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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냐 님의 서재입니다.

돛대 없는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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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냐
작품등록일 :
2022.05.27 23:51
최근연재일 :
2022.12.05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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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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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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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
글자수 :
296,472

작성
22.06.25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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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이름을 모르는 무괴

DUMMY

가나 대륙까지 3분의 2정도 가까워졌을 때의 어느 밤이었다.


지원은 조종실 위로 올라가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다는 빛 공해도 없고, 모기 같은 벌레도 없어서 쏟아지는 별들을 올려다보기 딱 좋았다.


그때 아래쪽에서 창문이 드르륵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비교적 따듯한 조종실 안쪽에서 찬호가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지원은 그쪽을 신경쓰지 않았다. 잠이 솔솔 왔다.


“여기서 자면 체온떨어져서 죽는다.”


기르불이었다. 그는 몸의 일부를 늘려 창문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와 지원의 옆에서 말을 걸고 있었다.


“안 잡니다.”

“그래?”


그때 누군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퉁퉁 소리가 들렸다. 여기에 지원 말고 사다리를 이용할 사람은 하나밖에 없었지만.


찬호가 사다리에 매달려 고개만 빼꼼 내민 채 램프를 조종실 위쪽에 올려두었다. 기르불의 심지가 매달린 램프였다.


“지원, 이거좀 맡아줘요. 추워서 창문을 못 열어두겠어요.”


지원은 램프를 받았다. 그때 찬호의 대충 걸친 망토 사이로 그의 맨몸이 보였다. 그는 아직까지도 제대로 된 옷 없이 망토만 걸치고 있었기에, 밤에는 조종실 안에 들어가 웅크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찬호는 램프를 건네자마자 후다닥 조종실 안으로 들어갔다.


지원은 램프를 배 위에 올렸다. 기르불의 온기가 전해져 추위에 경직되어 있던 몸을 편하게 했다. 그녀가 말했다.


“저와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기르불은 쭈욱 늘렸던 몸을 다시 움츠려 평범한 등불처럼 램프 안에 얌전히 들어 있었다.


“응? 어. 타카슬 말인데, 저렇게 혼자 놔둬도 괜찮을까?”

“타카슬이 신경쓰이십니까?”

“생각해봤는데, 그동안 타카슬을 너무 방치한 게 아닌가 싶어서. 듣자하니 안 좋은 일도 많이 겪은 것 같던데. 며칠 동안이나 말을 나누지 않았잖아. 그렇다고 저쪽에서 말을 거는 일도 별로 없고.”


확실히 그랬다. 타카슬은 지원이나 찬호, 루니 혹은 기르불과 단독으로 대화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경우, 츠카와 지원이 만칼리에 관한 일로 대화하고 있을 때 한마디 거드는 정도가 다였다.


그래도 타카슬은 매일매일 바닷속의 물고기들을 사냥해 배 위로 던져주고, 상어나 고래 같은 생물들을 열심히 쫓아내주고 있었다.


“너무 우리 편한대로 부려먹는 기분이 들어.”


기르불의 우려는 이해가 갔다. 하지만 실용적이지 않은 걱정이었다. 지원이 말했다.


“무괴는 혼자 사는 종족입니다.”

“음? 아니, 그렇다고 해도 지금은 다같이 있잖아.”

“인간, 지사리, 옥토끼, 나아가 개, 원숭이, 코끼리, 벌······이 동물들은 무리를 이루어 사는 게 천성입니다. 무리 내에서 자신의 역할을 나누고, 서로 돕는 게 본능에 각인된 행동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무괴는 혼자 있는 게 천성이라는 거야?”

“예. 곰이나 호랑이처럼······. 이런 생물들은 거의 평생을 혼자 살아갑니다. 예외는 어릴 적 형제들과 함께 있을 때, 그리고 번식기에 짝짓기를 할 때 정도이죠. 이런 생물들이 인간이나 지사리처럼 외로움이라는 걸 느낀다면 제정신으로 살 수 없을 겁니다.”


기르불은 조용히 그녀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지상에 대해서는 지원이 자신보다 전문가이고, 또한 그녀의 말이 논리적으로 꽤 타당하니 납득할 만 했다.


기르불의 시야에는 일행의 배와 약간의 거리가 있는 곳에서 타카슬이 등만 내놓고 주변을 헤엄치는 것이 잘 보였다.


물에 흐려져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그는 처음 만칼리를 떠날 때에 비해 굉장히 커져 있었다.

중생들이 건강한 정신을 가지려면 건강한 육체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는 아주 건강한 육체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정신 쪽도 별로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정말로 기우에 불과했던 걸까.


“기르불, 저희가 만난지 얼마 안 됐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지원이 기르불의 램프를 옷 속에 집어넣어 배 위에 올려놓으면서 말했다. 기르불의 시야가 차단되었고, 그가 볼 수 있는 건 지원의 뱃살과 아랫가슴 뿐이었다.


“그건 왜?”

“그때 기르불은 고압적인 말투를 쓰려고 부던히 노력하셨습니다. 지금은 많이 유해지셨죠. 그렇지 않습니까?”


기르불은 램프의 바람구멍을 통해서 튀어나와 지원의 옷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지원은 배 위에서 불타는 기르불을 빛을 막기 위해 눈 아래쪽에 손바닥을 세웠다.


“기르불, 당신 빛 때문에 별이 안 보입니다.”

“야, 내가 언제 그랬다고?”

“모르셨습니까? 처음 합류했을 때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너희가 나의 인도를 받을 인간들인가?’”

“따지고 보면 너도 처음에는 좀 그런 식으로 나오지 않았던가?”


기르불은 반박을 위해 지원의 과거 언행을 떠올려보려 애썼다. 지원은 그를 기다려주지 않고 말했다.


“옛날 일을 따지고 들자는 게 아닙니다. 제 말은, 저희는 계속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맞춰가는 식으로 변한다는 겁니다. 당신이 지사리의 왕제 기르불에서 공작대의 경호원 기르불로 변해갔고, 츠카도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저희에게 마음을 열어가고 있듯이 말입니다.”


기르불은 츠카가 지원을 죽이려 들던 것을 떠올렸다. 그때 온갖 악바리를 쓰던 모습은 지금의 츠카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무괴는 그렇지 않습니다. 저들은 굳이 동족에게 자신을 끼워맞추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이 충분히 강합니다. 그러니 신경쓰실 것 없습니다.”

“그럼 그러지 뭐. 야, 근데 너도 좀 변했어. 알지?”

“무엇이 변했습니까?”


지원은 순수하게 궁금함만을 담아 물어보았다. 기르불은 자신도 지원의 옛날 대사를 꺼내들어서 그녀를 부끄럽게 만들어보려고 기억을 더듬었다.


지원은 그동안 하늘을 바라보면서, 옷 속에 품은 램프에서 새어나오는 온기를 느끼고 있었다. 이전의 기르불이었다면 감히 지사리를 천 속에 감금하려 드는 거냐면서 따져들었을 것이다.


지원에게 문득 가슴이 따뜻해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그녀는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기르불은 얌전히 배 위의 램프 속에 들어 있었다. 가슴이 따뜻할 이유는 없었다.

지원은 이상함을 느꼈다. 예전에 읽었던 책 중에, 인간이 극도의 추위에 장기간 노출되면 어느순간 추위를 더위로 착각하고 옷을 훌훌 벗어던져 결국 동사해버린다는 사례를 소개한 것이 있었다. 전직 설산 모험가의 자서전 겸 생존 수칙 모음집이었는데, 꽤 흥미롭게 읽었고 실제로도 많은 도움이 됐던 책이었다.


지금은 기온이 낮지는 않았지만 바람이 많이 불고 습도가 높았다. 지원은 자신이 별구경에 열중하느라 바닷바람에 너무 오랜 시간 체온을 뺏긴 탓에 이상증세가 나타난 것이라 판단했다.


“전 이만 내려가야겠습니다.”

“그래. 그러자. 나도 가져가고.”

“알겠습니다.”


지원은 옷 속에서 램프를 빼내 손에 들고 조종실 위에서 내려왔다. 조종실 안으로 들어가자, 거기에서는 찬호와 츠카, 루니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위에서 뭔 얘기했냐?>


루니가 물었다. 지원은 기르불을 천장에 걸어놓고 그에게 대답을 떠넘겼다.


“기르불이 대답해줄 겁니다.”

“그냥 뭐······옛날 이야기 좀. 유찬호. 내가 예전하고 지금의 말투가 많이 다른가?”


찬호가 망토 속에서 팔짱을 끼며 뭐 그런 걸 물어보냐는 듯이 대답했다.


“음? 몰랐어요? 기르불 옛날에는 좀 거북했어요. 그래도 선넘는 말은 안 하니까 그런갑다 했죠.”

<옛날에는 어땠어?>


츠카가 또다시 새로운 이야기를 갈구했다. 루니도 옆에서 약간의 흥미를 보였다. 기르불은 찬호의 입을 감싸서 그의 발언을 막으려고 했다.


지원은 발을 마음껏 뻗지 못할 정도로 작은 조종실의 한구석에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문득 시선을 느낀 찬호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는 그대로 굳어서,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기지 못했다.


이윽고 다른 사람들도 지원을 돌아보았다. 지원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저를 보십니까?”


찬호는 손을 휘휘 저어 기르불을 치운 뒤 웃음기 띈 얼굴로 말했다.


“지원, 웃을 줄 아네요?”

<어, 그렇네. 너 방금 웃었다.>

루니도 거들었다. 지원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찬호는 헤실헤실 웃으면서 떠들어댔다.


“맨날 엄격, 근엄, 진지하게 얼굴 굳히고 있는 것보다 그게 훨씬 좋아보여요. 이제 주브만칼리에서도 빠져나왔겠다, 웃으면서 다녀보시는 게 어때요?”


기르불도 중얼거렸다.


“뭔가 바뀐 것 같더라니, 얼굴 표정이 변했던 거구나······. 그게 네가 무리에 적응하는 방식이야?”


찬호와 기르불은 지원의 변화에 즐거워했다.

하지만 루니와 츠카는 그녀의 정서가 그 둘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눈치챘다. 지원의 눈가는 쑥쓰러움이나, 놀라움이 아닌 두려움으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녀가 벌떡 일어섰다.


“저······저는 잠시 바람을 좀 쐬야겠습니다.”


지원은 허겁지겁 문을 비틀어열고 뛰쳐나갔다.

찬호는 그녀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루니는 염력으로 그를 뒤로 잡아당기고 문을 닫았다.


<혼자 있게 해 줘. 쑥쓰러워서 저러는 게 아니야.>


찬호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츠카는 곰곰히 생각에 빠졌다.


<마음이 열려버릴 정도로 동요했어. 루니, 너도 느꼈지?>

<느끼고 말고 할 것도 없어. 지원이는 내가 제일 잘 안다고.>


찬호는 자신이 뭔가 실수를 했음을 알아챘다. 그는 두려움에 떨면서 물었다.


“제가······헛소리를 했나요?”


기르불도 거들었다.


“나는 방금 전의 대화에서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을 잘 모르겠어. 아직 내가 인간에 대해 모르는 게 있는 걸까.”


루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지원의 심리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럴 자격이 있는 건 아니었다.


<쟤 반응을 설명하려면 옛날이야기를 좀 해야겠는데. 문제는 내 이야기가 아니라 지원이의 사생활이기 때문에 우리끼리 말할 수가 없어. 저 애가 다시 들어오면 허락을 맡고 너희한테 말해주도록 할게. 그렇다고 나가서 데려오지는 말고, 혼자 있을 수 있게 시간을 줘.>

“아니, 제가 그렇게까지 막무가네는 아니거든요. 그냥 지원이 웃길래 좀 들떠서 그랬어요.”


찬호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기르불도 램프 안에서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츠카는 바깥을 바라보았다. 흐릿한 창문 너머로, 조종실의 불빛이 새어나가 지원의 옆얼굴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밤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루니가 찬호의 말에 대답했다.


<널 탓하는 게 아니야. 나도 좀 기뻤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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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을 모르는 무괴 22.06.25 16 2 11쪽
31 거짓말 22.06.24 19 2 9쪽
30 4형제의 배 이야기 +1 22.06.22 36 3 9쪽
29 왕검 코츠불 22.06.21 17 2 10쪽
28 평화 22.06.21 24 2 13쪽
27 도마뱀 꼬리 +3 22.06.19 38 2 11쪽
26 추적대, 공작대, 구출대 22.06.19 22 2 10쪽
25 공중지원 요청폭격 +2 22.06.18 34 2 11쪽
24 주브만칼리의 상식 22.06.17 21 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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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우물 안에는 개구리, 아루신 안에는 옥토끼 22.06.12 19 2 10쪽
16 오월동주 22.06.12 30 4 9쪽
15 옥토끼의 본능, 본성 22.06.11 20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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