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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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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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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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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
글자수 :
916,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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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0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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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9쪽

그믐_중간자의 사연 2

DUMMY

창성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선원을 감싸고 지나갔다. 바람소리가 노랫가락처럼 아련했다.

이렇게 그믐 외출 둘째 날이 지나가는구나.


‘그래도 여긴 수명환을 줄 사람이 있어. 그럼 된 거야. 다른 건 또 기회가 오겠지.’

나는 물 한 모금을 삼키고 서재를 둘러보았다.


익숙해지자 서재도 처음보다 아늑해 보였다.

책장에 놓인 책도, 두루마리도 모두 어릴 적 그리운 시간을 담고 있었다.


부운거사도 처음과는 달라 보였다.


세상을 초월한 듯하면서도 엄격해 보였는데, 지금은 부드럽고 온화해 보였다. 낯빛은 여전히 병색이 짙었지만, 긴장이 풀어지니 그마저도 익숙해졌다.


그도 물 한 모금으로 마른 입술을 적셨다.

“아버지가 천사인 걸 정말 몰랐소?”


“전혀요. 어머니도 모르셨어요.”

당연하지. 알면 어떻게 어머니가 혼인까지 했겠나.


하지만 나는 조곤조곤 대답했다. 아픈 사람의 심기를 최대한 건드리지 않도록.


“아버지는 공부만 아는 글방 선생님이셨거든요. 책을 좋아하셨어요. 가끔 마을 사람들을 치료해주고, 동네 아이들한테 글자랑 셈법도 가르치셨어요. 작지만 논과 밭도 일구고, 그때 정말 행복했어요.”


잊고 있던 어머니의 모습이 서서히 또렷해졌다.


사는 동안 내내 아버지를 그리워하셨다. 아버지를 사랑하고, 고마워하고, 그리워하던 어머니.

“아버지를 무척···, 아주 많이 사랑하셨고요.”


“아버님은···, 어쩌다 돌아가셨소?”

부운거사는 담담하게 물었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전쟁터에서 돌아가신 줄 알았는데···.”

갑자기 울컥해졌다.


“다훤 아저씨가 전해주셨어요. 남은 것은 아버지의 신발뿐이라고.”


완전히 잊은 줄 알았던 기억이 하나씩 떠올랐다.

양파 껍질을 까듯 하나를 생각하면 하나가 또 나타났다. 하나에서 둘, 둘에서 넷으로 기억이 이어졌다.


그 신발은 어머니가 한 땀씩 꿰매어 만든 것이었다.


부드러운 천을 덧대고 바깥 천과 촘촘히 맞대어 꿰매 한눈에 누구의 솜씨인지 알 수 있었다. 젊을 때 무희였다고는 믿지 못할 실력이었다.


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나고도 어머니의 통곡은 끝나지 않았다.

울음에 지쳐 기력이 떨어지면 소리죽여 흐느꼈다. 날이 갈수록 말이 적어지고 눈빛도 흐려졌다.


선아 대천사님이 찾아와서 달래주지 않았다면 헤어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는 선아 아주머니였다.


아버지의 먼 친척으로, 장사를 잘하는 굉장한 부자라고 했다. 덕분에 어머니와 나는 굶지 않고, 따뜻하게 지낼 수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진짜 이유는 천계에 와서 알았다.


“사람이 일으킨 전쟁 때문이 아니었어요. 사람들을 위해 피천귀들과 맞선 거예요. 천사들이 찾아갔을 때는 너무 늦었다고···.”


갑자기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다. 그칠 줄 모르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부운거사가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지만, 나도 내 눈물에 놀랐다. 목이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 왜 이러지? 괜찮아, 아버지는 무결의 고리에 든 거야. 선아님도 그러셨잖아. 헛된 소멸이 아니었다고.’


얄리장터에서 선아 대천사가 말씀하셨잖아.

‘반열님이 지키신 종족이 인간세를 지탱하고 있어. 그런 이들이 있으니 인간세는 살아남을 거야. 헛된 소멸이 아니란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에요. 나는 아버지를 볼 수 없는데···.’


이제는 아버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

중간자가 되면서 인간세의 일도 거의 지워졌다. 어머니나 선생님 얼굴만 간신히 기억한다.


“아버지와 오래도록 같이 지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도 다른 사람처럼 살다가 영천옥으로 갔겠지요?”

그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부운거사가 하얀 천 조각을 내밀었다. 눈물을 닦아줄 듯 손을 내밀다가 손수건만 내려놓았다.


코를 훌쩍거리며 눈물을 닦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거사님, 주무실 시간이 한참 지났습니다요. 내일 못 일어나십니다.”

청지기였다. 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으니 걱정되어 찾아왔나 보다.


“알겠네. 손님과 할 이야기가 있으니 자네 먼저 쉬게.”

“거사님···.”

청지기가 애원하듯 간절한 목소리로 부운거사를 불렀다.


“자네는 그만 가보게.”

부운거사가 단호하게 말하자 청지기도 돌아섰다.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만 누워야겠소. 내 몸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오.”


그의 기운이 몹시 흔들렸다. 처음보다 더 많이 쪼개진 느낌. 곧 가루가 돼서 부서질 것 같았다.


일어나려다 말고 그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빈이라 하였소? 그대와 어머니는 어떻게 지냈소?”


천계에만 관심이 많은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도 관심이 많구나. 저런 호기심이 그를 지금의 경지까지 끌어올렸겠지.


“사는 건 힘들지 않았어요. 선아 대천사님, 아, 그때는 선아 아주머니였죠. 가끔 찾아오셨거든요. 어머니도 보살펴주셨고, 필요한 건 다 갖다주셨어요.”


부운거사는 힘없이 웃었다.


“아버지와 살던 곳은 생각나지 않아요. 다훤 아저씨가 새로 구해준 집은 평온리였어요.”

하나씩 추억이 되살아나자 생각을 멈추기 싫었다.


지금이 아니면 이 기억은 다시 저 밑바닥으로 가라앉고 여간해서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조금 더 기억을 붙잡고 싶었다.


가족이 함께 살던 작은 집 마당이 기억났다.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그 밤 모닥불을 피우고 둘러앉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보였다. 아버지의 얼굴도 보일 듯하다가 흐려졌다.


장작 몇 개가 전부였지만 불은 따뜻하게 몸을 녹여주었다.

모닥불 주변을 돌며 어머니는 춤을 추었다. 하늘을 날아오를 듯 가볍고 우아하게, 한 마리 나비처럼.


“어머니는 바느질도 잘하셨지만, 춤도 잘 추셨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안 추셨지만.”


어머니의 아름다운 춤사위를 보고 싶었다. 너무나 그리워 가슴이 갈라지는 것 같았다.

이토록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그리움은 여전하다니.


가슴이 아파서 숨을 들이마시다가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아차! 이 밤을 이렇게 보낼 수는 없지.’

사연 팔이 하다 끝낼 수는 없다. 그믐 외출이 며칠이나 된다고.


“부모를 잃은 사람이 저뿐만은 아니죠. 지금도 많은 이들이 어렵게 살고요.”

나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그를 위한 질문을 준비했다.


“한마이국에서 이재민들이 내려오고 있대요. 집도 잃고, 삶의 터전도 잃고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내가 손수건을 내려놓자 부운거사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들을 돕고 싶소?”

“거사님 생각이 어떠신지 알고 싶어요.”

“이미 준비하고 있소. 반야산 입구에 임시 보호소를 만들고 있소.”


낮에 청지기가 말하던 임시 어쩌구가 이거였구나. 임시 창고였는지, 임시 거처였는지 제대로 못 들었는데.

어쨌든 청지기는 거사님이 고민하느라 건강이 더 나빠질까 그것만 걱정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그는 이미 계산을 다 끝낸 듯 당당한 눈빛이었다.

“여기 정착하고 싶다면 일자리를 찾아주고, 다른 곳으로 떠나고 싶다면 여비를 마련해줄 거요.”


흐트러짐 없이 단정했다. 이때만큼은 아픈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웠다.


“그대도 그리하지 않았소? 나라고 다를 것이 없소.”

“마을 사람들이 걱정하던데, 어찌하시려고요?”

“내가 움직이면 그들도 따라줄 것이오.”


나는 코를 훌쩍거리며 눈가에 묻은 눈물을 닦았다. 여간해서 콧물이 멈추지 않았다.

“좋아요. 저도 도울게요.”

“고맙소.”


부운거사는 잔기침을 하며 어깨를 들썩였다. 마른기침 소리가 서재를 웅웅 울렸다.


내 할 일도 빨리 해치워야지. 이 밤이 지나기 전에.

“거사님, 앞으로 더 많은 일을 하고 싶지 않으세요? 계속 사람들을 도우면서 말이에요.”


수명환을 주기 위한 질문이었는데,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병도 낫고 사람들도 돕고, 공부도 하고요. 어떠신가요?”

콧물이 자꾸 흘러나와 코를 찡긋거렸다. 이런 중요한 순간에 이 무슨 추태냐.


“이만 누워야겠소. 사빈님도 가서 쉬시오.”

그는 나를 보지도 않고 등을 돌렸다.


‘대답 안 하겠다 이거지.’

침묵은 긍정이다. 마고의 반지가 침묵하는 것처럼.


내 마음이 가리키는 대로 따르면 된다. 그가 대답하든 대답하지 않든 나는 먹일 것이다. 이번에는 기필코.


주먹을 꽉 쥐었다. 사명감에 불타올랐다. 이게 얼마 만에 나눠주는 수명환인가!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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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천계_중앙황천 대차사들 23.07.21 42 2 11쪽
89 천계_한긋장벽을 따라 23.07.20 42 2 11쪽
88 천계_부르는 소리 23.07.19 42 2 10쪽
87 천계_마음이 가는 곳 23.07.18 43 2 11쪽
86 천계_영진촌 낭원 23.07.17 42 2 11쪽
85 천계_변경된 일정 23.07.16 41 2 14쪽
84 천계_백하의 고민 23.07.15 43 2 12쪽
83 천계_어리화는 짙어지고 23.07.14 41 2 13쪽
82 그믐_그리운 아버지 +2 23.07.13 44 2 14쪽
81 그믐_한 번뿐인 나들이 23.07.13 43 2 13쪽
80 그믐_새로운 일꾼 23.07.12 42 2 10쪽
79 그믐_거리의 소녀 23.07.11 43 2 12쪽
» 그믐_중간자의 사연 2 23.07.10 43 2 9쪽
77 그믐_중간자의 사연 1 23.07.10 43 2 11쪽
76 그믐_운기정 서재에서 23.07.09 45 2 11쪽
75 그믐_흉흉한 소문 23.07.08 43 2 12쪽
74 그믐_백홍선원 부운거사 23.07.07 48 2 11쪽
73 그믐_창성곡의 산적 23.07.06 52 2 13쪽
72 천계_온사랑 팔찌 23.07.05 50 2 13쪽
71 천계_회향미곡 잉걸둥지 23.07.04 51 2 13쪽
70 천계_이상한 편지 23.07.03 54 2 11쪽
69 천계_온천 물빛이 바뀌다 23.07.02 55 2 13쪽
68 천계_두 번째 구멍 23.07.01 55 2 13쪽
67 천계_피하지 못할 고백 23.06.30 58 2 10쪽
66 천계_뜻밖의 만남 23.06.29 57 2 14쪽
65 천계_다시 시작된 수색 23.06.28 58 2 12쪽
64 천계_천인의 기억법 23.06.27 61 2 12쪽
63 천계_인연이라는 끈 23.06.26 64 2 12쪽
62 천계_마음을 전하는 일 23.06.23 68 3 12쪽
61 그믐_옥구슬의 사연 23.06.22 67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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