설 때까지 손을 흔들며 뱃전을 떠나지 않았다.


*


다음에는 아이들을 집까지 데려다줄 상단으로 찾아갔다.

“여기 장주님이 우리 선원에 다니십니다요. 거사님의 부탁이라면 거절 못 하시죠.”


“거사님이 오늘 일을 알고 계세요?”

“그럼요. 거사님이 어떤 분인데요. 여기 남는다는 여인들에게 일자리를 찾아주라고 하셨지요.”

“선원에서는 일꾼 안 뽑나요?”


“아휴, 그것이···.”

청지기는 한숨을 쉬었다.


“전에 웬 여인이 거사님 아기를 갖겠다고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여하튼 우리 선원에는 여인을 안 들입니다요.”


부운거사를 생각하니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졌다. 용모도 수려한 데다 인품도 훌륭하니, 여인들이 애태울 만도 했다.


장주의 거처에 도착하자 청지기는 여인과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갔다. 우리가 선원에서 출발하기 전에 부운거사가 연통을 넣은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근처를 둘러봐야지. 꽤 큰 마을이니까 저잣거리나 장터도 활발할 것이다.

‘얄리장터에 도움이 될 만한 것도 있을 거야.’


내가 걸음을 옮기자 어떻게 알았는지 바나가 발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왕왕, 주인님, 저기서 고기완자를 판다고라.”

“바나, 나오기 전에 밥 먹었잖아?”


“아니어라. 저 산을 걸어 내려왔잖여라? 너무너무 배고파라.”

바나는 횡설수설하며 노점 앞까지 가서 기다렸다. 천연덕스럽게 꼬리를 흔들었다.


‘차분하게 둘러보려면 일단 저 입부터 막아야겠어.’

바나는 고기완자를 한 접시나 먹고 나서야 조용해졌다.


나는 천천히 장터를 둘러보았다.


얄리장터보다 물건도 적고, 조잡하지만 나름대로 정감 있었다.

어디서든 싸움이 일어났다 하면 구경하느라 몰려다녔다. 시끌시끌한 것이 사람 사는 동네 같았다. 사람의 온기도 느껴졌다.


다리가 뻐근했다. 영감도 바람잡이도 없으니 조금만 걸어도 쉽게 지쳤다.

바나도 지루한지 하품을 해대면서 흐느적흐느적 걸었다.


우물가 나무 그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람은 누구나, 언제든 악마가 될 수 있다고 누가 그랬더라?”

“왈, 어려운 얘기 그만 하시어라, 수명환이나 빨리 건네셔라. 삽살이한테 가야지라.”

아직도 삽살이와 참새에게 갈 수 있다는 희망을 못 버린 거야?


“그만 포기해. 꽃수 열쇠가 부를 때까지 꼼짝없이 여기 있어야 해.”

“에? 그런 거여라?”

바나는 콧김을 내뿜고는 바닥에 풀썩 엎드렸다.


마을 여인들이 물통을 들고 우물로 모여들었다.


‘사람이 모이면 재미있는 소문이 나오기 마련이지.’

나는 여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떤 총각 이야기나 물방앗간 이야기는 대충 넘겼다. 시대가 달라져도 바뀌지 않는 화젯거리였다.


“들었어? 한마이국에서 이재민들이 오고 있대.”

“홍수랑 지진이 겹쳤다던 거기?”


“도둑도 많을 거래. 먹지도 입지도 못했을 거 아냐? 보이는 대로 훔쳐 갈 거래.”

“정말? 너무 무섭다.”

젊은 여인들은 비명을 지르며 손을 떨었다.


‘그런 이야기가 있어? 이재민이라···.’

정확하게 알려면 한마이국에서 넘어온 상인을 찾아야 했다. 나는 황망히 장주의 거처로 돌아갔다.


*


커다란 대문 앞에서 청지기는 수레를 정리하고 있었다. 상단의 장사꾼 몇 명이 그를 돕고 있었다.

“얘기가 쉽게 끝나니 좋네. 장주님이 시원시원하셔.”

“그럼요. 화통하시죠.”


나는 헥헥거리며 달려가 청지기의 팔을 붙잡았다.


“어르신, 한마이국에서 넘어온 장사꾼과 얘기할 수 있을까요?”

“한마이국? 아, 이 친구가 거기서 왔습죠. 아이들을 데려다 줄 사람입니다요.”


날렵한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나를 보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서 이재민이 넘어오고 있나요?”

“그렇다오. 이백 명은 족히 넘을 것이오. 큰일이오. 저 산만 넘으면 우리 마을이니.”


“그렇군요.”

나는 그가 가리키는 산을 올려다보았다. 산을 넘으면 하루도 안 되어 여기 다다를 것이다.


우물가에서 보았던 여인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기 것을 지키려는 당연한 두려움이지만···.


“누구 하나라도 물건을 훔치면 다 몰매를 맞을 거요.”

콧수염의 남자가 말하자 옆에 서 있던 다른 남자가 끼어들었다.

“아니지, 아예 못 들어오게 해야지. 우리도 먹고살기 어렵다고.”


“그렇다고 죽어가는 사람을 어찌 나 몰라라 하나.”

청지기가 혀를 끌끌 찼다.


나도 한숨을 몰아쉬었다. 불의는 참을 수 있어도 불이익은 못 참는다 이건가.


청지기는 백홍선원의 식구답게 이재민을 두둔하고 나섰다.

“아까 그 아이들도 한마이국에서 잡혀 왔는데, 다 불쌍한 처지야. 자네도 보지 않았나?”


“잡혀 와?”

“두건파에게 잡혔다가 도망쳤다더군.”

“그럼 그놈들은?”

“난 모르지. 여기 이 아가씨가 데려왔으니.”


세 사람의 시선이 한꺼번에 내게로 향했다.

“두건파는 어찌 되었소?”


“그, 그. 아! 제가 갔을 때는 산적들이 다 죽어있었어요. 소, 소리가 나기에 가본 거예요.”

생각나는 대로 둘러대느라 자꾸 말을 더듬었다.


장사꾼 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누굴까? 그런 극악무도한 놈들을 처리하다니?”

“누구면 어떤가? 마음 놓고 산을 넘을 수 있는데.”

“그러니까···. 한마이국에서 오는 사람들이···.”


콧수염을 기른 장사꾼이 손뼉을 따닥 쳤다.

“내일이면 여기 도착하겠군. 무사히 말이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네. 모두에게 알려야지. 지킬 건 지켜야지.”

다른 장사꾼의 말에 도와주던 일꾼들까지 빠르게 돌아섰다.


아니. 사람들을 도와주자고 왔는데. 얘기가 이렇게 흘러가다니. 뒤통수가 얼얼했다.


나는 청지기에게 다가갔다.

“우리가 도와야 하잖아요?”


“그러면 좋겠지요, 그도 그렇지만, 저 사람들도 이해는 됩니다요.”

청지기는 내게 말고삐를 넘겨주었다.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가려면 서둘러야 합니다요.”

청지기는 어렵사리 말 등에 올라탔다.


바나는 수레 위로 뛰어올랐다.

“왕왕, 주인님, 저는 못 걸어라. 발이 너무 아파라.”

수레에 자리를 잡자마자 눈을 감았다.


“거사님께 말씀드리면 되지 않을까요?”

나는 말고삐를 잡아 돌려 청지기의 말 옆에 나란히 섰다.


“거사님을 귀찮게 하지 마십시오. 편찮으셔서 얼마나 조마조마한데요.”

청지기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묻어있었다. 정말로 많이 걱정하는구나.

“아시겠죠? 힘들게 하면 절대! 안 됩니다요.”


내 생각은 달랐다. 나는 말고삐를 잡고 흔들었다.

‘부운거사를 시험할 기회야.’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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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천계_중앙황천 대차사들 23.07.21 42 2 11쪽
89 천계_한긋장벽을 따라 23.07.20 42 2 11쪽
88 천계_부르는 소리 23.07.19 42 2 10쪽
87 천계_마음이 가는 곳 23.07.18 43 2 11쪽
86 천계_영진촌 낭원 23.07.17 42 2 11쪽
85 천계_변경된 일정 23.07.16 41 2 14쪽
84 천계_백하의 고민 23.07.15 43 2 12쪽
83 천계_어리화는 짙어지고 23.07.14 41 2 13쪽
82 그믐_그리운 아버지 +2 23.07.13 44 2 14쪽
81 그믐_한 번뿐인 나들이 23.07.13 43 2 13쪽
80 그믐_새로운 일꾼 23.07.12 42 2 10쪽
79 그믐_거리의 소녀 23.07.11 43 2 12쪽
78 그믐_중간자의 사연 2 23.07.10 43 2 9쪽
77 그믐_중간자의 사연 1 23.07.10 43 2 11쪽
76 그믐_운기정 서재에서 23.07.09 45 2 11쪽
» 그믐_흉흉한 소문 23.07.08 44 2 12쪽
74 그믐_백홍선원 부운거사 23.07.07 48 2 11쪽
73 그믐_창성곡의 산적 23.07.06 52 2 13쪽
72 천계_온사랑 팔찌 23.07.05 50 2 13쪽
71 천계_회향미곡 잉걸둥지 23.07.04 51 2 13쪽
70 천계_이상한 편지 23.07.03 54 2 11쪽
69 천계_온천 물빛이 바뀌다 23.07.02 55 2 13쪽
68 천계_두 번째 구멍 23.07.01 55 2 13쪽
67 천계_피하지 못할 고백 23.06.30 58 2 10쪽
66 천계_뜻밖의 만남 23.06.29 57 2 14쪽
65 천계_다시 시작된 수색 23.06.28 58 2 12쪽
64 천계_천인의 기억법 23.06.27 61 2 12쪽
63 천계_인연이라는 끈 23.06.26 64 2 12쪽
62 천계_마음을 전하는 일 23.06.23 68 3 12쪽
61 그믐_옥구슬의 사연 23.06.22 67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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