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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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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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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916,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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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9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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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그믐_운기정 서재에서

DUMMY

수명환은 시험을 통과한 사람에게만 줄 수 있다.

시험은 지켜볼 수 있어도 결정은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마고의 반지가 허락해야 한다.


반지가 먼저 결정할 때도 있다. 그때는 반지가 희미하게 빛을 낸다.

자격이 안 되면 반지 안쪽이 파르르 떨린다. 보이지 않지만 손가락에 전해지는 느낌은 분명하다.


아무 반응이 없다면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뜻이다. 그런 경우, 나는 주는 쪽이다. 어느 정도는 인정한다는 뜻이니까.


기린 홍월을 도울 때도 그렇고, 오래전 마른 우물을 살릴 때도 그랬다.


벌써 날이 저물고 있었다. 그믐 외출은 빠르게 지나갈 것이다. 상대가 정해졌다면 빨리 움직여야지.


바나는 장터 구경 말고는 재미있는 일이 없다며 투덜거렸다. 무언가 먹을 때만 조용하지.

‘심심하여라. 재미없어라. 삽살이와 참새가 보고 싶어라.’


“바나, 자꾸 그러면 다음부턴 안 데려올 거야.”

“힝, 주인님은 고집쟁이여라.”

바나는 어느새 개와 고양이가 모여 있는 울타리로 가버렸다.


나는 백홍선원에 도착하자마자 부운거사를 찾아다녔다.

‘그가 어떻게 나올까?’


부운거사가 머무는 운기정 서재에 불이 켜져 있었다.


나는 서재 앞에서 부운거사를 불렀다.

“거사님,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대답이 없었다. 다시 한번 큰 소리로 불렀다. 문을 두드리려 손을 드는데 스르르 문이 열렸다.


부운거사가 문을 열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기다리고 있었소.”


“기다렸다고요?”

예상하고 있었다. 특이한 기운을 읽을 정도면 천선계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겠지.


서재는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서가마다 두루마리가 가득한 것을 보니 배움을 좋아하고 지식을 아끼는 사람이었다.

오래된 죽간과 비단 두루마기도 있으니 그것을 구할 만큼 부유하다는 증거이고.


나는 그가 일러주는 대로 서탁 맞은편에 앉았다.

산속의 선원은 일찍 어두워졌다. 등불 몇 개가 흔들리며 책장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부운거사는 팔찌를 꺼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내가 아는 물건이었다.

당연하지. 내가 만들었으니까.


노랑과 황토, 붉은 색실 세 가닥에 국화매듭과 청록빛 조약돌을 세 개씩 끼워 넣은 팔찌.

며칠 신세 지는 삯으로 청지기에게 주었는데?


“여기서 묵는 대가로 내준 것이 맞소?”

“예. 사흘 정도 신세를 지고 싶어서요.”


그는 팔찌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곳에서 나는 실과 돌이 아니오. 그대는 누구시오?”


나는 부운거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실대로 말하면 믿어주려나?


‘어디부터 어디까지 말해야 할까?’

진짜 선사에게 제대로 공부했다면 천계와 선계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어느 정도’가 어느 정도냐 이것이 문제였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부운거사가 말을 이었다.

“천인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라고 했소. 중간자는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닐 터인데, 이런 물건은 어디에서 구했소?”


‘장터에서 구했다고 할 수는 없고. 산적들의 짐에서 빼냈다고 하면?’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거짓말에 소질이 없는 데다, 그의 눈을 보니 꾸며대고 싶지 않았다.


나는 똑바로 앉아 으흠 목을 가다듬었다.


“천계에서 구했어요. 사흘 묵는 삯에 못 미칠 수 있어요. 거기 널려있는 실과 돌멩이로 만들었으니까요.”

“반인반천이오? 천계를··· 드나들다니?”


어라? 잠깐!

지금 나는 부운거사를 시험하러 온 것이지 내 정체를 밝히러 온 것이 아니잖아?

진지한 태도와 근엄한 눈빛에 밀려 진짜 목적을 깜빡 잊다니.


“거사님, 우리 하나씩 궁금한 것을 나누죠. 저도 궁금한 것이 있거든요.”

나는 탁자에 팔꿈치를 얹고 턱을 치켜들었다.


“팔찌를 어디서 구했는지 답했으니 제가 질문할 차례네요.”


그는 눈을 감고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으나 잠시 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자, 무엇부터 물어볼까?

“몸이 많이 안 좋다고 하던데, 어디서 다쳤나요?”

“전쟁터에 나갔다가 몸에 독이 퍼졌소. 그 후로 여기서 쉬면서 공부하고 있소.”


‘치료하기 위해서라···.’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졌다.


백홍선원이 자리 잡은 창성곡은 땅의 기운이 좋았다. 습기도 적당하고, 공기도 쾌적하여 요양하기 알맞은 곳이었다.


산의 일부가 신성한 땅이니 당연한가? 산적들이 숨어있던 동굴만 해도 다른 곳과 달랐다.


그 넓지도 않은 신성한 땅에 백홍선원의 모든 건물이 알맞게 들어가 있었다. 그는 땅의 기운도 잘 읽는 사람이었다.


부운거사가 질문할 차례였다.

“어제 그 사람들, 산적에게서 구했다던데···, 사실이오? 두건파를 직접 상대했소?”


그는 끊임없이 내 기운을 읽으며 무언가를 알아내려 하고 있었다.


나도 그가 천선계를 어디까지 배웠는지 가늠하면서 눈치를 살폈다. 이름하여 눈치작전이랄까.

손을 휘저으며 짐짓 큰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아우, 그럴 리가요. 전 싸울 줄도 모르고, 무기도 없는걸요. 제 강아지 바나가 처리했죠. 시체는 천사들이 치워주었대요.”


“그 작은 강아지가?”

“변신술을 쓰거든요.”

목소리를 낮췄다. 운기정 가까이에 아무도 없는 것을 알면서도 속삭이듯 말했다.


“차원의 문지기에게 배웠다네요.”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믿든 안 믿든 그것은 그의 선택이고.


부운거사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기에 나는 손을 들어 막았다. 내가 질문할 차례였다.

“거사님은 그 몸으로 얼마나 버틸지 아시나요?”


그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얼굴에 머물던 미소가 사라졌다.

“얼마 남지 않았소. 며칠이 될지, 몇 달이 될지는 모르나···. 해를 넘기지는 않을 것이오.”

“더 살고 싶지 않나요?”


“삶과 죽음은 하나요. 살고 싶어 살고, 죽고 싶어 죽는 것은 아니나 결국 모든 것은 하나로 이어져 있소. 살아있는 동안 삶에 충실했으니 이제 죽음에 충실할 차례요.”

“아직 기회가 있다면요?”


부운거사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쓸쓸하고 어두운 표정이었다.

“그보다 그 상자는 어떻게 옮겼소? 여기 올 때만 해도 짐이 없었는데. 그 몸으로는 들지도 못할 테고.”


말을 돌리는 것을 보니 목숨을 늘리고 싶지 않다는 뜻인가? 아니면 방법이 없으니 포기한다는 뜻인가.


‘이 사람이 원하지 않으면 수명환을 줄 수가 없어···.’

이러면 또 일이 안 되잖아. 이번에는 수명환을 꼭 건네고 싶은데.


문틈으로 바람이 스며들었다. 문과 창문이 한꺼번에 덜컹거렸다.


상자는 나 혼자 옮긴 것이 아니었다.

풀려나고 싶은 물건의 바람이 제대로 힘을 냈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들의 바람도 힘을 더한 것이고.


“그 정도야 공기와 바람의 힘을 빌리면 되지요. 대명천에서는 이만한 집도 저 혼자 옮기거든요.”

나는 팔을 들어 커다란 원을 그렸다.


“대명천? 대명천과 마음숲에 대해 들은 적 있소.”

부운거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마음숲도 알고 있었어? 신기하네.’

어떤 선사가 스승이었는지는 몰라도 아주 자세하게 알려주었구나. 물론, 선사마다 가르치는 내용이나 방식이 다르지만.


어쨌든 이 사람과는 얘기가 되겠는걸. 조금만 설득하면 수명환을 받을지도···.

‘어디까지 아는 거야? 내가 미래에서 왔다면 이해하려나?’


“천계에 드나드는 능력자였군.”

“능력이라고 해야 아주 조금···.”

나는 검지와 엄지를 맞붙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천계를 드나드는 중간자라···. 들어본 적 없는데.”

“거사님이 어찌 다 아시겠어요? 차원에 끝이 없으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 많이 일어나지요.”


입으로는 질문에 대답하면서, 머리로는 수명환을 먹일 방법을 고민했다.

‘이번에는 기필코, 이 사람을 살려보겠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천계는 어떻소? 다섯 성천으로 나뉜다는데, 북방흑천은 어떤지?”

“다섯 성천 모두 평온해요. 반계 때문에 가끔 소란이 일어나지만 신제님들끼리는 잘 지내세요.”


“북방흑제는···.”

그는 말을 꺼내 다 말고 멈추었다.


“천사장님요? 잘 계세요. 중앙황제님과 북방흑제님은 자주 뵈니까요.”

“신제가 그대 같은 중간자를 만난다고?”


그의 말에 나는 눈을 번뜩였다. 중간자를 무시해?

“천계에서는 천인과 다를 거 없어요. 중간자를 차별하는 것은 이곳 인간세뿐이죠.”

말하면서도 입을 삐죽거렸다.


인간세에만 오면 날지도 못하잖아. 싸움도 못 하는데다, 과거로 떨어지면 영감도, 바람잡이도 없고. 이것이 차별이 아니면 무엇인가.


“혹시 수리마루 정명님을 본 적 있소?”

“아니오, 누구도 그분을 보지 못했어요. 으뜸성에만 계신다는데, 대체 그 으뜸성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부운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명천에서는 무슨 일을 하시오?”


그의 물음에 나는 머뭇거렸다. 하지만 아주 잠깐이었다. 이 사람을 믿고 싶었다.


선하고 깊이 있는 눈빛을 보니 사실을 말해도 될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천선계에 대해 충분히 아는 것 같고.


“저는 마음숲을 지키는 마고랍니다.”

“마고···?”

부운거사의 눈이 커졌다. 손을 탁자 위에 올리고 허리를 앞으로 숙였다.


“중간자가 마고인 적이 없는데?”

그가 놀라는 만큼 나도 놀랐다. 마고가 뭐냐고 묻지 않는 건 마고를 안다는 뜻이다.


‘이 사람, 천계에 대해 너무 잘 아는데?’

나는 신기해서 그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사람인데···.’

오래 수련한 기운은 있지만, 천인도 선인도 아니야. 그런데 뭔가 이상해.

‘대체 어디가 이상한 거지?’


부운거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말없이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오랫동안 생각에 빠져있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마음숲의 마고라면 알고 있소. 아란이라 하였소. 사빈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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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천계_중앙황천 대차사들 23.07.21 42 2 11쪽
89 천계_한긋장벽을 따라 23.07.20 42 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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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천계_마음이 가는 곳 23.07.18 43 2 11쪽
86 천계_영진촌 낭원 23.07.17 42 2 11쪽
85 천계_변경된 일정 23.07.16 41 2 14쪽
84 천계_백하의 고민 23.07.15 43 2 12쪽
83 천계_어리화는 짙어지고 23.07.14 41 2 13쪽
82 그믐_그리운 아버지 +2 23.07.13 44 2 14쪽
81 그믐_한 번뿐인 나들이 23.07.13 43 2 13쪽
80 그믐_새로운 일꾼 23.07.12 43 2 10쪽
79 그믐_거리의 소녀 23.07.11 43 2 12쪽
78 그믐_중간자의 사연 2 23.07.10 43 2 9쪽
77 그믐_중간자의 사연 1 23.07.10 43 2 11쪽
» 그믐_운기정 서재에서 23.07.09 46 2 11쪽
75 그믐_흉흉한 소문 23.07.08 44 2 12쪽
74 그믐_백홍선원 부운거사 23.07.07 48 2 11쪽
73 그믐_창성곡의 산적 23.07.06 52 2 13쪽
72 천계_온사랑 팔찌 23.07.05 50 2 13쪽
71 천계_회향미곡 잉걸둥지 23.07.04 51 2 13쪽
70 천계_이상한 편지 23.07.03 54 2 11쪽
69 천계_온천 물빛이 바뀌다 23.07.02 55 2 13쪽
68 천계_두 번째 구멍 23.07.01 55 2 13쪽
67 천계_피하지 못할 고백 23.06.30 58 2 10쪽
66 천계_뜻밖의 만남 23.06.29 57 2 14쪽
65 천계_다시 시작된 수색 23.06.28 58 2 12쪽
64 천계_천인의 기억법 23.06.27 61 2 12쪽
63 천계_인연이라는 끈 23.06.26 64 2 12쪽
62 천계_마음을 전하는 일 23.06.23 68 3 12쪽
61 그믐_옥구슬의 사연 23.06.22 67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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