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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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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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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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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
글자수 :
916,352

작성
23.07.07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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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그믐_백홍선원 부운거사

DUMMY

산 아래 경사진 땅에 여러 채의 집이 보였다.

작은 마을인 줄 알았는데, 모든 집이 한 담장 안에 들어선 선원이었다. 문 옆 기둥에 ‘백홍선원’이라고 쓰여 있었다.


선원의 불은 모두 꺼져, 짙은 어둠에 묻혀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둠 속의 집이 보이지 않으니 몸을 잔뜩 웅크리고 주변을 흘끔거렸다.


백홍선원은 대문도 담장도 낮아 안이 다 들여다보였다.

흙벽에 초가로 지붕을 이은 작은 집이 수십 채 늘어서 있었다.


집과 집 사이는 회랑이 길게 늘어서 비를 맞지 않고도 다닐 수 있었다. 흙집인데도 회랑에, 이 층 건물이라니, 이 시대로서는 상당한 기술이었다.


여인들이 입은 옷과 쓰는 말투는 내가 어릴 때와 비슷한데, 그때도 이렇게 좋은 집이 있었나?


넓은 정원과 마당을 보니 천인들의 집이 생각났다. 어디가 그렇다고 콕 집어낼 수는 없지만 북방흑천에 있는 다훤 아저씨의 별채와 비슷했다.


마고가 되기 전, 예사달 할머니를 따라 찾아간 적 있다. 소담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천사의 집은 역시 다르다고 느꼈는데, 그것과 비슷했다. 비록 아저씨는 별채에 머무는 날이 별로 없지만···.


“계십니까? 주인 계십니까?”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인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여기 사람이 사는 곳 맞아요? 혹시 귀신의 집이면···.”

여인들은 집을 보고도 두려워 떨었다.


“기다려보죠. 분명 사람이 사는 곳이에요.”

나는 애타는 마음으로 마당 안을 들여다보았다.


“다리가 너무 아파요.”

“너무 졸려요.”

아이들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산에서 내려오며 친해졌다고 아이답게 칭얼거렸다.


“계십니까? 여기 아픈 사람이 있어요. 문 좀 열어주세요!”

문을 두드리며 소리치는데 등 뒤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시오?”

흰 저고리에 검은색 허리띠를 두른 남자였다. 머리에 쓴 복건도 검은색이었다. 나이는 서른 가까이 되었을까.


그의 얼굴은 어둠 속에서도 빛이 날 정도였다. 서 있기만 해도 기가 눌렸다. 눈썹이며 코, 입술이 보통 사람과 달리 기품있으면서도 온화해 보였다.


“산적을 만났다가 도망쳐왔습니다. 도와주십시오.”

남자와 가까운 곳에 앉아있던 여인이 그의 발 앞에 엎드렸다.


“일단 들어가시지요.”

남자는 성큼성큼 내 앞을 지나치더니 잠긴 문을 열었다. 그가 지나갈 때 무언가 익숙한 향이 느껴졌다.


‘이건···, 선계의 향기?’

비록 남다른 기품이 있지만, 그는 선사가 아니었다. 천사는 더더욱 아니었다.


기둥에 쓰인 글자를 다시 보았다. ‘백홍선원’.


그래, 이때는 선사에게 배운 이들이 선원을 세우기도 했다. 그곳에서 수련도 하고, 아이들도 가르쳤다.

나도 어릴 때 그런 학당에 다닌 적 있다. 몇 달 못 다녔지만.


마당에는 일꾼들 몇이 나와 서성였다. 문 두드리는 소리에 나왔는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남자가 손짓하자 일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기다리니 그들은 졸린 눈을 비비며 물 주전자와 요깃거리를 날랐다.


마당에는 급한 대로 돗자리도 깔리고, 몸을 감쌀 모포도 쌓였다. 부엌에서는 찬밥을 데우고 반찬을 준비하느라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인들과 아이들은 들마루와 마당에 나눠 앉아 모포를 둘러 싸맸다.

나는 마당 한쪽에 서서 물끄러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들마루 끝에 걸터앉아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차를 따랐다.

“어쩌다 산적을 만났소?”


“한마이국에 큰 홍수가 났습니다. 집이고 밭이고 다 뒤집혔어요. 살길을 찾아다니다 그만···.”

나이 많은 여인이 대답했다.


마른 입술에 혀도 말라 소리가 갈라졌다. 남자가 차를 권하자 그녀는 찻잔을 받아들고 천천히 차를 마셨다.


“같은 고을에서 오셨소?”

“아니요. 동굴에서 처음 만났어요.”

이번에는 다른 여인이 대답했다.


‘한마이국···.’

내가 태어나 살던 곳은 한마삼국이었다.


한마국은 일국에서 칠국까지 연합으로 이루어진 나라였다. 홍수나 지진은 모르는 일인데···.

그렇다면, 지금은 내가 태어나기 전이나 요마전쟁이 끝난 다음일 것이다.


한마국은 요마전쟁 후 십 년을 채우지 못하고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런 사실도 마고가 되고 한참 후에 알았다. 그믐 외출에서 만난 어떤 학자에게 들었다. 유물도, 기록도 찾기 어렵다고.


바나가 내 치마를 잡아당겼다. 찢어진 치맛자락이 길게 늘어져 땅에 끌렸다.

“왕, 주인님. 왜 그러셔라?”

“신기해서. 사람인데 왠지 선사 같지 않아? 수련을 오래 했나 봐.”


“모르겠어라. 그냥 사람이어라.”

바나는 그 말을 남기고 부엌을 향해 비틀거리며 걸었다. 한쪽 다리를 절뚝거렸다.


‘왜 저러지? 어디 다쳤나?’

그 이유는 금방 드러났다. 괜히 바나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조그만 강아지가 문지방에서 절뚝거리며 낑낑대자 찬모가 혀를 끌끌 찼다.

“에구, 불쌍한 것, 다리를 다쳤구나.”


찬모는 누룽지를 내밀었다. 바나는 냉큼 누룽지를 받아 물고 기둥 옆에 엎드렸다.


‘허! 사람의 혼을 상대하더니 잔꾀만 늘었어.’

저 정도면 혼자 다녀도 거뜬하겠네.


다른 일꾼이 귀엽다며 식은 감자를 던져주자 바나는 그것도 덥석 받아 물었다.


선원의 일꾼들이 강당을 치우는 사이, 도망쳐온 이들은 주린 배를 채웠다.

모두 잠에 들자 일꾼들도 모자란 잠을 채우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


*


벌써 날이 밝고 있었다. 그믐 외출의 하루가 훅 지나갔다.

‘쉴 곳도 찾아주었으니, 이만 가볼까.’


나는 마당을 돌아 넓은 정원으로 들어섰다. 강당 건물 뒤로 마련된 숨은 정원이었다.

‘잠깐 정원만 구경하고.’


아기자기한 정원이 발길을 잡아끌었다. 사시사철 꽃을 볼 수 있도록 수목의 종류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아직 이른 봄이라 바람이 차기는 해도 매화가 피어있어 눈길을 사로잡았다.

여린 햇살이 비추자 이파리에 맺힌 이슬이 반짝거렸다.


‘신기하네. 이런 정원을 가꾸는 사람이 있다니.’

그때는 정말이지 먹고 살기도 어려운 시절이었다.


대천사 선아님이 갖다주신 쌀과 옷감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주고 죽을 끓여 먹던 때가 생각났다.


지금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배고프다고 말도 못 하고.

‘그래도 어머니가 계셔서 다행이었어.’


“혹시···, 천사님이오?”

인간세에서 천사 소리를 듣다니. 흠칫 놀라 돌아보았다.


문을 열어준 남자가 천천히 걸어왔다. 한 걸음 한 걸음 물새가 떠가듯 우아한 움직임이었다.


“보통 사람과 다른 기운이 보이는군.”

“천사를 알아보세요?”

내가 의아해하자 남자는 매화나무를 사이에 두고 멈춰 섰다.


“천선계의 도를 배우고, 하늘의 길을 읽으며 수련하고 있다오. 그대는 참으로 신묘한 기운을 품고 있구려.”

남자는 긴 소매 아래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부운거사라 하오.”

“사빈이에요. 천사는 아니고, 사람에 가까워요.”

나도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허리를 올리며 그의 다리에서 허리, 가슴으로 시선이 움직였다. 일어나다 말고 잠깐 멈추었다.

‘이 사람···, 수명이 얼마 안 남았어.’


오래 수련한 덕에 버티는 거야,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야. 아니, 이미 죽어야 했는지도.


“사빈···. 좋은 이름이오.”

그는 애써 웃었으나 그 웃음이 왠지 슬퍼 보였다. 그 역시 계속 나의 기운을 읽고 있었다.


그렇게 기운을 읽다가는 남은 기운마저 바닥나겠네. 어서 사실대로 말해줘야지.

“중간자라서 사람도 아니고, 천인도 아니에요.”


“중간자가 진짜 있다니. 말은 들어봤어도 처음 보는구려.”

남자는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단아하고 우아하지만, 어딘가 맥이 풀렸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여기서 쉬다 가시오.”

“말씀 고맙습니다.”

아직 계획이 없으니 초대를 받아들일 수도, 거절할 수도 없었다.


지난 그믐에는 파라다이스 빌라에서 쉬었는데, 이번에는 과거의 백홍선원에서 쉰다고?

겉으로는 웃음 지었지만, 속으로는 한숨이 쌓여갔다.

‘다음 마고는! 수명환은!’


“왈, 주인님, 여기 재미없어라.”

바나가 바닥에 코를 킁킁대며 다가왔다.


“방이 정리되었는지 가보겠소.”

부운거사는 무릎을 구부려 바나를 쓰다듬고는 정원을 돌아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니 구멍이 숭숭 뚫린 나무 인형 같았다. 겉모습은 정성스럽게 다듬어 수려하지만, 속이 텅 빈 인형.


“왕왕, 주인님, 재미없다고라. 같이 놀아주는 사람도 없어라. 다른 데로 가시어라.”

“다른 곳 어디? 어디로 갈지 나도 몰라.”


나는 매화나무에 기대앉았다.


*


밤을 꼬박 새웠으니 아침이 되어도 정신이 몽롱했다. 인간세의 공기는 과거나 현재나 무겁기 그지없었다.


“이러다가 수명환 쓰는 법도 잊어버리겠네.”

머리를 나무에 기대고 눈을 감았다. 몸이 노곤하니 하루 내내 잘 수 있을 정도였다.


“수명환요? 왈왈.”

바나는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내 주위를 서성거렸다.


“왕, 아까 그 사람에게 주셔라. 그 사람 무지 아프다더라.”

“과거에서 수명환을 주는 건 까다로워. 현재가 완성되어 있잖아? 마고가 끼어들 수 있는지, 수명환을 줘도 문제가 없는지 잘 살펴야 해.”


바나는 목을 갸르릉거렸다.

“헤에, 산적도 아무 일 없었지라? 왈.”


그래. 천사가 지나갔지.

“천사가 다녀갔다면 그것이 맞는 일이긴 해. 저 사람도 그럴까?”


서성이던 바나가 찢어진 치맛자락에 배를 깔고 누웠다.

“왈, 내가 들었지라. 거사님 몸이 안 좋다고라, 잘 챙기라고라. 일꾼들도 무지 걱정하여라.”


한참 얘기하더니 바나는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머리를 땅에 대는가 싶더니 기다릴 틈도 없이 새근새근 잠에 빠졌다.


피곤하기도 하겠지. 변신술에, 싸움에, 안 쓰던 천력을 쓰느라 녹초가 되었을 것이다.

백하와 한얼 정도의 천력이라면 받아쓰는 것도 벅찰 것이다.


바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매화 나뭇가지를 올려다보았다. 올망졸망한 꽃잎이 햇살을 받아 맑고 투명하게 보였다.


“어쩌면 부운거사가 그 사람일 수도···.”

수명환을 줄 사람이 있으니까 꽃수 열쇠가 여기로 왔겠지.


‘그래도 그냥 얹혀 지낼 수는 없어. 여긴 문 닫은 사당도, 빈방도 아니잖아?’

나는 주머니에서 팔찌를 꺼냈다. 가온에게 주려고 만든 팔찌.


가온을 위해 이름도 온사랑이라 지었지만, 이렇게 시간과 공간의 덫에 걸리다가는 언제 만날지 모를 일이다.

‘다음에, 다시 만들면 되지.’


“어차피 못 주는 거···, 며칠 묵는 삯으로 써야겠다.”

부운거사를 지켜봐야겠어. 수명환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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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천계_중앙황천 대차사들 23.07.21 42 2 11쪽
89 천계_한긋장벽을 따라 23.07.20 42 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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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천계_마음이 가는 곳 23.07.18 44 2 11쪽
86 천계_영진촌 낭원 23.07.17 42 2 11쪽
85 천계_변경된 일정 23.07.16 41 2 14쪽
84 천계_백하의 고민 23.07.15 44 2 12쪽
83 천계_어리화는 짙어지고 23.07.14 41 2 13쪽
82 그믐_그리운 아버지 +2 23.07.13 44 2 14쪽
81 그믐_한 번뿐인 나들이 23.07.13 43 2 13쪽
80 그믐_새로운 일꾼 23.07.12 43 2 10쪽
79 그믐_거리의 소녀 23.07.11 43 2 12쪽
78 그믐_중간자의 사연 2 23.07.10 43 2 9쪽
77 그믐_중간자의 사연 1 23.07.10 44 2 11쪽
76 그믐_운기정 서재에서 23.07.09 46 2 11쪽
75 그믐_흉흉한 소문 23.07.08 44 2 12쪽
» 그믐_백홍선원 부운거사 23.07.07 49 2 11쪽
73 그믐_창성곡의 산적 23.07.06 52 2 13쪽
72 천계_온사랑 팔찌 23.07.05 50 2 13쪽
71 천계_회향미곡 잉걸둥지 23.07.04 51 2 13쪽
70 천계_이상한 편지 23.07.03 54 2 11쪽
69 천계_온천 물빛이 바뀌다 23.07.02 55 2 13쪽
68 천계_두 번째 구멍 23.07.01 55 2 13쪽
67 천계_피하지 못할 고백 23.06.30 58 2 10쪽
66 천계_뜻밖의 만남 23.06.29 58 2 14쪽
65 천계_다시 시작된 수색 23.06.28 58 2 12쪽
64 천계_천인의 기억법 23.06.27 61 2 12쪽
63 천계_인연이라는 끈 23.06.26 64 2 12쪽
62 천계_마음을 전하는 일 23.06.23 68 3 12쪽
61 그믐_옥구슬의 사연 23.06.22 67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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