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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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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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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
글자수 :
916,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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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5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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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천계_백하의 고민

DUMMY

이즈막 광장의 서쪽, 한요재는 언제나처럼 하얗고 깨끗하게 빛났다.

상산대 훈련장에서는 대원들의 기합이 울려 퍼졌다.


천인 중에서도 능력이 뛰어난 이들이 차사가 되지만, 수련의 길은 쉽지 않았다.

바람, 물, 불, 얼음의 기운에서 자신만의 원소를 찾기까지도 끊임없이 정진해야 했다.


백하가 허공에서 얼음을 빼내 장검으로 바꾸는 순간은 너무나 경이로웠다.


긴 얼음 막대가 빛을 뿜으며 날카로운 검으로 바뀌고, 쨍강거리는 맑은소리가 울린다. 주위는 순식간에 서늘해진다.


대원들은 얼음칼을 눈앞에 둔 것처럼 훈련에 빠져들었다. 우렁한 소리가 훈련장을 넘어 대감의 집무실까지 날아들었다.


상산대원들을 바라보는 대차사 해담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대원들이 저리도 열심이니 마음숲은 평안하겠구나.”


백하도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그 옆에 서서 훈련장을 내다보았다.

“안심할 수는 없습니다. 한긋장벽에서 구멍을 발견했거든요.”

“천기공이 아니라 한긋장벽에?”


“달해산 북쪽, 한긋장벽과 부딪치는 곳에 있었고, 다른 하나는 반다강이 회귀하는 곳이었습니다. 반다강의 힘이 워낙 강하니 피천귀는 못 들어왔을 겁니다.”


“달해산 북쪽이라···. 피천귀가 이미 마음숲에 들어왔을 수도 있겠군.”

“아직 다른 움직임은 없습니다. 귀물씨앗도 모두 없앴고요.”


“그걸 어떻게 알았나?”

“예?”

“거기 구멍이 있는 걸 어찌 찾아냈냐고.”


“사빈이 알려주었습니다. 아나진을 찾다가 이상한 기운을 발견했다고 했습니다.”

“그런가···.”

해담은 말끝을 흐렸다.


‘중간자의 천력으로···?’

무언가 미심쩍었지만, 해담은 모른 척 등 뒤로 손을 맞잡았다.


백하는 창가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어리화가 피었다고 합니다. 대부님은 알고 계셨죠?”


“알고는 있다만···.”

해담은 굳게 입술을 다물었다. 창가에서 물러나 집무실 의자에 앉았다.


깊은 생각에 빠지자 눈썹과 이마가 꿈틀거렸다.

“너무 일찍 나오지 않았나? 황제님도 걱정하시네.”


“저도 의아합니다. 이제 마고를 시작한 거나 다름없는데···.”

백하는 꿈틀거리는 감정을 내리눌렀다.

화가 치미는지, 불안 때문인지, 서운함인지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이었다.


‘그렇게 일찍 떠날 줄 몰랐는데···.’

상산대감을 맡은 이후 여러 명의 마고를 거쳤건만, 사빈이 없는 마음숲은 상상할 수 없었다.


해담은 물을 한 잔 가득 따라 마셨다.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자꾸나.”


그는 백하에게도 맑은 물을 따라주었다.

“황제님이 대차사들을 모두 다움성으로 부르셨다.”


“어리화 때문입니까?”

“그것도 어려운 문제이긴 하지. 벌써 그믐이 네 번 지났더구나.”

“이번 그믐에는 이레 동안이나 잠들었습니다.”

“큰일이군. 계속 천력을 잃을 텐데.”


해담은 백하의 표정을 살폈다. 사빈을 걱정하는 대자를 보니 애틋하면서도 뿌듯했다.

‘이제야 보통 천인처럼 느끼게 되었나.’


“중천도 큰 문제다. 회생이 불가능해졌으니. 그뿐인가. 남방홍천과 동방청천에서는 새로운 별이 태어나지 않고.”


해담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반계의 기운도 달라졌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다.”


백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반계는, 결코 천계에 발을 들이지 못할 겁니다. 제가 막을 겁니다.”


“다음 마고를 찾지 못하면 사빈은 더 약해질 거다. 점점 빨라질 거야. 게다가 그 아이는 중간자가 아니냐. 마음 써야 한다. 알겠느냐?”


“예. 대부님.”

백하는 고개를 숙였다.


*


해담이 돌아가고 백하는 다시 집무실 창가에 섰다.

상산대원들은 혼알방을 돌아보러 나가고 훈련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빈에게 마음을 쓰라고 부탁한 이는 대차사 해담뿐만이 아니었다.

선대 마고 아란의 부탁은 당연한 인사였지만, 중앙황제 현원이 한요재를 찾아온 것은 놀라웠다.


‘그 후로 다훤님과 예사달님이 오셨고, 북방흑제님도 말씀하셨지. 사빈을 지켜달라고.’


대천사 선아까지 찾아왔을 때 비로소 사빈이 평범한 반인반천이 아님을 알았다. 중간자인데도 천사 담아와 가온과 친구가 되지 않았나.


백하는 고개를 젖혀 천장을 바라보았다. 사빈이 다소곳하게 서서 웃고 있었다.


하얀 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사빈은 온화한 얼굴로 차를 따르고 있었다.

상산대 훈련장으로 고개를 돌리니 사빈은 낑낑거리며 장터의 물건을 나르고 있었다.


“힘없고 약한 중간자였는데···. 지금은···.”

그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사빈은 모를 것이다. 마음숲을 떠나면 더더욱 모르겠지.


백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알게 해야지. 마음숲이 더 어수선해지기 전에!”


*


한요재 응접실에 모여 앉은 삼인행은 동시에 소리쳤다.

“예? 아직도 말 안 했다고요?”


“뭔 소리라요? 그게 언제 적인디.”

부루가 혀를 차며 안타까운 눈빛으로 백하를 바라보았다.


차미는 백하에게 사실을 말해야 하나 고민했다. 사빈은 그런 사랑은 못 느낀다고.

그동안 생각만 하다가 때를 놓쳤다.

‘어쩌지? 알려줘야 해, 말아야 해?’


백하를 바라보았다. 그는 연거푸 차를 마시며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그 마음도 알 것 같았다. 어리화 소식을 들었으니 조급하겠지.


‘알려주면? 뭐가 달라져? 대감은 포기하지 않을 거야. 사빈이 어디로 가든 기꺼이 따라갈 거라고. 그렇다면···.’

차미는 도박하기로 했다.


‘어쩌면··· 대감으로 인해 사빈이 달라질지 몰라. 사빈 때문에 대감이 바뀐 것처럼.’

생각은 점점 확신이 되었다. 백하에게는 끝까지 모른 척하기로 했다.


“그르게 누가 그리 까칠하게 구시래요?”

부루의 말에 차미는 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엄청 까칠했어.”


“기억나요? 처음에는 완전 얼음바다였다니까요. 사빈님이니까 버텼지 나 같으면 그냥···.”

차미는 손가락을 펴서 손날로 탁자를 내리쳤다. 탁자가 요란하게 울렸다.


운와는 턱을 긁으며 입맛을 다셨다.

“사빈님이 한 말이 맞군요. 천계는 시간이 느리게 흘러서 뭐든 늦다고요. 변화도 없고.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사니 열정도 없다고요. 그때는 아니라고 반박했지만···.”


운와는 백하의 시선을 피해 돌아앉았다.

“그게 언제 적인데···. 쯧쯧.”


백하는 굳은 얼굴로 애써 미소 지었다.

“무슨 좋은 수가 있는가?”


“좋은 수가 있으면 제가 썼지, 여태 혼자겠슈?”

부루가 입을 삐죽거렸다.


차미가 옆구리를 툭 치자 화들짝 놀라며 옆구리를 가렸다.

“아이쿠, 맞는 말인디?”


“그냥 말하면 되잖아? 연모한다, 나와 혼인하자.”

운와가 대답하자 차미가 쌩 콧바람을 뿜었다.

“사빈님이 그 말을 믿겠어요? 지난번에도 자기가 뭐 잘못한 거 있냐고 묻더라고요.”


“그럼 선물 워뗘? 거시기, 그때 보니께 겨우내떡 좋아하드만.”

“그 수법은 이미 써먹었어. 그보다 나은 것이 필요해 보이는데?”

운와가 돌아앉아 백하의 표정을 살폈다.


백하는 얼굴을 찡그리고 빈 탁자만 내려다보았다. 하얀 얼굴과 머리카락이 생기를 잃어 칙칙해 보였다.

“공방의 키움차사들한테 물어보면?”


“이, 고것은 지가 물어봤는디요. 고샅공방의 요선님은 요리가 좋다고 하시져. 한 상 딱 차려서 대접하라고. 보듬공방의 지나실님은 무조건 새 옷이라고, 말만 하면 최고로 잘 만들어주겠다던디.”

부루의 말에 운와가 손을 휘저었다.


“소소공방과 검새공방은 안 들어도 알겠네. 조각품이나 장신구가 좋다고 했겠지.”

“오메, 어찌 안댜?”


부루가 놀라는 표정을 짓자 차미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자기네 공방 물건이 제일 좋다는 거잖아요?”


“그럼, 그거 다 하죠. 이번에야말로 사빈님이 알아차리도록.”

운와가 주먹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여하튼 진심이 중요해요. 진심.”

차미가 손바닥을 가슴에 올리며 진심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었다.


“그러니께 고 진심을 워찌 보여주냐고?”

“잘! 아주 잘!”

차미는 가슴을 두드리며 눈을 부릅떴다.


“그니께 어찌 하믄 잘하는 거냐고?”

이번에는 부루가 제 가슴을 두드렸다.


백하는 고개를 떨구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들을 믿다니··· 내가 어리석었지.’


*


한긋장벽 바깥쪽은 두꺼운 구름에 싸여 회백색 성벽이 되었다. 구름 위에 떠서 내려다보니 용솟음치며 휘도는 반다강이 또렷이 보였다.


강물을 훑어보던 백하의 눈빛이 한곳에서 멈추었다.

반다강이 휘돌아 오르는 절벽이었다. 소용돌이치는 강물과 그 아래 검은 바위가 언뜻 보였다.


물기둥에 휘청이던 사빈을 구해준 곳이다.

품에 안겨있던 느낌이 되살아나자 백하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자신의 품에서 작은 새처럼 떨던 그녀의 숨결이 목덜미에서 느껴졌다.


백하는 장벽 바깥쪽을 살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천기공과 다른 구멍이 또 있는지 살펴보며, 다른 한편으로는 어떻게 사빈에게 다가갈지 고민하느라 걸음은 계속 느려졌다.


“상산대감?”

맑은 목소리에 돌아보니 천사 담아가 싱글거렸다.


“대감이 여기까지 나오다니? 절 마중 나온 것은 아닐 테고. 무슨 일이에요?”

담아는 생글거리며 한긋장벽을 둘러보았다.


“담아로군. 인간세 일은 잘 끝냈소?”

“일단은요. 완전히 끝난 건 아니고요. 언제든 다시 터지겠죠. 인간세 일이 다 그렇듯.”

담아는 서글픈 눈빛으로 삼도천 너머를 바라보았다.


“마음숲에 가는 길이었소?”

“한긋장벽에 그림자가 어른거리기에 내려와 봤죠. 혹시 피천귀인가 하고.”


“얼마 전까지는 피천귀가 다니던 길이었소.”

백하는 두껍고 단단해진 구름을 두드렸다. 둔탁한 소리가 짧게 울리다 이내 사라졌다.


“이상하네요. 그래도 대감이 직접 둘러보다니. 그것도 혼자.”

“생각할 것이 있어서···.”

백하는 급히 말을 끊었다.


그러나 담아의 웃음 띤 얼굴을 보자 생각이 바뀌었다.

‘담아가 사빈과 친하잖나?’


“뭐 하나만 물어보겠소.”

“그러세요. 뭐가 궁금하실까?”

담아는 눈웃음 지으며 백하를 바라보았다.


‘까칠한 얼음기둥이 알고 싶어 하는 일이라···?’

담아는 상산대감을 놀리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았다.


지금의 상산대감은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언제부터인가 조금씩 달라졌는데, 오늘은 또 다른 모습이었다. 얼음이 아니라 물기둥이랄까.


백하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고백할 때 말이오.”


담아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오호, 사빈에게 고백?’


“어떤 선물이 좋겠소?”

“선물요?”

담아는 허공을 올려다보며 고민하는 척 눈을 깜빡였다.


“어떤 여인이냐가 중요하지만···.”

담아는 일부러 천천히 말했다.

눈을 치켜뜨고 진지하게 기다리는 백하의 표정이 흥미로웠다.


“아무래도 대감이 제일 잘하는 것이 좋죠. 상산대감 백하만이 할 수 있는 거요.”

담아는 알아들었냐는 듯 고갯짓했다.


백하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몰라 담아를 바라보았다. 농담 같지는 않은데.

‘나만이 할 수 있는 것?’


‘아···!’

백하는 얼굴 가득 웃음을 지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담아도 엄지를 치켜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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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90 천계_중앙황천 대차사들 23.07.21 42 2 11쪽
89 천계_한긋장벽을 따라 23.07.20 42 2 11쪽
88 천계_부르는 소리 23.07.19 42 2 10쪽
87 천계_마음이 가는 곳 23.07.18 43 2 11쪽
86 천계_영진촌 낭원 23.07.17 42 2 11쪽
85 천계_변경된 일정 23.07.16 41 2 14쪽
» 천계_백하의 고민 23.07.15 44 2 12쪽
83 천계_어리화는 짙어지고 23.07.14 41 2 13쪽
82 그믐_그리운 아버지 +2 23.07.13 44 2 14쪽
81 그믐_한 번뿐인 나들이 23.07.13 43 2 13쪽
80 그믐_새로운 일꾼 23.07.12 43 2 10쪽
79 그믐_거리의 소녀 23.07.11 43 2 12쪽
78 그믐_중간자의 사연 2 23.07.10 43 2 9쪽
77 그믐_중간자의 사연 1 23.07.10 43 2 11쪽
76 그믐_운기정 서재에서 23.07.09 46 2 11쪽
75 그믐_흉흉한 소문 23.07.08 44 2 12쪽
74 그믐_백홍선원 부운거사 23.07.07 48 2 11쪽
73 그믐_창성곡의 산적 23.07.06 52 2 13쪽
72 천계_온사랑 팔찌 23.07.05 50 2 13쪽
71 천계_회향미곡 잉걸둥지 23.07.04 51 2 13쪽
70 천계_이상한 편지 23.07.03 54 2 11쪽
69 천계_온천 물빛이 바뀌다 23.07.02 55 2 13쪽
68 천계_두 번째 구멍 23.07.01 55 2 13쪽
67 천계_피하지 못할 고백 23.06.30 58 2 10쪽
66 천계_뜻밖의 만남 23.06.29 57 2 14쪽
65 천계_다시 시작된 수색 23.06.28 58 2 12쪽
64 천계_천인의 기억법 23.06.27 61 2 12쪽
63 천계_인연이라는 끈 23.06.26 64 2 12쪽
62 천계_마음을 전하는 일 23.06.23 68 3 12쪽
61 그믐_옥구슬의 사연 23.06.22 67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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