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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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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조회수 :
13,189
추천수 :
431
글자수 :
916,352

작성
23.07.12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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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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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10쪽

그믐_새로운 일꾼

DUMMY

빛 속에 서 있던 사람이 나를 향해 사뿐히 뛰어왔다.


“언니!”

그녀의 목소리가 요란하게 머릿속을 울렸다.


어슴프레한 형상은 분명 엄마였는데, 내게 다가온 사람은 과자 가게 앞에서 만난 소녀였다.

‘설마···.’


순간 지금이 과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정말 엄마일 수도 있어.

심장이 마구 뛰었다.

‘정말, 정말 엄마라면···.’


“주막에서 사람을 구한다고 해서 가는 길이에요. 아직 안 가셨어요?”

소녀는 주막 뜰을 내려다보았다.


주막을 내려다보니 바나는 벌써 울타리 앞에서 기웃거리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마당에 앉아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 으응. 점심 먹고 가려고.”

나는 일어나 소녀의 손을 잡았다.


“넌 이름이 뭐야?”

“은솔이에요. 그냥 솔이라고 부르세요. 바람 솔솔, 재미 솔솔.”


은솔은 깔깔거렸지만 나는 손이 떨렸다.

손만이 아니라 혀끝부터 등과 다리를 지나 발가락까지 파르르 떨렸다.


자세히 보니 알겠어. 엄마의 얼굴이 그대로 있어.

두건 밑으로 흘러내린 주홍빛 머리카락도, 눈코입 모두 엄마였다.

나는 하염없이 소녀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수명환을 생각할 때가 아니야. 엄마와 함께 있고 싶어.

그믐 외출이 이제 겨우 이틀 남았잖아. 시간이 없다고.


‘엄···마.’

반계에서 만든 덫이 너무나 고마웠다. 이런 함정이라면 몇 번이라도 빠질 거야.

가슴이 벅차오르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언니,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아니, 아니야. 배고프지? 점심 사줄게.”

나는 괜찮다는 은솔을 끌고 주막으로 들어갔다.


바나는 기다렸다는 듯 우리가 앉은 들마루 아래 자리 잡았다. 하얀 털 뭉치 강아지를 보고 주막에 있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사람들이 귀엽다며 쓰다듬고, 어떤 이는 살점이 남은 뼈다귀를 가져다주었다.

바나는 신이 나서 겅중겅중 뛰며 재주를 넘었다.


은솔도 깔깔거리고 소리 내어 웃었다.

웃는 모습도 그대로구나. 손짓, 눈짓, 웃음소리 모두 그리운 엄마였다.


나는 소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혹시 무희였니?”

“어? 어떻게 아세요?”

“몸을 보니까. 나도 어릴 때 춤을 췄거든.”

“그래서 언니가 그렇게 예쁘군요. 선이 참 고와요.”


은솔은 주막 안을 둘러보았다.

“여기 일하러 왔는데. 누구한테 말하는 거예요?”


‘이 주막에서 일한다고?’

주막을 둘러보았다.


넓은 마당에 들마루도 넉넉하고 청소도 잘 되어있었다. 고깃국을 끓이는 걸 보면 장사가 꽤 잘된다는 뜻이지.

주인 부부는 억센 손에 험상궂은 얼굴이지만, 성실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여기는 안 돼. 아버지가 이곳까지 찾아오기는 힘들 거야.

세상 물정 모르는데, 후미진 골목의 숨은 맛집을 어떻게 아냐고. 큰길만 다닌다고.


‘처음 만났을 때 아버지는 순박한 글선생이라고 했어. 학자가 찾아갈 만한 곳이어야지.’


“솔아, 나이가 몇이야?”

“열여섯이요. 곧 열일곱이 돼요.”


은솔은 일 때문에 나이를 묻는 줄 알았나 보다.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저 일 잘해요. 바느질도 하고, 요리도 해요. 극단이 작아서 춤만 출 수는 없거든요.”


“거기 주인이 자주 때리니?”

“예? 아···.”

은솔은 소매로 팔뚝을 가렸다.


소매가 짧아 멍이 그대로 보이자 팔을 등 뒤로 돌렸다.

“제, 제가 잘 못 해서···.”


은솔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런 사연은 전혀 몰랐다. 어머니는 좋은 추억만 얘기하셨으니까.

‘어머니에 대해 너무 몰랐어. 어떻게 사셨는지,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때마침 주인이 국밥을 가져와 숟가락을 들었다. 그릇 속 국물을 보고 있어도 머릿속으로는 온갖 생각이 지나갔다.


‘어머니는 열아홉에 아버지를 만났다고 했어. 만난 지 두세 달 만에 혼인했고···. 곧 열일곱이 된다니 이 년 후에 아버지를 만나겠지?’


그때까지 어머니는 안전한 곳에 머물러야 해. 술 취한 손님들이 행패 부리는 곳이 아니라.


‘백홍선원!’

당연히 백홍선원으로 데려가야지. 그곳만큼 안전한 곳은 없을 거야.


거기라면 아버지가 찾아갈 만해. 선원이야말로 가난한 글선생이 하룻밤 묵게 해달라고 부탁할 곳이지.


“그 일자리, 내가 알아봐 줄게. 밥 먹고 나랑 함께 가자.”

“어디요?”


“한마이국 사람들을 위해 임시 보호소를 만들었거든. 거기서 기다리면 선원에서 일할 수 있도록 주선해줄게.”


“정말요? 언니, 너무 좋아요. 고맙습니다.”

은솔은 숟가락 가득 밥을 퍼서 한입에 삼켰다. 배가 무척 고팠는지 쉬지 않고 한 그릇을 다 비웠다.


“너도 한마이국에서 왔다며?”

“예. 용춘골에서 왔어요. 홍수 때문에 마을이 물에 잠겼는데, 역병까지 돌아서 겨우 도망쳤어요.”


“혼자 온 거야?”

“이웃집 언니네랑 함께 나왔어요. 외가가 한마사국에 있대서, 언니네는 어제 떠났어요. 거기는 배를 타야 한 대요.”


“너만 남겨두고 가버렸어?”

“제가 남는다고 했어요. 언제까지 폐를 끼칠 수는 없잖아요. 저도 제 일을 찾아야죠.”

은솔은 담담하게 말하며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들마루 아래에서 바나가 뼈다귀를 긁는 소리가 띄엄띄엄 들렸다.

대체 바나는 정체가 뭐람. 혼 찌꺼기로 만들었으니 구태여 먹지 않아도 될 텐데. 아무래도 굶어 죽은 혼이 들어갔나 보다.


*


청지기가 쉽게 허락할 줄 알았는데, 정반대였다.

“안 됩니다요. 선원에는 여자를 들이지 않습니다요.”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규칙이 어디 있어요? 정말 일 잘한다니까요. 예쁘고 참하고···.”

“그래서 안 된다구요. 예쁘면 더더욱!”


청지기는 부엌으로 들어가더니 쟁반을 들고 나왔다. 쟁반 위에는 탕약 그릇이 담겨있었다.


나는 서재로 향하는 청지기 뒤를 바짝 뒤따랐다.

“청지기님, 이건 정말 둘도 없는 기회예요. 한 사람, 아니 세 사람의 인생이 달렸다구요.”


“아가씨, 왜 이러십니까? 여자 손님을 방에 들인 것도 처음이라고요.”

“규칙은 깨라고 있는 거죠! 여자인 제가 손님방에 머물렀으니 여자 일꾼도 뽑을 수 있다는 뜻이죠.”


청지기가 한숨을 쉬며 걸음을 멈추었다.

“여하간, 안 된다고 했습니다요.”


“알겠어요. 그럼, 제가 직접 여쭤볼게요. 이리 주세요.”

나는 어깨로 청지기를 밀며 억지로 쟁반을 빼앗아 들었다.


“거사님이 심부름시킨 일도 있으니 약 갖다 드리면서 겸사겸사.”

“예? 거사님이 손님에게 일을 시켰다고요?”

청지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갑자기 쟁반을 잡아당겼다.

“어허! 또 거사님 못 주무시게 하려고요? 안 됩니다요. 일찍 주무셔야 합니다요.”


“약속할게요. 약만 갖다 주고 바로 나올게요. 됐죠?”

나는 쟁반을 꽉 쥐고 놓지 않았다.


“아휴, 정말···”

청지기는 가슴을 치며 돌아섰다.


청지기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자리에 서서 지켜보았다. 서재까지 가려면 중문을 지나 마당 하나를 가로질러야 한다.


수명환과 미감제를 넣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이 정도면 아무리 부운거사라도 절대 눈치 채지 못할 것이다.


*


“거사님, 약 가져왔습니다.”

내가 약을 내미니 그는 약그릇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말도 없이 오래도록 찰랑이는 탕약을 바라보는데 나도 모르게 입안에 침이 말랐다.


수명환을 내주면서 이렇게 긴장하기는 마고의 역사상 처음이다. 이만 번이 넘도록 외출했건만, 아직도 내공이 부족한가.


침묵의 시간이 길었지만, 긴 기다림 끝에 어쨌든 부운거사는 약을 마셨다. 멈추지 않고 단숨에 쭉.


‘됐어.’

웃음이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싸우는 소리가 들리던데?”

부운거사는 약그릇을 내려놓고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았다.


“거사님, 부탁드릴 일이 있어요. 이건 정말이지 꼭 들어주셔야 해요.”

나는 그릇을 치우고 무릎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선원에서 일꾼을 뽑는다기에 한 사람 추천했더니, 안 된다는 거예요. 정말 잘하는 사람이거든요.”


“여자인가 보오?”

부운거사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천천히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그 규칙 바꾸시면 안 될까요? 가족도 없이 떠도는 불쌍한 소녀라고요.”

“이곳으로 넘어온 한마이국 사람이 그리 많은데 한 사람만 가련하겠소?”

부운거사는 읽던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저도 열여섯에 어머니를 잃었거든요.”

나는 울컥하는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침을 꿀꺽 삼켰다.


“그 나이에 혼자가 되었으니 남 같지 않아서 그래요. 작은 극단에 있었다는데, 거기선 매질도 많이 한 것 같더라고요.”


나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부운거사를 바라보았다.

이런 안타까운 눈빛이 안 통할 리 없다. 그동안 얼마나 갈고 닦은 눈빛인데.


목소리도 약간 떨어야 효과가 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한 것 같았어요. 한 번만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여인은 들이지 않소.”

“거사님! 이 넓은 선원에서 하인과 부딪칠 일이 얼마나 있겠어요? 거사님이 안 다니는 곳에서 일하면 되잖아요?”

이런 고집불통이 있나. 나는 그를 노려보며 필사적으로 외쳤다.


“별원도 있고, 약초밭도 있어요. 빨래터도 거사님과 만날 일이 없지요. 부엌에도 안 들어가시잖아요? 설마 이 마고의 추천을 무시하시는 건가요?”

가슴을 치며 씩씩거리자 부운거사는 책을 내려놓았다.


“언제까지 머물게 하려고?”

“이년 정도면 돼요. 어머···, 아니 은솔이 열아홉이 될 때까지.”


“기한이 정해졌소?”

“예. 그때쯤 되면 좋은 인연이 찾아오거든요.”

나는 확신에 차서 대답했다.


당연히 좋은 인연이 생길 것이다. 그들에게서 내가 태어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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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천계_백하의 고민 23.07.15 43 2 12쪽
83 천계_어리화는 짙어지고 23.07.14 41 2 13쪽
82 그믐_그리운 아버지 +2 23.07.13 44 2 14쪽
81 그믐_한 번뿐인 나들이 23.07.13 43 2 13쪽
» 그믐_새로운 일꾼 23.07.12 43 2 10쪽
79 그믐_거리의 소녀 23.07.11 43 2 12쪽
78 그믐_중간자의 사연 2 23.07.10 43 2 9쪽
77 그믐_중간자의 사연 1 23.07.10 43 2 11쪽
76 그믐_운기정 서재에서 23.07.09 45 2 11쪽
75 그믐_흉흉한 소문 23.07.08 44 2 12쪽
74 그믐_백홍선원 부운거사 23.07.07 48 2 11쪽
73 그믐_창성곡의 산적 23.07.06 52 2 13쪽
72 천계_온사랑 팔찌 23.07.05 50 2 13쪽
71 천계_회향미곡 잉걸둥지 23.07.04 51 2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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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천계_뜻밖의 만남 23.06.29 57 2 14쪽
65 천계_다시 시작된 수색 23.06.28 58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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