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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냐 님의 서재입니다.

돛대 없는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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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냐
작품등록일 :
2022.05.27 23:51
최근연재일 :
2022.12.05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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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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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06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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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실패는 결말이 아니다

DUMMY

지원과 기르불이 찬호에게 돌아왔다.


약발이 다 떨어져 가는지, 그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신에게 간절하고 애절한 기도를 올리고 있었는데, 그 신앙심이 아니었다면 진작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지원은 무릎을 꿇고 그의 상태를 살폈다.


찬호는 다른 곳은 다치지 않았지만, 역시나 왼쪽 다리 정강이는 부러졌다. 천만다행으로 뼈가 살갗을 찢고 튀어나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촉박해도 가나 대륙에는 3주 뒤에나 도착할 텐데, 그러면 치료를 받아도 절름발이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어쨌건 그들은 움직여야 했다.


지원은 땅을 파서 기르불을 내려놓았다.


“부목으로 삼을 만한 걸 가져오겠습니다. 찬호를 부탁합니다.”

“그래, 빨리 다녀와라.”


지원은 서둘렀다. 그녀는 다리가 계속해서 움직이도록 내버리고, 머리로는 생각을 돌렸다.


퇴각 경로는 미리 생각해 두었다. 하염강을 따라 북상해 해안까지 나아가고, 거기서 기르불을 영혼 형태로 가나 대륙에 출동시켜 구조를 요청하는 것이 애초의 계획이었다.


옥토끼와 무괴를 치워버렸으니 하염강을 사용하는 건 문제가 없다. 진짜 문제는 찬호였다. 그가 앞으로의 여정을 감당할 수 있을지 의심됐다.


전장에서, 다리를 못 쓰는 군인은 같은 무게의 모래주머니와 그 가치가 같다. 끊임없이 먹여주고 재워주고 얼러줘야 하지만 결국 쓰임새는 진지구축용 벽돌일 뿐이다. 부상병이 그 신세를 면하려면 재빨리 전선에서 빠져줘야 한다.


그래서 지원은 퇴각을 선택했다. 문제는 전쟁터를 벗어나면 또다른 전쟁터가 펼쳐진다는 것이다. 지원은 찬호를 숲과 산과 절벽과의 전쟁에서 피신시켰다. 하지만 물가는 습하고 머리 위에는 태양이 작열한다. 이제 그들은 습기, 질병, 햇볕이라는 또 다른 자연과의 전쟁에 노출되었다.


지원의 발이 멈췄다. 그녀의 다리는 주인을 무사히 명죽림 앞까지 대령했다.


환청의 숲이 바람과 함께 나그네를 끌어들이고 있었다. 지원은 숲의 가장 바깥쪽에 있는 대나무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칼을 꺼내 그 대나무 밑동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숲이 쉬지 않고 살목 행위를 규탄했다. 지원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는 대나무 3그루의 허리를 잔인하게 절단한 후 가지를 휘어잡고 질질 끌고 갔다. 재수 없는 숲의 발치에 침을 탁 뱉어주는 것도 있지 않았다.

입에 벌레가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벌목한 대나무들은 바위 절벽 위에서 오체분시됐다. 지원은 마디마다 절반으로 쪼개진 나뭇조각을 모아서, 절벽 아래에 숨겨둔 가방을 꺼내 그 안에 쑤셔 넣었다.

가방을 숨겨둔 곳에는 찬호의 보따리도 함께 있었다. 지원은 잠깐 생각하다가, 돌아와서 다시 가져가기로 하고 도로 짚을 덮었다.


보따리, 그러니까 감시장비는 반드시 가지고 돌아가야 했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부숴서 핵심 부품이라도 주머니에 넣고 귀환할 생각이었다. 그것은 지원의 실패를 변호해줄 것이고, 그녀가 ‘돛대 없는 배’에 소속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그녀가 찬호를 안내하고 그를 위해 단소를 연주하고 땀을 흘려주는 것도 그걸 위해서이다. 찬호는 돛대 없는 배 소속 군인이다. 지원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소개장이니, 그를 반드시 살려 보내야 했다.


임무가 실패로 돌아간 지금, 지원은 최대한 ‘봐줄 만한’ 실패를 그들에게 보여줄 작정이었다.


‘동료와 함께였던 적이 처음이었던지라 실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를 부축해 이곳까지 데려오는 데 성공했고, 기르불을 무사히 땅속으로 돌려보냈으며, 감시장비도 온전하게 보존해냈습니다. 돛대 없는 배에 입대할 기회를 주신다면 앞으로는······.’


지원은 걸음을 돌려 강으로 뛰어갔다.


그녀는 흐르는 물에 머리를 처박았다.

저런 구차한 변명 따위는 할 필요도 없었다. 지원은 실패자이다. 처음부터 신용을 다시 쌓아야 하는 처지였다. 몇 년의 노력이 무너지니 눈물로 절로 나왔다.


그러나 감정이란 댐과 같아 한 번 무너지면 손쓸 틈이 없으니, 기르불과 찬호 앞에 서기 전에 넘치는 억울함을 진정시켜야 했다. 마침 이럴 때 쓰는 특효 처방이 있다.


지원은 폐 안의 모든 공기를 물 안으로 방출했다. 그러자 북받치는 설움이 차오르는 숨으로 변했다. 슬픔이 아닌 생존 본능이 머리를 뿌옇게 만들었다. 지원은 속으로 10초를 더 세고 머리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뇌는 인생 계획의 무산보다는 생존의 희열을 우선 느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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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밭을 헤치고 들어가니 찬호는 하늘을 향해 누워 절실하게 경을 외고 있었다.

지원은 대충 뼈 위치를 맞추고 부목을 묶은 다음 그를 부축했다. 아주 고된 작업이었다. 찬호가 이를 바스라질 정도로 심하게 악물기에 지원의 여벌 옷을 물려주어야 했다.


그들이 있는 곳은 물이 불어나면 잠기는 곳이다. 지원은 동료들을 높은 곳으로 옮겨야 했다.


“완전히 붙으십시오. 다리에 힘 주지 마시고, 저한테 매달리시는 겁니다.”


찬호는 입에 옷을 물고 끙끙대느라 대답도 못하고, 몸 전체를 심하게 떨고 있었다. 주머니 안에서 기르불이 뭐라고 말했다. 잘 안 들렸다.


지원은 보따리를 숨겨둔 곳으로 돌아와 찬호를 눕혔다. 윗부분이 튀어나오도록 기울어진 바위 절벽이 훌륭한 은신처가 되어줄 것이다.


지원은 머리를 짚고 해야할 일을 점검했다. 오래지 않아 그녀는 행동에 나섰다. 대나무와 그 줄기가 섬세하고 빠르게 엮였다.


“내가 도울 건 없을까?”

“찬호를 지키시고, 주위를 살피십시오.”


지원은 찬호를 기르불에게 맡겨두고, 묶은 대나무들을 바닥에 깔고 땅에 꽂고 벽에 기대어 은신처를 급조했다.


혼자서 모든 일을 도맡아 했지만, 전혀 힘들거나 버거워하는 낌새가 없었다. 이 일은 그녀가 질리도록 반복해왔던 작업이다. 몇 시간도 안 되어서 퍽 안락한 잠자리가 만들어졌다. 지원이 유일하게 고생한 시간은 찬호를 흙바닥에서 대나무 장판으로 옮길 때였다. 그 작업이 끝나자, 찬호는 지쳐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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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질 무렵 찬호가 어느정도 정신을 차렸다. 여전히 심하게 떨고 있긴 했지만 대화가 가능했다.


“다리는 어떠십니까?”

“이제 좀 괜찮아졌어요. 고마워요······.”

“이를 악물지 마십시오. 잘못하면 이가 깨집니다.”

“네······.”


두 인간 모두 더 이야기를 이어나갈 기력이 없었다. 기르불이 걱정스레 물었다.


“지원이 너는 뭘 좀 먹어야 하지 않겠어?”


지원은 흙벽에 기대앉은 채 얼굴을 감쌌다. 그녀는 몹시 졸렸지만, 자기 전에 음식을 구해 먹어야 내일 뭐라도 할 기운이 날 것이다.


“예, 저는 밖에 다녀올 테니, 기르불은 찬호를 지켜주세요.”

“혼자서? 이제 해도 졌는데 내가 없어도 되겠어?”

“당신들과 함께하기 전에는 원래 혼자였습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지원은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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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놀랍도록 화사했다. 생각해보면 이번 여정에서 달을 제대로 올려다본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명죽림은 우거져서 하늘이 거의 보이지 않고, 쉴 때는 하루종일 기르불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달빛이 있다면 그 무괴도 강바닥에 박힌 채 움직이지 않을 테지. 무괴가 수면 위로 나오지 않는다면 옥토끼도 거동을 주의할 테니, 마음놓고 낚시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원은 천천히 강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신발을 물에 잠기게 해두고는, 발목을 간질이는 수면을 느꼈다. 귀에는 갈대가 저마다의 리듬으로 흩날리는 소리가 들렸다. 옛날 일이 떠오르는 소리였다.


처음으로 명죽림 횡단에 성공한 건 2년 전이었다.

지원은 배가 고팠고 낚시를 시도했다. 하지만 환청에 너덜너덜해진 정신머리 때문에 제대로 된 고기는 구경도 못하고 머리만 대충 뜯어낸 미꾸라지 3마리를 생으로 삼켰다가 배탈이 나서 귀환했다. 이제 그런 실수는 하지 않는다.


그녀는 물이 반쯤 고여 있는 곳을 찾아, 흙과 나뭇조각을 세워 물이 들어오고 나오는 통로를 막았다. 이윽고 격렬한 첨벙거림이 얕은 물가 바위나 진흙 속에서 잠자고 있던 물고기들을 깨웠다. 독 안에 든 물고기들은 도망치려고 했지만, 어느새 지원의 손에 붙들려 마른 땅 위로 던져졌다.


남은 물고기가 도망치는 걸 염려할 필요 없었기 때문에 사냥은 여유로웠다. 지원은 물고기를 건지자마자 칼로 대가리를 찍어내려 즉사시켰다. 그렇게 8마리를 죽였다.


지원은 정말 형편없는 몰골로 은신처에 돌아왔다. 온몸에 진흙과 갈대를 덕지덕지 묻히고는 품속에 축 늘어지고 미끌미끌한 물고기들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찬호는 그 어느때보다도 지원에게 애정을 느꼈다.


그녀는 사냥물들을 바닥에 내버려두고 강물에 목욕을 하기 위해 다시 떠났다. 잠시 후 지원은 더 쫄딱 젖었지만 한결 깨끗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지원은 옷까지 통채로 씻었기 때문에 그걸 말리기 위해 벗어서 널어두고 알몸으로 기르불 옆에 있었다. 찬호는 딱히 흥분한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무례하게 보일까봐 눈을 감았다.


어느새 잠이 들었다. 지원은 그를 흔들어서 깨웠고 코앞에 아주 달콤한 냄새가 나는 살덩이가 있었다.


찬호는 홀린 듯이 그것을 앙 물었다. 무슨 종인지도 모를 구운 생선은 간도 안 돼 있었지만 씹을 때마다 침이 넘쳐흘렀다. 지원은 찬호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을 때까지 생선을 먹여주었고, 그가 먹으면서 잠에 들자 턱을 탁 쳐 마저 삼키도록 한 다음 자신도 남은 조각을 입에 욱여넣으면서 잠을 청했다.


기르불은 환기를 위해 조금 열어놓은 지붕에 고개를 빼곰 내밀고는 주위를 경계했다. 동시에 곤히 잠든 두 인간을 조용히 지켜보면서 늘 느꼈던 막중한 책임감을 되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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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입국 22.07.02 20 2 10쪽
36 윈스반 22.07.01 18 2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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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4형제의 배 이야기 +1 22.06.22 36 3 9쪽
29 왕검 코츠불 22.06.21 17 2 10쪽
28 평화 22.06.21 24 2 13쪽
27 도마뱀 꼬리 +3 22.06.19 38 2 11쪽
26 추적대, 공작대, 구출대 22.06.19 22 2 10쪽
25 공중지원 요청폭격 +2 22.06.18 34 2 11쪽
24 주브만칼리의 상식 22.06.17 21 2 11쪽
23 살기 22.06.16 24 2 11쪽
22 달콤한 휴식 22.06.15 18 2 9쪽
21 구조대 +1 22.06.14 24 3 10쪽
20 화령 +1 22.06.14 27 2 11쪽
19 구조요청 +2 22.06.13 45 2 10쪽
18 서로만, 옥토끼와 인간의 도시 22.06.13 23 2 10쪽
17 우물 안에는 개구리, 아루신 안에는 옥토끼 22.06.12 19 2 10쪽
16 오월동주 22.06.12 30 4 9쪽
15 옥토끼의 본능, 본성 22.06.11 20 3 11쪽
14 적과의 동행 22.06.10 26 4 10쪽
13 영원에 고립된 옥토끼 22.06.09 24 4 9쪽
12 협박, 작은 보복 22.06.07 22 4 11쪽
11 제 3의 세력 22.06.07 22 4 11쪽
» 실패는 결말이 아니다 +2 22.06.06 29 3 11쪽
9 사상검증 +1 22.06.05 29 5 10쪽
8 임무 실패 22.06.04 23 5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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