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조회수 :
13,234
추천수 :
431
글자수 :
916,352

작성
23.07.11 09:19
조회
43
추천
2
글자
12쪽

그믐_거리의 소녀

DUMMY

이른 아침부터 백홍선원의 일꾼들이 천막을 세우기 시작했다. 반야산 앞 넓은 뜰에 임시 보호소가 세워졌다.


나도 사람들과 함께 천막에 가리개를 달고, 평상도 옮겼다. 침구와 탁자를 갖다 놓으니 며칠 묵을 만한 공간이 되었다.


부운거사가 하는 일이니 마을 사람들도 하나둘 모여들었다.

백홍선원이 꽤 인정받는가 보다. 선원 일꾼들만 따르는 줄 알았는데, 마을 사람들까지 일손을 도우러 오다니.


상단 건물 앞에 있던 사람도 몇몇 보였다. 이재민을 막아야 한다고 소리치던 사람들이었다.

어제만 해도 불평을 늘어놓았는데?


“거사님한테 계획이 있을 줄 알았어. 미리 준비를 하셨다니.”

“이 사람아, 한마이국에 홍수가 날 때부터 준비하셨네. 자네만 몰랐지.”

나이 많은 노인도 지지대를 날랐다. 몸은 호리호리해도 힘은 다른 사내에 못지않았다.


“우리 거사님이 보통 분인가? 앞날을 내다보신다고. 풍년이든 흉년이든 못 맞춘 적이 있던가? 그 덕에 우리도 잘 넘기지 않았어?”

노인이 들고 있던 지지대를 흔들었다.


“여하튼, 마을에 들어와서 난동을 부리면 안 된다고요.”

남자는 그래도 마음이 안 놓이는 모양이었다.


“사람이 서로 도와야지, 여기는 홍수가 안 날성싶은가?”

“참내, 어르신도. 괜히 싸움 나면 양쪽 다 피를 본다고요.”

남자는 툴툴거리면서도 노인의 말에 따라 막대기를 날랐다.


이른 시각이라 부운거사는 나오지 않았지만, 청지기가 일꾼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바나는 거의 감독자 수준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축 늘어져 있었는데, 지금은 천막 사이를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자고 있다가도 사람이 북적거리는 곳은 금방 알아차렸다.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고, 넓은 뜰에는 어느새 수십 개의 천막이 세워졌다. 임시 거처라 해도 쓸만한 지붕과 벽, 바닥이 지어졌으니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준비해야겠지.


몇 군데 아궁이를 만들고 솥단지를 걸었다. 잔치를 치를 때 집집이 돌려가며 쓰던 것인지 사용한 흔적이 있어도, 많이 낡지는 않았다.


‘며칠 전부터 준비했다고? 그런 사람이라면 당연히 수명환을 받아야지.’

부운거사가 냉큼 받는다고 했으면 얼마나 좋아? 일도 편하고.


이번에는 승낙한 것이 아니니 모르게 먹여야 한다.

하루에 네 번이나 약을 먹으니까 그중 하나에 슬쩍 넣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맛과 향이었다. 보통 사람은 전혀 못 느끼지만, 오래 수련했다면 알아차릴 것이다.


‘미감제부터 만들어야지!’

장터에 갔을 때 약방도 보았다. 어디인지도 알고 있다. 거기라면 재료가 있을 거야.


하늘을 보니 벌써 한낮이었다.

‘서둘러야 해! 말! 말이 필요한데···.’


천막촌을 둘러보며 청지기를 찾아냈다. 그는 일꾼들과 함께 말에 실린 물동이를 내리고 있었다.


그가 잠깐 손을 멈추고 허리를 펴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거사님은 안 나오세요?”


청지기는 부루퉁해져서 내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누워계시죠. 그러게 일찍 주무시라니까. 하여튼···.”


“미안해요. 그보다 말 좀 빌릴게요. 다녀올 곳이 있어요.”

“또 무슨 일을 벌이려고요?”

“필요한 게 있어서 그래요. 장터에만 살짝 다녀올게요. 말이 다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앞으로 거사님을 귀찮게 하면 안 됩니다.”

“알았어요. 조심할게요.”


시험이 끝났으니 수명환만 주고 빠지면 된다.

‘이번에는 일찌감치 숙제를 끝내고 나도 사람들을 도와야지.’


청지기는 내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아니지, 운기정 근처에는 절대로 가지 마십시오! 이번에 쓰러지면 못 일어나십니다요.”


그 정도로 몸이 안 좋다면 서둘러야 해.

나는 말고삐를 붙잡고 바나를 찾았다.


“바나, 장터에 가자.”

“왕왕, 주인님. 여기도 바빠라. 장터에는 왜 가셔라?”

“수명환을 먹이려고.”

“웅, 거사님이 좋아라 하셨어라?”


“아니. 그냥 먹일 거야.”

“그래도 되여라? 왈.”

“뭐 어때? 효과가 나든 안 나든 내 맘대로 할 거야.”


바나는 말 등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내 앞에 앉아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멍멍거렸다.

“출발이어라, 멍!”


*


약방에서 나왔을 때 바나는 보이지 않았다. 말 한 마리만 약방 앞에 얌전히 서 있었다.


‘분명 여기서 지킨다고 했는데···.’

바나를 믿은 내가 잘못이지. 구경거리가 많은 장터에서 가만히 앉아 기다릴 리가 없다.


말고삐를 잡고 저잣거리를 따라 걸었다.

‘바나! 바나!’

나는 소리 내지 않고 전언으로 바나를 불렀다.


강아지가 있을 만한 곳을 두리번거렸지만, 인간세의 강아지만 있을 뿐 바나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간 거야?’

장터가 넓은 것도 아니고 골목 몇 개가 전부인데 꼬리도 안 보이다니.


‘한 번만 더 둘러보고 가야겠다. 알아서 찾아오겠지.’

천계의 능력을 받은 강아지이니 그 정도는 해낼 것이다.


바나 찾기를 포기하니 저잣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사람은 적어도 아기자기한 물건이 많아 보는 재미가 있었다. 투박하면서도 정감 어린 공예품도 많았다.


어제와는 또 다른 멋이 있었다.

‘현재의 인간세에 갖다 놓으면 골동품으로 대접받겠지? 값이 어마어마할 거야.’


나는 선원으로 돌아가는 길을 따라 가게마다 기웃거렸다.


과자 가게 앞에 한 소녀가 서 있었다.

유난히 초라한 행색이 눈길을 끌었지만, 그보다 신경 쓰인 건 그 소녀를 바라보는 주인의 눈초리였다.

찢어지고 더러운 옷을 입고 있으니 주인이 못마땅해하며 노려보고 있었다.


열넷이나 열다섯 정도 되었을까.

작고 야윈 몸에 부스스한 얼굴, 꾀죄죄한 옷이 떠돌이임을 알려주었다. 머리에 쓴 두건도 빛이 바랬다.


소녀가 과자를 바라보며 침을 삼킬 때마다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너 한마이국에서 왔냐?”

주인이 먼지떨이를 흔들며 앞으로 나왔다.


“예.”

소녀는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면 반야산 입구로 가라. 거기 천막을 세운다잖냐? 여기서 괜한 오해를 받지 말고.”

“저기, 저는···. 다른 길로 와서요. 거긴 몰라요.”


주인은 부릅뜬 눈에 힘을 주었다.

“어쨌거나 여기 있지 말고 얼른 가라. 손님들이 싫어하신다.”


그는 먼지떨이로 소녀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소녀가 겁에 질려 움찔거렸다. 어깨를 잔뜩 움츠리면서 몸을 떨었다.


그 몸짓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 매를 자주 맞는 사람들의 방어 자세였다. 또 맞을까 두려워 작은 손짓에도 몸을 떤다.


이걸 보고 그냥 넘어갈 수 없지. 내가 누구야? 마고 사빈이 아닌가.

백홍선원의 손님방에 남아있는 진주를 한 알 불러냈다.


나는 매끈한 진주를 손에 쥐고 과자 가게 앞으로 다가갔다.

“주인장, 과자 좀 싸주시오.”


주인과 소녀 사이로 끼어들어 소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나는 주인의 손에 진주를 올려놓았다.

“앞으로 이 아이가 먹을 과자값이오.”


주인은 진짜 진주임을 확인하자 헤벌쭉 웃었다.

“그러지요, 암요, 그래야지요.”


나는 돌아서서 소녀에게 과자봉지를 내밀었다.

“먹을래?”


소녀는 잔뜩 긴장해서 뒤로 물러섰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래? 혼자 먹기는 너무 많은데···.”


“너무 많기는요. 바나가 여기 있어라! 왈왈.”

어디서 나타났는지 바나가 내 치맛자락을 물어 당겼다.


“어머, 강아지.”

소녀는 그 자리에 꿇어앉아 바나의 등을 쓰다듬었다.


내려다보니 그 사이 바나는 더 어린 강아지가 되어 있었다.

동그란 눈에 코와 입이 조그만 것이 한 살 정도로 보였다. 털은 여전히 새하얗고 윤이 났다.

‘왜 갑자기 변신?’


“너, 우리 이모네 강아지랑 똑같아.”

소녀가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으흠, 그래서···?’

나도 바나 옆에 쪼그려 앉았다.


“얘는 바나란다. 네가 마음에 드나 보다.”

“강아지가 참 예뻐요.”

“으음. 예쁘기는 예쁘지···.”


바나가 통통 튀어 오르듯 걷자 소녀도 따라 일어났다.


나도 함께 일어서며 과자봉지를 내밀었다.

“어차피 나 혼자 다 못 먹어. 강아지한테는 과자를 주면 안 되거든. 알지?”


소녀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과자를 받아먹었다. 과자를 하나 입에 넣고 천천히 녹여 먹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보니 덩달아 마음이 따뜻해졌다.


저잣거리가 끝나는 곳에 이르자 소녀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저는 일할 곳을 찾아야 해서요. 안녕히 가세요.”


소녀는 꾸벅 허리를 숙였다.

“과자 고맙습니다.”


소녀가 되돌아가자 바나가 발톱으로 치맛자락을 긁어댔다.

“바나는 보통 강아지가 아니어라. 과자 먹어도 되여라. 왕왕.”

“허, 네가 못 먹는 게 있니?”


바나에게 남은 과자를 주면서 눈으로는 소녀의 뒷모습을 쫓았다.

‘저 모습···. 왠지 익숙한데?’


바나는 떨어진 가루까지 핥아먹느라 고개도 들지 않았다. 그것도 부족한지 바닥을 킁킁거리더니 이번에는 말 옆으로 갔다.


“주인님! 어서 수명환을 주러 가셔라. 이러다 그믐 외출 끝이어라.”

“알아. 수명환이 먼저라는 거.”


나는 말고삐를 잡고 골목을 빠져나왔다.


적어도 골목을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는데, 또 다른 골목이었다. 분명 선원으로 가는 길 맞는데.


“왈, 이 길이 아니어라. 선원으로 가려면···.”

바나가 킁킁거리며 바람의 냄새를 맡았다. 변신을 풀지 않아 여전히 어린 강아지였다.


“이쪽이어라!”

바나가 구르듯 뛰어나갔다. 나도 말고삐를 잡고 빠른 걸음으로 하얀 털 뭉치를 따라갔다.


골목을 빠져나왔지만, 선원과는 반대 방향이었다. 멀리 반야산이 보였고, 백홍선원의 지붕도 보였지만 아까보다 더 멀어졌다.


“어라? 여기가 아니어라?”

“바나, 너 이상하다? 길을 잃다니?”

“모르겠어라. 냄새는 이 길이 맞어라. 왕.”

바나는 고개를 바짝 들고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고기 굽는 냄새가 확 밀려들었다. 냄새는 돌다리 아래 주막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주막 뜰 한쪽에서는 고기를 굽고, 한쪽에서는 커다란 솥단지에 고깃국을 끓이고 있었다. 오늘 점심과 저녁 장사를 위한 것이리라.


“바나! 이 냄새를 따라온 거야?”

“헤, 주인님. 먹어야 잘 찾는다고라. 고기부터 한 덩이···.”

바나는 최면에 걸린 듯 주막을 향해 끌려가기 시작했다.


눈을 반쯤 감은 모양새가 이미 정신줄을 놓은 것이다.

나는 바나를 잡으려고 허리를 숙였다.


누군가 돌다리 위로 들어섰다. 나도 모르게 그에게로 시선이 움직였다.


한낮의 햇빛 때문에 검은 형상만 보였다. 발과 다리, 허리와 가슴으로 눈길이 올라갔다.

눈이 부셔서 자세히 볼 수 없지만, 그 모습과 걸음걸이는 확실히 아는 사람이었다.


작고 가는 몸집, 가볍고 우아한 몸놀림, 바람에 몸을 실은 듯 사뿐사뿐 걷는 걸음걸이.


‘엄마···?’

나는 홀린 듯 일어섰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아날빛숨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90 천계_중앙황천 대차사들 23.07.21 42 2 11쪽
89 천계_한긋장벽을 따라 23.07.20 42 2 11쪽
88 천계_부르는 소리 23.07.19 42 2 10쪽
87 천계_마음이 가는 곳 23.07.18 44 2 11쪽
86 천계_영진촌 낭원 23.07.17 42 2 11쪽
85 천계_변경된 일정 23.07.16 41 2 14쪽
84 천계_백하의 고민 23.07.15 44 2 12쪽
83 천계_어리화는 짙어지고 23.07.14 41 2 13쪽
82 그믐_그리운 아버지 +2 23.07.13 44 2 14쪽
81 그믐_한 번뿐인 나들이 23.07.13 43 2 13쪽
80 그믐_새로운 일꾼 23.07.12 43 2 10쪽
» 그믐_거리의 소녀 23.07.11 44 2 12쪽
78 그믐_중간자의 사연 2 23.07.10 43 2 9쪽
77 그믐_중간자의 사연 1 23.07.10 44 2 11쪽
76 그믐_운기정 서재에서 23.07.09 46 2 11쪽
75 그믐_흉흉한 소문 23.07.08 44 2 12쪽
74 그믐_백홍선원 부운거사 23.07.07 49 2 11쪽
73 그믐_창성곡의 산적 23.07.06 52 2 13쪽
72 천계_온사랑 팔찌 23.07.05 50 2 13쪽
71 천계_회향미곡 잉걸둥지 23.07.04 51 2 13쪽
70 천계_이상한 편지 23.07.03 54 2 11쪽
69 천계_온천 물빛이 바뀌다 23.07.02 55 2 13쪽
68 천계_두 번째 구멍 23.07.01 55 2 13쪽
67 천계_피하지 못할 고백 23.06.30 58 2 10쪽
66 천계_뜻밖의 만남 23.06.29 58 2 14쪽
65 천계_다시 시작된 수색 23.06.28 58 2 12쪽
64 천계_천인의 기억법 23.06.27 61 2 12쪽
63 천계_인연이라는 끈 23.06.26 64 2 12쪽
62 천계_마음을 전하는 일 23.06.23 68 3 12쪽
61 그믐_옥구슬의 사연 23.06.22 68 2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