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조회수 :
13,196
추천수 :
431
글자수 :
916,352

작성
23.07.10 09:10
조회
43
추천
2
글자
11쪽

그믐_중간자의 사연 1

DUMMY

선원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서재에서는 촛불이 타오르며 그을음도 길게 올라왔다.


부운거사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선대 마고인 아란까지 알고 있다니···.’


지금 나는 시간의 덫에 걸려 과거에 와있다.

예전에도 시간과 공간을 건너뛴 적이 몇 번 있지만, 이 사람만큼 천계를 잘 아는 수도자를 만나지 못했다.


백홍선원의 청지기와 일꾼들이 마음으로 믿고 따르니 수명환의 첫 번째 시험은 통과한 것이다.

‘천계의 기운을 읽을 줄 알아. 이 정도까지 수련했다면 알려줘도 괜찮지 않을까?’


“아란님은 선대 마고님이시죠. 전 아란님의 뒤를 이어 마고가 되었고요.”

“그럼···.”


“전 미래에서 왔어요. 반계에서 만든 시간의 덫에 걸렸지요.”

말을 마치자 부운거사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그래, 역시 믿기 힘들 거야.


시간의 덫.

얼마나 교묘하게 덫을 짰는지 꽃수 열쇠를 따라올 때 이상한 느낌이 전혀 없었다.


지난번 현재의 겹에 갇혔을 때는 덫인 줄 바로 알았는데. 이번에는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여느 때와 똑같이 눈을 뜨니 여기였다.


부운거사는 탁자 위의 물을 한 잔 따라 마셨다. 흙으로 구워 투박하지만, 정성이 깃들어 좋은 기운을 내고 있었다.


“시간의 덫이라···.”

그는 중얼거리다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마고는 그믐마다 수명환을 나눠주러 다닌다고 들었소. 내게 수명환을 주려는 거요?”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믐 외출은 제가 선택할 수 없어요. 오려고 온 것은 아니지만, 시간의 덫에도 걸렸고···. 인연이라면 인연이니.”


탁자 위에 팔을 걸치고 손을 흔들었다.

“원하지 않으면 강요하지 않아요. 간곡히 설득하겠지만요. 아주··· 간곡하게?”


이럴 때는 간절한 눈빛과 부드러운 미소가 중요하지. 나는 생긋 눈웃음을 지었다.


부운거사는 내게도 물을 한 잔 따라주었다. 맑은 물 덕분인지 정신이 맑아졌다.


물과 함께 숨을 돌리니 웃을 수 있는 여유도 찾았다.

“그동안 시험을 통과한 사람이 없었을 뿐, 수명환을 거부한 사람은 없거든요. 이번에는 어떨지 모르겠네요.”


“수명환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어떻게 중간자가 되었는지 알려주겠소? 중간자는 처음이라.”

부운거사는 소매를 가지런히 하고 의자에 똑바로 기대앉았다.


어디서부터 얘기를 시작할까 생각하는데 청지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거사님, 약 드실 시간입니다요.”


청지기가 가져온 쟁반에는 약사발과 작은 물병이 하나 놓여있었다. 오늘 마셔야 하는 네 번째 약이었다.


부운거사가 하루에 네 번 약을 마시는 건 이미 들었다. 청지기가 어찌나 강조하던지.


오늘 아침부터 장터를 오가는 동안에도 청지기는 백홍선원과 부운거사를 자랑하느라 숨을 몰아쉬었다. 자랑이 끝날 줄 몰랐다.


그 덕분에 백홍선원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니고, 부운거사의 인품이 어떤지 충분히 들었다.


“아가씨는 약차를 드시지요.”

내 앞에 물병을 내려놓을 때는 거칠게 탕 내려놓았다.


“고맙습니다.”

내가 눈웃음으로 답하자 청지기는 생글거리던 웃음을 딱 멈추었다.


“거사님은 쉬셔야 하는데···.”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내게 눈짓했다. 그만 물러나라는 뜻이겠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마고 사빈이 아니지. 그믐 외출은 하루하루가 소중해서 잠시도 놓칠 수가 없다고.


나는 부운거사가 약을 다 마실 때까지 기다렸다.

그에게는 아날빛숨의 샛바람물과 잔별차가 도움이 될 텐데. 갖고 올 수 없으니.


청지기가 나가고 나자 부운거사는 물을 따라 자신의 앞에 놓았다.

“중간자가 되기 어렵다고 들었소.”


“지금은 저와 다른 이, 둘이 중간자이지요.”

다른 중간자. 한얼이 떠오르자 또다시 가슴이 따끔거렸다.


“중간자가 마고가 되다니···. 마고는 선택받은 혼이 맡지 않소?”

“거사님, 마고에 대해 많이 아시네요?”


내 말에 부운거사는 입술에 힘을 주었다.

그는 한쪽 입술을 올리며 시선을 피했다. 무언가 숨기는 것 같았다.


“들은 이야기가 많아서···. 여러 스승을 모셨기 때문이오.”

천계를 어찌 그리 잘 아는지는 몰라도, 중간자에 대해 알고자 하는 그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때가 열여섯이었어요. 요마전쟁으로 땅의 모든 것이 죽어가고 있었지요. 숨이 끊어지려고 할 때, 다훤 아저씨가 물었어요. 할 일이 있다면 그 일을 하겠냐고요. 아니면 쉬고 싶냐고.”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천인의 기억방식이 그렇듯, 없던 일처럼 깨끗이 묻혀있다가 갑자기 눈앞에 펼쳐졌다.


*


들판의 모든 것이 불타고 있었다. 마을의 집과 논과 밭, 언덕의 나무와 풀들까지 불길이 지나간 자리마다 새까맣게 그을렸다.


나는 가슴에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어디서 날아온 화살인지, 사람이 만든 것인지, 진짜 화살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함께 도망치던 마을 사람들 모두 그 자리에 쓰러져 목숨을 잃었다.


어머니의 몸도 차갑게 굳어버렸다. 너무나 짧은 순간이라 신음도 내지 못했다.


비쩍 마른 나무를 타고 불기둥이 치솟았다. 타닥타닥 나무 타는 소리, 짐승들이 애처롭게 내지르는 울음, 날카로운 바람 소리만이 가득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중얼거렸다.

‘엄마, 하늘에서 다시 만나요.’


의식이 까마득한 나락으로 떨어지는데 누군가 내 손을 잡아당겼다.

“사빈아, 정신 차려라.”


그가 내 상처에 손을 얹자 통증이 멈추었다. 눈을 뜰 수 없어도 목소리는 귀에 익었다.


그때가 다훤 아저씨와의 세 번째 만남이었다.


“아저씨···.”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아저씨는 꼭 슬플 때만 오시네요.’

‘기쁠 때는 구태여 올 필요가 없지.’

확실히 다훤 아저씨가 오면 슬픔이 희미해졌다. 빛이 바래는 것처럼.


아저씨를 처음 만난 건 열한 살 때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장례식을 끝내고도 며칠 머물면서 춤 명인을 찾아주셨다. 아저씨 덕분에 나는 하은빛 선생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다.


그 후로도 생활은 어렵지 않았다. 선아 대천사님이 쌀과 옷감, 돈과 고기를 갖다주셨으니까.


너무나 아름다운 춤사위 때문이었을까. 시기하는 세력도 많았다. 관리와 손을 잡고 누명을 씌웠다.

선생님은 결국 감옥에 갇혔고, 습한 공기와 고문으로 걸을 수 없게 되었다.


선생님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다훤 아저씨가 찾아왔다. 그것이 두 번째 만남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불타는 전쟁터에서.

아저씨는 정말 슬플 때만 오시네. 이제는 다시 만날 일도 없겠구나.


나는 마지막 남은 숨을 모아 눈을 떴다. 말을 꺼내기도 힘들었다.

“아저씨···, 이번에도 위로하러 오셨어요?”


“아니다. 너에게 물어볼 것이 있다.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저씨도 참···, 저 이제 죽어요.”


“너에게 할 일이 있다면 남아서 그 일을 하고 싶으냐? 아니면 다른 혼들처럼 쉬고 싶으냐?”


다훤 아저씨의 손이 뜨거워지는가 싶더니 차가워졌다. 고통도 사라지고 숨쉬기 편해졌다.


“말해봐라. 하고 싶다면 할 수 있는 몸이 될 테고, 쉬고 싶다면 너의 혼도 삼도천을 건너 영천옥으로 갈 것이다.”


“할 일이 있다면 해야죠. 그 일 다 하고 쉴게요.”

“좋다.”

다훤 아저씨의 대답은 짧았다.


“누나! 눈꽃 누나!”

갑자기 꼬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난데없이.


“누나, 죽지 마요. 내가 힘을 나눠주겠다고 했어요.”

무대에 설 때마다 찾아오던 아이였다. 그때 열두 살쯤 되었을까.


처음 만났을 때는 여덟 살 꼬마라서 별사탕이라고 불렀는데, 제법 의젓해 보였다.


‘너한테 무슨 힘이 있다고.’

웃음이 나왔지만, 별사탕의 진지한 얼굴을 보니 웃을 수가 없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아득해졌다. 고통도, 숨도 멎은 것 같았다.

별사탕도, 다훤 아저씨도 사라졌다. 세상이 깜깜해졌다가 눈앞이 하얗게 빛났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어떤 할머니가 옆에 앉아있었다.

“할머니···?”


“할머니가 좋으냐? 그럼 할머니가 되어주마.”

예사달 할머니는 거친 손으로 내 이마를 쓸어주었다.


주름이 까끄러웠지만 따뜻해서 싫지 않았다. 할머니 냄새, 할머니의 목소리, 할머니의 손길. 모든 것이 좋았다.


“동녘뜰에 집을 짓고 살자. 네 이름을 따서 사빈재라고 짓자꾸나.”

할머니가 내 손을 토닥였다.


*


어떻게 중간자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그 방법은 다훤 아저씨만 아시겠지.

“예사달 할머니가 천선계와 우주에 대해 가르쳐주셨어요. 내가 중간자라는 것도 그때 알았고요.”


“다훤과 예사달.”

부운거사가 읊조렸다.


“혹 천사장의 가슴에서 솟아났다는?”

부운거사의 창백한 얼굴이 더 하얗게 바뀌었다. 핏기라고는 남아있지 않았다.


“네, 맞아요. 예사달 할머니는 중앙황제님의 눈에서 비롯되었고요. 우주를 너무 오래 떠돌아서 모습을 가질 때부터 할머니였대요. 후후.”

할머니와 아저씨를 생각하니 요마전쟁의 기억으로 괴롭던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부운거사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탁자를 바라보았다.

“인간세의 사람이 중간자가 되고, 다훤과 예사달과 함께 지낸다···.”


그는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놀랍소.”


“저도 놀랐어요. 제가 반인반천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도 많이 놀랐고요.”

“반인반천··· 이라면 부모 중에 누가 천사였소?”


부운거사가 아무리 수련을 오래 했어도 내 이야기를 들으면 엄청나게 놀랄 것이다.

“거사님은 천계에 대해 많이 알고 계시니, 대천사도 아시겠지요?”


나는 천천히 부운거사의 낯빛을 살폈다.


아버지의 이름을 듣고 놀랄 그의 모습을 상상하니 즐거웠다. 천사들과 차사들도 그 이름을 듣고 몹시 놀랐으니까.


내가 대천사 반열의 딸이라고 해도 놀라지 않은 천인은 상산대감 백하 뿐이었다.

그는 시종일관 중간자가 마고가 된 것을 몹시 불쾌해했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앉은 부운거사는 심성이 고우니 얼음대감과는 다를 것이다.


“제 아버지는 대천사 반열님이에요. 지금은 무결의 고리에 드셨지만.”

내 예상이 맞았다.


부운거사는 바윗돌처럼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린 것 같았다.

이럴 때는 충격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다른 천사나 차사들처럼.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아날빛숨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90 천계_중앙황천 대차사들 23.07.21 42 2 11쪽
89 천계_한긋장벽을 따라 23.07.20 42 2 11쪽
88 천계_부르는 소리 23.07.19 42 2 10쪽
87 천계_마음이 가는 곳 23.07.18 44 2 11쪽
86 천계_영진촌 낭원 23.07.17 42 2 11쪽
85 천계_변경된 일정 23.07.16 41 2 14쪽
84 천계_백하의 고민 23.07.15 44 2 12쪽
83 천계_어리화는 짙어지고 23.07.14 41 2 13쪽
82 그믐_그리운 아버지 +2 23.07.13 44 2 14쪽
81 그믐_한 번뿐인 나들이 23.07.13 43 2 13쪽
80 그믐_새로운 일꾼 23.07.12 43 2 10쪽
79 그믐_거리의 소녀 23.07.11 43 2 12쪽
78 그믐_중간자의 사연 2 23.07.10 43 2 9쪽
» 그믐_중간자의 사연 1 23.07.10 44 2 11쪽
76 그믐_운기정 서재에서 23.07.09 46 2 11쪽
75 그믐_흉흉한 소문 23.07.08 44 2 12쪽
74 그믐_백홍선원 부운거사 23.07.07 48 2 11쪽
73 그믐_창성곡의 산적 23.07.06 52 2 13쪽
72 천계_온사랑 팔찌 23.07.05 50 2 13쪽
71 천계_회향미곡 잉걸둥지 23.07.04 51 2 13쪽
70 천계_이상한 편지 23.07.03 54 2 11쪽
69 천계_온천 물빛이 바뀌다 23.07.02 55 2 13쪽
68 천계_두 번째 구멍 23.07.01 55 2 13쪽
67 천계_피하지 못할 고백 23.06.30 58 2 10쪽
66 천계_뜻밖의 만남 23.06.29 57 2 14쪽
65 천계_다시 시작된 수색 23.06.28 58 2 12쪽
64 천계_천인의 기억법 23.06.27 61 2 12쪽
63 천계_인연이라는 끈 23.06.26 64 2 12쪽
62 천계_마음을 전하는 일 23.06.23 68 3 12쪽
61 그믐_옥구슬의 사연 23.06.22 67 2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