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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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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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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
글자수 :
916,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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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8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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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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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천계_다시 시작된 수색

DUMMY

유난히 공명이 약한 혼이 있다. 인간세에도 유달리 적응을 못 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아나진도 공명이 약한 혼이었다.


자주 길을 잃었고 그때마다 상산대원의 도움을 받았다.

여간해서 밖으로 나오는 일도 없는 데다 매번 발견된 장소가 달랐기에 이번 수색도 까다로울 것이다.


사빈은 상산대원들과는 다른 길을 찾아 동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율도학당을 지나 그림터 혜존각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림터는 돌봄차사와 키움차사가 지내는 곳이므로 다른 혼은 이곳까지 오지 않는다. 하지만, 아나진이라면 그것조차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율도학당을 막 지나쳤을 때, 목예와 석보가 다가왔다. 그들은 공방거리로 가는 길이었다.


사빈은 선생들을 발견하자마자 훌쩍 뛰어 그들 앞에 내려섰다.

인사를 하려는데 목예는 기다리지 않고 덥석 그녀의 팔을 잡았다.


“사빈, 땅이 흔들린 거 아니?”

“예? 언제요?”

“네가 그믐에 나갔을 때. 미세하지만 바닥이 흔들렸어.”


사빈이 말없이 굳어있자 석보가 다가왔다.

“반갑게 인사하면 되는 걸 왜 그러나. 땅이 흔들린다니? 대명천에 지진이 말이 돼?”


“아니야. 위화님도 느꼈다고 했어.”

“위화님이나 자네나 너무 예민해. 설사 땅이 흔들렸다 쳐. 그렇게 요란하게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땅이··· 흔들렸다고?’

사빈이 뭐라 물어볼 틈도 주지 않고 목예와 석보가 다투듯 말을 주고받았다.


“석보, 아무래도 어리화 때문인 것 같아. 이번에는 위화님과 나만 느꼈지만, 다음에는 더 크게 흔들릴 거야.”

“바닥이 좀 흔들린다고 마음숲이 무너지지 않아.”


“무너지지야 않지. 하지만, 틈이 생기잖아? 한긋장벽에.”

목예의 말에 석보도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누구도 대답할 수 없었다.


“아, 그런데 사빈아, 어디 가는 길이니?”

목예가 팔을 흔들자 멈춰있던 사빈의 눈동자가 다시 움직였다.


“아나진이 사라져서요. 찾고 있어요.”

“아나진?”

목예는 아나진이 누구인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석보가 피식 웃었다.

“상생농장 좋아하는 그 혼? 농장 찾아가다가도 몇 번이나 길을 잃었잖아.”

“맞아요. 상생농장 좋아했어요.”


목예는 손을 까딱거렸다.

“그럼, 지금은 아나진을 찾아봐라. 얘기는 나중에 하자.”


“지금까지 할 얘기 다 해놓고 나중은 무슨. 할 얘기가 남았기나 해?”

“석보! 나와 다투자는 거야?”

목예가 고개를 치켜들었지만, 그녀의 눈높이는 석보의 어깨에도 닿지 못했다.


“아니, 그렇다는 거지. 자네랑 싸워서 이겨봐야 내 손해지.”

그 너털웃음을 지으며 앞장서 갔다.


*


상생농장은 아나진이 좋아하는 곳이었다.


사빈도 상생농장에서 아나진을 몇 번 보았다.

그때마다 그는 고랑을 따라 움푹 팬 곳에 누워 있었다. 풀처럼 눕고 풀처럼 일어서고 싶다고 했다.


‘며칠 동안 바람이 남서쪽에서 북동쪽으로 불었어. 정처 없이 걸었다면 바람이 떠미는 방향으로 갔을 거야.’

상생농장에서 북동쪽으로 올라가면 달해산이었다.


사빈이 농장 입구로 들어서자 논티가 뛰어나왔다. 그는 싱글벙글 웃으며 두 손을 비볐다.

“마고님, 장날에 내놓을 열매 보러오셨나유?”


“그건 나보다 구추님과 논티가 잘하는 걸. 혹시 아나진 못 봤어?”

“아나진요?”


논티는 이마를 긁적였다.

“아휴, 또 길을 잃었나 보네. 그렇게 공명이 약한 혼은 처음이라니께.”


논티가 잠깐 생각하더니 오른손 주먹으로 왼쪽 손바닥을 타닥 쳤다.

“오기는 했는디, 며칠 지났어유. 돌아간다고 해서 그런가 보다 했는디.”


“알았어. 내가 찾아볼게.”

날아오르려는데 논티가 사빈의 소매를 잡았다.


“마고님, 그라믄 지난번 것과 똑같이 내갈까유?”

“그래. 장날에 봐.”

사빈의 대답에도 논티는 아쉬운 듯 입을 삐죽거렸다. 농장의 작물을 자랑하고 싶은 것이다.


사빈은 사뿐히 내려섰다.

“아나진 찾으면 또 들를게. 뭐가 좋은지 같이 보자.”


“예, 예. 그래야지유. 마고님이 계셔야지유.”

사빈이 논티의 어깨를 툭툭 다독이자 그의 표정이 환하게 빛났다.


논티는 싱글거리며 곡괭이를 집어 들었다. 그의 휘파람을 뒤로 하고 사빈은 달해산을 향해 날아올랐다.


*


달해산 입구에 서서 사빈은 꼭대기로 오르는 여러 갈래 길을 훑어보았다.

‘어느 쪽으로 갔을까?’


하늘 끝까지 닿을 듯 한 산꼭대기를 보자 사빈은 산을 헤맬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다른 혼이라면 날아서 올랐을 테지만, 아나진은 아니다. 공명이 약한 혼은 제대로 날지 못한다.


‘아나진이라면 완만한 길로 걸어갔을 거야.’

사빈은 아나진이 찾기 쉽고, 오르기에 힘들지 않은 길을 찾아보았다.

나무가 빽빽한 곳도 아니고, 풀이 우거진 곳도 아닐 것이다.


사빈은 작은 짐승이 물을 마시러 다닐 법한 길을 찾아다녔다.


산길을 오르며 내려다보니 들판 너머 작은 회오리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새놀산 꼭대기가 조그맣게 보이는 서쪽 벌판이었다.


작은 회오리는 살아있는 병정처럼 이곳저곳을 휘돌았다.


‘대감이 정찰병을 만들었구나.’

백하가 만든 회오리는 상산대원들이 못 찾는 작은 구멍까지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상산대원들은 넓고 두꺼운 파장을 펼쳐 길 잃은 혼을 찾았다. 혼의 공명점만 알면 마음숲 어디에 숨어도 찾아낼 수 있다.


문제는 아나진처럼 공명이 약한 혼이었다. 상산대원들의 파장이 아무리 강해도 혼의 공명이 약하면 알아내기 어려웠다.


서쪽 벌판의 작은 회오리를 보고 있으니 사빈은 오소소 몸이 떨렸다. 그 회오리에 닿으면 얼마나 서늘한지···.


차가운 칼바람이 살을 스치고 지나가면 온몸이 얼어붙고 소름이 돋았다.

‘역시 빙천술의 대가다워. 어우, 생각만 해도 싸늘하네.’


사빈은 손을 엇갈려 양팔을 쓰다듬었다.

‘그걸 언제 보았더라?’


한긋장벽의 구름이 끓어오를 때였다. 사빈이 마고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


천계도 거대한 생명체처럼 살아있는 땅이었다. 두 번의 대혼란 동안 뒤집힌 중심은 여전히 굳지 않았다.


흔들리는 중심이 언제 굳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차원이 닫힐 때까지 지금 그대로일 수도 있다.


그렇게 불과 물과 흙이 서로 엉기고 뒤섞이며 끓어오르다가 공기와 바람을 만나면 솟아 나오기도 한다.


그날은 불의 기운이 마음숲 근처에서 끓어올랐다.

배웅문 근처의 한긋장벽이 부글거리며 뜨겁게 달구어졌다. 이윽고 거대한 구름 기둥이 솟아올랐다.


모로매 온천보다 몇 백 배 뜨거운 구름이 부풀어 오르자 상산대원과 도우미들은 배웅문 근처의 혼알방을 모두 깨웠다.


대부분 안전한 곳으로 옮겼지만, 미처 옮기지 못한 혼들이 열기에 녹아내렸다. 그 주변의 혼들은 공명력을 잃고 헤매다녔다.


백하와 상산대원들은 끓어오르는 장벽을 마주하고 섰다. 백하가 허공에서 얼음칼을 빼 들었다.


그가 구름을 향해 칼을 휘두르자 허공에 수천 개의 얼음조각이 생겨났다.

그것은 얼음화살이 되어 비처럼 열기를 향해 날아갔다. 다른 대원들도 수백 개씩 얼음화살을 만들어냈다.


첫 번째 화살비는 치이익 소리를 내며 녹아내렸지만, 백하가 얼음칼을 휘두를 때마다 구름의 열기는 가라앉았다.


‘대감, 구름을 얼려버릴까요!’

상산대원 하나가 소리쳤다.


‘아닐세. 얼음장벽이 되면 곧 녹아내려. 혼알방이 물에 잠길 걸세. 가라앉히자고.’


열기가 어느 정도 누그러지자 백하는 얼음칼을 돌려 작은 회오리를 만들었다. 수천 개의 회오리가 구름을 달래듯 장벽을 향해 들어갔다.


그때 사빈 옆으로 회오리 하나가 지나갔다.


살에 닿는 순간 몸이 얼어붙을 듯 서늘하고 두려웠다. 마치 상산대감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는 느낌이었다.


*


사빈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얼음칼을 빼내던 백하의 모습을 떠올렸다.

속을 꿰뚫어 볼 것 같은 연회색 눈동자를 생각하자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정말 모르세요? 상산대감이 누구를 좋아하는지?’

용희의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울렸다.


사빈은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풀숲만 우거지고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다시 산길로 걸음을 옮겼다.


‘완전히 얼음이었잖아? 사람도, 피천귀도 단숨에 얼려버리는데, 마음은 따뜻하네.’

이번에는 천사 담아의 목소리였다.

‘마음이 따뜻하다고! 어느 누구에게만 따뜻하다고!’


‘여하튼 이런 쪽에 쑥맥인 사람이 꼭 있다니까. 도와줘야 해.’

천사 가온이 옆에서 속삭이는 것 같았다.

‘사람뿐이냐? 대명천에도 하나 있잖아. 어떤 쑥맥이.’


여러 소리가 한데 섞여 귓가를 어지럽혔다. 사빈은 가슴이 울렁거려 걸음을 멈추었다.

온몸의 피가 빠르게 돌았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잘 생각해봐. 대감이 사빈님을 어떻게 대하는지.’

차미의 환영이 다가와 속삭였다.

‘상관없을 거야. 대감은 어디든 사빈님을 찾아갈 거야.’


사빈은 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눌렀다.

‘설마···, 정말 나를···.’


그녀는 풀숲 사이 바위에 걸터앉았다. 어지러워서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었다.

‘날 위해 일부러 대명천 붉은바다까지 간 거였어? 한요재에 다과를 준비한 것도 그래서?’


한요재에서 자신을 맞이하던 백하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고는 중요한 임무이니 자신을 소홀히 하면 안 되오. 기력이 없어서야 하겠소?’


사빈의 머릿속에서 얼음조각이 점점 녹아내리며 살아있는 상산대감 백하가 되었다. 하얀 살갗 아래로 붉고 뜨거운 피가 흐르는 중앙황천의 차사 백하의 모습으로.


사빈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천천히 내뱉었다.


한얼이 있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한얼을 볼 때는 따끔거린다면 백하를 생각하면 가슴 밑바닥이 뭉근히 데워지는 느낌이었다.


‘난···, 난 모르겠어···.’

가슴과 목 사이 어딘가가 콱 막힌 듯 답답했다. 알 것 같으면서도 끝내 알 수 없었다.


묵직한 무언가가 가슴과 배 사이를 누르는 것 같으면서도,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텅 빈 공간이 있는 것 같았다.


서쪽 들판 끝에서는 작은 회오리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또 다른 회오리를 만들었다. 풀잎 하나 건드리지 않고 저 혼자 돌면서 멈추었다가, 때로는 폭을 늘렸다 좁히기도 했다.


아나진에게만 반응하는 회오리였다. 아나진을 찾으면 그의 몸을 띄워 올릴 것이다.


사빈은 물끄러미 회오리 정찰병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일어섰다. 가슴이 뛰어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지금은. 아나진부터 찾자.’


씩씩하게 오르기 시작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주저앉았다. 배도 고프고, 다리도 뻐근했다. 기운이 빠르게 빠져나갔다.


달해산의 정기가 강해서인지, 마고의 천력이 부족해서인지 예전에 왔을 때보다 훨씬 힘들었다.


‘이러다 아나진을 찾기도 전에 쓰러지겠어.’

물이라도 마셔야 해. 옹달샘이 어디 있을 텐데.


사빈은 물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날아다닐 때와는 풍경이 다르지만, 몇 번 와본 곳이라 샘물을 쉽게 찾아냈다. 구불구불하고 키 작은 나무들. 억센 풀줄기와 깎아지른 바위가 이정표가 되었다.


샘물을 마시고 땀을 닦았다. 산들바람도 기다렸다는 듯 부드럽게 불어왔다.

바위에 앉아 지친 다리를 두드리는데, 가까운 풀숲에서 바스락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 커다란 것이 움직이는 소리였다.


“아나진?”

사빈이 소리쳤지만, 대답이 없었다.

소리의 주인은 아름드리나무 뒤로 돌아 으슥한 그늘로 사라졌다.


‘이렇게 쉽게 찾다니!’

사빈은 재빨리 바위 위로 날아올랐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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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90 천계_중앙황천 대차사들 23.07.21 42 2 11쪽
89 천계_한긋장벽을 따라 23.07.20 42 2 11쪽
88 천계_부르는 소리 23.07.19 42 2 10쪽
87 천계_마음이 가는 곳 23.07.18 44 2 11쪽
86 천계_영진촌 낭원 23.07.17 42 2 11쪽
85 천계_변경된 일정 23.07.16 41 2 14쪽
84 천계_백하의 고민 23.07.15 44 2 12쪽
83 천계_어리화는 짙어지고 23.07.14 41 2 13쪽
82 그믐_그리운 아버지 +2 23.07.13 44 2 14쪽
81 그믐_한 번뿐인 나들이 23.07.13 43 2 13쪽
80 그믐_새로운 일꾼 23.07.12 43 2 10쪽
79 그믐_거리의 소녀 23.07.11 44 2 12쪽
78 그믐_중간자의 사연 2 23.07.10 43 2 9쪽
77 그믐_중간자의 사연 1 23.07.10 44 2 11쪽
76 그믐_운기정 서재에서 23.07.09 46 2 11쪽
75 그믐_흉흉한 소문 23.07.08 44 2 12쪽
74 그믐_백홍선원 부운거사 23.07.07 49 2 11쪽
73 그믐_창성곡의 산적 23.07.06 52 2 13쪽
72 천계_온사랑 팔찌 23.07.05 50 2 13쪽
71 천계_회향미곡 잉걸둥지 23.07.04 51 2 13쪽
70 천계_이상한 편지 23.07.03 54 2 11쪽
69 천계_온천 물빛이 바뀌다 23.07.02 55 2 13쪽
68 천계_두 번째 구멍 23.07.01 55 2 13쪽
67 천계_피하지 못할 고백 23.06.30 58 2 10쪽
66 천계_뜻밖의 만남 23.06.29 58 2 14쪽
» 천계_다시 시작된 수색 23.06.28 59 2 12쪽
64 천계_천인의 기억법 23.06.27 61 2 12쪽
63 천계_인연이라는 끈 23.06.26 64 2 12쪽
62 천계_마음을 전하는 일 23.06.23 68 3 12쪽
61 그믐_옥구슬의 사연 23.06.22 68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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