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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랑깜이의 서재

판게아의 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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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랑깜이
작품등록일 :
2020.05.11 22:38
최근연재일 :
2020.06.1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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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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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게아의 중원 (17화)

DUMMY

저 멀리 울창한 나무숲 사이에서, 세 사람은 한꺼번에 나왔다. 잠시의 지체도 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여민은 왠지 가슴을 졸였다. 셋 중 한 명은 알아 볼 수 있었고, 나머지 둘은 못 알아봤다. 손가람이야 본적이 없으니 당연한 얘기. 여민이 못 알아 본 건, 힘을 되찾아 커다란 변모를 한 율이 아니었다. 율에게서 느껴지는 이 독특한 이질감은 세상에서 느껴 본 적이 없는 것. 모습이 중요하지 않았다.


헌데, 저 여인. 귀인의 옆에서 걸어오고 있는 활을 등에 맨 여인.


여민은 머릿속에서 그날의 그림을 펼쳐놓고 들여다보았다. 얼굴도, 모습도, 심지어 검은색 무복까지. 옷차림까지 그대로인데, 한 동안 알아보지 못했다. 여민의 그림 속 그때 그 여인은 저런 사람이 아니었기에. 성큼성큼 내딛는 발걸음에 진중한 여유가 찍혀 나왔다. 흔히 자신감이라고 하는 품새.


어느덧 첸첸에게 강자의 면모가 생겨나고 있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 중 여민이 가장 앞에 나와 있었기에, 여민의 옆을 지나칠 때 첸첸이 여민을 알아봤다. 가까이 와서야 첸첸도 이자가 그때 봤던 여민이라는 자임을 알아보고 상당히 놀랐다. 여민 또한 못 알아 볼 정도의 변모를 하였으나, 그 때문은 아니었다.


‘이자 또한 기어이 여기에 이르렀구나. 하늘의 뜻은 이자에게도 주어졌나보구나.’


그렇게 율의 일행은 여민을 지나쳐, 장백진인 앞에 도달해 섰다. 잠시 서로를 느껴보던 중, 장백진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HI”


의아함이 모두에게 던진 침묵.


“아, 원랜 이게 아니었다고 했었지. 뭐였더라? ho, hu.. hous?”


율이 슬며시 미소 지었다.


“houston.”


장백진인은 환하게 웃었다.


“맞아, 맞아. 그랬었지. 하하하. 귀인은 결국 말대로 되었구려, 또 다시 길을 가셔야 하나보오. 들꽃 하나 꺾어와 장백산을 오르겠다하셨는데, 내가 아직 여기다 묘비를 못 세워놔서, 그 약속은 못 지키시게 되셨소. 허허.”


장백진인 서무제. 이 이름을 들어 아는 모든 이들이 한번쯤 품어봤을 궁금증. 서무제는 왜 장백산에 은거하는가. 맹주를 위시한 몇 명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참 뭔가를 생각하던 율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벗이라도 됐던 모양이야? 과거 그랬던 사람이 한 둘 있었던 것 같긴 한데, 서무제는 없어. 혹시 만나면 기억이 떠오를까 했었지만, 전혀 안 나는데?”


장백진인이 뭔가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 이유는 들은 바가 있소. 전대의 귀인이 나와 만난 것은 우도 이후. 하여 무곡산에 이르러야 날 기억해낼 거라 했었지. 해서 택한 장소도 멀리 돌지 않을 장백산이었던 게고. 그땐 그저 반은 장난삼아 나눴던 얘기였는데, 나이가 들다보니 그 시절 생각이 많이 나, 말년에 장백산에 들었소.”


“...아, 아아! 그렇지. 그렇게 되겠구나.”


그랬다. 율. 본디 예언의 귀인은 기억이라는 유전자 정보를 다음 대가 계승할 수 있는 특이 생명체. 용과는 또 다른 의미로 불사의 존재였다.


우도에서 전승한 기억은 최초의 존재와, 그 이후 우도에 도달한 모든 귀인의 기억. 우도 이후에 생긴 기억이라면 아직 얻지 못한 것이었다.


전 대의 귀인은 엉뚱하게 위시를 때려 부쉈다. 그리고 그 선택에 영향을 끼쳤다는 이가 바로 서무제. 우도의 기억을 계승했는데도 하필 그 서무제가 없어서, 그간 무척이나 궁금하고, 의아했었다. 무엇보다 위시의 염려대로 유전자 정보의 소실로 인한 상실일 수도 있을 일.


그러나, 이유는 아주 간단한 곳에 있었던 것이다.


아직 만나지를 않았다. 그렇게, 인간 서무제에 대한 막연한 의구심을 거두고보니 왠지 모를 반가움도 들었다.


기분이 묘했다.


귀인의 기억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정도로 제법 많은 것을 나눴던 사이임은 분명했다. 거기다 자신의 떠올릴 수 있는 사람 중에 이만한 강자는 정말이지 드물었다. 한 둘이나 있었을까 말까, 역사에 없는 경지라는 말이 가히 틀리지 않았다. 왜 많은 것을 나눴는지를 알 것도 같았다.


“정말 많은 것을 알고 있네? 그럼 하나만 물어볼게. 어떻게 된 거야? 나와 용, 그리고 위시. 왜 결론이 그렇게 됐던 거야?”


장백진인의 인상이 한없이 깊어졌다. 이것은 장백진인 자신도 일생동안 생각했던 문제였다.


“내가 들어 알고 있는 사실로, 귀인과 흑안의 용, 그리고 철의 왕. 그 이야기의 시작이 해로 오천 년이 더 되었다 들었지. 그 무구한 역사에서 내가 보았던 모든 건 그저 찰나조차 못 될 파편. 고작 한 명의 인간 따위가 결론을 논할 수 없다는 것이 내 견해이오.”


이 자리에 있는 모두는 각자 다른 사유로 크게 놀랐다. 한 가지만 같았다. 오천 년이라는 세월에 대한 경외.


율은 신뢰할 만한 그릇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표정으로 장백진인을 보았다. 맞는 말이다. 이자가 가진 특수성을 너무 가벼이 여겼다. 한번은 최종에 도달하고, 다시 귀인과 조우한 인간. 자신과는 또 다른 시선에서 오랜 세월 숙고했으리라.


전 대의 귀인은 다른 선택을 했고, 그것을 율 자신에게 전했다. 무엇 때문에 그랬는지는 전하지 않고, 그냥 다른 선택을 했다는 것만 전했다. 무엇을 알리려 했던 걸까.


역시나, 오직 자신이 가보아야만 알 수 있는 일.


율은 눈을 감았다. 깊은 상념에 빠진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땐 웃었다.


“훗. 좋아. 그건 그렇고, 왜 온 건지는 알고 있지? 가지고 갔다 하던데?”


“물론. 산채 안에 있소. 그 사막에 산처럼 쌓여있어 하나 주워오긴 했는데, 그 뒤로 다시 보진 않았지. 나는 그 괴상한 물건이 참으로 싫더이다.”


“오호. 어쨌거나 잘 됐군.”


“어쩌시겠소? 바로 떠날 거라면 가져다 드리고, 겸사겸사 여독을 풀고 가시려거든 산채로 안내하겠소.”


율이 팔짱을 끼고 장백진인을 바라봤다.


“음, 하긴. 장백진인 당신도 시간이 필요할 테니, 겸사겸사가 좋겠네. 얼마나 걸릴 것 같아?”


“뭐가 말이오?”


“떠날 채비. 이 상황이면 누가 봐도 당연한 흐름 아니야?”


장백진인이 주먹을 몇 번 쥐락펴락했다.


“이보오, 귀인. 허허. 뭘 빼먹고 계산하시는 거 아니오? 앞전하고는 상황이 퍽 다를 텐데? 상황판단이 전 대에 비해 많이 부족하신 거 같소.”


율은 팔을 이리저리 꺾으며 몸을 푸는 시늉을 했다. 행동과는 다르게 즐거워보였다.


“호오. 그래요? 하긴 사람이 이렇게 모이면 위계 정리도 필요하지. 뭐가 얼마나 부족한지 해보시겠소?”


마주 본 두 사람의 얼굴이 흐뭇했다. 뭉클하기도 했다. 이백 여년의 세월을 넘어 이뤄진 재회. 장백진인은 정말이지 만감이 교차했다.


율은 그저 알 수 있었다. 기억엔 없는, 아직 만나지 않은 존재. 그럼에도 전해지는 것이 있었다. 연(緣). 첸첸의 그것과는 또 다른.


“HI. 당신에겐 정말이지 오랜만이겠군.”


“어서 오시오. 허허헛.”


그런 후, 땅쇠가 안내하여 다들 산채를 향해 한 걸음씩 내딛었다. 첸첸과 손가람도 걸음을 옮겼는데 장백진인이 그 자리에 서있었기에, 다가오는 둘을 맞이하는 모양이 됐다. 그가 두 사람에게 한번 씩 눈길을 주었다. 눈길을 마주한 둘은 깊은 무엇을 전해 받았다.


“여전히 살아오고 있었구나. 가끔은 그 모든 게 꿈이었나 싶을 때도 있었지.”


장백진인이 둘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런 후 다시 한 번 둘을 바라보았다. 첸첸과 손가람은 마음을 깊이 숙여, 인사했다.


“위대한 분을, 대를 이어 뵐 수 있어 영광입니다.”


“허헛. 그래, 잘 왔네. 잘 왔어.”



그렇게 모두를 산채에 들이고는, 술판을 벌렸다. 이 첩첩산중에, 방문객이 올 일도 없는 장소. 거기에 무려 신령이라 불리는 자가 기거하는 산채인데도, 어째선지 술은 차고 넘치게 있었다. 여하간 그랬다.


그리하여 도래하고만 무한반복의 지옥도. 이 자리에 유일하게 술을 마시지 않고 있는 혁우에게 닥쳐온 세상. 서로가 서로의 얘길 듣지 않는다. 그러면서 제각기 자기 말만 계속해서 되풀이 하고 있는 이 아비규환.


그 끝이 없을 것 같던 도탄에 빠진 세상에도 여명은 찾아오는 것인가. 사상자가 하나씩 죽어나갔다. 한 번에 두세 명씩 나자빠지기도 했다. 그 마지막에 저 짐승 같은 땅쇠라는 자가 남아, 장백산 꼭대기에 산다는 백호라는 신수를 흉내 냈다. 산채만한 흰 털의 범을 흉내 내던 짐승이, 벽을 타고 날아다니다, 기둥을 들이받고는 죽었는지 늘어졌다.


[콰-앙]


혁우가 산채의 문을 발로 걷어차고 밖으로 나왔다. 지옥을 뒤로하고 생환한 자의 모습. 마지막 힘을 다해 산꼭대기를 올려본다. 깊게 숨도 들이마셨다. 듣기로는 이 산의 주인이라는 백호가 저 위에 있다한다. 그 백호의 아가리 안이라서, 도리어 농사도 짓고 사람들이 살아간다고. 이 산채가 백호 저지선이라나 뭐라나. 땅쇠라는 이름의 짐승이, 족히 일백 번은 떠들었던 얘기. 그러면 뭐하리오, 결국 자기들끼리 다 죽어나가는 것을.


“후우. 산바람이 참 좋소.”


보이지도 않는 백호에게 말을 걸어본다. 그런 후, 혁우는 결국 그 자리에 쓰러졌다.



[짹,짹. 짹-짹]


“아으흐흐, 으.”


땅쇠는 눈을 떴을 때 이상함을 느꼈다. 눈두덩이에 가늘게 틈을 겨우 만들어 주변을 보았을 때, 아무도 없었다.


“신령님. 신령님.”


밖으로 나왔는데도 아무도 없다. 다들 떠났음은 진즉에 알았는데, 그저 빈자리를 일부러 느껴보았다.


이제 장백산엔 신령이 없다.


이 소식을 할매에게, 아재에게. 어찌 전해야 할까. 터덜터덜 주변을 배회하다, 평소 장백진인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장소에 이르렀다.


제철장.


가만히 서서, 지난 그날들을 둘러본다. 한참 그러다가 장백진인의 손을 많이 탔던 도구들을 하나씩 잡아봤다. 왈칵 눈물이 났다. 어찌하여 이러시는가. 어찌 이 모든 사람들을, 말 한마디 남기지 않고 떠나셨는가. 갑자기 솟구치는 마음에 손에 들고 있던 쇠망치를 집어던지려 팔을 휘둘렀다. 휘둘렀는데.


쇠망치가 날아간 벽에 뭔가가 붙어있다. 다가가 보니 장백진인이 남긴 글이 있다.


‘그래도 작별은 고하셨구나.’


벽에 한걸음 한걸음 다가섰다.


[땅쇠야. 이 안에 너를 위한 것을 남기고 간다. 아직 가르치지 못 한 것이 많으나, 언제든 올 날이다. 그것이 조금 빨리 왔구나. 야속하게 왔던 스승, 그저 야속하게 떠난다. 모두에게 잘 전하고, 모두를 잘 돌보아라. 백호를 만나거든 떠났다 전해주고.]


땅쇠는 흐르던 눈물을 훔쳐내고 벽을 만져보았다. 이 안에 뭘 남겼다는데,


“벽이면 벽이지, 안이 있다는 게 무슨 뜻이어요? 뭔 소리여요 이것이?”


아무리 살펴봐도 벽은 그냥 벽. 어차피 머리를 굴려봤자, 그런 방식으로는 평생 알아내지 못 할 자신을 깨달은 땅쇠. 저 멀리까지 가서는 느닷없이 벽을 향해 날아와, 몸으로 벽을 들이받았다.


[티이이-잉]


분명히 뭔가 박살이 나는 소리가 나야했지만, 어디서 뭔가가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벽은 가운데를 중심축으로 빙글빙글 회전했다.


여하간 땅쇠는 안으로 들어왔다. 벽 밖을 내다보니 선반이 하나 박살이 나 있었다. ‘원래는 저기 어딜 조작하는 것이었나?’ 생각해 보고는,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들어왔다.


“이것이 뭐시여요?”


장백산을 떠나 본 적이 없는 땅쇠에게는 더더욱 희한한 물건이, 서 있었다. 마치 사람처럼


광택이 전혀 없는 무쇠로 만든 갑옷. 그런 것이 서 있었다.


몸에 걸치는 방법도 어려워 낑낑대기를 반나절 만에, 땅쇠는 그 갑옷을 입어 볼 수 있었다. 어마어마하게 무거워, 서 있기도 힘들었다. 머리에 쓴 것은 눈구멍도 잘 안 맞아서 시야도 가리는 것이 이것은 필시 뭘 한참 잘 못 만든 것 같았다. 거기다 갑옷의 가슴에 커다란 새 날개 같은 모양의 표식을 붙여놔서,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았다.


땅쇠의 생각엔 하등 ‘쓰잘때기없는'’것 같은 걸 일부러 붙여 논 걸 보니.


“‘뭘 또 깨달으란 거여요. 말씀은 해주고 가셨어야 할 것 아니어요. 어이구, 참말로.’


땅쇠는 가슴에 붙은, [V] 모양으로 생긴 부착물을 양손으로 붙잡고 뜯어내보려 하였다.



- 18화에 계속


작가의말


마지막의 땅쇠 에피소드는 원래는 다른 장면인데, 그냥 그렇게 떠나고 말았다는 설정이 걸려서 좀 넣었습니다. 나중에 수정을 통해 통으로 날아갈 수도 있는 장면이 될 것 같네요. 


한 가지 더 


이번 주 들어 지방출장 중입니다. 이번 주 분량은 어떻게 하긴 했는데, 좀 불안하네요. 하여간 펑크내지 안도록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이건 스스로에게 남기는 멘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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