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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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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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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916,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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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2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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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12쪽

그믐_옥구슬의 사연

DUMMY

바람을 부르듯, 숨을 쉬듯 옥구슬의 구름무늬가 꿈틀거렸다.

“천사가 만든 거 맞아. 이건 치유의 돌 조각이야.”


가온은 손바닥의 옥구슬을 쓰다듬었다.

“엄마가 아기를 위해 만들었대. 아기의 목에 걸려있었다는데? 어쩌다 길을 헤맬까?”


“천계의 물건이 주인을 잃고 떠돌다니···. 사람들이 못 알아봐서 다행이다.”

“그러게.”

가온도 안타까운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천계의 물건이라도 천인이 쓰지 않으면 힘을 내지 못한다. 그러나 천인이 사용한다면 인간세의 것이라도 특별한 힘을 갖는다.


옥구슬의 빛이 멈추었다. 잠든 것처럼 구름도 움직이지 않았다.


“천사의 아기를 위한 거라고? 그럼 그 아기도 천사겠지.”

물끄러미 구슬을 바라보자 가온이 내 손에 구슬을 건네주었다.


천사는 천사의 알에서도 태어나지만, 아주 드물게 북방흑천 천인들의 결합으로 태어나기도 한다. 그만큼 아기 천사는 아주 귀한 존재였다.


손가락 끝이 움찔거렸다. 가만, 이 기운···. 어디서 느꼈는데?

‘어디였더라···?’


나는 눈을 감고 오로지 구슬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심연에 가라앉은 기억을 빠르게 걷어 내며 옥구슬과 비슷한 신호를 찾아냈다.


‘너나들이?’

얄리장터에서 스치듯 느꼈던 기운이었다. 너나들이 모임의 천막에서 흐르던 기운.


“이거, 너나들이에게서 나오던 기운이야. 마음숲에 오는 반인반천들.”

“그래? 아기가 반인반천이었다면 이해된다.”


“얄리장터 천막에서 이것과 비슷한 공명을 느꼈어.”

“그럼, 이건 네가 맡아. 다음 장이 열리면 찾아봐. 주인을 찾아주면 구슬도 좋아할 거야.”


“꼭 찾아줘야지.”

옥구슬을 주머니에 넣으려는데 가온이 내 팔을 잡았다.


“잠깐! 그래도 세상에 공짜는 없어.”

“그럼?”


“너나들이라며? 그들은 여기서도 사업을 하거든. 누군지 몰라도 아직 인간세에 살고 있으면 달숲에 와서 값을 치르라고 해. 나도 장사해야지.”

“역시···.”


가온다운 말이었다. 어쩌면 이렇게나 인간세에 적응을 잘하는지. 누가 봐도 진짜 사람이라고 느낄 것이다.

‘설마···, 원래 사람이었나?’


가온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동쪽 하늘이 밝아지며 별이 희미해졌다.

“오늘도 허탕이구나.”


가온은 빈 배낭을 흔들었다.

“비슷한 옥이 신성한 땅에서도 나는 것 같던데···.”


“신성한 땅? 인간세에 있는 것?”

“맞아. 어떤 사기꾼이 그 땅을 야금야금 사들였다고. 몇 번이나 이름을 바꿔가면서.”


은서가 말한 그 반인반천인가 보다.

나는 가온 옆에 바짝 붙어서서 다음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담아가 그랬어. 그자가 마음숲에서도 사기를 친다고. 너도 조심해.”

“뭐? 마음숲에서?”


“혼들을 속이고 다닌다잖아. 마음숲 혼들이 소곤대는 걸 간신히 알아들었대. 상산대도 모르게 다닌다니 심상치 않아.”


가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마음숲 결계를 뚫고 들어가지? 너나들이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길로만 다니잖아?”


그녀가 말하는 사기꾼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나는 가온의 뒤를 따르며 어지러운 생각을 붙잡으려 애썼다.

‘김치국이··· 단가람?’


마음숲의 혼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어떤 천인이 선견자라면서 그랬거든요. 저는 여기 오래 머물 거라고요.’


‘그 사람 목덜미에 문신이 있어요. 동그라미 세 개가 연결된. 자기는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을 모두 읽는대요. 혼알방의 기운을 나눠주면 순서를 바꿔준다고 했어요.’


얄리장터 열림날, 너나들이 부단장도 알려주었다.


‘인간세는 뒷배경이 중요하지요. 돈도, 인맥도 없으면 누명을 쓰기 쉽죠. 죄를 뒤집어쓰고··· 억울한 일이 한둘이 아니죠.’


‘그에게 좋은 스승이 있었다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 겁니다.’


단가람이라면 오래전에 본 적 있다.

잠깐 봤지만, 반인반천이니 조금도 늙지 않았을 것이다. 겉모습은 사십 대 중후반이겠지.


은서가 보여준 사진에는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있어 얼굴이 안 보였지만, 아직 그대로일 것이다.

‘인간세에서도 죄를 짓고 다닌다고? 그래도 거의 수명이 다했을 거야···.’


단가람을 찾아 응징하려던 마음이 희미해졌다. 만나면 설화옥으로 보내겠다고 이를 갈았는데.


은서가 조사한 김치국이 정말 단가람이라면 그 역시 내가 도와야 할 혼이었다. 사람의 혼처럼, 반인반천의 혼도 아낌을 받아야 하니까.


“사빈, 너 내일 아침에 돌아간다고?”

“아마도?”


“그럼, 오늘은 가게 문 닫고 하루 종일 놀고 마시자. 보름달을 걸어놓고 배도 띄우고.”

가온은 즐거운지 어깨를 들썩거렸다.


천사 가온이 만드는 환상의 공간이라면 기대할 만하다. 엉뚱한 장난도 잘 치지만, 그만큼 멋진 장치도 잘 만드니까.


*


소품샵 ‘달숲의 작은 천사’는 드넓은 호수가 되었다.


수평선 위로 구름이 낮게 깔리고 검푸른 하늘에 은빛 달이 휘영청 빛을 뿜었다. 보름달은 천장을 뒤덮을 만큼 크고 밝았다.


우리가 앉은 자리는 아늑한 쿠션이 깔린 뗏목이었다.

바람도 살랑거리며 뗏목을 기분 좋게 흔들어주었다. 물결이 찰랑이는 소리도 은은하게 들렸다.


진열대는 섬과 바위가 되었고, 달숲의 물건은 꽃과 새가 되었다.

벽 선반에 놓인 요정 조각들이 바위섬을 장식했다. 요정에게 둘러싸인 커다란 유리공도 함께.


처음 달숲에 들어왔을 때도 요정과 유리공에 자꾸 눈길이 갔다.

유리공 안에는 작은 궁전이 들어있는데 아주 독특한 기운을 뿜어냈다. 아련하면서도 구슬픈 느낌.


자세히 보니 지새늬가 쓰던 것과 비슷했다.

그건 바우가 만들었다고 했는데. 저것도 해밀의 차원에서 만든 것일까.


그럼, 저 안에 피천귀가 붙잡혀 있나?

‘피천귀의 기운은 아닌데···.’

무엇이 들어있기에 오묘한 기운을 뿜어내지?


“저건 뭐야?”

“해밀의 차원 문지기가 준 선물. 바우의 어머니가 그쪽 문지기거든.”

“안에 누가 들어있지? 네가 아끼는 거야?”


“응. 부활을 기다리는 선인의 혼이야. 영혼수집가에게 먹혔었는데, 꺼내왔어.”

가온의 눈빛이 아득해지는 것을 보니 굉장히 중요한 혼인가 보다.


“선인의 혼도 묶여있다니···. 인간세에 묶인 혼이 많을까?”

“많지는 않아도 찾아보면 꽤 있을 거야. 명부전에 기록되지 않은 혼도 있다니까.”


가온은 허공에 떠 있는 술병을 건드렸다. 술병이 기울어지며 잔에 술을 채웠다.


바람이 뺨을 간질이며 지나갔다. 나도 빈 잔에 술을 채웠다.

“길 잃은 혼도 많겠지만···. 바림창고에 유물을 남기지 않았으면 마고도 알 수 없어.”


“살아있으면서도 스스로를 놓아버린 혼도 있고, 죽었어도 떠나지 못한 이귀도 있고.”

가온이 어깨를 기울이자 뗏목이 출렁였다.


“이귀는 자신이 천사를 기다린다는 걸 알지만, 인간세에는 천사가 모르는 곳도 있거든.”


그래. 불천수 대나무숲에 살던 예슬처럼. 혼이 길을 잃으면 마물에게 먹히기 쉽다고 했다.

나는 예슬이 만든 향낭을 만지작거렸다. 라온향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가온이 몸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뗏목이 심하게 출렁거리며 물소리가 거칠어졌다.


“뭘 그리 고민해?”

가온이 뗏목 바깥으로 손을 내밀어 손가락에 물을 묻혔다. 내 얼굴에 물방울을 털어내며 싱긋 웃었다.


“인간세의 사람은 중앙황천에서 돌보는 혼과 달라. 혼은 사람을 태어나게 하지만, 일단 사람이 되면 그 혼과는 전혀 다른 존재야. 마고가 걱정해도 어쩔 수 없어.”


“그냥···. 틈에 낀 존재를 도울 수 있을까 하고. 실증계와 상상계 사이에 낀 혼도 그렇고, 천선계와 인간세 사이에 낀 혼도 그렇고.”


달숲의 작은 천사는 길 잃은 물건과 마음을 잃은 사람 찾아 이어주는데, 묶인 혼은 누가 풀어줄까.


모든 경계에 무언가가 끼어든다면 차원의 틈에도 어떤 것이 끼어 있을 것이다.

내가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 낀 중간자인 것처럼.


바위 위 요정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았다. 바람 때문인가.

“저 요정 조각이 선인의 혼을 지키는 거야?”

“응. 나빌라 요정이라고. 선인이 살아있을 때 아끼는 요정들이었어. 그가 조각을 만들었어.”


“그럼 반드시 깨어날 거야. 나도 인형 덕분에 너를 찾았으니까.”

가슴에 품고 있던 아리 인형을 꺼내 보여주었다.


인형을 보자 가온은 새된 소리로 깔깔 웃었다.

“아하하, 이거 담아한테 판 건데! 어떻게 너한테 갔지?”

“이게 파라다이스 빌라로 이끌어줄 거라고 했어.”


“그래? 너한테는 다른 아리 인형을 줄게. 마고 사빈을 위해 특별히 만든 것으로.”

가온이 손목을 돌려 손바닥을 위로 펼쳤다.


그녀의 손바닥에 작고 노란 병아리 인형이 나타났다. 담아가 준 아리 인형에 비하면 반도 되지 않을 만큼 작았다.


크기는 작아도 인형의 눈에서 나오는 기운은 몇 배나 강렬했다.


그 기운은 검은 눈에서 나왔다. 담아의 인형은 검은 실로 눈을 표시했는데, 작은 아리 인형에는 검은 구슬이 박혀있었다.


“이 눈동자 신기하네?”

나는 아리 인형의 눈을 쓰다듬었다. 매끈한 검은 돌에서 선계의 기운이 스며 나왔다.


“하륜님이 준 거야. 선계의 중산에서 가져온 한빛돌이야. 네가 길을 잃으면 알려줄 거야.”

“이렇게 귀한 걸 나한테?”


한빛돌은 선계의 중산에서만 나는 돌이었다.

길을 헤맬 때 반딧불처럼 길을 밝혀준다고 해서 한빛돌이었다. 실제로 빛을 내는 것은 아니고 내면의 눈으로 보는 빛이었다.


“나도 하나 있어.”

가온은 자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보여주었다. 그녀의 것은 물방울처럼 매끈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가시버시날 너한테 주려고 했는데, 쪼개졌지 뭐야. 할 수 없이 눈 두 개로 붙였어.”

“가시버시날 오려고?”


“갈 수는 없어도 선물을 보내려고 했어. 그날은 부부와 연인을 위한 날이기도 하지만 친구를 위한 날이기도 하니까.”

“고마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가온과 담아 같은 천사를 친구로 두다니 얼마나 운이 좋은가.


“어우, 닭살!”

가온이 몸서리치며 손을 엇갈려 팔뚝을 쓰다듬었다.


나는 큰 아리 인형은 가온에게 건네고, 작은 아리 인형을 노리개에 달았다.


허리띠 왼쪽과 오른쪽으로 노리개가 하나씩 달렸다. 향낭과 아리 인형이 한쪽에 달렸고, 다른 하나는 꽃수 열쇠와 수명환을 넣는 옥함의 자리였다.


“균형이 잘 맞네!”

가온이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나는 찔끔 눈에 맺힌 눈물을 닦고 아리 인형을 내려다보았다.

‘다음에도 달숲의 작은 천사를 찾게 해주겠지?’


우리는 술잔을 기울이며 달빛을 떼어 잔에 담았다.

흔들리는 뗏목, 출렁이는 물결, 유유히 흐르는 구름, 검푸른 하늘에 휘영청 걸린 달. 지나온 이야기를 나누기에 더없이 좋은 풍경이었다.


달빛에 취하고 술향기에 취해 진하게 술을 마신 것까지는 좋았는데···.


깨어나니 아롱재였다. 바나도 침대 아래 엎드려 곤히 잠들어 있었다.

‘어흑, 인사도 못 하고 돌아오다니···.’


그래도 이번 그믐은 휴가 같았다. 진짜 휴가.

‘너무 즐거웠어. 단서 하나 못 찾았지만···.’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마음은 날아갈 것처럼 가벼웠다.


천사와 선사, 정령의 후손에 해밀의 차원에서 건너온 문지기까지 나를 도와준다잖아. 상상계에서 넘어온 용병도 내 편인데, 다음 마고 하나 못 찾겠어?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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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천계_중앙황천 대차사들 23.07.21 42 2 11쪽
89 천계_한긋장벽을 따라 23.07.20 42 2 11쪽
88 천계_부르는 소리 23.07.19 42 2 10쪽
87 천계_마음이 가는 곳 23.07.18 44 2 11쪽
86 천계_영진촌 낭원 23.07.17 42 2 11쪽
85 천계_변경된 일정 23.07.16 41 2 14쪽
84 천계_백하의 고민 23.07.15 44 2 12쪽
83 천계_어리화는 짙어지고 23.07.14 41 2 13쪽
82 그믐_그리운 아버지 +2 23.07.13 44 2 14쪽
81 그믐_한 번뿐인 나들이 23.07.13 43 2 13쪽
80 그믐_새로운 일꾼 23.07.12 43 2 10쪽
79 그믐_거리의 소녀 23.07.11 43 2 12쪽
78 그믐_중간자의 사연 2 23.07.10 43 2 9쪽
77 그믐_중간자의 사연 1 23.07.10 44 2 11쪽
76 그믐_운기정 서재에서 23.07.09 46 2 11쪽
75 그믐_흉흉한 소문 23.07.08 44 2 12쪽
74 그믐_백홍선원 부운거사 23.07.07 49 2 11쪽
73 그믐_창성곡의 산적 23.07.06 52 2 13쪽
72 천계_온사랑 팔찌 23.07.05 50 2 13쪽
71 천계_회향미곡 잉걸둥지 23.07.04 51 2 13쪽
70 천계_이상한 편지 23.07.03 54 2 11쪽
69 천계_온천 물빛이 바뀌다 23.07.02 55 2 13쪽
68 천계_두 번째 구멍 23.07.01 55 2 13쪽
67 천계_피하지 못할 고백 23.06.30 58 2 10쪽
66 천계_뜻밖의 만남 23.06.29 58 2 14쪽
65 천계_다시 시작된 수색 23.06.28 58 2 12쪽
64 천계_천인의 기억법 23.06.27 61 2 12쪽
63 천계_인연이라는 끈 23.06.26 64 2 12쪽
62 천계_마음을 전하는 일 23.06.23 68 3 12쪽
» 그믐_옥구슬의 사연 23.06.22 68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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