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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음여류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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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음여류
작품등록일 :
2012.11.16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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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6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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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037,868

작성
16.12.22 21:06
조회
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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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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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아프가니스탄 [Episode..2] 예지자

DUMMY

‘그래, 목소리가 꽤 좋았던 것 같은데. 진정성 같은 게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그녀는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오랜 시간 잠들어 있는 바람에 정신과 의사가 처방해준 약을 먹지 않아서 두통이 심해졌지만, 대신에 모두 다 망상이라고 여겼던 장면들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대기실에서 기다리는데 그 남자가.. 한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바로 내 앞에 서서..”


전형적인 병원 스타일이 아니라 어렴풋한 기억 속, 내 집 같은 디자인이라 마음이 편안해지곤 했던 대기실에서 낯선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그 저주만큼이나 큰 축복을 받으셨다더니, 정말로 아름다우시군요.”


외출할 때면 남녀노소를 불문한 수많은 사람이 작업을 걸어와서 이골이 난 그녀는 남자를 무시하기로 했다. 어처구니없는 멘트와 놀랍게도 진정성이 느껴지는 목소리의 조합이 썩 신선하기는 했지만, 어차피 노리는 건 뻔했으니까.


‘아주 웃기고 있네.’ 다프네는 그를 쳐다보지도, 답하지도 않았다.


남자는 자신을 향해 고개조차 돌리지 않는 여신의 얼굴을 보며 더없이 밝게 웃고는, 조금 더 진중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다가 신음처럼 되뇌었다.


“이렇게 빨리..”


그의 손이 잠깐 귀를 만졌다 싶은 순간 여유롭던 남자의 행동이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다프네의 얼굴 앞으로 명함 한 장을 불쑥 들이밀었다.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며 한마디 하려 할 때 그가 말을 막았다.


“벗어나려는 것과 이겨내려는 것은 다른 거라고 들었습니다. 이 모든 게 꿈이 아니었음을 깨닫는 날, 이 번호로 연락을 주십시오. 죄송합니다, 이제야 찾아와서.”


역시나 별다른 반응 없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그녀의 손에 강제로 명함을 쥐여준 남자는 병원의 화장실로 내달려 모습을 감췄다.


‘참나, 이제는 별 이상한 방법으로..’


순식간에 사라진 남자의 작업방법이 색다르다는 건 인정했지만, 강제로 손을 잡은 게 불쾌해서 명함을 버리려고 휴지통을 찾았다. 아니, 찾으려고 할 때 병원 출입문이 열리며 여자 한 명이 들어왔다.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았고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세미 핏 스타일의 검은색 정장과 어깨까지 내려오는 적갈색 머리카락을 세련되게 묶어 넘긴, 굉장히 지적인 분위기의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여성이었다. 그녀가 병원 안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다프네는 죄라도 지은 것처럼 명함을 호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저 악마 같은 비서가 왜 여기에 온 거야?’ 그녀는 바알제불을 대신해서 자신을 관리하는 대리인이었다.


자신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이곳을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듯 강한 압박감을 주며 입구에 서 있던 대리인은, 조용히 병원 내부를 둘러봤다.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끼며 포니테일을 훔쳐보던 그녀는 비서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이 왜 그렇게 겁을 먹었는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저 여자의 눈빛은..’ 포니테일의 눈빛은 악몽 속 괴물들의 것과 똑같은 색깔을 가지고 있었기에, 다프네는 숨소리마저 조심했다.


평범한 사람은 구별할 수 없겠지만, 삶의 대부분을 그들과 함께해온 다프네에게는 흑백을 구별하듯 쉬운 일이었다. 아름다우며 지적이고 부드러워 보이는 눈빛 아래로 흉포한 괴물의 본성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핏줄까지 찢어발길 수 있는 자들의 색깔을 어찌 모를 수 있으랴?


힐, 특유의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져 오자 다프네는 두 눈을 꼭 감았다. ‘제발, 나한테 말 걸지 말고 그냥 갔으면..'


가위에라도 눌린 것처럼 얼어 있는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포니테일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차분히 말했다.


“그는 어디로 갔죠?”


따스함이 느껴질 정도로 상냥한 목소리였지만, 다프네는 등골이 오싹해져서 마른침을 삼켰다. 아무런 대답도 없자 포니테일은 손을 뻗어 다프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대답하지 않을 건가요?”


그녀의 손가락이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것 같아 소스라치게 놀란 다프네는 손을 뻗어 화장실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가 그 이상한 남자라면 저리로, 저기 화장실로 들어갔어요.”


그들이 인간을 어찌 대하는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의 목소리는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떨렸다. 두 손을 기도하듯 꼭 마주 잡은 채 숨소리마저 죽이려고 애써 노력하는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포니테일은, 그녀의 에메랄드빛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휘감아서 부드럽게 당겼다가 놓으며 말했다.


“사실대로 말해줘서 고마워요.”


살짝 끄덕여 감사를 표한 포니테일은 남자가 사라진 쪽으로 걸음을 옮기다 말고 다시 한 번 다프네를 바라봤다.


“그가 무슨 말을 했건 잊으세요, 그분께서 언급한 선을 지금 밟았어요. 당신이 걱정돼서 하는 말이에요. 다프네 양.”


다프네가 정신없이 끄덕이자 포니테일은 화장실의 문을 열고 사라졌다. 그리고 채 1분도 되지 않아서 익숙한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면, 그녀는 더 견디지 못하고 병원을 뛰쳐나갔으리라.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로 주치의를 만난 그녀는 좀 전에 있었던 일을 정신없이 설명하고, 그 포니테일의 눈도 괴물들과 같다고 열변을 토했다. 그런 뒤에는..


‘뭐지?’


포니테일의 정확한 외모와 그날 이후의 상황 등, 기억을 좀 더 자세하게 되짚어보려 하니 엉뚱하게도 주치의의 얼굴과 목소리가 연이어 떠오르는 게 아닌가?


“다프네 씨, 꿈은 외적 경험의 소산과 무의식의 발현일 뿐입니다. 지금 언급하신 일련의 사태가 꿈이고 그에 연결된 망상일 뿐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인지하는 순간부터, 당신은 진짜 삶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좋습니다, 다프네 씨.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대기실에 설치해둔 CCTV를 저랑 같이 확인해 보도록 하죠.”


“어때요? 지금 본 화면이 진실입니다. 다프네 씨는 대기실의 소파에서 깜빡 잠이 드셨고, 이후 남자나 그..괴물의 눈을 가진 포니테일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예, 간호사가 당신을 깨웠죠. 이제 기억이 나시나요?”


“물론 받아들이기 쉽지 않겠지만, 이게 진실이랍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평생을 악몽에 시달려와서 그런 거니까. 전에 했던 것처럼 조금씩, 천천히 받아들이면 됩니다. 자, 일단은 자리를 옮길까요?”


“다프네 씨, 그 의자에 편안하게 누워서 저랑 함께 기억을 되짚어 봅시다. 그 남자의 목소리를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세요. 스무살 때 당신을 매음굴에서 구해줬다던 그 형사의 목소리와 같지 않나요? 물론, 그때를 떠올린다는 것이 너무나 힘들겠지만, 눈을 감고 편안하게 생각해보세요. 당신은 지극히 안전하답니다. 저를 믿고 제 말에 집중하세요. 제 말에 집중..집중..기억..망상..현실..”


주치의의 목소리가 길게 늘어지며 수많은 단어로 분해돼 기억을 헝클인다. 그리곤 기괴하게 조합돼 머릿속에 새겨지기 시작했다.


‘다프네, 이것 하나만을 기억하십시오. 꿈은 꿈일 뿐이다. 이것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매음굴, 아픔, 평온한 현실, 보존, 지켜야 할 삶, 유지, 진실, 꿈, 악몽, 거짓, 화면, 진실..'


“기억, 현실, 악몽, 거짓, 꿈, 망상, 삶, 진실.. ”


다프네는 넋 나간 눈으로 주치의가 강조했던 단어들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무당의 주문처럼 웅얼대던 단어들은 매음굴에서의 끔찍했던 기억들과 뒤섞이며 하나의 문장으로 완성되고 있었다.


“삶을..지켜야 해. 악몽은 다 꿈이고 망상일 뿐..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어. 지켜야 해. 악몽, 꿈, 기억은 다 거짓.”


그렇게 눈앞의 현실을 스스로 부정하려 할 때, 강제적으로 억누른 목소리가 울려와서 그를 방해했다.


‘벗어나려는 것과 이겨내려는 것은 다른 거라고 들었습니다. 이 모든 게 꿈이 아니었음을 깨닫는 날, 이 번호로 연락해 주십시오. 죄송합니다. 이제야 찾아와서.’


당시 느낀 진정성 어린 울림이, 아무런 사심도 없던 맑은 웃음이 되살아나서 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다프네의 흐릿했던 눈빛이 생기를 되찾아간다. 그녀는 몇 번이고 어물거리다가 결국에는 진실을 뱉어냈다.


“꿈이, 아니야? 악몽은.. 빌어먹을 놈의 꿈이 아니었어.”


주입되고 세뇌된 기억 속에 갇혀 살던 자는 화들짝 놀라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정신없이 리모컨을 찾아 발코니로 향하는 문을 개방하고는 뛰다시피 걸음을 옮겼다. 쌀쌀한 바람이 가녀린 몸을 휘감아오자 떨리는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우중충한 하늘을 보며 애써 외면하던, 아니면 누군가 왜곡한 기억을 조심스레 곱씹어보던 그녀는 쓴웃음을 흘렸다.


'매음굴..' 왠지 모르겠지만, 불현듯 그때의 일이 되살아났다.


그곳에는 자신을 포함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물건을 관리하던 마담이 있었다. 평생 이 일을 한 것치고는 곱게 나이가 들었던 갸름한 얼굴이 떠오른다.


‘저렇게만 늙어도 나쁘진 않겠다고 애들이랑 부러워 했었지..’


마담은 시간이 날 때마다 자신의 젊은 시절을 들려주곤 했었다. 세계 곳곳의 절경과 그곳에서 저질렀던 음탕한 로맨스들이 주된 스토리였는데, 다프네는 음탕한 이야기보다 세계의 절경을 상상할 수가 있어서 마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잠들었었다. 때로는 끝까지 이야기를 들을 때도 있었는데, 그녀가 항상 마무리로 덧붙이던 잔소리가 마침 떠올라서 쓴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세상 어디에도 창녀를 위한 포주는 없어. 멍청한 년들이나 그렇게 믿고 사탕발림에 넘어가서 몸 주고 마음 주고 미래까지 갖다 바치는 거야. 대가 없는 화대가 독약인 것처럼, 포주들의 말은 절대로 믿지 마. 그리고 너희들 잘 들어, 무섭고 비참해도 지금 내 꼬락서니를 알아야 해. 그래야 이 바닥에서 벗어나건, 화대를 올리건, 눈먼 놈이라도 잡아서 세탁을 하건 간에 돌아갈 수 있는 조그만 가능성이라도 열리는 거야.’


듣던 몇몇은 투덜거리며 돌아섰고 몇몇은 눈시울을 붉혔으며 몇몇은 조그만 주먹을 꽉 쥐었다.


‘너희들 돈 몇 푼에 몸이나 파는 년이라는 사실을 외면하고 억지로 꾸미고 흥청망청하는 순간부터 미끄러져. 세월은 무섭게 흘러가고 몸값도 떨어지다 보면 어느새 포주한테 버림받고.. 이리저리 팔려 다니다가 나처럼..벗어날 수 없게 돼.’


그 당시 다프네는 하루의 대부분을 잠들어 있었기에 자신의 화대가 얼마고 하루에 몇 명이나 자신을 거쳐 가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 만큼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잊어버리기에는 마담의 눈빛에 서린 세월의 허망함이 너무나도 짙었으니까.


'세월은 무섭게 흘러가고 결국에는 벗어날 수 없게 돼.'


지금 자신의 꼴이 마담이 언급한 멍청한 년들 중 하나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절로 조소가 흘러나온다.


“창녀를 위한 포주도, 대가 없는 화대도 없어. 결국에는 내 삶을 망치는 독약일 뿐이야.”


어찌 보면 천박하기 그지없는 말이었지만, 요즘 들어서 이런저런 공부를 하던 중에 만난 인간들.. 스스로 멘토라고 칭하는 낯두꺼운 자들의 입에 발린 소리보다는 한낱 마담의 푸념이 가슴에 더 와 닿아서 그녀는 한 가지를 결심할 수 있었다.


“그래, 무섭고 비참해도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돼.”


그리곤 지금 자신의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구축했을 지도 모르는 자부터 떠올렸다.


“바알제불, 그래도 이름을 숨기지는 않았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 작성자
    Lv.52 K.S
    작성일
    17.01.24 15:52
    No. 1

    태생부터 설계된 삶이었네요..
    전 수료식을 마쳤습니다. 충성!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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