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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랑깜이의 서재

판게아의 중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무협

아랑깜이
작품등록일 :
2020.05.11 22:38
최근연재일 :
2020.06.12 09:00
연재수 :
1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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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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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03,7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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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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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판게아의 중원 (16화)

DUMMY

키 큰 나무들이 울창하게 들어찬 장백산 산기슭. 신형 하나가, 나무기둥들을 발로 차내며 날듯이 해쳐나가고 있다.


여민.


그러다 나뭇가지 하나를 밟고 도약하니, 어느새 허공.


‘율! 귀인이라 칭하는 율.’


볼 수도 없었던 그때의 장면을 떠올려본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디뎌 날아올랐다.


[휘이이-익]


[척-]


커다란 나무의 꼭대기까지 솟아오른 여민이, 굵은 나뭇가지 하나를 밟고 섰다. 뭔가 시도를 해보았는데, 흉내조차 낼 수 없음을 느꼈다.


‘이런 게 아니야. 좀 더 근본적인 다름이 있다.’


공간의 실존을 느끼게 되니, 그것을 만질 수가 있다. 만질 수가 있게 되니 디딜 수도 있다.


그런데,


더 이상이 없다. 이 앞을 지금의 여민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모르는 것이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앞을 넘어 간 존재를 봤기 때문에.


그럴 때, 저 아래에서 빠른 속도로 산을 오르고 있는 두 사람의 존재가 감지된다. 맹주와 혁우. 목적지가 같았지만, 동행을 하기도 껄끄러워 따로따로 향했는데, 장백산을 오르는 길에 마주쳤다.


맹주를 다시보자 잊고 싶었던 기억이 떠올라, 여민은 자신의 왼팔을 쳐다본다. 차라리 그때 잘라냈다면 속이 좀 더 편했을 것 같다.


환골탈태. 차원을 달리하는 변모를 거친 여민을 앞에 두고, 풍림방주는 여민의 무공을 폐하려던 뜻은 접어야 했었다. 남은 건 사생결단. 선택지는 그뿐이었다. 풍림방과 여민의 전면전을 피해가기 어려워 보이는 상황에, 여민이 스스로 나서 뜻을 전했다.


[여한을 풀고 반드시 돌아와 풍림방의 손에 죽겠소. 그러니 여기선 이것으로 유보해주시길.]


그런 후 여민은 진심으로 팔을 잘라내려고 했었는데, 풍림방주 이관수가 거절의 뜻을 단호히 보였다. 팔을 자르려하자, 풍림방주가 갑자기 자신의 모든 공력을 폭발시켜 여민을 멈추게 했었다. 이글거리는 얼굴, 급작스런 내공운용의 여파로 입가에 피가 배어나왔다.


그 분노를 여민은 마주했다.


[그 따위 오만을 누가 허하였더냐!.. 그대로 달고 있어라. 언제고 반드시 풍림방의 힘으로써 죽여줄 것이다.]



지난 일이 떠오른 여민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힘의 우위에서 지지 않았다. 그래서 마주해버렸다. 풍림방의 통한에 찬 표정들을. 그 얼굴들 하나하나가 무겁고 아프다. 큰 애착도 없이 살아온 삶에서 처음으로 가져보는 후회. 스스로의 꼴이 우스웠다.


이치승이라도 옆에 있으면 좋으련만. 절실히 혼자임을 느낀다. 여민은 앞으론 누구와도 그렇게 지낼 일은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삶이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를 헤아려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원인은 명확하게 하나뿐이었다.


그놈의 갑주. 그때 그 여인의 표현에 의하면 ‘귀인의 신물’, 이 모든 방랑과 일탈의 시작이 됐던.


그것에 우여곡절 끝에 닿았다. 단서조차 없던 것이, 갑자기 귀인이라는 당사자에게, 그리고 맹주를 통해 들은 바, 현재로썬 유일한 접점, 그 인물이 장백진인. 만남은 고사하고, 살면서 생각 할 일조차 별로 없던 이름. 여민에겐 그만큼 다른 세계에 있는 존재.


나무 꼭대기에 올라있는 여민이 앞을 내다봤다.


울창한 숲에 가려진 풍경이, 산마루에 다다르자 시원하게 열리며 펼쳐진다. 낮은 능선의 경사면을 따라 흐르는 냇물과 형형색색의 풀밭이, 곧게 뻗은 나무들 사이로 펼쳐져 있는 장관. 그 선경(仙境) 속에, 작은 산채 하나가 덩그러니 자리 잡고 있었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어서 오히려 의아했다. 으레 이런 곳엔 주인의 허락 없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기문이나, 결계가 있기 마련. 혹시 놓친 것이 있나 주변을 살펴보니, 토끼도 사슴도 아무런 헤맴 없이 뛰 놀다, 냇가에 이르러 목을 축이고 가는 게 보인다.


여민은 고개를 주억거리곤 나무위에서 몸을 날렸다.


땅에 내려온 여민이 산채를 향해 걸어갔다. 들어서보니 위에서 보던 것과는 또 다른 절경. 오묘한 기분을 들게 했다. 풍경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금 막 산채에서 걸어 나온 두 명의 남자. 그중의 한 사람. 함께 서있는 기골이 장대한 장사와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풍모. 풀어헤친 긴 머리가, 흰 도포자락과 함께 흩날리는 유려한 모습의 남자.


아직 먼 거리였는데 여민은 저절로 발걸음이 멈춰졌다.


‘물고기가 아니라 물이다.’


물속에선 물을 제외한 모든 존재는 이물. 그것이 여민의 깨달음.


그런데 걸러지지 않는다. 그리하여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경지. 경단을 빨아먹던 소녀를 만났을 땐 정체를 알 수 없던 이질감. 이 독특한 기감을 그때도 느낄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여민이 그러한 아쉬움을 느낄 때, 뒤에서 맹주와 혁우가 다가와 여민을 지나쳐갔다. 그 둘이 다가오고 있는데도, 장백진인은 여민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이 발걸음을 무겁게 해, 여민은 천천히 다가갔다.



“실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찾아뵙지 못해 송구합니다. 어르신.”


맹주와 혁우가 허리를 깊이 숙여 예를 표했다. 떠나가는 외인이니 예를 표하지 말라던 장백진인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격식이었다.


무표정한 시선으로 여민을 바라보던 장백진인이, 이내 조금의 미소를 지으며 맹주를 맞이했다.


“후후. 이거야 원. 기다리던 손님보다, 엉뚱한 손님이 먼저오셨으이. 하긴, 왜 이 생각은 못했을까. 귀인이 세상에 나왔다면 뭔 일이 나도 났겠지. 이렇듯 맹주가 직접 온 걸 보니 어디하나 멸문이라도 당한 겐가?”


뜻밖에도 장백진인은 이미 맥락을 알고 있다. ‘귀인’.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중원에 나왔다. 여민을 통해서도 들은 그자의 정체가 귀인. 장백진인이 무슨 일이 벌어졌을 것까지 어림짐작하고 있다는 점이 또 중요했다. 그것은 바로 진위여부. 처음 혁우의 보고를 받았을 땐, 허무맹랑하기도 했던 이야기였으나, 장백진인이 만나자마자 저렇게 말 한다면, 확실한 실체가 있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니, 사실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꺼내야할지가 난감했던 맹주는 한결 편해졌지만,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껄끄러운 부분도 있었다.


“어르신, 제발 맹주라 부르시는 것만은 말아주십시오.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가까운 인연이 있다 해도, 현 무림의 대표인 이상, 아래로 대해서야 안 될 일. 그것보단..”


장백진인이 여민을 다시 한 번 살펴본 후 말을 이었다. 여민은 어느덧 지척거리까지 다가오다가 눈길을 받아 발이 잠시 멈췄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피해 갈 수는 없는 지경인가?”


될 수 있다면 얽히지 않는 것이 좋다는 뜻. 여민의 모양새를 봐도 상상을 넘어서는 존재임은 확실했었는데, 장백진인씩이나 되는 사람이 쐐기를 박아버린 꼴. 어쨌거나 뭘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단계는 아직 아니었다, 판을 알아야 다음 수를 생각할 것 아닌가. 우선 정체를 알려 왔을 뿐이다.


맹주는 등 뒤에 있을 여민을 엄지로 지목하며 말을 시작했다.


“화를 입은 건 아직까진 단 한명으로, 저자의 아비인 여근추라는 사람입니다. 어르신께선 모르실 수도 있는 신흥세력으로 여씨세가의 가주였으며, 무림맹의 장로이기도 했던 자입니다. 허니 그자의 목적 여하에 따라 결정되겠지요. 해서 어르신께 여쭈기 위해 왔습니다. 귀인이 무엇이며, 그들은 누구입니까?”


“그들? 뭘, 얼마나 알고 맹주가 그들이란 판단을 내렸을꼬. 정체불명의 존재가 세상에 나왔으니, 맹의 입장에서야 당연히 이것저것 파악을 해둬야겠지. 해서, 제일먼저 알고 싶은 건 이거 아니겠나.. 무림의 적이냐, 아니냐.”


정확한 지적. 예언이니 용이니 하는 건, 잘 쳐줘도 그저 개인적인 호기심. 맹주로써 알아야 할 것은 적인지, 세력인지, 무엇보다 어떤 계기가 있어 그동안 정체를 드러내지 않다가, 무림에 나섰는지. 천하제일을 꺾을 만한 귀인은, 계기만 있다면 언제든 무림에 나서는 것인지.


“제가 더 알고자 하는 바는, ‘귀인’은 언제고 적이 될 수 있는 ‘세력’인가. 하는 부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림맹이 응당 정체를 알아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외인의 길을 걷고 계신 어르신께 큰 결례인줄은 잘 압니다만, 부디 자세히 알려주시길 간청합니다.”


장백진인이 눈을 감고 뭔가 생각을 정리하고 있기에, 맹주는 잠시 기다렸다. 이내 장백진인이 맹주를 바라봤다.


“무림맹의 이름으로 관여해야 할 일은 아직 한 사람의 죽음뿐이고, 그것이 저자의 아비였던 사람이다. 일어난 일은 이게 전부란 말이지?”


“예. 아직은 그렇습니다.”


“음. 의외일세. 그자의 심성에 변화가 있는 것인지. 아니라면 처음의 안내자가 요령이 좋은 것일지. 만나기 전까진 알 수 없는 노릇이군.”


맹주는 귀가 쫑긋해졌다. 왠지 가슴이 뜨끔해지는 긴장감을 느꼈다.


‘만남이 예정되어 있나?’


맹주가 그러고 있을 때, 장백진인이 여민에게 손을 들어보였다. 여민은 짐짓 놀랐다.


“이보게 자네. 가까이 올 수 있겠나?”


여민이 다가와 말없이 섰다. 장백진인이 격식을 내치는 성격인 것을 여민은 모르고 있었지만, 어쩐지 아무런 예를 보이지 않았다. 여민스스로도 몰랐지만 그는 압도되어 있었다. 장백진인이 뭘 해서가 아니라, 그를 느낄 수 있는 자만이 알 수 있는 기운이 있었다.


장백진인이 여민은 깊은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 어딘지 흐뭇한 미소를 흘렸다.


“내 일찍이, 중원에선 더 이상 문을 여는 자가 나오지 않으리라 말한 적도 있었네만, 내심 기다리고 있었던가보이. 이제 막 화경의 문을 연 자. 만나서 반갑네.”


알고는 있었는데, 직접 말로써 들으니 다들 가슴이 뜨끔해졌다.


화경. 중원무림에서 오래도록 사용하지 않았던 말.


맹주는 이제 진실로 피부에 와 닿았다. 여민이 현 무림 최강고수에 올랐음을. 어쩌면 예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기도 했다. 여민은 무림에 이름이 알려진 때부터, 그 행실을 모두가 인정하지 않았었고, 또한 스스로도 무림에 뜻이 없었을 뿐. 그를 아래에 뒀다고 말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맹주, 그리고 원래는 그의 보좌인 혁우까지. 착잡한 심경을 느꼈다. 아무리 타인의 성취를 높게 인정해 주는 것이 무림의 법도라 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여민은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못했다는 것이 더 맞다. 장백진인의 존재감에 온 신경이 쏠려있었다. 장백진인은 자신이 먼저 인사를 건넨 모양이 되었는데 상대가 반응을 안 했다.


그의 입장에서 여민이 보이는 반응이 재밌기도 했다.


“후훗. 하나를 깨달아 문을 열고 보니, 백가지 모름이 기다리고 있군.”


여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맞습니다! 지금껏 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게 다 틀린 것이었습니다. 무슨 조화인지 당최 모르겠습니다.”


이 감정의 이름은 희열. 누구와도 논해볼 수 없었던 주제, 며칠 간 홀로지낸 여민에겐 말 상대가 절실히 필요했었다.


“그 하나하나를 일일이 깨부수고 나아가야 하네. 그럼 자연히 도달할 걸세.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전 아직 아무 것도 모르겠습니다. 어디에 이 모든 것의 답이 있습니까?”


마음이 어쩐지 기쁜 건 장백진인도 마찬가지였다. 중원에선 없을 거라 여겼는데, 따라오는 자가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눈앞의 이 자는 왠지 자신과 닮아있기까지 했다. 언제가의 자신을 보고 있는 것도 같았다.


“자넨 이제 막 들어섰을 뿐이네. 스스로 깨뜨려 나가는 것 말고는 답이 없는 법. 공간을 이해하였더니 문이 나왔지. 그 공간에 관여할 수 있게 되어 자네는 하늘을 열었다. 그렇게 스스로가 공간에 관여하는 방법을 모조리 터득하여, 그 끝에 다다르면, 이젠 공간으로 하여금 스스로에게 관여 할 수 있게 되는 또 다른 하늘이 열리니. 그것을 현경이라 한다. 오라. 올 수만 있다면 자연히 열린다.”


목숨을 주고도 얻을 수 없는 논경. 허나 이걸 듣고 뭔가를 깨우칠 수 있다면, 그런 자에게는 어차피 필요도 없다. 그가 걸어 본 바, 아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장백진인이 좋은 기분으로 평소 하지 않던 행동을 하고 나니, 본론으로 돌아오기가 힘들어졌다. 본인이 뭔 얘길 하려다 여기까지 왔는지도 헷갈렸지만, 눈앞의 이자들의 표정이 너무들 심오해졌다. 이자들의 표정은 그러려니 하겠는데.


“따, 땅쇠야. 넌 왜 그러느냐?”


다들 무의식적으로 땅쇠를 보게 됐다. 장대한 기골에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란 생각이 모두에게 들었다. ‘거웅’ 정도면 적당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여민이 장백진인의 눈길을 받았다.


“자네 선대인의 얘긴 맹주에게 들었네. 하여, 내 하나 물음세. 왜 여길 왔는가. 귀인을 쫒고자 함인가?”


여민이 고개를 떨궜다.


“쫒는다기보단, 만나려합니다. 진인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게 복수심 같은 건 처음부터 없습니다. 귀인과의 또 다른 인연 때문입니다, 저는 제 삶을 다해 그것을 쫒아왔습니다.”


장백진인은 궁금해졌다. 귀인과의 또 다른 인연.


“또 다른 인연이란 것이 몹시 궁금하네. 그것이 무엇인가?”


“얼마 전 귀인을 만났을 때 들었습니다. 그것을 귀인의 신물이라고 하더군요. 갑주였습니다. 천도, 금속도 아닌 갑주. 지금으로부터 스물 몇 해 전에 제 선친이 얻은 기연이었지요.”


얘길 듣고는 각자 놀랐다. 물론 가장 놀란 것은 장백진인이었다.


“귀인의 갑주?! 그것을 어쩌다 사람이 얻게 되었을까. 하여 자네는, 그때부터 그것의 정체를 쫒아왔단 말이지?”


“예. 그렇습니다.”


“허허. 자네는 아무래도 귀인과 인연이 닿긴 닿은 모양이군.”


장백진인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깊은 생각을 했다. 그런 후. 여민에게 먼저 말했다.


“자네와 무림맹의 사정이 크게 다르군. 자네는 아마 귀인의 길에 함께하게 될 것 같네. 나 또한 갔던 길. 자네의 생각은 어떠한가? 귀인은 이미 장백산을 오르고 있네.”


여민은 미소 지었다. 나이로는 어른이라 절제를 할 줄 알 뿐. 신나 보였다.


“귀인의 길. 맹주로부터 예언의 노래라는 것을 들었습니다. 용과 이계의 괴수. 그게 귀인의 길이라면 저는 환영입니다. 갑주의 정체를 찾아다닐 때부터 그 정도는 나와 주기를 학수고대해왔습니다.”


이런 여민을 바라보며 장백진인은 아무도 모를 소리를 했다.


“설마, 이자도 철의 왕이 준비한 것은 아니겠지? 설마, 아닐 테지.”


이구동성으로.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무것도 아닐세. 하여간 자넨 모쪼록 잘 어울려보시게. 특별한 은원이 있지 않은 이상에야 동행을 거절하진 않을 걸세.”


혹시 그럴 수도 있어서, 여민은 심각해졌다. 웃으며 헤어진 사이는 아니기에.


여민이 혼자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장백진인이 말을 이어갔다.


“맹주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내 생각엔 이쯤에서 잊는 것이 가장 현명할 것이다. 무림맹의 우수한 인재를 잃은 것은 통탄할 일이겠지만, 대승적인 희생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을 듯도 하다. 귀인은 그와 비교 자체를 할 수 없는 희생을 우리들을 위해 해 온 존재다.”


맹주가 언뜻 말을 하려는 것 같았으나 장백진인이 말을 이어감에, 감히 끼어 들 순 없었다.


“또한 내가 장담컨대, 맹주가 걱정하는 바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귀인의 경로가 이미 중원을 넘었으니, 다음의 행선지는 무곡산이다. 무림과 마찰이 일어날 일은 없음을 내가 보장하지. 그러니 가능하다면 귀인이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떠나는 것이 어떻겠는가, 맹주.”


무림맹주 추서길과 혁우는 눈이 번쩍 뜨였다. 그야말로 큰 일 날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맹주가 나섰다.


“하오나 어르신! 무곡산이라면 천인공노할 마교 놈들의 본산 아닙니까?! 귀인이라는 자가 그곳을 향한다면 이건 무림 전체가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장백진인이 표정이 차가워졌다. 순간적으로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맹주.”


“예, 예 어르신.”


“서길아. 이놈아. 아직도 그런 편협한 세상을 못 벗어났단 말이냐. 누가 그들을 마교라 한단 말이냐. 이 중원 잡것들아!”


입도 벙긋할 수 없었다. 입은커녕, 숨도 제대로 쉬기 어려웠다. 장백진인의 노기가 공간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주변의 동물들이 모두 달아나고, 새가 저 멀리 날아갔으며, 혁우는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세상을 보아라. 세상을 알아라. 네놈의 세상이 기어이 중원을 못 벗어난다면, 넌 평생 화경을 열어젖힌 이 친구의 뒤꽁무니나 쳐다봐야 할 것이다. 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것 아니냐!”


잠시 말을 끊고 맹주를 바라보던 장백진인이 공간을 누르던 기력을 풀어냈다. 그제야 숨을 좀 쉴 수 있었다.


“깨고 나와야 한다. 무한히 부딪혀 깨져보아야만, 드디어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것이 무의 길이다. 그건 연공실에도, 무공서에도 없다. 왜 오직 나만이 여기까지 이르렀느냐? 오직 나만이 이 세상의 전부를 해쳐보았기 때문이다.”


“어, 어르신.”


맹주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장백진인이 뒤돌아 산채를 향해 걸음을 옮겨갔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땅쇠가 그 뒤를 따랐다.


얼마간 나아갔는데, 장백진인이 갑자기 몸을 돌려 뒤를 향했다. 그때 쯤 됐을 때, 여민에게도 느껴졌다.


누군가 다가오고 있음이.



- 17화에 계속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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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3

  • 작성자
    Lv.69 그라시아S
    작성일
    20.06.10 09:10
    No. 1

    재밌게 읽었어요. ^^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7 아랑깜이
    작성일
    20.06.10 11:55
    No. 2

    댓글 감사합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네요. 몇 화였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글을 올리고 하루종일 조회수가 '1'이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게 님이셨을 수도 있다는 생각.

    '그라시아S' 가슴에 새겼습니다. 감사합니다.

    [써 놓고 보니 손이 오그라들어서.. 죄송]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9 그라시아S
    작성일
    20.06.10 12:03
    No. 3

    계속 올게요. ^^ 완결까지..., ^^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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