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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본의 서재

세계의 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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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본
작품등록일 :
2020.01.20 21:43
최근연재일 :
2021.06.22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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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6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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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Episode 01. 묶인 천사-믿음

DUMMY

“세상에···”

3층 중환자실에 도착한 시영은 차마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눈을 감은 채 일어나지 못한 사람들은 문서에서 본 그대로였다. 모두가 미동조차 없이 평온하게 잠을 자는 것 같았지만, 시영은 그들의 평온함에서 잃어버린 미소를 자각하자 참아왔던 슬픔이 몰려왔다.


뭐라도 알기 위해서는 이들의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마다 눈시울은 점점 붉어졌고,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라보며 복부에 장기가 있는 피해자에게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 사람도 남들과 다를 바 없이 눈을 감은 채 의식을 잃은 상태, 복부에 장기의 유무는 눈으로 봐서는 상관없는 것 같았다.


“누구시죠?”

날카롭고 조용한 목소리가 시영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속이었다.


“안녕하세요.”

“처음 보는데, 병원 관계자신가요?”

고속은 시영을 훑어보며 경계했다.


“아, 저는 병원 관계자는 아니고.”

“관계자가 아니면 제 동료 곁에서 떨어져 주세요.”

고속은 정중하게 말했지만, 낯선 시영을 계속 경계했다. 그런 그에게 시영은 차분하게 자신이 누구인지와 무엇을 위해 여기로 왔는지를 설명했다. 하지만 의심이 많은 고속은 믿어주지 않았고, 시영은 어쩔 수 없이 스승님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해성과의 대화는 백날 연습한 자기소개보다 월등히 완벽했다. 정보상인 고속은 해성에게 제자가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고, 그것이 시영임을 확인하자 조심스럽게 경계심을 풀었다.


정작 시영은 스승님의 힘을 빌려야 하는 상황이 아쉬웠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뭐, 피해는 제 동료가 받았지만, 저도 넓게 보면 피해자입니다.”

병원 안 카페로 걸음을 옮긴 두 사람, 고속은 한탄하며 시영이 산 커피를 받았다.


“고맙습니다. 시영 씨도 커피인가요?”

“아뇨, 저는 밀크티요.”

“입은 옷만 보면 커피 잘 드실 것 같은데 의외군요?”

“하하, 그래 보이긴 하네요. 사실 커피는 왠지는 몰라도 먹을 수 없어요. 억지로 먹어도 몸에서 안 받거든요.”

“아, 제 동료 중에서도 카페인이 잘 안 받는 친구가 있는데, 걔는 커피 마시면 그냥 설사하고 그래요.”

고속은 동료 이야기에 한숨을 쉬었다. 시영은 밀크티를 한 모금 마시며 고속에게 사준 커피를 바라보았다.


“결론적으로 제 동료들은 괴인에게 습격당했어요. 어제 새벽이었나 그랬을 거예요.”

시영은 수첩을 꺼내 고속의 증언을 적었다. 어제 새벽, 그때는 그가 돌아왔을 때였다.


“근처에는 은색 머리카락의 소년이 있었죠. 이름은···”

“소인인가요?”

“그 애를 아세요?”

고속은 눈을 크게 떴다.


“그렇게 많이 아는 건 아니에요.”

“제 생각에도 소인이 같기는 한데, 시영 씨가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궁금하군요.”

고속은 시영을 흥미로운 눈길로 바라보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이야기하자면 조금 길어요. 저도 이해는 안 가는데, 은색 머리카락이면 정황상 소인이일 확률이 높아요. 그리고 고속 씨는 소인에 대해서 뭔가 알고 있을 것 같고요.”

“맞습니다. 전 정보상이고, 그런 애들에 대해서는 알고 있습니다.”

시영은 의외의 직업을 가진 고속을 신기한 눈빛으로 바라보았고, 고속은 그 눈빛에 머쓱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저는 시영 씨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정보상이라는 걸 알고 계실리는 없을 것 같고, 시영 씨는 어떻게 제가 소인이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셨죠?”

고속은 궁금함이 그윽하게 담긴 눈으로 시영을 바라보았다.


“그야, 소인이는 제 해방기를 훔쳐 가려고 했고, 고속 씨는 제 것과 색이 다른 검은 해방기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 순간, 정적이 흘렀다. 시영은 밀크티를 한 모금 마셨고, 고속은 허리춤의 해방기를 움켜쥐며 미심쩍은 눈길로 시영을 노려보았다.


“해방기와는 전혀 관련 없지만, 어쨌든 소인이를 알고 있고, 그 애를 찾고 있는 건 맞습니다.”

고속은 커피를 조금 마시며 사뭇 달라진 눈빛으로 시영을 바라보았다.


“혹시, 해방기를 가지고 계십니까?”

고속의 물음에 시영은 보란 듯이 품속에서 하얀 해방기를 꺼내 보여주었다.


“아, 그러셨구나.”

고속은 시영을 흘겨보며 피식거렸다.


“잠깐, 시영 씨에 대해 알고 싶은데, 괜찮을지?”

“네, 괜찮아요. 근데 뭘 알려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냥 최근에 뭘 하셨는지 정도?”

“저는 6개월 전에 외국으로 나가서 어제 돌아왔어요.”

“···그래요?”

고속은 미심쩍은 눈길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여기 상황은 잘 몰라요.”

시영은 묘하게 고속의 태도가 달라진 것 같은 느낌에 이상함을 느꼈다.


“그렇군요. 뭐,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닌 것 같고. 어쨌든 전 그 애가 괴인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지금은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닌지라 만나고 싶어도 그럴 수 없군요.”

“복부 속 장기 때문인가요?”

시영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고속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빠르기에는 자신 있지만, 그럼 뭐합니까, 발이 묶였는데.”

“제가 도와드릴게요.”

“예?”

고속은 시영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쪽이 절 도와주려 하죠?”

“그야, 고속 씨가 어려운 상황이잖아요.”

“아니 그러니까 왜···”

고속은 시영의 말에 큰 혼란을 느꼈다. 겉으로 드러나는 마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일까, 시영은 그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했다.


“뭐, 말만이라도 고맙습니다. 하지만 소인이를 직접 보고 싶습니다.”

“방금까지 같이 있긴 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제미니는 옥상에 있다.”

시영과 고속이 고개를 돌리자, 이터널이 그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이, 이터널?”

그의 등장에 적잖게 당황한 고속은 눈을 크게 뜨며 경계했다. 시영은 영문 모를 그의 태도에 고개만 갸웃거렸다.


“제미니는 옥상에 있다.”

이터널이 다시 말하자, 고속은 그를 주시하며 커피를 들고 도망치듯 다른 곳으로 갔다. 이터널은 고속을 지그시 바라보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시영으로서는 지금 상황이 적응은커녕 이해조차 되지 않았다. 고속과 만나서 한 일을 정리해보자, 해방기가 문제라는 결론이 나왔다.


“저, 이터널 씨.”

이터널은 걸음을 멈췄다.


“이게 무슨 일이죠?”

“뭘 말하는 건가.”

“해방기가 문제인가요?”

시영은 하얀 해방기를 보여주었다.


“무슨 일이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이걸 보여주자마자 고속 씨가 절 경계하는 것 같고···”

“그게 있다면, 여러모로 곤란할 거다.”

이터널은 시영의 손에 들린 해방기를 가리켰고, 시영은 해방기를 바라보며 긴장을 삼켰다.


“역시 이것 때문이군요.”

“아마, 그럴 거다.”

이터널은 당연하다는 듯이 덤덤했지만, 오히려 시영은 어이가 없었다. 해방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고작 이런 물건 때문에 오해받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지금이라도 그걸 포기한다면 적어도 곤란할 일은 없을 거다.”

“그럴 수는 없어요.”

시영은 고개를 저었다.


“이건 누군가 제게 맡긴 물건이에요. 기억은 안 나지만, 분명 무슨 이유가 있어요.”

“그렇다면 싸울 준비는 됐나?”

“왜 싸워야 하죠?”

시영과 이터널의 눈이 마주쳤고, 누구 하나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해방기를 가지고 있다면 싸울 일이 생길 것이다. 시영, 넌 지금 제미니와 액셀러레이터 등 여러 해방기 소지자들을 만났다. 그들을 널 믿지 않는다. 과연 그들과 싸우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제미니와 액셀러레이터가 누구죠?”

“제미니는 소인, 액셀러레이터는 고속이다.”


시영은 이터널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싸움 대신 사이좋게 지내라면 못 지낼 이유도 없었다. 그들과는 악연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도움이 필요했다. 시영은 그런 그들을 돕고 싶었지만, 해방기를 물건 하나 때문에 그들과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왜, 대체 왜 그런 거죠?”

“제미니가 널 믿지 않고, 스크롤을 빼앗은 게 이유라면 이유겠군.”

시영은 말문이 막혔다. 단지 이유가 해방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그것으로 애초부터 소인이 자신을 싫어할 수밖에 없다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이게 뭐라고···”

시영은 최대한 화를 억눌렀지만,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남은 화를 깊은 한숨과 함께 떨쳐내려 했지만,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뭐라고?”

이터널은 미동 없이 놀랐다. 시영은 말이 통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 고집을 부리는 듯한 모습은 의외라고 판단했다.


“어째서지?”

“그건 제가 소인이를 믿고 있기 때문이에요.”

“대체 왜 그런 건가? 그 상황에서도 제미니를 믿을 수 있다고?”

“그야, 제가 이터널 씨의 말을 믿고 있기 때문이에요.”

이터널은 시영의 궤변에 당황하며 말문이 막혀버렸다. 누군가 믿어준다는 건 고마운 말이었지만, 그가 믿어도 소인의 마음이 변할 리 없었다. 아무리 좋은 쪽으로 분석해도 0%에 가까운 가능성에 불과했다.


“이상한 말이군, 이해할 수 없어.”

“이터널 씨는 해방기 소지자는 서로 싸우고, 서로 믿을 수 없다고 그러셨죠?”

“그렇다. 그게 지금 현실이지.”

“저도 어쨌든 해방기 소지자고, 이런 제가 이터널 씨를 믿는다면, 똑같은 해방기 소지자인 소인이를 못 믿을 이유가 없지 않을까요?”

시영은 빙그레 웃으며 이터널의 벨트 옆에 장착된 해방기를 가리켰다.


“그러니까, 분명 진심으로 다가간다면 소인이도 마음을 열어줄 거라 믿어요.”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지?”

“이터널 씨가 절 적대하지 않으니까요.”

시영의 변함없는 미소에 이터널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렸다.


“이터널 씨는 거인 씨를 알고 계시죠?”

“말하지 않겠다.”

“그런 훌륭한 분 밑에서 자란 소인이니까, 그렇게밖에 행동할 수 없는 건, 분명 무슨 사정이 있을 거예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믿지 못할 이유도 없잖아요.”

그때, 이터널은 스스로 모를 정도로 보이지 않게 미소를 지었다.


“시영, 분명 그 따스한 마음은 배신당할 것이다. 아무리 분석해도 그럴 것 같군. 하지만 정말 그 말이 진심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그 마음이 절대 변하지 않길 바란다.”

“당연하죠.”

시영은 밝게 미소를 지었다. 이터널은 그 미소에 그 이상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입을 열면 열수록, 자기 스스로가 한심하게 여겨지기만 했다.


“실례했습니다.”

시영은 여전히 정중한 인사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이터널은 계단을 내려가는 그의 모습에서 6개월 전, 열정 가득했던 자신을 겹쳐보았다. 신기하게도 그와 이야기를 나눌 때면 감옥에 가둬놓았던 그때의 마음에서 뜨겁게 열이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나도, 할 수 있을까.”

금 간 투구를 벗은 이터널은 그것에서 비치는 여러 명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이상하리만큼 각도에 따라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분명 그는 무표정이었지만, 투구에 비친 한쪽은 미소를 지었고, 다른 한쪽은 진절머리 날 정도로 울상이었다.


그렇게 다시 투구를 썼다. 그저 이대로 멈춰 있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뿐이었다. 정확히 어떤 것을 해야 할지는 이터널은 당장 알지 못했지만, 지금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았다.


그때, 시영이 다시 올라왔고, 사색이 된 모습에 이터널은 눈을 깜빡거렸다.


“시영···”

말을 걸기가 무안하게도 시영은 잽싸게 화장실로 몸을 숨겼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미가 올라왔다.


이터널은 무슨 상황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방금 시영이 해방기에 갖는 생각이 이런 느낌이었을 것이 분명했다.


아미는 시영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남자 화장실 앞에서 한참을 기다렸지만, 시영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미는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돌아갔지만, 그녀의 걸음걸이에서는 한 걸음마다 어쩔 수 없이 퇴각한다는 진한 집착을 남겼다. 그렇게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몇 분이 흐르자, 그제야 시영은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냈고, 안심하고 병원을 나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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