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약자에겐 선택권 따윈 없다
음. 그래도 분위기상 뭘 하라는 건지는 알 것 같았다.
“너희 누구야? 왜 우릴 공격했지?”
“살려줘. 나는 원래 티오르트 자작님을 모시는 군인이다. 지금은 브라이튼 백작을 도와주러 온 연합지원군 소속으로 정찰 중에 야만족이 보여서 공격한 거야.”
“그아르 에게! 그아르 에게!”
하아. 뭘 또 물어보란 소리지?
내가 우물쭈물하고 있자, 게란바토의 시미터의 압력이 더 강해지자 병사의 목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으으윽! 다 말한다고. 빨리 이 야만족 좀 말려봐!”
“잠깐만요!”
내 말을 들은 게란바토가 압박을 약하게 했다.
“뭐가 궁금한데? 어차피 우리도 지원군으로 왔지만, 당장 너희 야만족과 전쟁해서 피를 흘릴 생각까지는 없어. 이미 이런 분위긴 거 알잖아?”
“음...”
“그아르 에게! 그아르 에게!”
“아! 이 야만족이 뭐라는 거야? 알아들어야 대답을 할 거 아니오?”
“음...”
나도 모르겠다. 게란바토는 뭐가 궁금한 걸까?
병사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 숲 쪽을 가리켰다.
“이 숲길을 따라 저쪽으로 더 들어가면 연합군 진지가 나와요. 숫자는 천 명 정도고, 숲 밖에 또 진지가 더 있어요.”
- 쏴악!
조금 전까지 말하던 병사의 목이 잘리며 피가 사방으로 튀었고, 내 얼굴에도 묻어버렸다. 조금 전까지 살아있던 인간의 피는 뜨거웠다.
“아. 깜짝이야!”
게란바토는 내 말에 아무런 반응도 없이 시미터를 집어넣었다. 더 이상 병사에게 들을 말이 없는가 보다.
그리고는 자신과 말에게 박힌 화살을 뽑고 대충 응급처치하더니 내 짐을 내리고 숲 쪽을 가리켰다.
“그으르그”
이제 나 혼자 숲 쪽으로 가란 말인가?
“이제부터 혼자 가라고요?”
게란바토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타고 쿨하게 돌아가 버렸다.
조금만 더 가면 우리 편인 제국의 지원군을 만날 수 있다. 쓰러져 있는 제국군의 시체를 보자 내가 누구의 편인지 잠시 헷갈렸다.
뭐 아무렴 어떤가? 설마 평범한 소년인 나를 제국군이 해치지는 않겠지.
숲길을 한 시간 정도 걸어 들어가자, 제국군의 초병과 마주치게 되었다.
“꼬마야 이리 와봐. 너 어디 가냐?”
“제국의 용사님! 만나서 다행이에요. 저는 야만족 놈들의 침략을 피해서 지금 고향으로 가는 중입니다.”
“어디서 왔는데?”
“브라이튼 백작님의 영지에서 왔어요.”
“따라와.”
초병들은 수군거리더니 나를 연합군의 진지로 데리고 갔다. 내 대답이 이상했나? 왜 데리고 가지?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들이 나를 데려온 곳은 낡은 텐트 안이었다.
그곳에는 험악하게 생긴 군인들이 여러 명 있었다.
“나는 정보 수집을 담당하고 있는 조사관이다. 그냥 간단하게 몇 개 물어볼게. 성에서 도망쳐 나왔다고?”
“네.”
“너처럼 꼬마가 어떻게? 어이~ 이 자식 소지품 다 꺼내 봐.”
뭐지? 설마 나를 야만족의 첩자 같은 걸로 의심하는 상황인가? 신분을 밝혀야 하나? 노예란 걸 들키면 좋을 게 없으니, 평민인 것처럼 얘기하자.
“저는 브라이튼 백작님의 충성스러운 기사 제프리 님의 시종 랜스입니다. 민가에 계속 숨어 있다가 기회를 봐서 겨우 도망 나왔습니다.”
“흥~ 주인을 버리고 도망가는 게 뭐 그리 자랑이라고.”
“흑. 기사님이 먼저 제 고향인 베네트 지역으로 가 있으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가는 길이에요.”
이런 상황은 생각도 못 해봐서 임기응변이 생각처럼 잘되지 않았다. 내가 봐도 좀 어설퍼 보였다.
조사관은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있는 내 소지품을 살펴보더니 무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 퍽
조사관이 갑자기 나의 따귀를 때렸다!
충격으로 머리에 별이 돌고, 옆으로 쓰러졌다.
“새파란 놈이 거짓말은. 네 행색을 봐라.
허겁지겁 도망쳐 오는 놈이 멀쩡한 옷에 이렇게 여행 채비를 완벽하게 갖췄다고? 내 피난민을 수백 명 봤지만, 너 같은 놈은 처음이다.”
“그냥 운이 좋았어요. 믿어주세요.”
이렇게 된 이상우기는 수밖에 없다. 뺨이 얼얼하다.
“이 돈은 뭐야? 10골드라니. 너 같은 꼬마가 갖고 다니기는 너무 많은데? 훔쳤냐?”
“아니에요. 기사님의 돈이에요.”
“거짓말! 이 단검은 또 뭐야? 오~ 이 정도 마감이면 이런 촌에서 나올 만한 물건은 절대 아닌데.”
“그건 정말 제프리 님의 집안에서 내려오는 가보라고 했어요. 나중에 꼭 찾으러 온다고 했어요!”
“단검은 기사님 것이고, 골드는 훔쳤다? 맞지?”
“전부 기사님 거예요.”
“한 번만 더 거짓말하면, 거꾸로 매달고 몽둥이질을 할 줄 알아. 그 골드 민가에서 훔친 거 맞지?”
와~ 조사관 이 새끼 진짜. 뭘 어쩌란 거지?
까딱하다가는 여기서 첩자나 도둑으로 몰려서 또 감옥에 갇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식은땀이 흘렀다.
내가 대답이 없자, 조사관이 의외의 결론을 내렸다.
“그래. 원래는 너 같은 놈은 혼 좀 내줘야 하는데, 네가 훔친 돈을 인정하고 자수하니까 이번에는 봐주마.”
“네?”
“너 물건 다 주고 풀어줄게. 대신 훔친 돈은 전부 몰수다. 이의 없지?”
“하~ 네.”
이제 보니 처음부터 이놈들 목적은 나한테 돈을 뜯는 것이었다. 그래도 놈들이 단검은 제프리의 것이라고 믿어서 뺏기지 않은 게 불행 중 다행이랄까?
그렇게 나는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 연합군에서 그 조사관 놈들 외에는 나 같은 꼬마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진지를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혼자 길을 걷게 되었다. 차라리 혼자가 안전한 것 같다.
- 타닥 타닥
갑자기 뒤에서 다급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잠깐! 랜스. 뭘 두고 갔잖아.”
어? 저 사람 어디서 봤지?
아까 텐트에서 봤던 수사관을 돕던 병사다.
혼자 말을 다급히 몰고 온 것이다.
그는 말에서 내리더니, 주위를 한 번 쓱 둘러보더니 나에게로 걸어왔다.
뭐지? 왜?
“뭘요?”
- 푸욱!
그는 아무런 대답 없이 나에게 다가오더니, 갑자기 나의 복부에 단검을 쑤셔 넣었다.
“크흑!!”
엄청난 고통! 피가 쏟아져 나오는 복부를 손으로 감싸며 쓰러졌다. 눈물이 나왔다. 피가 역류하면서 입에서 나왔다.
“많이 아프지?”
- 스으윽
“웁!!”
병사가 이번에는 나의 목을 그어버렸다.
“음~ 음~ 음~~”
나의 움직임이 둔해지자, 병사가 콧노래를 부르면서 내 몸을 뒤지기 시작했다.
아! 단검이 비싼 물건인 걸 알고 뺏기 위해 나를 따라왔구나.
귀에 들리는 콧노래 소리가 작아지고, 몸에 감각이 점점 사라졌다.
[플러스 미션에 실패했습니다.]
[사망했습니다.]
[지구로 영혼 자동 이동]
[동화율 94.82453%]
정신을 차렸다.
이번에는 병실에 나 혼자 밖에 없었다.
이계에서 또 죽다니.
두 번이나 타살당하니까 충격도 충격이지만, 착잡하고 씁쓸한 맘이 들었다.
이번 생에 확실히 깨달은 게 있다면 약하면 그냥 짓밟힌다는 것이다. 강해져야 한다!
유니가 방문을 열고 싸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 짝!
내 볼에서 또다시 경쾌한 소리가 병실에 울려 퍼졌다.
이계에서 조사관에게 맞은 지 얼마 됐다고 또!
“왜, 왜 그래요?”
“명한 씨, 정말 이런 식으로 나를 배신할래요? 내가 지금까지 너무 잘해 줬죠?”
뭐지? 왜 또 이렇게 화가 났지?
“플러스 미션 실패해서 그래요?”
“그게 아니라! 왜 연결방식 ‘중개’를 선택 안 했어요? 내 목소리가 그렇게 듣기 싫던가요?”
“아니요. 미리 얘기해 줬으면 중개를 선택했을 텐데. 다음부터 중개로 할게요. 됐죠?”
“뭐 됐죠? 명한 씨. 내 경고하는데, 한 번만 더 ‘됐죠?’ 같은 말투 쓰면 끝인 줄 알아요.”
하아. 또 말투 지적이다.
“네. 유니. 정말 미안해요.”
“이제 아이템에 대해 말해 봐요.”
나는 윤회의 성배에 있는 두 가지 스틸 윤회와 영혼 주입에 관해 얘기해 줬다. 좀 숨길까 하다가, 그래봐야 이득도 없을 것 같아 그냥 솔직하게 다 얘기해 버렸다.
내 얘기를 듣는 동안 유니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저런 모습 처음이다.
“아~ 그런 거구나. 그럼 명한 씨 이제 목숨이 887개 남았네요. 이제 명한 씨는 그 목숨 다 쓸 때까지 이 병원에서 못 나가요. 다 늙어야 나가겠는데요.”
“네? 맘대로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인상 쓰지 말고~ 그리고 미션에 실패했죠? 확실히 할 건 확실히 하자고요. 내가 미션에 실패하면 벌을 받는다고 했는데, 내 말 무시했어요?”
“아, 아니에요.”
무섭다. 웅카르의 매니저는 안 그렇다는데, 얘는 왜 이렇게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일까?
“자~ 지금부터 매니저로서 시스템으로부터 받은 공식징계 권한을 사용하겠어요. 명한 씨는 태업을 했어요. 가벼운 저주를 벌칙으로 줄게요. ‘탈모’와 ‘발기부전’ 이 두 가지 중에 맘에 드는 걸로 골라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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