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우리는 모두 친구
“빨리 들어가라고 이 새끼야!”
다급한 목소리로 어디서 구했는지 뾰족한 송곳 같은 걸로 뒤에서 나를 쿡쿡 찌르며 재촉했다.
너무 아파 비명이 나왔다. 피가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아악! 찌르지 마세요.”
“그러니까 빨리 들어가라고. 시간 없어!”
어쩔 수 없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들어갔다. 통로는 너무 좁았다. 구역질을 참고 겨우 기어가서 그들이 말한 사다리를 발견했다. 온몸에 더러운 것들이 잔뜩 묻었다.
마침내 사다리 앞에 도착했다. 하지만 순간 마음속에 갈등이 생겼다.
이걸 내려줘야 하나? 이것들이 나를 동료로 생각했다면 송곳으로 찌르지 않았겠지?
그냥 나 혼자 도망가버릴까? 내가 우물쭈물하자 밑에서 간절하고 다급한 음성들이 들려왔다.
“어서 사다리를 내려. 랜스!”
“서로 약속을 지키자! 나가면 널 끝까지 챙겨 줄게.”
고민 끝에 결국은 사다리를 내려줬다.
사람들이 올라오기 시작해서 마침내 탈옥을 모의한 사람들이 모두 다 올라오고 사다리를 다시 거둬들였다.
- 퍼억.
“헉!”
생각지도 못했는데, 누군가 갑자기 나를 뒤에서 감옥 쪽으로 차버렸다. 아무런 대비도 못하고 나는 높은 위치에서 감옥으로 떨어져 버렸다.
충격이 너무 컸다. 아마도 갈비뼈가 부서진 것 같다.
“수고했어. 꼬마야.”
위에서 킥킥거리는 소리가 잠시 들리더니 사라졌다.
아! 배신당했구나. 나쁜 놈들!
나약한 자에게 세상은 항상 냉철했다.
그게 힘없는 자의 숙명!
특히 이번 생에는 특히 지긋지긋하게 경험해봤다.
의식이 점점 흐려졌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내성도 함락된 이후였다. 야만족들은 이제 남은 포로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장난치듯 불필요한 자들의 목을 자비 없이 쳐버리고 있었다.
아! 결국 미션에 실패했구나.
그래.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선택이 틀렸던 것 같다. 기사를 찾아갈 게 아니라, 어디 구석에 숨어서 시간만 보냈어야 했는데. 이렇게 어려운데, 난이도가 E급이라고?
두 손을 묶인 채 이끄는 대로 끌려갔다.
아무래도 내 차례가 온 것 같다.
야만족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아~ 냄새! 얘는 꼬만데 상처도 입었고 상태도 안 좋은 거 같은데, 목을 칠까요?”
“잠깐만. 야~ 꼬마야. 누구 몸값을 내 줄 사람이라도 있냐?”
당연히 없지.
“아니요. 근데...”
근데 죽기 전에 갑자기 궁금한 거 하나가 떠올랐다. 그 야만 전사는 정말 피카츄 그림을 갑옷에 새겼을까? 아니면 내가 꿈에서 헛것이라도 본 건가??
“뭐? 빨리 말해.”
“번개를 쏘고, 머리에 곰 가죽을 쓴 덩치 큰 위대한 전사님은 누구입니까? 그의 갑옷에 새겨진 그림을 본 적 있다고 전달해 주십시오.”
“크크. 내가 그딴 걸 왜 해 줘야 하는데? 이거 완전 돌은 놈이네. 그냥 목을 쳐라.”
하긴 그렇겠지.
터무니없는 소리를 들어줄 리가 없겠지.
끝났다! 그래도 목을 치면 고통은 덜 느끼겠네.
고통이 무섭지, 죽는 거야 뭐 이제 현실에서 타격은 없다.
“잠깐!”
그때 다른 야만족 하나가 나에게 다가왔다.
“그 그림이 뭔데?”
“음. 피카츄 아닌가요?”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하지만, 예상외의 대답이 들려왔다.
“이 꼬마는 일단 빼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몰라도 일단은 목이 안 달아난 것이다.
잠시 뒤 나타난 야만족 하나가 나를 데리러 왔다.
“야! 너 왜 이렇게 냄새가 심하냐. 위대한 전사를 만나러 가는데, 일단 좀 씻자.”
그는 나에게 옷을 모조리 벗으라 한 뒤 물을 몇 번 퍼부은 뒤 알몸으로 만든 뒤, 짐승처럼 목줄을 끌고 다녔다. 짐승처럼 취급당한다는 수치심 보다, 갈비뼈의 통증, 그리고 너무 추워서 이빨이 덜덜 부딪혔다.
나중에는 끌려가는 게 힘들어서 네발로 기어가다시피 계단을 올라갔다. 그래서 도착한 곳은 내성에서도 중요 인물이 거주하는 곳으로 나도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그는 화려하고 커다란 방으로 와 문 앞에서 외쳤다.
“키타시라 족의 위대한 전사 웅카르 님이여! 그대의 상징을 알아본다는 자가 있어 데리고 왔습니다.”
“그 녀석만 들여보내고 가봐.”
웅카르는 고급스럽고 커다란 욕조 속에 뜨거운 물에 알몸을 담그고 있고, 옆에는 시녀가 시중을 들고 있었다.
낮에 봤던 거구의 전사가 맞는 것 같다. 덥수룩한 수염과 몸에 빽빽하게 새겨진 문신, 근육질의 거구, 모든 것이 야만족 같았고, 마초 그 자체였다. 보기만 해도 위압감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가까이 와.”
저음의 위엄 있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물건도 튼실하다! 제발 게이가 아니기를.
“내 질문에 틀리면 바로 목을 쳐 버릴 줄 알아.”
“네.”
“피카츄 라이츄. 그다음에 뭐야?”
헉! 뭐지? 설마 설마 했더니 피카츄를 진짜로 안다!
“파이리 꼬부기 으음. 음. 서로 다른 모습은 달라도 우리는 모두 친구~”
긴장해서 기억나는 부분만 불러봤다.
이거 내가 지금 삽질하는 거면 어떡하지?
“큭큭. 됐어. 춥지? 들어와”
웅카르가 씨익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권했다. 물이 뜨뜻하다! 알몸으로 찬바람을 맞아서 피부가 빨갛게 되고 굳어 버렸는데 온수에 몸을 담그자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으으으~”
좋아서 나도 모르게 목욕탕 느낌으로 신음이 나왔다.
“근데, 꼭 그렇게 앉아야 해?”
아무 생각이 없어서 한 행동인데, 나도 모르게 그의 허벅지 위에 엉덩이를 대고 자연스럽게 앉았던 것이다. 이건 절대적으로 랜스의 의지다!
“으음”
그제야 나도 깜짝 놀라 반대쪽으로 몸을 돌려서 그와 얼굴을 마주 보게 되었다.
“훗. 너는 방에 가 있어.”
웅카르가 지시하자 시녀가 나가고, 우리 둘만 남게 되었다.
“여기는 백작 부인의 방이야. 사치를 어지간히도 좋아했나 보군. 온통 대리석이네. 욕조도 편백인가? 암튼 좋지?”
“네.”
상대는 나처럼 컨택트 상태의 지구인일 것이다. 피카츄 주제가를 아는 걸로 봐선 한국인이나 일본인? 하지만 이곳에서의 입장 차이 때문인지, 그의 포스 때문인지 왠지 함부로 말을 건네기도 겁이 났다. 하긴 같은 접속자라고 해도 반드시 호의적이란 법은 없을 테니.
“하하하. 오랜만이야. 이걸로 두 번째네.”
“뭐가요?”
“내가 컨택트를 한 지 이제 10개월 정도 지났는데, 첫 번째로 만난 접속자는 아프리카의 ‘보츠와나’라는 듣도 보도 못한 나라 사람이었어. 같은 접속자고 지구인이라서 너무 반갑고 신기했는데, 의외로 할 말이 많이 없더라고.”
이제는 확실해졌다. 그도 나와 같은 지구인이고 지금 컨택트 상태다. 근데 이 생활을 10개월이나 했다고?
“어느 나라에서 왔냐?”
“네. 저는 대한민국에서 왔습니다.”
“크크크. 그럴 거 같더라. 이 멀리서 동포를 만나다니!”
그는 거대하고 털이 수북한 손을 내밀었다. 자연스럽게 악수했지만, 어른과 어린아이 정도의 손바닥 크기에 다시 한번 위압감을 느꼈다. 저 손에 맞으면 죽는다!
“그리고 둘이 있을 때는 말 편하게 해. 대신 다른 사람이 있을 때는 역할에 충실하자고. 안 그러면 네가 위험해질 수 있어.”
“아. 예~”
솔직히 아무리 그래도 말 편하게 못하겠다. 그가 나와 같은 지구인이란 걸 알아도, 지금은 이곳 베가가 나에겐 현실이다. 그리고 그의 무서운 면상 앞은 도무지 적응이 안 돼서 편해지지 못할 거다. 이번 생이 노예라서 더 주눅이 더 드나?
“아까 보니까 몸에 상처가 많은 것 같던데.”
“갈비뼈가 부러진 것 같아요. 그리고 송곳에도 좀 찔렸고, 그리고 빈대 때문에.”
“아! 빈대! 빈대는 여기가 더 독하지. 초원에는 물리면 고생 끝에 죽게 되는 종류도 있고, 정말 끈질겨. 오죽했으면 내가 독 내성 수치를 우선으로 올렸겠어? 지금이야 잘 물리지도 않고, 물려도 별문제 없지만.”
그러더니 나의 갈비뼈를 만졌다. 자동으로 신음이 나왔다.
“으윽!”
“완전히 부러진 건 아니고 금 간 거 같네. 뭐 별거 아니야. 이따가 치료해 줄게.”
“저. 물 좀 마실 수 있어요?”
안 그래도 계속 목이 말라서 아까부터 욕조 물이라도 먹고 싶은 심정이었다.
웅카르는 씨익 웃더니 몸을 일으켜서 물병을 내밀었다. 정신없이 다 마셔버렸다. 그는 시녀를 불러 물을 더 떠 오고 약을 준비하라고 시켰다.
“저기, 밥도 좀. 이틀을 굶었어요.”
웅카르는 웃으며, 시녀에게 죽도 가져오라 했다.
“고통도 줄일 겸 술이라도 좀 줄까?”
“음. 주면 고맙죠.”
“자~ 이거 좀 독하니 천천히 먹어라. 네가 아이의 몸이란 걸 감안해.”
웅카르가 준 술을 마시자 몸이 뜨거워지고 고통이 덜해졌다. 동시에 좀 몽롱해지는 거 같았다.
“어때? 좀 낫지?”
“네, 고마워요.”
“몇 번째 접속이냐?”
“두 번째예요.”
“나는 이번이 스물세 번째다."
“와~ 그렇게 많이 접속할 동안 어떻게 살아남았어요? 대단한데요. 미션도 다 성공했어요?"
“죽을 뻔한 적이야 많았지. 그냥 운이 좋았어. 악으로 깡으로 버티기도 했고. 음. 미션은 일곱 번 정도 실패했고. 확률이 낮은 미션을 적당히 포기했던 게 살아남는 요령이었지.”
“미션에 실패하면 페널티가 있다고 매니저가 말하던데.”
“그거야, 매니저 맘이니까. 매니저마다 기준이 다르겠지. 다행히도 내 매니저는 그런 쪽으로는 관대했어.”
“음. 근데 베가에서 한 번도 안 죽었어요? 목숨이 하나뿐인가요?”
웅카르의 표정이 의문으로 변했다.
“당연히 하나뿐이지. 그럼 너는 더 있어?”
“음. 저는 지난번에.”
말하고 있는 와중에 갑자기 상태 창이 떴다.
[주의 : 정보 제공 허용 한도를 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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