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가수저라(加須底羅)
오래전 궁에서 먹었던 후식이라 해서 잡과병이나 두텁떡 같은 궁중떡 또는 율란이나 서여향병 같은 옛 궁중 간식을 생각하고 있던 시현이라 카스텔라는 의외였다.
“카스텔라도 만들어 드릴 순 있지만 카스텔라라면 오랜만이라고 하실 게 없지 않나요? 나가서 사 와도 맛있는 집이 많은데?”
“아니, 아니야, 내가 말하는 카스텔라는 요즘 말하는 카스텔라가 아니고 우리 전하가 드셨던 카스텔라, 그러니까 가수저라를 말하는 거야.”
“가수저라요?”
“음, 우리 전하가 말년에 속이 안 좋아 음식을 잘 못 들고 고생하실 적에, 어의 이시필이 처음 만들어 드렸던 거지.”
이시필이 사신단과 함께 연경에 갔을 때 요인을 치료해 주고 진귀한 음식이라고 서양 계란떡을 대접받았는데 그 맛이 매우 부드럽고 뛰어났다고 했다.
이시필은 그 조리법을 청해서 얻어 왔는데, 입맛을 잃은 노년의 숙종에게 좋지 않을까 해서 그 조리법대로 만들어 보았다고 한다.
하지만 연경에서 먹은 서양 떡의 맛을 내지 못했는데, 그럼에도 숙종은 꽤 입에 맞았는지 좋아했고, 조리법을 사옹원과 수라간에 내려 가끔 만들어 올리도록 했다.
가수저라(加須底羅)라는 이름은 카스텔라를 한자로 음차한 것이다.
이시필 외에도 카스텔라에 매혹된 사람은 적지 않았다. 역시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서양인들에게 카스텔라를 대접받았던 일암 이기지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재료와 조리법을 물어 온 후 굽기도 하고 쪄 보기도 하면서 여러 가지로 연구했지만 서양인들이 내주었던 것과 같은 것은 만들지 못해 아쉬워했다고 한다.
“송가미록에는 서양 후식 편에 제대로 된 카스텔라 조리법이 있던데요? 옛날식이긴 하지만.”
“그야 자네 고조부가 송가미록을 완성했을 때는 한참 세월이 지난 후니까 그렇지. 그때는 양과자가 꽤 많이 들어와서 궁중에서도 자주 먹곤 했거든. 고종 황제는 와플 기계도 궁중에 구비해 놨었다고.”
“아 참 그렇지요. 커피도 즐겼다고 했으니까.”
“우리 전하 때의 가수저라는 정말로 서양 떡에 가깝다고 할까. 지금 사람들은 맛없다고 할 수도 있는데 우리 전하는 꽤 즐기셨다네. 나한테도 먹여 주시고.”
옛 가수저라 조리법은 서유구의 ‘정조지’며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등에 남아 있는데 다음과 같다.
- 정한 밀가루 한 근과 설탕 두 근을 달걀 여덟 개로 반죽하여 구리 냄비에 담아 숯불로 색이 노랗게 되도록 익히되 대바늘로 구멍을 뚫어 불기운이 속까지 들어가게 하여 만들어 꺼내서 잘라 먹는데 이것이 가장 상품이다.
서재에서 청장관전서의 필사본을 찾아 읽어본 시현이 빙그레 웃었다.
“왜 떡이 됐는지 알겠는데요? 머랭을 안 쳤잖아요.”
청나라에 다녀온 사신들이 서양인들에게 재료와 조리법을 물어서 받아온다고 받아오긴 했는데 흰자로 거품을 내 머랭 치는 법까지는 미처 몰랐던 모양이었다.
“그렇지, 아마 자네 말이 맞을 거야. 나야 나중에 고종 황제 시절에 서양 사람이 만든 카스텔라도 먹어 보고 했지만, 그래도 그 시절 가수저라에는 추억이 있으니까. 다시 한번 먹어 보고 싶네.”
시현이 싱긋 웃으며 고양이의 등을 쓰다듬었다.
“만들어 드릴게요.”
청장관전서를 다시 본 시현이 머리를 저었다.
“어우, 그런데 이 레시피는 어마어마하게 달겠는데요? 설탕을 밀가루의 두 배나 넣었네요? 생각만 해도 혀가 녹을 것 같아요.”
“음, 거기 적힌 건 그런데 우리 전하가 드시던 건 그렇게까지 달진 않았어. 설탕이 워낙 귀하던 시절이기도 했고.”
“설탕을 밀가루와 동량으로 줄일게요. 그래도 충분히 달콤할 거예요.”
먼저 계란을 깬다. 일반적으로는 노른자와 흰자를 분리해 흰자는 머랭을 치고 노른자는 반죽에 사용하겠지만 옛 조리법을 따라 하려고 분리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다.
더운물을 받은 큰 그릇에 계란 그릇을 중탕하듯이 넣고 설탕을 부어서 잘 저어준다. 그냥 섞어도 되지만 더운물 그릇 안에서 저으면 설탕이 녹으면서 더 쉽게 섞인다.
계란과 설탕이 곱게 섞이고 나면 체에 친 밀가루를 넣어 빠른 속도로 다시 저으면서 반죽해 준다.
머랭도 치지 않았고 이스트나 베이킹파우더를 넣지 않았기에 많이 부풀어 오르지는 않지만 열심히 젓는 동안 반죽이 녹진녹진해지면서 부피감이 생겼다.
“나 맛 한 번만 볼게.”
어느새 은롱이 와서 손가락을 쏙 내밀었다.
그릇 옆에 묻은 반죽을 살짝 찍어 먹은 은롱이 생글 웃었다.
“우와, 엄청 달달하고 촉촉해!”
잘 섞인 반죽을 냄비에 담아 약한 불 위에 올려 익힌다. 타지 않도록 냄비 옆면과 아래쪽에 골고루 식용유를 발라 주었다.
차차 달콤한 향이 냄비 위로 퐁퐁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형! 타는 냄새 나!”
“헉!”
오븐이 아니고 냄비에 굽다 보니 바닥이 좀 탔다.
시현은 허둥지둥 가수저라를 뒤집어 주고 불을 더 약하게 줄여서 마저 익혔다.
“휴, 다행히 겉면만 좀 탔다. 먹는 데는 지장 없겠어.”
“옛날엔 아무나 먹을 수 없었던 거라는데, 반죽 젓는 게 팔 아프겠지만 조리법은 생각보다 간단해 보이네.”
은롱이 말했고 금손이 야웅 울면서 대답했다.
“궁중 과자들이 진짜 손 많이 가고 복잡한 게 많은 것에 비해 가수저라는 간단한 편이지. 그렇지만 설탕이랑 밀가루가 다 귀한 재료라 아무나 쓸 수 없는 거고, 태우지 않게 조심해야지. 봐라, 시현이도 태울 뻔했지?”
완성된 가수저라는 시판 카스텔라처럼 부풀어 오르진 않았지만 잘 익어서 보기 좋았다. 따뜻할 때 썰어 내가자 금손이 향수에 어린 눈을 했다.
“그렇지, 이걸세. 맛도 예전 것과 비슷하면 좋겠군.”
썰어 내면서 자투리를 시현이 먹어 봤는데 시판 카스텔라처럼 포슬포슬하진 않지만 대신 촉촉하고 쫀득한 맛이 있었다.
단맛도 향료를 넣지 않아 더 순박한 맛이라고나 할까. 마치 할머니가 어렸을 때 밥솥에 쪄주신 소박한 밀가루빵을 연상하게 하는 맛이었다.
“맛있는데? 생각보다 맛있어. 옛날 빵이라고 해서 크게 기대 안 했는데, 고급스런 맛은 아니지만 뭔가 정다운 맛이야. 형아.”
“쫀득하고 포근포근한 게 좋은데요. 엄청 달콤하기도 하고. 카스텔라와는 좀 다르지만 떡 좋아하는 사람 입에는 더 맞겠어요.”
은롱과 세나도 한마디씩 칭찬을 하면서 가수저라를 먹고 우유를 마셨다.
“카스텔라는 역시 우유랑 먹는 게 젤 맛있어.”
은롱이 우유컵을 내려놓자 입가에 동그랗게 우유 자국이 남았다.
“금손 씨는 어떠신가요?”
금손이 앞발 끝에 묻은 가수저라 가루를 살짝 핥고 나서 시현을 보며 연둣빛 눈을 찡긋했다.
“좋은데, 아주 좋아. 이 순진한 단맛이 옛 가수저라의 맛을 그대로 살렸군. 그리고 오븐이 아니라 불에 구웠기 때문에 나오는 은근한 불맛, 겉면의 좀 눌은 맛이 진짜 예스러워. 옛날 수라간의 부뚜막에서 송 숙수가 자투리를 잘라 주길 기다리던 어린 고양이 시절이 되살아나는군.”
밀가루와 설탕으로 만드는 간식이란 조선에서 보통 사람들이 쉽게 입에 댈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다.
송 숙수가 가수저라를 만드는 날이면 사옹원과 수라간의 어린 일꾼이나 나인들이 냄새라도 맡아 보려고 주변을 맴돌다가 꾸지람을 듣곤 했다.
둥근 구리 냄비로 굽거나 쪄낸 가수저라를 왕에게 올릴 때는 네모반듯하게 썰어서 가져가는데, 송 숙수는 일부러 자투리가 큼직하게 남도록 썰고 잘라낸 가장자리 부분을 어린 내관과 나인들에게 나눠주곤 했다.
“금손이는 자투리 안 먹어도 되지? 어치피 전하가 나눠주실 것 아니냐.”
“냥!”
금손은 점잖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부뚜막에 흩어진 빵가루를 잽싸게 핥아 먹곤 했다.
“어린 나인들뿐 아니라 점잖은 선비들이 서로 먹겠다고 싸우기도 했다니까.”
청장관전서에 가수저라 조리법을 기록했던 정조 시대의 실학자 이덕무는 자타공인하는 단 것 마니아였는데, 어느 날 지인에게서 가수저라를 선물로 받았는데 친구인 박제가가 그것을 훔쳐먹었다고 분개하는 글을 남겨놓았다.
“아, 그 조선 식신······.”
고종 냉면을 만들었을 때도 박제가 이야길 들었는데, 한 번에 냉면 세 그릇과 만두 백 개를 먹었다고.
규장각 검서관에다 ‘북학의’를 남긴 저명한 실학자 박제가는 금손의 말을 들을 때마다 시현의 머릿속에서 이미지가 점점 바뀌어 가고 있었다.
“나루서점에 갈 일이 있는데 이 가수저라를 좀 가져가면 유 사장님 어머님이 좋아하시겠는걸. 남아 있나?”
“예, 남아 있는데, 선물로 가져가실 거면 새로 만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음, 만들어주면 좋지.”
“나루서점은 무슨 일로 가시나요?”
“새 책도 들어왔다고 하지만 그건 급하지 않고, 사실 나루가 좀 만나고 싶다고 연락이 와서 말이야.”
***
나루서점의 유 사장 모친 성 여사는 예상대로 가수저라를 아주 좋아했다. 두 번째로 만든 것이라 불 조절을 잘해서 겉면이 타지도 않았고 속살도 더 부드러웠다.
몇 조각 맛있게 먹은 후 성 여사는 잠이 온다고 자리에 들었고, 금손이 유 사장에게 말했다.
“은롱이도 같이 오고 했으니 나루를 공원에 데리고 가서 좀 놀다 오고 싶은데 어떤가?”
“데리고 나가 주신다면 저야 좋지요. 매일 산책을 시키긴 하지만 아무래도 제가 바빠서 오래는 못하니까요. 은롱이랑 같이 논다면 나루가 더 좋아할 겁니다.”
유 사장의 허락을 받은 금손이 나루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일부러 나루서점에서 멀찌감치 세워 놓았던 차까지 걸어온 그들은 차 안에 탔고, 문을 닫자마자 나루가 몸을 후르르 털었다.
강아지의 몸이 아지랑이 같은 금빛에 감싸이더니 강아지는 사라지고 은롱 또래의 남자아이가 하나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강아지 털과 똑같은 색의 금갈색 머리카락에 새까맣고 동그란 눈동자의 아이는 금손을 향해 머리를 꾸벅 숙이더니 은롱과 시현을 향해 생글 웃었다.
“은롱이랑 시현 형도 안녕!”
“어, 안녕,”
시현은 얼떨결에 인사를 하며 나루를 살폈다.
인간으로 변신하면 이렇게 생긴 아이였구나. 그나저나 구미호도 그렇고 삼족구도 그렇고 아직 어려서 그런가 친화성이 참 좋네.
강아지였을 때는 왼쪽 앞다리가 없던데. 시현이 살짝 보자 아이의 모습을 한 나루에게는 왼손이 제대로 있었다.
“아, 이거? 기왕 변신하는 김에 형태만 만든 거야. 사람 모습일 때 팔이 없으면 아무래도 이상하니까. 움직일 순 있지만 크게 힘은 못 써.”
나루가 왼손을 살짝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왜 오라고 한 거야?”
은롱이 묻자 나루가 대답했다.
“너랑 금손 씨한테 의논해 보고 싶은 일이 생겨서. 근데 차 안에서도 맛있는 냄새가 나네?”
시현이 부스럭거리며 가수저라 봉지를 꺼냈다.
“아까 못 먹었지? 너 주려고 따로 챙겨놨어.”
“우왕! 빵이다! 카스텔라야? 카스텔라랑은 좀 다른데?”
“옛날식 카스텔라야. 삼백 년 전의 조리법을 따라서 만들어봤어. 가수저라라고 해.”
“우웅! 맛있다!”
나루는 강아지처럼 머리를 흔들면서 가수저라를 먹었다. 물론 강아지가 맞긴 하지만.
“저번에 맥적도 너무 맛있었는데, 시현 형 정말 음식 잘하시네. 은롱아 부럽다.”
“우리 형이 음식 좀 잘하지.”
은롱이 자기가 칭찬을 받은 것처럼 어깨를 폈다.
“그래, 무슨 일이냐, 나루야? 여기까지 부르고.”
금손이 궁금한 얼굴로 묻자 나루가 가수저라를 한 입 더 먹은 뒤 대답했다.
“좀 이상한 일이 있었거든요. 금손 씨랑 은롱이에게 의견을 구해 보고 싶었어요.”
“어떤 일인데?”
“오스키친의 오인국 셰프 아시지요?”
“어, 알지.”
“그 사람 나오는 방송에서 이번 과제가 한국의 옛 맛을 찾는 거였거든요.”
“응, 우리도 안다. 시현이가 전에 일하던 식당 요리사가 일반인 참가자로 출전했거든.”
“그래요? 그럼 얘기가 쉽겠네요. 금손 씨도 아시다시피 우리 서점이 크진 않아도 옛 조리서 보유량은 전국에서 최고잖아요. 제작진 중 안목 있는 사람이 있었던지 우리 서점에 촬영 섭외가 왔더라고요.”
“음.”
“그래서 며칠 전에 촬영을 왔었는데요. 저는 장애가 있는 강아지라고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할까 봐 문간의 먹는방에 숨어 있었단 말이에요.”
“왜 집에 가 있지 않았어?”
시현이 묻자 나루는 눈을 살짝 치켜올렸다.
“형, 나는 삼족구야. 나루서점과 유 사장님을 지켜야지. 촬영한다고 어중이떠중이가 들어와서 귀한 책을 상하게 하면 어떡해? 그래서 먹는방에 숨어 있긴 했어도 문틈으로 바깥을 살피면서 긴장을 풀지 않고 있었다고.”
“아 그랬구나. 미안, 미안.”
시현은 싹싹하게 사과했고 나루는 으흠 헛기침을 하면서 어깨를 폈다.
저런 모습은 은롱이랑 아주 비슷하네. 둘 다 자부심이 강해.
- 작가의말
저는 조금 태웠어요. ㅠ ㅠ 윗면도 매끄럽게 익지 않아 볼품이 없고...
그래도 맛은 달달하니 좋았습니다.
Comment ' 6