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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냐 님의 서재입니다.

돛대 없는 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훙냐
작품등록일 :
2022.05.27 23:51
최근연재일 :
2022.12.05 15:08
연재수 :
64 회
조회수 :
1,951
추천수 :
208
글자수 :
296,472

작성
22.06.24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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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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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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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거짓말

DUMMY

지원은 츠카에게서 기대 이하의 답을 들었다.


그는 일단 자신이 본 것들 만큼은 생생하게 기억했다. 거리의 모습, 태양궁의 자태,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까지. 하지만 정작 그 거리의 어디에 은행이나 경찰서, 군사 시설, 교도소 같은 중요 시설이 위치하는지는 몰랐다.


카추샤는 평범한 인간 여자 같았으며, 어떤 속셈도 느껴지지 않았다고 한다.


“어떤 대화를 나누셨습니까?”

<내가 누구이고, 왜 여기에 왔으며, 다른 옥토끼는 어디에 있는지 물어봤지.>


아마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츠카와 대화했다는 그 여자가 카추샤가 아닌 대역이거나, 카추샤가 맞는데 이전에 다른 옥토끼를 만난 적이 있어 텔레파시로부터 생각을 방어하는 법을 익힌 것이거나.


그게 아니라면 카추샤는 3일만에 옥토끼를 영원히 감금하고 고문할 각오를 세운 미친년이라는 뜻이 된다.

그녀 정도 되는 인간이 ‘영원’이라는 단어를 믿을 리 없다. 언젠가는 감금에 빈틈이 생기고, 츠카가 탈출을 할 것이며 그러면 감당할 수 없는 후환이 닥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었을 텐데······.


“카추샤의 외모를 묘사할 수 있겠습니까?”

<종이를 주면 그림으로도 그려줄 수 있어.>

“종이는 없지만, 이 배 어딘가에 그림을 그릴 만한 뭔가가 있을 겁니다. 찾아보겠습니다.”


지원은 이야기를 잠시 멈추고 하늘을 바라봤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넓은 바다에는 산도 없고 건물도 없어 아무것도 시야를 방해하지 않았다. 수평선 위로 펼쳐진 하늘을 보면 마음이 탁 트이는 수준이 아니라, 마음이 가슴 밖으로 흘러넘치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곧 해가 질 겁니다. 일단 들어가서 잘 준비를 합시다. 이야기는 내일 이어서 하는게 좋겠습니다.”


지원은 츠카와 함께 조종실 안으로 들어갔다. 조종실 안에서는 찬호와 루니와 기르불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배 밖에 있는 타카슬도 한마디씩 끼어들고 있었다.


“어 지원, 얘기 다 했어요?”


찬호가 말했다. 그런데 지원이 조종실 문을 닫았을 때, 그는 표정을 구기며 괴상한 소리를 냈다.


“억······.”


지원은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감각을 느꼈다. 뭐지? 주브만칼리에서 병이라도 걸렸나? 아니면 탈출할 때 어디 잘못 부딪히거나 다치기라도 했나?


“왜 그러십니까?”


찬호는 손으로 입과 코를 막으면서 말했다.


“지원, 냄새나요.”

“예?”

“지금까지 계속 같이 있으니까 몰랐는데, 잠깐 떨어져 있으니까 바로 냄새가 나네요. 하긴 거의 일주일은 안 씻었으니까······. 잠깐, 루니, 혹시 저도 냄새나요?”


루니가 흔들리는 키 위에 걸터앉아 균형을 잡으면서 텔레파시를 보냈다.


<응. 몰랐냐?>


찬호는 충격받은 표정으로 조종실 문을 열고 나갔다.


“해가 지기 전에 좀 씻어야겠어요. 츠카, 저좀 도와주실래요?”


츠카는 깡총깡총 뛰어서 그를 따라갔다.


밖을 바라보니, 찬호는 벌써 몸에 두른 망토와 속옷까지 다 벗어버린 후였다. 츠카는 양동이에 바닷물을 퍼올려줬고, 찬호는 그걸 받아 자신의 머리 위로 계속 쏟아내고 있었다.


찬호는 알몸이었기에 지원은 그쪽을 보는 걸 그만뒀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기대서 눈을 감았다. 루니는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어차피 가나에 가면 하나부터 열까지 다 취조 들어갈 텐데 뭐하러 벌써 귀찮게 해.>

“놔둬, 궁금한 게 많겠지.”

기르불이 천장에 매달린 등 속에서 말했다.


지원이 말했다.

“루니, 저도 일몰 전에 씻어야 하니까 빨리 끝내달라고 찬호한테 전해 주십시오.”

<근데 이제는 이름으로 부르네? 예전에는 아저씨라고 해줬잖아.>


지원은 놀라서 눈을 번쩍 떴다. 그녀는 기르불이 들었을까봐 걱정했지만, 그가 아무 반응이 없는 것을 보니 지원에게만 보낸 텔레파시였다.


그녀는 말로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글자들을 떠올렸다. 루니는 그 글자들을 읽었다.


<찬호랑 기르불한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고? 쟤네는 사람 얕잡아보는 그런 부류는 아닐 텐데. 그리고 입도 무거워서 네가 부탁만 한다면 굳이 다른 사람들한테 소문을 퍼뜨리지도 않을 거야.>

<아저씨라고 불리고 싶어요?>

<그건 아니지만. 하긴 네가 나이들고 다른사람들한테 할머니 소리 들을 때도 나한테 아저씨라고 부르면 이상하긴 하겠네.>


문득 지원은 자신의 늙은 모습을 상상했다. 60살 생일에 그녀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애초에 그때 살아는 있을까? 간첩질도 젊어서 체력이 받쳐줘야 가능하지 그때되면 그녀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지원은 지금까지 수십 번은 느꼈을 초조함에 휩싸였다. 나이들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무언가 진척을 이뤄내야 했다.


그때 루니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갑작스럽게 지원이 자신의 마음을 닫아버린 것에 의아해했다. 심지어 지원은 말로 이어가지도 않고 별다른 몸짓을 취하지도 않았으니, 루니 입장에서는 갑작스레 눈앞에 벽이 나타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지원은 닫힌 마음의 장벽, 생각의 울타리 속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들킬 염려 없이 안전하게 열등감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녀는 루니가 부러웠다. 나이가 들 것을 염려하지 않고, 몸이 상할 것을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옥토끼라는 종족이 부러웠다.


루니는 자기 귀가 잘린 것에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잘려나간 귀도 영겁의 세월이 지나다 보면 언젠가는 주인에게 돌아올 것이라 믿고 있었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주브만칼리가 영보교를 섬기는 마음으로 귀를 보관한다고 하더라도 몇 천년, 몇 만년 동안이나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원은······어쩌다 바위에 다리를 세게 부딪히기만 해도 다음날까지는 그쪽 다리가 계속 욱신거린다. 그러면 그동안의 활동이 크게 제한되고, 장기적으로는 엄청난 손해로 다가온다.


지원은 지독한 자기연민을 느끼고는, 스스로 정말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자괴감을 느꼈다. 그럼에도 도저히 떨쳐낼 수 없었다.


<지원아?>


루니가 지원을 부르며, 계속해서 닫혀있던 그녀의 마음의 문을 두드렸다. 지원은 떠올렸던 생각들을 싹 다 지워버린 후 마음을 열고 대답했다.


“찬호한테 언제 다 씻냐고 전해주기나 하세요. 아저씨.”

<무슨 생각했어?>

“뭐······잠깐 졸려서, 딴 생각 좀 했어요.”


지원은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녀는 옥토끼에게 마음을 열되 감정을 읽히지 않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루니는 지원이 거짓말할 때 특유의 죄책감과 불안함을 느끼고 있음을 텔레파시로 감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루니는 지원이 거짓말을 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루니는 지원에게 진심을 말하라고 요구하지 않았고, 그녀에게 순순히 속아주었다.


<그래.>


그리곤 루니는 찬호에게 지원의 말을 전해줄 겸, 그가 씻는 걸 도와줄 작정으로 밖으로 나갔다.


지원은 이마를 감싸고 한숨을 내쉬었다.


천장에서는 기르불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조종실 안에는 그와 지원만이 있었다. 해가 지면 기르불이 일행의 유일한 광원이 될 것이다.

기르불은 밤에 일행이 안전하게 잘 수 있도록 낮밤이 바뀐 생활을 했다. 즉, 지금이 기르불의 입장에서는 이른 아침인 것이다.


지원은 스스로를 비웃었다.


기르불은 언제든 모두를 태워버릴 수 있는 막강한 힘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단 한 번도 지원이나 찬호 혹은 다른 일행을 업신여긴 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을 헌신해 일행을 경호하고 있었다.


루니 또한 일행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귀를 포기했다. 비록 불사의 종족이기는 하지만, 옥토끼는 불사이기 때문에 오히려 오랜 시간 무뎌지지 않고 지속되는 고통에 더욱 민감하다. 루니는 지금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을 뿐 계속에서 잘려나간 귀에 심하게 아린 격통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츠카는 마약과 방부제에 절여진 적이 있고, 타카슬은 자신의 보호자를 잃었다.


찬호는 다리가 반쯤 잘린 적이 있었다.


그들은 단 한 번도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거나 칭얼대지 않았다. 그들 모두가 지원은 쳐다도 볼 수 없을 만큼 성숙하게 자신의 고난에 대처하고 있었다.


지원은 스스로를 한심하다 느끼며 비웃었으며, 동시에 제어할 수 없는 자괴감을 느껴 조용히 눈물 흘렸다.


그녀는 기르불이 흐느끼는 소리에 잠에서 깨기 전에, 츠카와 루니가 요동치는 감정의 파장을 감지해버리기 전에, 자신만의 특별 처방을 스스로에게 적용시켰다. 지원은 조종실 문을 박차고 나가 바다를 향해 뛰어들었다.


타카슬이 놀라서 주둥이로 허리를 툭 건드릴 때까지 숨을 참은 다음, 지원은 배 위로 올라갔다. 일행에게는 자신의 냄새가 너무 심한 것 같아 차라리 목욕을 해버렸다고 변명했다.


모두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걸 알았지만, 곧이곧대로 믿는 것처럼 행동했다.


작가의말

후원금을 받았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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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폭력을 중재하기 위한 폭력 22.06.28 18 2 9쪽
34 무괴의 본능, 본성 +2 22.06.27 26 2 9쪽
33 달빛 없는 밤 22.06.26 21 3 9쪽
32 이름을 모르는 무괴 22.06.25 16 2 11쪽
» 거짓말 22.06.24 20 2 9쪽
30 4형제의 배 이야기 +1 22.06.22 36 3 9쪽
29 왕검 코츠불 22.06.21 17 2 10쪽
28 평화 22.06.21 24 2 13쪽
27 도마뱀 꼬리 +3 22.06.19 38 2 11쪽
26 추적대, 공작대, 구출대 22.06.19 22 2 10쪽
25 공중지원 요청폭격 +2 22.06.18 34 2 11쪽
24 주브만칼리의 상식 22.06.17 22 2 11쪽
23 살기 22.06.16 24 2 11쪽
22 달콤한 휴식 22.06.15 19 2 9쪽
21 구조대 +1 22.06.14 24 3 10쪽
20 화령 +1 22.06.14 28 2 11쪽
19 구조요청 +2 22.06.13 45 2 10쪽
18 서로만, 옥토끼와 인간의 도시 22.06.13 23 2 10쪽
17 우물 안에는 개구리, 아루신 안에는 옥토끼 22.06.12 19 2 10쪽
16 오월동주 22.06.12 30 4 9쪽
15 옥토끼의 본능, 본성 22.06.11 20 3 11쪽
14 적과의 동행 22.06.10 26 4 10쪽
13 영원에 고립된 옥토끼 22.06.09 25 4 9쪽
12 협박, 작은 보복 22.06.07 23 4 11쪽
11 제 3의 세력 22.06.07 22 4 11쪽
10 실패는 결말이 아니다 +2 22.06.06 29 3 11쪽
9 사상검증 +1 22.06.05 29 5 10쪽
8 임무 실패 22.06.04 23 5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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