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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향목 님의 서재입니다.

여우 전당포의 신비한 요리사

웹소설 > 작가연재 > 현대판타지, 퓨전

공모전참가작

단향목
작품등록일 :
2024.05.08 11:32
최근연재일 :
2024.07.06 18:50
연재수 :
6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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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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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7,178

작성
24.07.04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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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37. 기억나지 않는 꿈(3)

DUMMY

주현은 은롱의 목소리에 이끌리듯 기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마치 영상을 빠른 속도로 돌리듯 그가 지나온 날들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회사에서 일을 하고, 거래처 사람을 만나고, 점심을 먹고, 외주 업체를 방문해 광고 시안을 확인하고, 저녁을 먹고, 지하철을 타고 퇴근하고, 다시 출근하고, 경조사에 참석하고, 하루하루가 주마등처럼 주현의 감은 눈꺼풀 안을 빠르게 지나갔다.


그리고 한순간, 주마등처럼 지나가던 기억의 영상이 느려졌다.

어느 날의 퇴근길, 지하철에서 주현은 그 남자를 보았다.

여덟 살의 꼬마에서 성인이 된 주현과 오십 대의 중년인이 된 그 남자는 같은 지하철에서 마주쳤다.


주현은 기억 속에서 자신이 그 남자와 맞은편 좌석에 앉아 있는 걸 보았다. 사람들 틈으로 그 남자의 얼굴이 여러 번 보였지만, 그도 자신도 서로를 알아보지 못했다.

몇 갠가의 역을 지나고 기억 속의 주현이 일어서서 지하철을 내렸다. 그는 한 번도 그 남자를 돌아보지 않았다.


***


세나가 주현의 몸을 가볍게 흔들었다. 기억 속에서 현실로 돌아온 주현이 눈을 뜨고 중얼거렸다.


“제가 그놈을 봤었군요. 그런데 알아보지 못했어요. 전혀 기억나지 않았는데······.”

“신주현 씨는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을 모두 잊었으니까요. 설령 잊지 않았다고 해도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못 알아봤을 겁니다.”


하지만 주현의 무의식은 그 남자의 얼굴을 잊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이십몇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친지도 알아보기 어렵게 변한 그 남자의 얼굴을 본 것만으로 주현은 지워 버렸던 과거의 꿈을 꾸게 되었다. 괴롭고 괴로워서 가위눌린 것처럼 몸부림치다 깨어날 때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꿈을.


“어린 신주현 씨는 그 화재가 자기 탓이라고 생각했고 그 화재의 기억이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스스로 기억을 지웠습니다. 그런데 지하철에서 그 남자를 본 게 묻어 버린 기억을 일깨우는 단초, 트리거(trigger)가 된 거죠.”


세나가 일어서더니 책상 서랍에서 몇 장의 종이를 가져왔다.


“지난번에 신주현 씨가 오셨을 때 말씀해 주신 내용을 토대로, 신주현 씨를 괴롭히는 꿈은 역시 그 화재 건 아니면 등산 때 일어난 사고 둘 중 하나일 거라고 추정했습니다. 그래서 미리 두 사건을 조금 조사해 봤는데, 오늘 신주현 씨의 꿈을 보니 역시 그 화재가 문제였군요.”


세나는 사진이 박혀 있는 종이 한 장을 신주현에게 건넸다.


“그 방화범은 징역 25년 형을 받았습니다. 출소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신주현 씨와 마주쳤나 봅니다.”

“왜 하필 그때······.”

“사건 당시의 진술에 따르면, 그자는 방화할 동네를 미리 답사한 뒤 방화할 집을 정했다고 합니다.”


세나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신주현을 보았다.


“어린 시절의 신주현 씨는, 자신이 친구의 집을 방화범에게 골라 줬다는 자책으로 기억을 잃을 만큼 괴로워한 거지요?”

“예. 그랬던 것 같습니다.”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자는 신주현 씨를 만나기 전에 이미 집을 정해 뒀다고 합니다. 침입 경로를 보고 있을 때 신주현 씨를 만난 거고요. 방화 시 침입 경로는 그 골목이 맞습니다만 주현 씨가 보여 준 뒷문으로 들어간 건 아니라는군요. 문소리가 날까 봐 담을 넘었다고 합니다.”


주현은 옛집을 떠올려 보았다. 주현의 집과 옆집을 가르는 골목에 면한 담은 어린 주현에겐 아주 높아 보였지만 지금 생각하면 성인 남자의 키 정도였다. 운동신경 좋은 남자라면 어렵지 않게 넘을 수 있었을 것이다.

주현의 집도 담 높이는 비슷했지만 담 위에 철조망을 둘러놓았었다. 하지만 옆집은 그냥 밋밋한 담이었다.


“그자의 사진을 보세요. 이제 오십 대 초반인데 노인처럼 늙어 보이죠?”


주현의 기억 속에서 본 지하철 속의 남자도 이미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였는데 세나가 준 사진 속의 남자는 더 초췌했다.


“췌장암 말기라고 합니다. 이번 달을 넘기기 어려울 거라더군요.”

“그렇군요······.”


주현은 사진 속의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주먹을 꽉 쥐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남자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한 토막 가위로 잘라 내듯이 가져가 버린 남자였다. 얼마나 큰 공포와 자책감을 주었으면 그랬을까.

어차피 그럴 거라면 죽을 때까지 다시 안 만나도 좋았을 걸, 스쳐 지나간 것만으로도 이렇게 고통스러운 꿈을 꾸게 하다니.


“신주현 씨, 죽음을 목전에 둔 이 방화범이 신주현 씨와 만나게 된 건, 어쩌면 오랫동안 주현 씨의 무의식을 괴롭혀 온 기나긴 자책감을 끊어내기 위해서일지도 모릅니다.”


세나는 주현에게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고, 세나 옆에 있던 은발의 사내아이가 갑자기 주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금빛 눈이 주현의 눈을 사로잡았다. 사내아이는 귀에 한 자 한 자 박아 넣는 듯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손님, 그 화재는, 손님 탓이 아니야!”


아이의 말이 머릿속으로 직접 전해져 오는 것처럼 또렷하게 박혔고, 주현은 갑자기 목이 메었다.


그런가, 정말인가, 내 탓이 아니었던 건가.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얼굴을 감쌌다.


사내아이와 고양이가 그의 곁에서 부드럽게 그의 몸을 토닥이는 동안 세나는 주방에 가서 새로 탄 미숫가루 한 잔을 들고 왔다.


“목마르실 텐데 한 잔 드세요.”


주현은 진하게 탄 미숫가루를 마셨다.


맛있네, 옛날에 정아네 아줌마가 타 주던 것처럼.

그는 천천히 미숫가루를 몇 모금 더 마신 뒤 입을 열었다.


“제가 기억에서 지웠던 게 또 있었네요. 전 미숫가루도 잊고 있었습니다. 그 이후 한 번도 마신 적이 없었어요. 무의식적으로 피했던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 참 좋아했는데. 그때 그날을 연상하게 하는 건 뭐든지 피했던 것 같아요.”


주현은 주먹으로 눈두덩을 쓱 문지른 다음에 세나와 은롱을 향해 말했다.


“고맙습니다. 이젠 꿈에 시달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혹시 다시 이 꿈을 꾼다 해도, 혼자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은롱이 까치발을 하고 어른처럼 그의 등을 두드렸고 주현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저는 정아네 식구들을 제 마음속에 묻어 놓고 떠나보내지 못했나 봅니다. 이제 드디어 보내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주현이 미숫가루를 다 마신 후 세나가 말했다.


“그럼, 이야기를 맡기시겠습니까?”


세나는 판매와 저당 차이를 설명했다.

기억을 완전히 잃게 된다는 말에 잠시 망설이는 주현을 보고 있던 은롱이 살짝 끼어들었다.


“손님, 그냥 팔아 버려.”

“?”

“우린 원래 손님의 결정에 맡길 뿐 매입을 할 건지 저당을 잡을 건지 간섭하지 않지만, 손님 경우는 이 이야기, 팔아 버리는 게 나아.”


노란 고양이 금손도 은롱의 곁에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왜 그렇지? 내가 이 기억 때문에 힘들었던 건 맞지만 이제 내가 그 비극의 원인이 아니었다는 걸 알아서 괜찮을 것 같은데.”

“왜냐하면 말야.”


은롱이 금빛 눈으로 주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손님의 이야기 속 방화범은, 아주 나쁜 것에 씌어서 그런 짓을 한 거거든. 손님의 이야기에는 그 나쁜 것의 흔적이 남아 있어. 완전히 털어 버리는 게 나아.”


은롱의 눈을 바라보고 있던 주현은 잠시 후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세나를 향해 말했다.


“팔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이야기 대신 받고 싶으신 게 있으십니까?”


세나의 말에 신주현은 머리를 흔들었다.


“받긴요. 제가 값을 드려야지요. 꿈을 밝혀내고 이야기를 하고 나니 이렇게 살 것 같은데요.”


세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이야기 값은 받으셔야 합니다. 자, 이렇게 하죠.”


세나는 은롱과 눈을 한 번 맞추고 나서 다시 주현을 향했다.


“신주현 씨께 저희 전당포를 소개해 주신 분은 정은빈 씨죠? 그분께 신주현 씨가 받아야 할 대가를 알려드려 놓겠습니다. 그분이 알아서 전해주실 겁니다.”

“예에······.”


주현은 좀 어리둥절한 얼굴로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건 나중에 은빈 누나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이제 전당포를 나가시면 저희에 대해선 다 잊으실 겁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손님, 잘 가!”

“냐아웅!”


죽림 식구들의 배웅을 받은 신주현이 문밖으로 나서는 모습이 잔상으로 서서히 사라지면서 시현의 시야가 현실로 돌아왔다.


***


시현이 조금 비틀거리면서 부르르 몸을 떨었다. 자신도 모르는 새 등줄기에 약간 소름이 돋아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세나가 물었고 시현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예. 견딜 만합니다. 이런 몽로는 또 처음이네요.”

“형이 감이 좋아서 더 그래.”


은롱이 시현의 허리춤을 토닥였다.


“맛도 그렇지만, 은롱이가 왜 불쾌한 몽로라고 했는지 알겠어요. 이야기를 보는 중에도 계속 몸이 섬찟섬찟한 게 기분이 안 좋더라고요.”

“그건 말이지.”


금손이 꼬리를 바닥에 탕 쳤다.


“그 이야기 속의 방화범이, 매구에 씐 놈이라 그래. 시현이 자네가 매구의 흔적을 느낀 거야.”

“예? 하지만 매구는 육십 년 전에 사라졌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매구가 숨어 버리긴 했지만 여기저기 흔적을 남겨놓았지. 그 방화범처럼 본래 심성이 안 좋거나 심기가 약한 자가 매구나 악귀의 흔적을 만나게 되면 씌는 수가 있다네.”

“응, 그러면 자기도 모르는 새 악행을 저지르게 되곤 해. 씐 사람이 원래 악하지 않은 사람이면 작은 일로 지나갈 수도 있지만 그 방화범처럼 심성이 나쁜 인간이면 그렇게 큰일을 저지르면서 즐기는 놈도 나와.”

“매구는 사람들 사이에 혼란과 파탄을 일으키는 걸 즐기니까.”

“그렇군요.”


시현은 팔을 올리고 몸을 부르르 털었다. 매구의 흔적이 남은 몽로에서 느껴지는 불쾌함을 털어 버리고 싶었다.

약간 맛을 보았을 뿐인데 몸에 이 정도의 거부감이 느껴지다니.

말로만 들었을 때는 알기 어려웠던 매구나 악귀가 사람에게 미치는 악영향이 어떤 것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체조하듯 몸을 몇 번 움직이고 나서 기분이 좀 나아진 시현이 세나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말이죠. 그 신주현이라는 사람은 전당포에서 아무것도 받아 가지 않았잖아요?”


시현의 말을 들은 세나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분도 대가는 받아 가셨어요. 단지 그분에게 필요한 대가는 다른 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쪽으로 보내 드린 거예요.”


***


죽림 전당포에 다녀간 다음 날, 잠에서 깬 신주현은 몸을 쭉 펴고 기지개를 켰다.

이렇게 개운하게 잠에서 깬 게 몇 달 만인지 몰랐다. 그동안 계속 편히 잠을 못 잤는데 오늘은 오랜만에 정말 편하게 잔 것 같았다.


“주현이 오늘 얼굴이 좋다?”


출근해서 만난 은빈이 주현을 보고 반색을 했다.


“예. 요즘 자고 나도 늘 몸이 찌뿌둥했는데 어젯밤엔 푹 잘 자서 그런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몸이 개운한 게 좋더라고요.”

“그래? 잘됐네.”


은빈은 뭔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웃으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몸이 개운해서 그런지 일도 더 잘 되는 것 같았다.

퇴근할 무렵 은빈이 주현을 불렀다.


“너 오늘 시간 있니? 나랑 어디 좀 가자.”


작가의말

Radha 님, 따뜻한 후원 감사드립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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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38. 최고의 한 상(2) +10 24.07.06 253 48 13쪽
65 38. 최고의 한 상(1) +4 24.07.05 331 42 13쪽
» 37. 기억나지 않는 꿈(3) +3 24.07.04 358 38 12쪽
63 37. 기억나지 않는 꿈(2) +5 24.07.03 401 40 13쪽
62 37. 기억나지 않는 꿈(1) +4 24.07.02 439 46 13쪽
61 36. 매구의 흔적 +5 24.07.01 451 39 12쪽
60 35. 가수저라(加須底羅) +6 24.06.29 495 43 13쪽
59 34. 환음 향설고 +6 24.06.28 486 43 12쪽
58 33. 송화다식(2) +13 24.06.27 505 47 13쪽
57 33. 송화다식(1) +8 24.06.26 505 44 13쪽
56 32. 송화 +9 24.06.25 529 44 12쪽
55 31. 가지 누르미 +11 24.06.24 535 50 13쪽
54 30. 첫 번째 선물(2) +7 24.06.22 580 57 12쪽
53 30. 첫 번째 선물(1) +5 24.06.21 574 52 12쪽
52 29. 수제비(2) +10 24.06.20 575 51 12쪽
51 29. 수제비(1) +7 24.06.19 581 53 12쪽
50 28. 노리개(2) +8 24.06.18 586 46 12쪽
49 28. 노리개(1) +8 24.06.17 587 52 12쪽
48 27. 콩나물밥(2) +5 24.06.16 589 47 13쪽
47 27. 콩나물밥(1) +6 24.06.15 643 43 12쪽
46 26. 조우 +7 24.06.14 648 44 12쪽
45 25. 맥적(4) +9 24.06.13 637 46 13쪽
44 25. 맥적(3) +4 24.06.12 637 4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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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25. 맥적(1) +8 24.06.10 651 48 12쪽
41 24. 고종 냉면(3) +6 24.06.09 652 42 12쪽
40 24. 고종 냉면(2) +6 24.06.08 657 45 12쪽
39 24. 고종 냉면(1) +7 24.06.07 662 46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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